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은 .. 비가 오는 날이었다. 그냥 비가 오는 정도가 아니었다. 귀가 멍해질 정도로 후두둑 소리를 내며, 이렇게 가만히 넋놓고 있는 사이에 금방이라도 목 언저리까지 물이 차올라 오는 것이 아닐까 걱정 될 정도로 장대비가 '퍼붓고' 있었다.
어두운 회색빛 하늘은 이 도시의 모든 곳에 무거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아직 오후 3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도 거리는 초저녁처럼 어두워져 있었다. 검은 아스팔트 위로 가끔 헤드라이트를 밝힌 자동차 몇대가 뿌연 물보라를 일으키며 바쁘게 사라져 갔다.
도시 동쪽의 야트막한 언덕 중턱에 자리한 여자고등학교의 창문들에서는 창백한 형광등 불빛이 위태롭게 가느다란 팔을 휘젓고 있었다.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일찍부터 간판의 조명을 밝힌 몇몇 상점이 아니었더라면, 마치 거리 전체가 해저 밑으로 가라앉아 완전히 호흡을 멈추어 버린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루시는 도시 서쪽의 공터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 그 공터에 고양이를 놓아주고 올 생각이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검은 헝겊 가방 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우산을 조심스럽게 낮추어 고쳐 잡고 핸드폰에 '보호상태'로 저장되어 있던 문자메시지 13개를 하나씩 읽고, 하나씩 지웠다. 그리고는 마치 무심결에 그러는 것처럼 헝겊가방을 겉에서 살짝 더듬어 그 안에서 잠들어 있는 동물의 뭉클한 감촉과 온기를 확인해 보았다.
한참을 더 망설인 끝에 그녀는 '단축번호 1번' 에 저장되어 있는 전화번호를 검색해, 일부러 숫자 하나씩을 확인해 가며 꾹꾹 눌렀다.
===켄, 나 지금 고양이를 놓아주러 가는 길이야. 비가 굉장하지? 꼭 바다의 밑바닥을 걷고 있는 느낌이야 .... 응? 그래? 신기하네. 여기는 이렇게 폭우가 쏟아지는데 거기는 맑다니. ..... 응? 고양이? 내가 고양이를 키우고 있는지 몰랐었어? 이름은 '카게시마'라고 해. '그림자섬' 이라는 뜻이지. 응? 잘 안들려? 여보세요? .. 안되겠어, 빗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켄, 내가 다시 전화할게. (탁)
===(여보세요? 조용한데로 들어왔어. 이제 잘 들려? 실은 켄에게 몇 가지 꼭 할 말이 있었어. 아, 지금 집이라구? ... 그럼 오래 통화 못하겠네. 일단 내가 하는 말을 들어봐. 실은.. 나 요즘 좀 불안한 상태야. 단순하게 '불안한 상태' 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사실은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건지 나 자신도 잘 모르겠어. 내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이런 상태일 때는 되도록 아무와도 연락하지 말고, 아무에게도 내 모습을 보이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라는 거야.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이런 상태일 때일수록 나는 많은 사람에게 쓸데없이 자주 문자메시지를 보내거나,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자꾸 잡게 되고, 약속을 잡아 놓고 나서 내가 지금 아무도 만날 수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는 약속을 취소하곤 해. 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 되어버리는 것인지 나도 잘 모르겠어.
이것은 나 자신이 아니다, 이것은 나 자신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 이 상태로는 누구와도 연락을 하거나 만나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나 자신이 아닌 사람이 나 자신의 행세를 하면서 누군가를 만나고 돌아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난 이런 상태에 빠질 때일수록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은 소망이 간절해져. 누군가와 밤새도록 통화하고 싶어.
그리고 켄에게 내 지금의 상태를 전부 말하고, 날 도와달라고 하고 싶어. 아니, 도와주지 못해도 좋아. 그저 밤새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내 지금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고, 내가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술을 마시고 울면서 매달리더라도 그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 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었으면,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해 볼 뿐이야.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돼. 그건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야.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누군가에게 기대게 되는 것이 난 무서워. 평화로운 일상을 즐기고 있는 내 주변의 사람들을 그런 식으로 괴롭힐 수는 없어. 나조차도 나 자신이 너무나 무서우니까. 이건 완전히 '나 자신의 문제' 니까, 누구도 이해 할 수 없는 문제이고, 해결해 주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해.
