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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자의 정의: 일본 핵폭격에 관한 진실
전쟁범죄를 이야기할 때 항상 거론되는 게 나치스의 유태인 학살이다.
그러나 미국이 전쟁범죄와 관련된 경우는 별로 없었다.
하지만 미국도 전쟁범죄로 재판을 받은 적이 있으며 실제로 유죄판결을 받은 적도 있다.
그런 경우는 여러 번 있었으며 항상 상대방 국가에 의해서였다.
전쟁범죄는 전쟁규칙을 어기는 행위로서, 이 규칙은 전쟁의 참혹함과 전쟁으로 인한
파괴 행위를 제한하자는 것을 기본취지로 하고 있다.
전쟁규칙은 가장 오래된 형태의 국제법이라 할 수 있으며 대개 다음 네 가지 범주로 나눠진다
: 1)전투병의 지위 2)적대 행위 3)점령 기간의 행위 4)정전이나 휴전 기간의 행위, 혹은 중립국에 대한 행위.
전쟁규칙은 전쟁으로 인해 가해지는 피해의 정도와 유형, 발생하는 고통의 정도,
전투나 기타 군사 활동에 참가하는 자들의 신분 등을 규정한다.
예를 들어 직업군인은 합법적으로 전투에 참가하여 인명을 살상할 수 있지만
전쟁포로나 민간인을 살상할 수는 없다. 도망쳤다가 다시 잡힌 포로도 벌줄 수 없다.
민간인이나 민간인으로 위장한 군인들은 전투 중이라 할지라도 적을 살상할 수 없다.
물론 규칙을 준수하는 '자원군(파르티잔이나 게릴라)'의 경우는 예외다.
군인이건 민간인이건 약탈은 불법이며 사유재산을 마음대로 몰수할 수 없다.
무방비 상태의 마음이나 도시, 건물, 거주지를 공격하거나 폭격하는 행위는 금지되어 있으며,
독가스나 생화학 무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적이라 할지라도 모든 전범 혐의자에 대해 재판할 권리가 있다.
전쟁범죄는 어떠한 것이든 극형을 받는다.
미군의 기초 야전교범에는 "경우에 따라 가벼운 벌을 가하는 경우도 있지만
모든 전쟁범죄는 원칙적으로 사형에 처한다"고 나와 있다.
역사를 통해 볼 때 전쟁범죄는 상당한 변화를 겪어왔다.
점령한 도시를 약탈하고 닥치는 대로 남녀노소를 살육하는 행위가
정복군의 당연한 행동으로 받아들여지던 때도 있었다.
실제로 성서에서는 전쟁과 관련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싸움을 벌이기 위해 어떤 성읍에 접근했을 때... 그곳에 있는 모든 남자들을 칼끝으로 쳐죽여라,
하나님께서 그 성읍을 너의 손 안에 인도해 주실 것이다.
그리고 여자들과 아이들과 가축들과 그 성읍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전리품으로 차지하여도 된다.
너의 하나님께서 너희 원수들로부터 빼앗아주신 전리품을 너희는 마음대로 쓸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유산으로 남겨주신 저역의 성읍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공격할 때에는
(다른 지역의 사람들을 공격할 때와는 달리) 숨쉬고 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도 살려두지 말아라
(여자와 아이들까지도).
신명기 20:10, 13-14, 16
또 성읍을 공격할 때 적의 과실나무는 한 그루도 손상시키지 말라고 덧붙이기도 한다.
"과실을 따먹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베어낼 수는 없다(들판의 나무는 사람의 생명줄이기 때문이다)."
(신명기 20:19)
좀더 후세로 오면 피정복자들을 죽이는 대신 노예로 삼았다.
1197 년 교황 알렉산더 3세는 전쟁포로들을 노예로 삼는 행위를 비기독교도인들에게만 국한시키라고 요구했다.
그 전세기인 11세기에는 특정한 날 전투를 금지하는 '하나님의 휴전일'이 교회에 의해 선포되기도 했다.
이를 어기는 사람들은 파문을 당했다.
하나님의 휴전일을 지키지 않고 공격해 오는 이교도 적들의 '위반 행위'에 대해서는 가혹한 응징을 가했다.
