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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취려는 언양(彦陽) 사람이니 아버지 부(富)는 예부시랑(禮部侍郞)이었다. 김취려는 문음으로 정위(正尉)에 임관되었다가 선발되어 동궁위(東宮尉)로 등용되었다. 여러 번 승직되어 장군(將軍)으로 임명되어 동북계(東北界)를 진수하고 대장군(大將軍)으로 등용되었다. 강종 때에 변경 요새 지대를 순무(巡撫)하였는데 변경 주민들이 그를 경애하였다. 고종 3년에 거란(契丹)의 유족인 금산 왕자(金山王子)와 금시 왕자(金始王子)가 하(河), 삭(朔) 지방에 압력을 가하면서 대료 수국왕이라고 자칭하고 천성(天成)이란 연호를 썼는데 몽고가 대 병력으로 그를 토벌하였다.
두 왕자가 근거지를 버리고 동으로 와서 금나라 군대 3만 명과 개주관(開州館)에서 교전하였는데 금나라 군대가 승전하지 못하고 대부영(大夫營)으로 퇴각하여 방어하고 있었다. 두 왕자가 또 진공하면서 사람을 보내 우리 북계(北界) 병마사에게 통고하기를
당신네가 식량을 보내 우리를 방조하지 않으면 우리는 꼭 너희 강토를 점령할 것이다. 우리가 며칠 후에 황색 깃발(黃旗-황제 노릇한다는 뜻)을 올릴 것이니 너희들은 그곳으로 와서 황제의 명령을 들으라. 만약 오지 않으면 너희들에게 군사 행동을 취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정한 날에 이르러 과연 황색 깃발이 올랐으나 병마사는 가지 않았다.
이튿날 금산이 부하 장수 아아걸노(鵝兒乞奴)로 하여금 군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와서 영삭(寧朔) 등 진을 공격하며 성 밖에 있는 주민들의 재물과 곡물이며 가축 등을 약탈하여 갔으며 또 그 이튿날에는 의주(義), 정주(靜), 삭주(朔), 창주(昌), 운주(雲), 연주(燕) 등 고을과 선덕진(宣德), 정융진(定戎), 영삭(寧朔) 등 각 진에 침입하였는데 그들은 모두 처자를 데리고 왔으며 산과 들로 돌아다니면서 마음대로 알곡을 거두고 마소(牛馬)를 잡아 먹으면서 한 달 이상 살다가 먹을 것이 없어지자 운중도(雲中道)로 옮겨 들어 왔다.
이에 상장군 노원순(盧元純)을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로,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백수정(白守貞)을 지 병마사(知兵馬使)로,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김온주(金蘊珠)를 부사(副使)로, 상장군 오응부(吳應夫)를 우군 병마사(右軍兵馬使)로, 최종준(崔宗峻)을 지 병마사(知兵馬事)로, 시랑(侍郞) 유세겸(庾世謙)을 부사(副使)로, 취려를 후군 병마사(後軍兵馬使)로, 최정화(崔正華)를 지 병마사(知兵馬事)로, 진숙(陳淑)을 부사(副使)로 각각 임명하여 13령(領)의 군사와 신기군(神騎軍)을 통솔케 하였다.
3군이 출발하여 조양진(朝陽鎭)에 이르니 조양 사람들이 적군이 이미 접근하였다고 보고하였다. 3군에서 각각 별초(別抄) 백 명과 신기군 40명씩을 보냈는데 아이천(阿爾川) 가에 이르러 적과 교전하여 관군이 약간 퇴각하였다. 신기 낭장(神騎郎將) 정순우(丁純祐)가 적진에 돌입하여 독(纛)기를 가진 놈을 쳐서 쓰러뜨리니 적진에 혼란이 생겼다. 이 틈을 타서 적 80여명을 죽이고 20여 명을 포로하였는데 그 중에는 양수척(楊水尺-신분이 천한 백정) 1명도 있었으며 마소(牛馬) 수 백 필과 병부, 관인, 기타 기계 병장기 등의 노획이 대단히 많았다. 이변 공로로 인하여 조정에서는 정순우를 장군으로 승진시켰다.
3군이 또다시 연주(連州) 동동(東洞)에서 적과 싸워 백여 명을 죽였는데 또 적 3백여 명이 구주 직동촌(龜州直東村)으로 와서 있었으므로 군후원(軍候員) 오응유(吳應儒)가 보병 3천5백 명을 데리고 비밀리에 행동하여 적을 기습하였는데 산원(散員) 함홍재(咸洪宰), 견국보(甄國寶), 이직(李稷)과 교위(校尉) 임종비(任宗庇) 등이 적병 2백50여 명을 죽이고 3천여 명을 포로하였으며 소, 말, 전투 기재, 은첩(銀牌), 동인(銅印) 등 물을 많이 노획하였다.