그리고 더 혼란스러운 것은 이렇게 말하고 있으면서도 내가 지금 무엇을 얘기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고, 무언가 지어서는 안 될 큰 죄를 짓고 있는 기분이야. 당신에게 기대기 시작하면, 당신에게 집착하게 될 것이고, 당신에게 큰 피해를 주게 될 것만 같아. 나는 너무 무서워져.
이런 나 자신이 도저히 용납이 안 돼. 나는 지금 누구도 만날 수 없어. 가끔씩 전화로 더듬거리며 내가 하고 있는 얘기인지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엉뚱한 이야기를 지껄이는 것도 너무 무서워져. 그리고 이런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말들을 늘어놓아서 내 주변의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도 너무 싫어. 이제 정말 지쳤어.
당분간은 나에게 연락이 되지 않을지도 모르겠어. 나 잠시 이 곳을 떠나고 싶어. 너무 걱정하지는 마. 그리고 지금의 이 혼란스러운 모습이 내 모습이야. 제발 날 마음껏 욕해줘. 역시 우리는 서로에 대해 조금 더 알아가는 과정히 필요했던 거였는데. 당신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어.. )
하지만 루시는 결국 그 말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켄에게 전화를 거는 대신, 핸드폰의 배터리를 분리하여 근처의 커다란 쓰레기통 속으로 내던져 버렸다. 누군가가 방금 버린 듯한 담배꽁초에서 희미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곧 세찬 빗줄기가 그 연기를 목졸라버렸다.
루시가 도시 서쪽의 공터에 도착했을 때 주변은 더 어두워져 있었다. 바람이 불어오는 쪽의 하늘에서는 이제까지 있었던 것보다 한층 두껍고 무거워 보이는 비구름떼가 살아 있는 짐승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구름은 어두운 회색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누리끼리한 초록색에 가까웠는데, 그 불길한 시체색깔의 구름덩어리들이 바람을 타고 빠른 속도로 이 도시의 천장을 덮어 가고 있었다.
루시는 공터 안으로 사분의 일 정도 들어온 지점에서 멈춰 섰다. 그녀는 잠시 고개를 들어 구름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패한 초록색의 구름덩어리들이 움틀거리며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그 곳에 그렇게 서서, 무슨 의식이라도 치르는 것처럼 그 구름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그녀의 눈빛에서 '감정' 이라고 부를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썰물이 빠져 나가듯 서서히 사라졌다. 사랑, 기대, 미움, 슬픔, 증오, 희망, 자부심, 믿음, 절망, 기쁨, 질투, 욕망 ... 모든 것이.
그리고 나서 그녀는 검은 헝겊 가방 속에서 고양이를 꺼냈다.
'카게시마, 잘가'
바닥에 내려진 고양이는 이 곳이 어디인지 확인하려고도 하지 않고, 주인을 돌아보려고도 하지 않고, 울음소리 한 번 내지 않은 채 공터의 서쪽 끝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집에 돌아온 것은 오후 6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하지 무렵이었기 때문에 평소같았으면 아직 환한 대낮이었겠지만 집 안은 이미 캄캄해져 있었다. 굵은 빗줄기가 아스팔트 노면을 때리는 소리 사이사이로 사나운 바람소리와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루시는 곧장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가 목욕을 하기 시작했다. 몸의 구석구석에 듬뿍 비누칠을 하고, 뜨거운 물로 헹구어 내고, 다시 비누칠을 하고 헹구어 내는 과정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그 모습은 몸의 더러움을 씻는다기보다는 차라리 22년동안 자신의 외피에 달라붙은 감정의 앙금같은 것들을 (그런 것이 있다고 한다면) 감자 껍질 벗겨내듯이 '벗겨내려고' 애쓰고 있는 장면처럼 보였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들여 목욕을 하고 난 후에 그녀는 벌거벗은채로 욕실을 나와 그녀의 방에 세워져 있는 커다란 전신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그 앞에 서서 오랫동안 그녀 자신의 몸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곳에서 잃어버린 귀중한 물건이라도 찾고 있는 것처럼 그녀는 아주 오랫동안 거울 속을 찬찬히 들여다 보았다.