전문적으로 본다면 최초의 전범 재판은 1305 년 있었던 월리엄 월리스 경에 대한 재판이었다.
이 재판의 내용은 멜 깁슨이 월리스 역을 맡았던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 잘 소개되어 있다.
윌리스는 반역죄와, 영국 여러 마을에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심지어 신부와 수녀까지도" 대량 살상했다는 죄로 런던에서 처형당했다.
전쟁과 관련된 현재의 국제법의 핵심은 1907 년의 헤이그 협약이 그 모체다.
물론 그 이후 이 협약은 1929 년의 제네바 포로 협정 같은 많은 국제회의에서 계속 다듬어졌다.
이 협약에 의해 정해진 규칙들은 대다수 나라들의 동의를 받아 채결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모든 나라에 대해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인정된다.
지난 수십년간 종종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원자폭탄 공격의 합법성에 관해 논란이 제기되었다.
특히 나가사키에 대한 공격이 더 그랬다.
두 도시에 대한 원자폭탄 공격이 있기 전부터 이미 일본은 항복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히로시마에 대한 원자폭탄 공격만으로도
일본이들의 무조건 항복을 충분히 얻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가사키에 대한 파괴 행위는 과연 꼭 칠요한 것이었을까?
1945 년 8월 6일 히로시마에서 대략 10 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75시간 뒤 나가사키에서는 74,000 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이 숫자는 초기 폭발로 인한 직접 사망자 수만 포함시킨 것이다.
얼마 안 있어 훨씬 많은 사람들이 방사능 관련 질병으로 사망했고,
나중에 백혈병이나 악성빈혈 등의 질병들로 죽어갔다.
최근의 평가에 의하면 두 번의 폭발로 지금까지 사망한 사람들의 총숫자는 34 만 명 이상이라고 한다.
(핵폭탄이 히로시마에서 성공적으로 폭발했다는 보고를 접하고 트루먼 대통령은 이렇게 외쳤다.
"이 일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일입니다!")
디츠이치로 아키즈키 박사는 나가사키 폭발 당시 폭발의 중심지에서 2 마일 떨어진 나키 병원에 일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목격담을 나중에 "나가사키 1945"(1981)에 실었다. 그중 일부를 옮겨본다.
마당 바깥쪽에서 갈색의 연기, 혹은 먼지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허둥지둥 내달리는 광경이 보였다. 그때 남서쪽을 바라본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늘이 온통 연기구름으로 시커멓게 뒤덮여 있었다.
그 어두운 하늘 밑으로 땅위를 황갈색 안개가 뒤덮고 있었다.
장막을 친 듯한 땅 위의 광경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이 너무 무서워 공포감으로 몸이 땅에 얼어 붙는 것 같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건물들이 불타고 있었다.
아니 모든 것들이 불타고 있다는 표현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지구 자체가 불과 연기를 토해 내고 있는 것 같았으며
불꽃은 땅 속으로부터 미친 듯이 몸부림치며 솟아올랐다.
하늘은 온통 칠흑같이 어두웠고 땅은 주홍빛이었다.
그 사이를 노란색 연기구름이 뒤덮고 있었다. 마치 세상의 종말이 찾아온 것 같았다.
아키즈키 박사는 지붕에 불이 붙기 시작한 병원에서 빠져나와 생존자를 찾기 시작했다.
3층짜리 병원 건물은 아직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으며 무너진 대들보와 돌 조각 사이에 깔린 사람들이 보였다.
곧이어 폭발시의 섬광으로 화상을 입은 피해자들이 병원 마당으로 비틀거리며 들어서기 시작했다.
아키즈키 박사는 이렇게 증언했다.
"이들은 반나체나 완전 나체 상태로 느릿느릿 이상한 발걸음을 하며 걸어들어 왔다.
마치 지옥의 심연을 여행하고 온 사람들처럼 몸 속 깊은 곳으로부터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몸은 온통 허연 재를 뒤집어쓰고 있었으며 얼굴은 마치 가면을 쓴 것처럼 보였다."
이들은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비틀거렸다.