3군이 구주(龜州) 삼기역(三岐驛) 전투에서 2일간 싸워 적 2백10여 명을 죽이고 39명을 포로하였으며 장군 이양승(李陽升)은 장흥역(長興驛)에서 또 적을 격파하니 적군이 창주(昌州)로부터 연주(延州)의 개평역(開平), 원림역(原林)으로 이동하는데 그들이 종일 연락 부절하였다. 관군이 신기장(神騎將)을 보내 적을 추격하여 신리(新里)에서 적을 만나 1백90명을 죽였다. 관군 전체가 연주 방면으로 계속 전진하여 광유(光裕), 연수(延壽), 주저, 광세(光世), 군제(君悌), 조웅(趙雄) 등 여섯 장군으로 사자암(獅子岩)을 수비하게 하고 영린(永麟), 적부(迪夫), 문비(文備) 등 세 장군으로 양주(楊州)를 방위하게 하였다. 이튿날 아홉 장군들이 힘을 합하여 조종수(朝宗戍)에서 적과 싸워 7백60여 명을 살해 또는 포로하고 말, 노새, 소와 패(牌), 인장, 병장기 등을 다수 노획하였다.
적은 다시 분산 작전을 하지 못하고 개평역(開平驛)에 군력을 집결하였는데 3군이 더 전진하지 못하였다. 우군은 서산(西山) 기슭에 자리잡고 있었고 중군은 평지에서 적의 공격을 받고 약간 퇴각하여 독산(獨山)에 둔취하였다. 그런데 김취려가 칼을 빼들고 장군 기존정(奇存靖)과 함께 말을 몰아 적의 포위망을 충격하여 드나들면서 맹렬히 공격하니 적병이 흩어졌다. 적을 추격하여 개평역을 지나자 역 북편에 매복하였던 적이 중군을 급격히 공격하였다. 김취려가 반격하니 적들이 또 붕괴하였다. 그날 밤에 노원순이 김취려에게 말하기를
'적은 다수요. 우리는 소수일 뿐만 아니라 우군(右軍)도 아직 도착하지 않은 형편이며 출발할 때 3일 분의 식량밖에 가지지 못한 것을 이미 다 먹었으니 연주성으로 후퇴하여 후방의 원조를 기다리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니 김취려는
'아군이 누차 승리하여 투지가 오히러 앙양중에 있으니 이 기세로서 한 번 싸운 후에 다시 의논하자'고 대답하였다.
적병은 묵장 벌(野)에서 포진하고 있었는데 기세가 대단히 성하였다. 노원순은 김취려를 급히 불렀다. 그리고 흑색 깃발을 휘둘러 신호하니 장병들 전체가 적의 칼날을 무릅쓰고 앞을 다투며 공격하였는데 모두 한 사람이 백 명씩 당하였다. 김취려가 문비와 함께 적진을 가로 잘라 놓으니 돌진하는 곳마다 적병이 막 쓰러졌으며 세 번 싸워 세 번 다 승리하였다. 그러나 이 격전에서 김취려의 장자가 전사하였다.
적들이 향산(香山)으로 쫓겨 가서 보현사를 불살랐다. 관군이 계속 적을 추격하여 적을 죽이고 생포한 총수가 2천4백여 명이었으며 남강(南江)에 빠져 죽은 적병의 수효도 역시 천 명 이상에 달하였다. 나머지 적들은 밤에 창주(昌州)로 도망갔는데 부녀들과 어린아이들을 길가에 내버리고 갔으므로 그들의 울음소리가 마치 수만 마리의 소가 일시에 우는 듯 하였다.
적군 한 사람이 무기를 버리고 자기는 관원이라 자칭하면서 바로 김취려의 앞으로 와서 하는 말이
'우리들이 귀국 변방을 소란하게 한 것은 물론 죄로 됩니다. 그러나 여자와 어린아이들이야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들을 모조리 죽이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를 박해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오래지 않아 우리가 스스로 물러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김취려가 그 자에게 '네 말을 어떻게 신용하겠는가?'라고 말하고 술을 주니 유쾌하게 마시고 갔다. 조금 후에 아아걸노가 공문을 보내고 애걸하였는데 아까 그 자가 말한 바와 같이 요청하여 왔다. 3군이 각각 2천 명씩 파견하여 퇴각하는 적의 뒤를 밟아 가면서 보았는데 적이 버린 물자, 식량, 병장기 등이 길가에 흐트러져 있고 소와 말은 허리를 찍거나 엉덩이를 찔러서 버려 두었다. 아마도 그것을 가져가도 다시 쓰지 못하게 만든 것일 것이다.