그녀 자신의 텅 빈 눈동자 저 건너편에 아직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감정의 찌꺼기들, 그녀 자신의 몸에 새겨져 있는 그 어떤 이질적인 흔적을 찾아 내려는 것처럼. 처음 한동안은 그대로 선 채로, 그리고 잠시 후에는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서,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자신의 몸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쯤이나 지났을까, 그녀는 약간의 현기증을 느끼면서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부엌의 찬장에서 검은색 대형 쓰레기봉투를 꺼내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오래된 편지를 모아 놓은 신발상자와 여러권의 일기장과 수첩들이 쓰레기 봉투 안으로 들어갔다. 인형과 장식품과 사탕바구니가 쓰레기봉투 안으로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거울 앞을 굴러다니던 감정의 마지막 찌꺼기들이 쓰레기봉투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쓰레기봉투의 입구를 힘차게 묶었다.
루시는 다시 욕실로 들어가서 마지막으로 샤워를 하고, 피가 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여러번 얼굴을 씻었다. 옷장에서 새로 세탁한 빳빳한 속옷을 꺼내 입고 검은색 반팔 블라우스와 검은색의 발목 바로 위까지 오는 주름스커트를 꺼내 입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거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느 새 약해진 빗줄기가 창문을 조용히 두드리고 있었다. 똑- 똑- 똑-
똑- 똑- 똑-
빗소리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집 안에 있는 사람을 불러내기 위해 문을 두드린다기 보다는, 마치 문의 재질을 시험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손톱 끝으로 톡톡 건드려보는 듯한 느낌의 소리였다.
루시는 조심스레 문 쪽으로 다가가 방범용 렌즈로 밖을 살펴보았지만 그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에 다시 현관문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똑- 똑- 똑- 이 아니었다. 가느다란 손톱 끝으로 긁어대는 듯한 끼익 끼익 하는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루시는 현관문에 달려 있는 안전 고리를 걸어놓은 채로 문을 약간 열어보았다.
그 곳에는 몸집이 작은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었다.
카게시마는 아니었다. 카게시마는 훨씬 몸집이 컸으며, 갈색 바탕에 검은 줄무늬가 있는 고양이었다. 그런데 이 고양이는 머리에서 발 끝까지 완전히 새까맣다. 얼룩 하나 없다.
그런데 고양이를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분명히 이 고양이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는 확신이 생기기 시작했다. 루시는 문의 안전 장치를 풀고, 비에 흠뻑 젖은 고양이를 안아올려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더러워진 털을 손질해 주고 보송보송하게 말려 주자마자 이 검은고양이는 곧장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혼자서 폭풍우 속을 헤매고 돌아다니느라 꽤 피곤했을 것이다. 바싹 말라 있는 것을 보면 오랫동안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루시는 잠들어 있는 고양이의 얼굴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분명히 이 고양이를 알고 있다. 도대체 나는 이 고양이를 어디에서 보았었던 것일까? 겨우 서쪽의 공터에까지 가서 카게시마를 놓아주었는데, 어째서 또 이런 고양이가 우리 집으로 찾아온 것일까?
고양이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으려니, 어쩐지 고양이의 실체가 현실감을 잃어가고 점점 일종의 홀로그램같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고양이는 그 곳에 누워 있었지만, 그 공간은 텅 비어 있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에 루시의 의식 또한 몽롱한 잠의 세계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검은 고양이가 예의바른 몸짓으로 꾸벅 인사를 했다.
'넌 도대체 누구지? 어디에서 온거야? 어째서 하필이면 카게시마를 놓아준 날에 내 앞에 나타난거지? 난 이제 고양이 같은 것을 키울 여유는 없어. 나는 오늘 밤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모두의 앞에서 사라지려고 했었단 말이다. 나 스스로 '루시'의 장례식을 치르고 어딘가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가서 텅 빈 껍데기로서의 삶을 살려고 했었단 말이야. 그것이 나를 위한 인생이야. 이제는 나도 어쩔 수가 없다고!'