옷은 모두 불에 타 살갗에 녹아내린 상태였고 목이 타버렸기 때문에 물을 애타게 찾았다.
폭발 중심지로부터 1 마일 내에 있는 지역의 온도가 순간적으로 1,000도F에서 6,000도F까지 올라갔던 것이다.
몇 시간 안에 갖가지 모습의 희생자들이 속속 병원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아침에는 온통 하얀색의 유령 집단으로 보이던 부상자들이 이제는 모두 검정색으로 변한 것 같았다.
머리카락은 모두 타버렸고 시커멓게 탄 피부는 물집이 생긴 채 벗겨지고 있었다."
희생자들의 부상 정도는 점점 더 참혹해져 갔다.
폭발 중심지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 중, 현장에서 공중으로 휩쓸려 올라가거나
즉사하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이 특히 참혹했다.
얼굴에 화상을 입은 사람 중엔 눈이 눈구멍 안에서 녹아버린 사람들도 있었으며
옷무늬가 살갗에 녹아붙어 마치 문신을 한 것 같은 사람도 있었다.
병원을 찾아혼 환자들에게 의사가 해줄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폭발 당시 발생한 열폭풍이 건물을 휩쓸고 지나가면서 온갖 장비와 약품들을 다 쓸어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히로시마 폭격 직후 파괴에 관한 왜곡 보도가 일본 전역을 휩쓸었다.
일본 내각은 사건의 정확한 진상을 알려고 노력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들은 놀라운 이야기들을 믿지 못했다.
미 육군 참모총장 조지 마셜 장군은 나중에
"파괴 행위가 너무 완변하게 진행되서 한참이 지나서야 사건의 진상이 도쿄에 전달될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사실 나가사키에 대한 두 번째 폭탄 투하 결정은 벌써부터 준비됐던 것이었다.
7월 16일에 이미 맨해튼 계획(2차대전 중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계획 암호: 역주) 책임자 레슬리 그로브스 소장은
일본에 적어도 원자폭탄 두 발은 터뜨려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한 발은 폭탄의 엄청난 파괴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한 발은 미국이 원자폭탄을 한 발 이상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로브스 소장과 맨해튼 계획에 참가한 민간인 연구원들은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적어도 일본의 도시를 두 개 정도는 파괴시켜야 할 것이라고 트루먼 대통령을 설득했다.
고쿠라와 니이가타가 잠정적인 두 번째 공격 목표 도시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결국 나가사키로 결정되었다.
나가사키 폭격 5일 후 일본은 미국이 주장하던 무조건 항복을 했다.
일본에 대한 미국측의 재래식 폭격은 항복이 최종적으로 조인되는 순간까지 계속됐으며
이로 인해 나가사키 폭격후에도 15,000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8월 15일 히로히토 일본 천황이 방송연설을 통해 일본의 패전을 발표했다.
일본인들이 그의 목소리를 직접 들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일본인들은 경외심으로 머리를 조아린 채 방송연설을 듣기 위해 스피커 앞에 모여섰다.
히로히토는 "적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며, 이로 인해 많은 무고한 자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설명했다.
두 번째 폭격에 대한 가장 중요한 변명은 전쟁의 조기 종식과,
미국의 일본 침공시 입게 될 미국인들의 인명 피해를 미리 막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MIT대학 역사학 교수 존 도우버는 사실 8월 폭격 당시는
미국이 실질적으로 일본 침공을 시작하려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일본 남부 큐슈 섬에 대한 가장 빠른 예비공격이 11월 1일로 예정돼 있었으며,
도쿄나 본토의 관통지방에 대한 공격은 다음해인 1946 년 3월경으로 예정돼 있었다.
일본 침공을 감행하지 않고서도 전쟁이 끝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미국이 소련에게 대평양전쟁에 개입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던 상황이었고,
실제로 히로시마 폭격 이후 이틀만에 소련은 이를 이행했다.