파견한 6천 명의 아군이 청새진(淸塞鎭)에서 적과 싸워서 수다한 적을 죽이고 포로하였으며 평로진(平虜鎭), 도령(都領) 녹진(祿鎭)도 70여 명의 적을 죽였다. 적은 드디어 청새진을 넘어서 도망갔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향산 전투에서 적장 지노(只奴)가 살에 맞아 죽고 금산이 적군을 통솔하였다 하며 일설에는 한 여자를 붙들었는데 그의 말이'나는 아아의 처이다. 나의 남편이 처음에 약산사(藥山寺)에 들어갔을 때 죽었고 지노가 그 군대까지 통솔하였다'고 하였다.
관군이 연주(延州)를 지낼 때에 적의 후속 대 부대가 또 우리 국경 안으로 들어온다는 정보를 듣고 다만 내상군(內廂軍)만을 남겨 두어 자위하게 하고 나머지는 전부 출발하기로 하였는데 후군이 홀로 양주(楊州)에서 적군을 만나 수십 명을 살해, 포로하였고 양군(전군과 중군)은 먼저 박주(博州)로 회군(回軍)하였다. 김취려는 치중(輜重)부대를 보위하면서 천천히 행군하여 사현포(沙現浦)에 이르렀을 때에 적군이 돌연 습격하여 왔다. 김취려가 양군에게 급보로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양군은 자기의 안전만을 생각하고 구원하지 않았다. 김취려는 홀로 힘껏 싸워서 적을 격퇴하고 끝내 치중(수송)부대를 보호하여 박주에 도착하니 노원순이 서문 밖까지 영접 나와서 치사하기를 갑자기 강적을 만났는데 적의 기세를 꺾었으므로 3군의 짐을 운반하는 부대의 병사들로 하여금 자그만 손실도 없게 하였으니 이는 당신의 힘이다라고 하고 마상에서 술을 부어 축배를 들었다. 양군 장병들과 여러 고을의 부노(父老)들이 모두 절하며 말하기를
'이 전 적의 강점지에서 강적과 맞아 싸우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개평, 묵장, 향산, 원림의 여러 전투에서 후군이 매 번 선봉으로 싸웠으며 적은 병력으로 매 번 대군을 격파하여 우리 같은 노약(老弱)의 생명을 보존하게 하여주니 그 은덕을 생각하면 보답할 길은 없으나 오직 원수님에게 축수를 드릴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적이 다시 잔당을 집합하여 창주(昌州) 성문 밖에 와서 연일 무력을 시위하더니 적병 1백50명이 창주 성 안을 침범하였으므로 관군이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관군이 박주(博州)에 주둔하고 밤에 군사를 출동시켜 흥교역(興郊驛)에 있는 적을 야습하여 40여 명을 포로하고 이튿날 밤에 홍법사(洪法寺)전투에서 싸워 또 승리하였다. 또 하루를 지나 장군 김공석(金公奭)이 적 백여 명과 창주 성문 밖에서 싸워서 50여 명을 살해, 포로 하였는바 김공석은 자기 칼로 은패를 찬 적을 죽이고 성 안으로 들어가 대원을 휴식시켰다.
적들이 밤을 이용하여 청천강을 건너 서경(西京)으로 향하여 갔다. 관군은 위주(渭州) 성 밖에서 적과 싸웠는데 패배당하고 장군 이양승(李陽升) 외 천여 명이 전사하니 수도에서 이 소문을 듣고 온 성 안 사람들이 통곡하였다. 적들이 서경 성 밖까지 와서 안정역(安定驛)과 임원역(林原)을 비롯하여 담화사, 묘덕사(妙德), 화원사(花原)의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고 있었으나 관군은 이를 방어하지 못하였다. 적들이 얼음을 이용하여 대동강을 건너 마침내 서해도(西海道)로 들어가 황주(黃州)를 도륙하였다.
이듬해에 김취려를 금오위 상장군(金五衛上將軍)으로 임명하고 일변 승선(承宣) 김중구(金仲龜)를 보내 남도(南道) 군대를 영솔하고 김취려와 합세하라고 하였는데 김중구는 도공역(陶公驛)에서 적과 싸우다가 패배하였다.
