간밤에 레르 경이 날 간호하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잔 것 같다. 덕분에 불덩이 같던 내 이마는 많이 식었지만, 이러다가 이번엔 레르 경이 병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과일과 약간의 나물을 캐온 레르 경에게 잠시 쉴 것을 권했다. 괜찮다고 사양하는 그녀에게서 막무가내로 과일과 나물을 뺏어 들었다. 근심 어린 표정으로 음식을 바라보는 그녀. 이제 보니 내가 음식을 손질하는 걸 불안해하는 것 같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흥. 입이 떡 벌어지게 해주지.
손질한 나물을 정성스럽게 돌돌 말아 모양을 낸 나는, 과일을 섬세한 손길로 먹기 좋게 잘랐다. 빌린 단검을 가져다줄 때 그녀의 표정을 보니, 내 솜씨에 놀란 눈치다. 하지만 아직 그녀가 놀랄 일이 더 남았다. 나는 품에서 궁에서 쓰는 작은 양념통을 꺼내 들었다. 그녀가 궁금해하는 표정으로 양념통을 바라본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양념통을 흔들었다. 그리고 주문을 외웠다.
“얄라 얄라 얄라 뿅.”
“…….”
“…….”
“공주님. 그 괴이한 주문은 무엇입니까?”
“같은 양념통에서 나오는 양념이라고 다 같은 양념인 건 아니에요. 누가 어떻게 터느냐에 따라서 맛이 확 달라지거든요.”
“그……”
“쉿! ……얄라 얄라 얄라 뿅.”
“…….”
“자, 됐어요. 나물부터 먹어보세요.”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그녀가 냄새를 맡는다. 앞뒤로 돌려보더니 입에 넣는다. 나물의 맛을 본 그녀가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기대 이하의 무성의한 반응이었지만, 짚고 넘어가진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양념통을 건넸다.
“레르 경도 한번 해보시겠어요?”
“이, 이렇게 하면 되는 겁니까?”
“주문도 외우셔야죠.”
“……그건 못하겠습니다. 저는 그냥 이렇게 먹겠습니다.”
주문을 외는 게 창피하기라도 한 걸까. 잠깐만 외우면 훨씬 맛 나는 걸 두고 그냥 먹겠단다. 답답해서 내가 대신 양념을 쳐주긴 했지만, 왠지 좀 그렇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 걸 그녀가 꺼리는 것 같아서. 아침을 먹고서, 그녀가 30분 뒤에 출발하자고 말한다.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여주고는 혼자만의 생각에 빠졌다.
나는 사실 죽고 싶지 않다.
궁에서 나온 것도 살려고 나온 거지, 죽으려고 했으면 자존심, 명예 다 버리고 거기서 왜 도망쳤겠어. 나는 죽음이 두렵고, 진흙탕에서 뒹굴더라도 살고 싶었다. 레르 경과 함께 며칠을 지내면서, 세상은 정말 힘들고 어렵구나 하면서도, 여전히 죽는 것보단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다만 세상에 사는 법을 몰라서, 모르고 두려워서 무작정 레르 경을 붙든 것이다. 영웅의 무덤에 이르러서, 정말 레르 경이 죽는다면 어떡할까. 그땐 나도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걸까.
그녀가 죽지 말고 나와 같이 살아주면 좋을 텐데. 나는 기대하고 있다. 늦기 전에 레르 경이 돌아가자는 말을 해주기를. 그게 아니라면, 나는 이 길을 걷고 싶지 않다. 그녀의 마음을 돌릴 좋은 방법이 없을까.
생각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고개를 빼꼼 내미니, 어느덧 해가 중천이다. 걷는 게 익숙해진 건지, 고통을 참는 게 익숙해진 건지. 아무튼, 정 힘들 땐 그녀가 내민 손을 잡아가며 뒤처지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알게 모르게 그녀의 눈치를 보게 된다. 그녀가 날 좋게 봐주길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나 자신을 속여가면서 그녀에게 매달리진 말자고 다짐해본다. 이미 궁에서 원수들에게 짓밟혀 찢긴 자존심, 그녀에게만은 들키기 싫었다. 공주 노릇을 하고 싶다. 그녀에게 공주였으면 싶다. 구차해지고 싶지 않다.
레르 경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정신을 깨우는 무언가. 멀지 않은 곳 수풀 사이로 뭔가 보였다. 동물 같기도 하고, 사람의 옷가지가 떨어져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뭘까 싶어 가까이 가본 나는 깜짝 놀라서 짧고 굵은 비명을 토했다. 뒤따라온 레르 경이 내 눈을 가렸다. 그리고 내 몸을 돌려서 나를 안아준다. 다가서는 중간에 그것이 몬스터 주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면서도 다가선 거였다. 몬스터의 주검을 보고서도 아무렇지 않다는 걸 레르 경에게 보여주려 했다. 내 각오를 자랑하려 했다.
그런데……, 그랬는데……
“레, 레르 경. 몬스터의 주검이 왜 저러죠?”
“공주님. 일단 진정을……”
그녀의 품에 소리쳤다.
“빨리 알려주세요! 안 그럼 전 더 무서운 상상이 든단 말이에요.”
“벌레 때문입니다. 죽음의 숲에선 몬스터보단 벌레에 당하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들은 적이 있어요. 내장을 파먹는 벌레. 궁에서 책을 찾아보진 않았지만, 선물 받은 책은 읽어보는 편이었죠. 하아,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잠시만 이대로 있을게요. 전 금세 괜찮아져요. 그럴 수 있거든요.”
“…….”
“레르 경? 지금 무슨……”
다리가 공중에 붕 뜨는 느낌에 놀라 눈을 떠보니, 내가 그녀에게 폭 안겨있었다.
“허락은 저번에 받지 않았습니까?”
“그, 그렇지만 서도……”
“좀만 더 가서 쉬는 걸로 하겠습니다.”
몸뚱이뿐만 아니라, 마음도 붕 떴다. 나는 누군가에게 안겨본 기억이 없다. 아기 때는 누가 날 안았을까. 어머니는 날 안은 적이 있을까. 모를 일이었다. 쉬면서, 그녀가 가벼운 요깃거리를 구해왔다. 나는 속이 안 좋아서 조금 이따가 먹겠다고 했다. 혼자 천천히 먹던 그녀가 내게 양념통을 빌려달란다. 양념통을 받아 든 그녀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주문을 외운다.
“얄리 얄리 얄리 뿅……”
그 모습이 웃겨서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으십니까?”
“레르 경. 주문이 틀렸어요. 그리고 그렇게 자신 없이 외면 맛이 달아난다고요.”
여전히 그녀는 불신에 찬 눈빛으로 나와 양념통을 본다. 나는 그녀에게서 양념통을 받아들었다. 방금 그녀의 모습은 생각할수록 웃기다. 절대 안 믿겠거니 했는데, 진지하게 주문을 외는 그녀의 모습이란.
“레르 경의 주문은 식욕을 돋우는 주문이었나 보네요. 저도 먹어도 되죠?”
“물론입니다.”
첫댓글 잘읽고가요 ㅎㅎ
오랜만에 새글이네요. 기대할께요~
ㅋㅋㅋㅋ
재미있는 주문에네요
귀여운 공주님이네요 ㅋㅋㅋㅋㅋ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