1946 년 미국 정부가 발행한 미국 전략무기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모든 정황 증거와 생존 일본 지휘관들의 증언을 토대로 할 때,
일본은 핵공격이 없었어도, 또 소련의 개입이나 일본침공 계획이 없었어도
1945 년 11월 1일, 혹은 늦어도 1945 년 6월 20일 전쟁을 끝내기로 은밀하게 결정했는데
"통상적인 관료적 늑장" 때문에 빨리 항복을 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보고하기도 했다.
실제로 같은 달 미국의 지휘관들도 암호 해독을 통해
일본측이 소련을 상대로 항복 협상을 위한 예비교섭을 시도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어내기도 했다.
미국인들의 인명 피해를 줄이기 위해 원자폭탄을 공격했다는 발상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두 차례의 공격으로 거의 20 만 명의 남녀, 어린아이들이 죽었고 사실 이 숫자는
대략 태평양전쟁 전 기간에 목숨을 잃은 미군 전사자 수의 두 배에 해당하는 것이다.
게다가 도우버 박사의 지적에 따르면, 폭격으로 인한 희생자 중엔 한국인, 중국인, 동남아시아출신 학생,
영국과 네덜란드의 전쟁포로, 유럽의 성직자들이 포함돼 있었으며, 일본을 방문했다가 예기치 않았던
일본의 진주만 습격 때문에 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던 천 명 이상의 일본계 미국인들도 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미 해군항해사 열두 명도 히로시마에서 죽음을 당했다.
도우버 박사는 자신의 글에서 미국이 일본을 원자탄 공격목표로 삼은 이유를 다르게 설명한다.
"테크놀로지 리뷰"(1995 년 8월호)에 실린 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맨해튼 계획을 추진했던 본래 목적은 나치의 핵폭탄 개발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지만,
미국의 핵 개발자들은 1943 년부터 이미 독일이 아니라 일본을 원자폭탄의 1차 공격목표로
삼았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있다. 독일이 그런 무기를 개발하지 않기로 했다는 사실이 분명해지기 1 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만약 폭탄이 불발됐을 경우 독일의 고급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이 불발 폭탄을 분해하여
자신들의 폭탄 제조 과정에 써 먹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공격목표를 독일에서 일본으로 바꾼 이유였다.
(일본이 이런 능력을 가졌다고 걱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맨해튼 프로젝트 책임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1945 년 5월 8일 독일이 항복했을 때
자신들이 애써 개발한 폭탄을 완성하기도 전에 전쟁이 그대로 끝나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에서
폭탄 개발 노력을 더 한층 강화했다고 털어놓았다.
특히 일본에 대한 적대감도 일본을 핵공격 대상으로 삼는데 일조했다.
"진주만을 기억하자--일본인을 죽이자"라는 말이 전쟁 초기로부터 유명한 군사 표어로 등장할 정도였다.
당시의 논평가들이나 특파원들 중에는 인종적, 문화적으로 훨씬 이질적인 일본인을
독일인보다 더 경멸에 찬 눈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미국 지도자들은 국내 및 국제적인 전후의 정치 상황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1960 년대부터 기밀취급이 헤제되기 시작한 문서들에 따르면 1945 년 봄 이후 미국 최고위 정책입안자들은
원자폭탄이 동유럽이나 기타 지역에서의 소련의 팽창을 저지할 것을 바라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원자폭탄 제조 과정에 깊숙히 관여했던 사람들 중 몇몇은 원자폭탄의 가공할 만한 파괴력을 전쟁을 이용하여
실제 도시에 실험해 볼 필요가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야 전후 세계가 핵무기 감축에 협조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동시에 미국의 민감한 국내 정치상황상, 만약 맨해튼 계획이 이렇다 할 만한 결과 없이 끝나버렸다면
전후 미국 의회에서 폭탄 개발에 들어간 엄청난 비밀자금 유용에 대해
청문회를 벌였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다.
도우버 박사는, 1937 년 일본의 중국 도시들에 대한 폭격과 스페인 내전 당시
파시스트들의 게르니카에 대한 폭격(이것은 피카소의 유명한 벽화로 표현되었다.)을
미국과 국제 연맹이 강력히 비난했지만, 사실 몇 년 뒤 영국과 미국도 독일 도시들에 대해 폭격을 감행했고,
특히 드레스덴 지역에 융단폭격을 감행하여 10 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 전쟁에서 도시들을 폭격하고 독일이 네덜란들의 로테르담과 영국의 코븐트리를 폭격했을 때
루즈벨트는 "인류의 양심에 심각한 충격을 주는 비인간적인 야만 행위"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 폭격들은 독일 도시들에 대한 영국과 미국의 대규모 폭격 행위에 비하면 별 게 아니였다.