이보다 앞서 중군이 군대를 증원하여 줄 것을 조정에 청하여 왔으므로 좌승선(左承宣) 차척(車倜)을 전군 병마사(前軍兵馬使)로, 대장군 이부(李傅)를 지 병마사(知兵馬使)로, 예부시랑 김군수(金君綏)를 부사(副使)로, 상장군 송신경(宋臣卿)을 좌군 병마사(左軍兵馬使)로, 장군 최유공(崔愈恭)을 지 병마사(知兵馬事)로, 형부 시랑 이실춘(李實椿)을 부사(副使)로 각각 임명하고 이미 편성된 3군과 합쳐서 5군으로 편성하였다. 5군이 안주(安州) 태조탄(太祖灘)에 이르러 대패를 당하고 쫓겨 돌아 오니 적이 이긴 기세를 타서 제멋대로 덤벼 들었다. 김취려가 문비(文備), 인겸과 함께 맞아 친결과 인겸은 나는 화살에 맞아 죽었으며 김취려는 분연히 칼을 휘두르며 대항하다가 전신에 창과 화살을 맞아 심한 부상을 당하고 돌아왔다. 적들이 관군을 추격하여 선의문(宣義門)까지 왔다가 물러가서 우봉(牛峰)을 침략하고 임강(臨江), 장단(長湍)으로 침입하였다.
이리하여 조정에서는 다시 5 군을 편성하고 오응부(吳應夫)를 중군 병마사로, 대장군 이무공(李茂功)을 지 병마사로, 소부감(少府監) 권준(權濬)을 부사로, 상장군 최원세(崔元世)를 전군 병마사로, 곽공의(郭公儀)를 지 병마사로, 호부 시랑(戶部侍郞) 김혁여(金奕與)를 부사로, 차 장군 공천원(貢天源)을 좌군 병마사로, 사재경(司宰卿) 최의(崔義)를 지 병마사로, 장작감(將作監) 이적(李勣)을 부사로, 차 상장군 오인영(吳仁永)을 우군 병마사로, 차 위위경(借衛尉卿) 송안국(宋安國)을 지 병마사로, 시랑 진세의(陳世儀)를 부사로, 상장군 유돈식(柳敦植)을 후군 병마사로, 최종준(崔宗峻)을 지 병마사로, 진숙(陳淑)을 부사로 각각 임명하여 적을 방어하게 하였다.
5군이 아직 출발하지 않고 있었는데 오직 후군 병마사 유돈식이 교하(交河)를 향하여 행군하였다. 오응부가 사람을 보내 말하기를 적이 적성장(積城場)에 머물러 있으니 되돌아오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으나 유돈식이 듣지 않고 4군에게 합력하여 적군 공격을 청하였으므로 4군이 그에 응하고 적성에 이르니 적이 그곳에 없었다. 적이 동주(東州)를 함락하였으므로 최충헌이 왕에게 고하기를
'거란병이 동주를 지나 장차 남쪽으로 갈 기세가 보이는데 5군이 머뭇거리고 싸우지 않으며 식량만 소비하고 있으니 오응부의 관직을 파하고 그의 아들과 사위를 철직시키며 전군 병마사 최원세로 그를 교체하고 김취려를 전군 병마사로 임명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니 왕이 그대로 시행하였다.
적군이 교하를 향하여 증파도(澄波渡)를 건넜는데 관군이 저촌(楮村)에서 적과 만나 싸워서 패주시켰다. 관군은 조정에 승전 보고를 보내기를
'적군이 풍양(豊壤)현 효성(曉星) 고개까지 침입하였는데 관군이 적과 싸우고자 횡탄(橫灘)을 건널 무렵에 적군이 배후로부터 공격하여 좌군이 먼저 싸우다가 패전하여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중군과 후군이 산 뒤로부터 적의 배후를 공격하여 적을 물리치고 노원역(盧元驛) 의의장(宜義場)까지 추격하여 적을 많이 죽였는데 적은 소, 말, 의복, 식량을 모두 버리고 갔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대정(隊正) 안팽조(安彭祖)가 그때 화살에 맞아 부상당하고 돌아와서 말하기를
'적군의 전사자는 단 두 명뿐이고 기타 죽은 자는 모두 아군이다.'라고 하였다.
전군(前軍)과 우군(右軍)이 지평현(砥平縣)에서 적과 싸워 그를 격파하고 말 천여 필을 노획하였다. 적군은 안양 도호부(安陽都護府)를 함락하고 안찰사 노주한(魯周翰)을 잡아 죽였으며 기타 관속(官屬)들도 많이 살해당하였다. 또 원주(原州)에도 적군이 침입하였는데 고을 사람들이 오랜 기간 적과 상지하였다. 무릇 9차의 전투를 겪었으나 양식은 결핍되고 기진맥진하였으며 외부로부터의 아무런 구원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드디어 성(城)이 함락되었고 전군과 후군도 패전하였다. 그리하여 대장군 임보(任輔)를 동남도 가발 병마사(東南道加發兵馬使)로 임명하고 또 수도에 사는 노예는 공사(公私)를 막론하고 군대로 선발 편성하여 전선으로 파송하였다.