미국은 이런 융단 포격을 도쿄와 기타 63개 일본의 도시들에 대해서 계속했다.
도우버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원자폭탄 폭격은 적을 위협하고 합법적인 새로운 공격목표,
즉 민간인들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목표를 수행하기 위한 더욱더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핵폭격은 전쟁 직후 도쿄 전범 재판에 기소되었다. 일본군 지휘관들을 재판하기 위해 열렸던
이 재판은 뉘른베르크에서 있었던 나치 지휘관들에 대한 전범 재판과 비견할 만하다.
도쿄 재판에서 가장 유명했던 피고인은 전쟁 기간에 일본의 수상이었던 히테키 도조 장군이었다.
연합군에 의해 재판을 받은 스물 다섯 명의 피고인 중 도조를 포함한 일곱 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열 다섯 명이 종신형을 받았으며 두 명은 기타 형을 언도받았다.
1971 년 프린스턴 대학은 리처드 미니어에 의해 저술된 "승리자의 정의"라는 책을 출간했다.
미니어는 이 책에서 도쿄 재판이 마치 인민 재판처럼 진행됐다고 주장했다.
즉 판사들이 피고인들을 공정하게 재판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검사가 사건을 기소하며 내세우는 증거 원칙들은 관대하게 해석하고,
같은 원칙을 피고인들에게 적용할 때는 아주 보수적이고 불리하게 해석했으며,
검사가 반박하는 내용이 있으면 다시 자의적으로 검사에게 유리하게 해석했다는 것이다.
그는 "결국 도쿄 전범 재판에 의해 도조는 유죄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지만
법적으로는 그가 무죄라는 것이 내 생각"이라고 쓰고 있다.
그는 또 재판 결과가 그렇게 나온 것은 이 재판이 "전쟁 기간에 일본이 보여준 비열한,
범죄적인 정책과 리더십을 확인하기 위한 정치적 재판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런 관점은 그 당시에도 분명했다. 1949 년 1월 11일 "워싱턴 포스트"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도쿄에서 정의라는 훌륭한 이름이 더럽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일본인들이 수많은 전쟁범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압도적으로 많다.
필리핀의 바탄 대학살이나 끔찍한 생체실험 같은 것이 우선 떠오른 예들이다.
그러나 그런 전쟁범죄에 대해 일본의 지휘관들이 얼마나 책임이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사실 도쿄 전범 재판은 전통적인 전쟁범죄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고,
법적으로 모호한 일본의 침략 행위에 주안점을 두었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통치는 19세기의 미국이나 영국의 식민통치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미니어의 견해는 이렇다. "이 재판은 일종의 도덕극이었다. 즉 2차대전을 발생시킨 한 요소였던
한쪽의 세계관이 옳다는 사실을 재확인한 과정이었다.
다라서 만약 이 세계관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 있다면 도쿄 재판은 도움은커녕 해로울 수도 있다.
즉 우리들을 몽상적인 비현실적 세계에 빠져들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피고인측에 의해 원자폭탄 공격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재판부는 증거를 인정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재판에 참가한 열한 명의 판사 중 세 명은 이 문제에 대해 소수 의견을 표명했다.
필리핀인 자라닐라 판사는 이런 대량 살상무기를 사용한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전쟁을 조기에 종결시키고 연합군의 생명을 구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수단이 목적에 의해 정당화된다면 원자폭탄 사용은 정당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인도 출신 팔 판사는 이런 견해에 동의하지 앟았다.
1차대전시 독일군의 전쟁범죄를 상기시키면서 그는 이렇게 썼다.
전쟁 초기에 황제 빌헬름 2세는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조세프 황제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냈다.