전군(前軍)과 우군(右軍)이 양근(楊根), 지평(砥平)에서 적군과 여러 번 싸워 금패, 은패(金銀牌)와 산자(傘子) 등을 노획하였는데 그것을 바치기도 하고 혹 군인들에게 표창하기도 하였다. 조정에서는 곽공의(郭公儀)를 위위경(衛尉卿)으로, 우군 병마사 오효정(吳孝貞)을 상장군(上將軍)으로 각각 승직시켰는바 공의는 일찍이 뇌물 받아 먹은 죄로 면직되었다가 금번의 전쟁 공로에 의하여 복직된 것이다.
관군이 황려현(黃驪縣) 법천사(法泉寺)까지 적을 추격하고 독점(禿岾)으로 옮겨 유숙하였는데 이때 최원세가 김취려에게 묻기를 '내일 행군할 길이 두 갈래인데 어느 편으로 가야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김취려가 말하기를 '군대를 나누어서 좌우의 팔과 같이 서로 호응하면서 행군하는 것이 좋지 않은가?'라고 하니 최원세도 그의 말대로 하였다. 이튿날 맥곡(麥谷)에서 양군이 합세하여 적과 싸웠는데 적병 3백여 명을 죽이고 적을 제주(堤州)의 개울가까지 육박하였는데 적의 시체가 개울물을 덮고 내려갔다. 3일 후 적을 추격하여 박달(朴達)고개에 이르니 임보(任輔)도 부대를 인솔하고 와서 서로 모였다. 최원세가 김취려에게 말하기를
'영(嶺) 마루터기는 대군이 머무를 곳이 못되니 산 아래로 내려가서 유하려 합니다'라고 하니 김취려가 말하기를
'전술상으로 보면 비록 인심의 단결이 귀중한 것은 물론이나 지형이 유리한 것도 경시할 수 없다. 만약 적이 먼저 이 고개를 점령하고 우리가 그 밑에 있게 된다면 아무리 원숭이같이 민첩한 군대라도 통과할 수 없을 것이거늘 하물며 인간으로서 어떻게 통과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관군이 드디어 영마루에 올라가 숙영하였다. 이튿날 동틀 무렵에 적군이 영(嶺) 남쪽으로 진출하여 먼저 수만 명의 병력을 나누어 영좌우 고지로 올라오면서 그 요지를 점령하려고 하였다. 김취려가 장군 신덕위(申德威), 이극인(李克仁)으로 좌측을 담당하고, 최준문(崔俊文), 주공예(周公裔)로 우측을 담당하게 하며 자기는 중간에서 북을 울리면서 지휘하였는데 전사들이 모두 결사적으로 싸웠다. 관군들이 바라보고 또 함성을 외치면서 앞을 다투어 돌격하니 적군이 대패하여 노약과 남녀며 병기와 차량 등을 내버리고 모두 도망쳤다. 그래서 적들이 이 전투로 인해서 남으로 진공할 계획을 포기하고 모두 동쪽으로 달아났다.
적을 추격하여 명주 대관산(溟州大關山) 영에 이르러서는 장졸들이 겁을 먹고 열흘 동안이나 머물다가 진군하니 적군은 이미 영을 넘어간 뒤였다. 중군, 좌군, 전군이 다시 적을 추격하여 명주 모로원(毛老院)에 이르러 교전하여 적을 격파하고 옥띠(玉帶), 금, 은패(金銀牌), 무기 등을 노획하였다. 적군이 명주성을 포위하고 있으므로 4군이 적을 추격하기로 하였으나 후군이 미처 따르지 못하였기 때문에 강주(剛州)에서 주둔하고 있었다. 우군이 단독으로 등주(登州)에서 적군과 교전하다가 패배당하고 지휘관 오수정(吳守貞)이 전사하였다. 적은 함주(咸州)를 거쳐 마침내 여진(女眞) 지역으로 들어갔고 관군은 위축되어 적의 뒤를 추격하는 자가 없었다. 김취려가 중군으로부터 받은 공문에 의하여 부대를 정주(定州)로 옮기고 적의 동태를 살피었다. 정찰병의 보고에 이르기를
'적군이 함주에 있는데 우리와의 거리가 가까워 개와 닭의 소리가 서로 들리는 형편입니다'라고 하였다. 김취려가 참나무 울타리(鹿角垣)를 설치하고 세 겹으로 참호를 파서 방어 시설을 만들었으며 이극인(李克仁), 노순우(盧純祐), 신덕위(申德威), 박유 등 네 장군을 남겨 수비하게 하고 주력 부대는 흥원진(興元鎭)으로 옮겨 가서 주둔하고 있었다.
적군은 여진병의 원조를 얻어 다시 활기를 띠우고 침입하여 들어왔다. 김취려 부대가 되돌아오다가 예주주천(豫州柱川)에서 적과 마주쳐서 교전하다가 퇴군하였다. 김취려가 갑자기 병에 걸렸으므로 막료들이 후방으로 가서 치료하기를 권하였으나 김취려는 대답하기를 '차라리 변경의 귀신이 될지언정 어찌 집 안에서 편안히 있기를 원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병이 심해서 왕의 명령으로 수도로 돌아가서 치료하기로 되어 가마를 타고 서울에 도착하여 몇 달을 지나 겨우 완치되었다.
그 사이 김취려가 남겨 둔 부대는 위주(渭州)에서 적과 싸우다가 패전하였고 적군은 다시 세력을 집결하여 고주(高州), 화주(和州)를 침략하고 영인(寧仁), 장평(長平) 두 진(鎭)을 함락하고 예주(豫州)까지 함락시켰다. 이에 조정에서는 전에 편성한 5군과 가발병(加發兵)을 폐지하고 새로 3군으로 개편하여 문한경(文漢卿)을 중군 병마사로, 이실춘(李實椿)을 지 병마사로, 이득교(李得喬)를 부사로, 공천원(貢天源)을 좌군 병마사로, 송안국(宋安國)을 지 병마사로, 김혁여(金奕與)를 부사로, 이무공(李茂功)을 우군 병마사로, 권준(權濬)을 지 병마사로, 김연량(金沿亮)을 부사로 각각 임명하였다.
이듬해에 적군이 또다시 대거 침입하였으므로 수사공(守司空) 조충(趙沖)을 서북면 원수로 삼고 김취려를 병마사로, 차장군 정통보(鄭通寶)를 전군으로, 오수기(吳壽棋)를 좌군으로, 신선주(申宣冑)를 우군으로, 이림(李霖)을 후군으로, 이적유(李迪儒)를 지 병마사로 각각 임명하고 왕이 친히 부월을 줘 보냈다.
조충과 김취려 등이 수차 적군과 교전하여 타격을 가하니 적의 세력이 궁지에 빠져서 강동성(江東城)으로 들어가서 그곳을 거점으로 삼고 있었다. 이때 몽고의 합진 찰라(哈眞札剌)와 동진의 완안 자연(完顔子淵)이 거란을 토벌하러 바로 강동성으로 진군하여 오면서 고려에 사람을 파견하여 군대와 식량을 요청하여 왔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가기를 꺼리고 있었다. 그런데 김취려가 말하기를
'국가의 이해가 바로 오늘의 처사에 달려 있다. 만약 그들의 뜻을 어겨 사단이 생긴다면 후회한들 무엇하리?'라고 하니 조충이 말하기를
'이 말이 바로 나의 의견이다. 그러나 이는 중대한 일이니 적임자가 아니면 보낼 수 없다'라고 하였다. 김취려가 말하기를
'나라에 일이 어려운 때에 사양치 않는 것이 신하된 사람의 직분이다. 내 비록 불민하나 당신을 위하여 한 번 가려 하노라'고 하니 조충이 말하기를
'군중의 모든 일을 공에게 의지하고 있는데 당신이 가면 되겠느냐?'라고 하였다. 이듬해에 김취려가 지 병마사 한광연(韓光衍)과 더불어 열 명의 장군과 그들의 군대와 신기군(神騎), 대각군(大角軍), 내상군(內廂) 등의 정예 부대를 데리고 갔더니 합진이 통역 조중상(趙仲祥)을 통하여 김취려에게 말하기를
'귀국이 과연 우리와 동맹을 맺으려면 먼저 몽고 황제에게 멀리 절하고 다음으로는 만노(萬奴) 황제에게 절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김취려가 말하기를 '하늘엔 태양이 두 개 있지 않고 인민에겐 두 임금이 없는 법인데 천하에 어찌 두 황제가 있을 수 있는가?'라고 하고 다만 몽고 황제에게만 절하였다.