편지 내용은 이랬다. "영혼이 찢어질 듯 아픕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불지르고 칼로 베지않으면 안 됩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학살해야 하며, 단 한 그루의 나무나 집도 서 있게 만들어선 안 됩니다.
이처럼 잔혹하게 응징해야만 타락한 프랑스 녀석들을 정신차리게 할 수 있고
전쟁을 두 달 안에 끝낼 수 있습니다. 인도주의 따위에 매달린다면 전쟁은 몇 년이고 계속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소 모순되긴 하지만 전자의 방법을 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발언은 빌헬름 황제의 무자비한 정책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전쟁 기간을 줄이기 위해 이런 식으로 무차별 살상을 자행하는 행위는 범죄로 생각되었다....
("도대체 이런 모든 일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됐는지 모르겠어. 하나님에 대한 신앙심마저 사라질 지경이야!"
* 1945 년 4월, 히틀러의 벙커(지하 엄폐호)에 공격이 퍼부어지고 베를린에 폭격이 행해지고 있는 동안
히틀러의 연인 에바 브라운이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태평양전쟁의 경우, 위에서 독일의 빌헬름 황제가 말한 내용과 비슷한 행위가
바로 일본에 대한 연합군의 원자폭탄 공격일 것이다.
민간인의 생명과 재산을 무차별로 살상하거나 파괴하는 일이 불법적인 일이라면,
태평양전쟁 당시 연합군의 원자폭탄 공격은 1차대전 때의 독일 호아제나
2차대전 때의 나치스 지휘관들의 명령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이런 일을 피고인들(재판을 받는 일본 지휘관들)의 책임만으로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도쿄 전범 재판이 끝나고 12 년이 지난 후 네덜란드의 뢰링판사는 원자탄 폭격을 유태인 학살에 비교하며,
"2차대전 얘기를 하면 무엇보다도 두 가지가 생각나는데 하나는 독일인들의 유태인 가스 학살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의 원자탄 폭격"이라고 말했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 관여했던 텔포드 테일러 준장의 견해는 이렇다.
"히로시마 폭격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나는 아직까지 나가사키 폭격에 대해서는 그럴듯한 변명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다른 악독한 전쟁범죄들, 예컨대 다차우나, 아우슈비츠나, 트레블랑카에서 저질러진 행위들에 비하면
드레스텐과 나가사키에서의 행위는 악랄성에 있어서 좀 떨어지기 때문에
이를 전쟁범죄로 보는 판단에 의문을 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말하면 그는 나가사키 파괴 행위를 전쟁범죄로 보고 있긴 하지만
적어도 나치스가 저지른 끔찍한 전쟁범죄들 만큼은 나쁘지 않다고 본 것 같다.
시모다 사건의 재판에서 연합군의 원자폭탄 폭격 문제를 직접 다루었던 적이 있다.
1963 년 12월 7일 도쿄 지방법원에서 실시된 이 재판에서 법원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두 지역의 파괴행위가 모두 사실상 불법 행위였다고 판결했다.
미국의 지휘관들이 전쟁범죄에 대해 유죄이든 무죄이든 간에,
전쟁범죄를 따질 적에는 일단 전쟁에서 이긴 측이 유리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패전국 지휘관들은 재판을 받고 처벌을 받지만 승전국의 지휘들은 처벌을 면제받는다.
만약 전쟁범죄로 기소된 미국 지휘관들이 국제법에서 요구하는 대로 일본인들에 의해 재판을 받았다면
재판 결과가 어떻게 나왔을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국제법의 문제점은 이런 데 있다.
세계정부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하에서 누가 법을 해석하고, 재판을 받아야 될 사람과
그렇지 않을 사람을 결정하며, 기소당한 국가에게 굴복을 강요할 것인가?
강제로 굴복을 강요당하지 않으면 어떤 나라도 다른 나라가 자기 나라를 심판하는 일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특히 미국에 해당되는 얘기다. 패전 상황이 아니고서는 미국이나 미국의 지도자들이
다른 누군가의 심판에 굴복하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미국 자신이 국제법을 잘 따라야만 다른 나라에게 국제법을 따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태인 대학살이나 캄보디아 크메르 루주의 인종 학살 같은 문제는 어떻게 되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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