김취려는 키가 6척(尺)5촌이나 되는 체격에 수염이 길어서 배를 지났으므로 예복을 입을 때마다 반드시 여종 두 명으로 하여금 수염을 좌우로 갈라 들게 한 후에 띠를 띠곤 하였다. 합진이 김취려의 용모가 위대할 뿐더러 이제 또 그의 말을 듣고 크게 기이한 인물로 인정하였다. 그를 자리에 인도하여 같이 앉힌 후 나이를 물으니 '60세에 가깝다'고 김취려가 대답하였다. 합진이 '나는 아직 50세 미만인데 이미 한 집안으로 되었으니 당신은 형으로 되고 나는 아우로 되겠다'라고 한 후 김취려를 동쪽으로 향하여 앉게 하였다. 이튿날 김취려를 또 다시 자기 병영으로 초대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합진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여섯 나라를 정벌하면서 훌륭한 인물들을 많이 보았으나 형의 용모를 보니 어찌도 그리 기이한가? 이것이 내가 형을 존경하기 때문에 형의 휘하 병졸에게 대하여도 역시 한 집안같이 대한다.'라고 하였다. 작별하고 떠날 때에도 김취려의 손을 잡고 문 밖까지 나와서 겨드랑을 받들어 말에 올려 주었다.
며칠 후 조충도 그를 방문하였는데 합진이 묻기를 '원수의 연치가 형보다 많으신가? 적으신가?'라고 물으므로 김취려는 나보다 연장자라고 대답하니 합진이 조충을 상좌(上座)에 앉히고 말하기를
'내가 한 말씀 드리고자 하는데 실례가 될 듯하다. 그러나 친한 정의에 체면만 차리는 것은 부당하다. 내가 두 형님 사이에 앉는 것이 어떠 할까?'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김취려가 대답하기를
'이것은 우리들이 바라던 바이나 먼저 발언하지 못했을 뿐이다' 라고 하고 좌석을 정한 후 술을 차리고 흥겹게 연회하였다. 몽고 풍속에 손님을 접대할 때에 잘 드는 칼 끝으로 고기를 꿰어 주인과 손님이 서로 먹여 주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런데 주고 받고 할 때 절대로 눈을 깜짝이면 아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군의 유명한 용사(勇士)들도 이것만은 모두 곤란한 빛을 보이었다. 그러나 조충과 김취려는 그와 수작하는 동작을 매우 익숙하게 하였으므로 합진 등이 지극히 유쾌하게 놀았다. 합진은 술을 잘 마시는 편인데 조충과 술 마시기 내기를 하되 지는 사람은 벌 받기로 약속하였다. 조충은 얼마 마시어도 취한 빛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지막 잔에 가서 잔을 받아 놓고 말하기를
'이 술을 내가 못마실 바는 아니나 만약 내가 이기면 약속대로 공이 반드시 벌을 받게 될 것이니 차라리 내가 벌을 받겠다. 주인으로서 손님을 벌 주는 것이 마음에 좋을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더니 합진이 그 말을 중히 여겨 대단히 기뻐하였으며 그리고 이튿날 강동성 밑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김취려가 성 밖 3백 보(步) 지점에 이르러 그쳤다.
합진은 강동성 남문에서 동남문에 이르기까지 너비와 길이가 십 척(尺)이나 되는 도랑을 팠으며 서문 이북은 완안 자연에게 맡기고 동문 이북은 김취려에게 맡겨 각각 참호를 파게 하여 성중에 있는 적이 탈주하지 못하게 하였다. 적의 기세가 군색해서 40여 명이 성을 넘어 몽고군에 항복하고 적의 괴수 감사왕자는 목매어 죽었으며 그의 관원, 군졸, 부녀 등 5만여 명이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하였다. 합진이 조충 등과 함께 다니면서 투항하는 상황을 시찰하였다. 왕자의 가족과 가짜 승상, 평장(平章) 이하 백여 명을 모두 현장에서 처단하였으며 기타의 사람들에 대하여는 관대한 처분으로 죽이지 않고 여러 군대들로 하여금 수비하게 하였다. 합진이 조충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만리 밖에서 와서 귀국과 합력하여 적을 격파한 것은 천재(千載)의 다행이라. 예의상 당연히 귀국 왕을 찾아가서 배알하는 것이 응당하나 우리 군대가 대단히 많아서 멀리 행군하기 곤란하므로 사람을 보내 사례만 드리노라!'고 하였다.
합진 찰라가 조충과 김취려에게 동맹 맺기를 청하면서 말하기를
'두 나라가 영원히 형제로 되어서 만 대에 이르기까지 오늘의 맹약을 잊지 말자!'라고 하였다.
조충은 군대를 위로하는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합진은 부녀와 소년 남자 7백 명과 우리 나라 백성으로서 적에게 포로된자 2백 명을 우리 측에 돌려 주고 여자로서 15세 전후의 처녀를 조충과 김취려에게 아홉 명씩과 준마(駿馬) 아홉 필씩을 선사하였으며 나머지는 모두 자기가 데리고 갔다.
조충이 거란 포로들을 각 고을에 나누어 보내고 공한지를 택해서 거주하게 하였으며 또 식구에 따라 토지를 주어 농사를 짓게 조치하였는바 향간에서 거란장(契丹場)이라고 부르는 곳이 바로 여기이다.
같은 해에 의주의 적 한순(韓恂)과 다지(多智)가 수비하는 장수를 죽이고 각 군과 연락하여 배반을 일으켰다. 조정에서 추밀 부사 이극서로 중군을 영솔하게 하고 이적유(李迪儒)로 후군을, 취려로 우군을 거느리고 적을 토벌하게 하였다.
다음해에 김취려를 추밀 부사로 임명하고 극서와 교체하여 중군을 지휘하게 하였는데 한순 등이 금나라 원수 우가하(于哥下)에게 투항하였다. 우가하가 한순과 다지 두 명을 유인하여 죽인 후 그들의 머리를 수도로 전하여 왔다. 3군이 이번 역적에게 복종한 여러 성들에 대하여 죄에 처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김취려는 말하기를
'서전(書傅)에 이른바 '그 괴수를 섬멸하거든 협박에 의하여 가담한 자는 죄 주지 말라!'고 하였다. 대군이 이르는 곳에는 요원의 불길과 같아서 죄 없는 백성들도 재난을 많이 당하고 있거늘 하물며 거란의 침략으로 인하여 관동(關東)지방이 폐허로 되었는데 이제 또 우리 군대를 내놓아 나라의 울타리(藩籬)인 변방의 성을 허물어 버리는 것이 옳은가? 나머지 사람들은 일체 죄를 묻지 말라!고 하였다.
김취려가 곽원고(郭元固), 김보정(金甫貞), 종주질(宗周秩), 종주뢰(宗周賚) 등을 의주로 파견하여 피난민들을 불러 들여 안착시키게 하였다. 그러나 종주뢰는 욕심이 많아서 뇌물을 많이 받아 먹었으며 뇌물을 가져 오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구실을 붙여 죽이곤 하였으므로 고을사람들이 모두 원망하여 적의 잔당 윤창 등을 인도하여 성을 넘어 들어오게 하여 종주뢰 등을 죽이니 곽원고 김보정 등이 도망하여 돌아 와서 보고하였다. 그래서 김취려가 판관(判官) 최홍(崔弘)과 녹사(錄事) 박문정(朴文挺)을 파견하여 그들에게 거역하면 화를 당하고 순종하면 복이 온다고 타이르고 이어 대장군 조염경(趙廉卿)과 장군 박문분(朴文賁)을 보내 군대 5천 명을 거느리고 토벌하게 하였더니 윤창 등은 도망하고 적의 도당은 와해되었다. 당시 거란 패잔병이 영원(寧遠)산중에 숨어 있다가 때때로 나타나서 백성들의 재물을 약탈하였으므로 그것이 민간의 우환거리로 되었다. 김취려가 이경순(李景純), 이문언(李文彦) 등을 보내 패잔병을 격파하였으므로 북부 국경 지대가 모두 편안하게 되었다.
김취려는 이듬해에 추밀사(樞密使) 병부상서(兵部尙書),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승직되었다가 미구에 참지정사(參知政事) 판 호부사(判戶部事)로 올라갔으며 15년에 수태위(守太尉), 중서시랑(中書侍郞) 평장사(平章事) 판병부사(判兵部事)를 거쳐 마침내 시중(侍中)으로 되었으며 21년(1234년)에 죽으니 시호를 위렬(威烈)이라고 주었다.
김취려는 검소하고 또 정직하며 충심과 외리를 신조로 삼았으며 군대를 통솔함에 있어서는 명령이 엄격하였다. 그리하여 군사들이 인민의 재물을 털끝만치도 침범하지 않았으며 술이 생기면 잔을 가져다가 최하급 군인들과 함께 고루 마시었기 때문에 병사들이 그의 명령이라면 죽을 힘을 다 바치었다. 강동 전투에서의 공로는 다 조충에게 돌려 주었으나 전쟁터에 나서서 적군과 싸울 때에는 신기한 전술을 많이 써서 큰 공을 이루었으면서도 한 번도 그런 공적을 자랑한 적이 없었다.
그가 상(相)으로 된 후에는 정직하게 하부를 통솔하였으므로 부하들이 감히 그를 기만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고종 묘정(廟庭)에 배향(配享) 되었으며 그의 아들 전(佺)은 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로 있었다. 김전의 아들은 김양감(金良鑑), 김군, 김중(金仲), 김보(金保),김병(金騈)이 있었는데 김양감의 아들은 김문연(金文衍)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