'......' 고양이가 텅빈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D 였다. D !어째서 진작에 알아보지 못했을까?
'넌... D 잖아!! 그렇게 고양이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서 미처 알아보지 못했어.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어떻게 하다가 고양이가 되 버린거지? 우리 집은 어떻게 알아냈어? ... 나를 기억하고 있었던 거야? .. 저어.. 미안한데 나는 너를 키울 수 없어. 방금도 말했지만 나는 이제 빈 껍데기가 되 버렸거든. '
'...상관없어요. 저는 분명히 D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D가 아닙니다.' 고양이는 소리도 없이 살며시 몸을 일으켜,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는 사람처럼 주변을 몇 차례 서성거리다가 도로 제자리에 웅크리고 앉았다.
'저는 실체로서의 D가 아니거든요. 하지만 실체로서의 D와 전혀 동떨어진 존재도 아니에요. 저는 실체로서의 D가 당신 내부에 투영되어 당신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가상의 D입니다. 따라서 당신이 저를 키운다고 해서 실체의 D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없어요.
실체로서의 D가 이 땅 위에 두 다리를 디디고 서 있는 존재라면, 저는 당신의 의식의 하늘위에 실체의 D가 반사되어 맺힌 허상같은 존재예요. 일종의 신기루 같은 것이지요. 안심하세요. 당신은 지금 스스로가 텅 빈 껍데기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 인간은 텅 빈 껍데기가 될 수는 없어요.
당신은 그저 여러 가지가 무서울 뿐이겠지요. 당신 내부의 혼란이 당신 주변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무서운 것이고, 누군가가 그 피해를 무릅쓰고 당신 곁에 있어준다고 해도 당신은 그 사람이 언제 떠날까를 끊임없이 두려워 하며 사는 것이 무서운 것이잖아요.
하지만 안심하세요. 저는 D인 동시에 D가 아닙니다. 당신의 의식 속에서 재조직된 D의 영상일 뿐이예요. 저는 당신을 떠나지 않습니다. 당신이 저에게 피해를 줄 수도 없습니다. 제가 당신에게 상처를 줄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당신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당신의 일부거든요. 당신의 의식속에서 나온 존재이죠. 저는 그림자이고, 신기루이고, 환상입니다. 그것은 희미하지만 영원히 사라지지 않아요 ... '
루시가 눈을 떴을 때 창문 밖은 순수한 파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새벽의 그 순수한 파란 빛은 태양의 빛과도 달빛과도 다르다. 마치 우주의 어딘가에 순수한 파란 연료를 태워'순수한 파란빛'을 내는 순수한 파란 행성이 있어서, 그 행성이 새벽녘의 그 찰나같은 짧은 시간 동안에만 이 지구에 얼굴을 내밀어 그 순수한 파란 물감을 잠깐동안만 풀어놓고 급히 사라지는 것 같다.
모두가 깊이 잠들어 있는 시간에만, 그것도 아주 잠깐동안만 나타나기 때문에 이 지구상의 누구도 아직 그 '순수한파란행성'의 존재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루시는 하얀 여름용 커튼을 완전히 젖히고, 창문을 활짝 열어 그 파란 공기를 폐 속 깊이 들이마셨다. 텅 빈 껍질 속 깊숙히까지 '순수한 파란행성'의 공기로 가득 찼다. 그녀는 검은고양이를 품 속으로 꼬옥 안아올리고, 검은 헝겊 가방 속에 서너권의 책과 고양이 사료를 잔뜩 채워넣은 뒤에, 가방과 고양이를 각각 옆구리에 끼고 '순수한 파란 행성'으로 통해 있는 계단 위로 뛰어올라갔다.
열린 창문 바깥으로 하얀 여름용 커튼의 끝자락이 빠져나가 바람이 불때마다 가볍게 펄럭거리고 있었다. 그 '순수한 파란빛'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새 사라져 버리고 여느때의 태양빛이 조금씩 작은 도시의 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 마리아나 해구 - 북마리아나 제도의 동쪽을 따라 남북방향으로 뻗어 있는 해구. 세계에서 가장 깊은 비티아스 해연(1만 1034 m)과 챌린저 해연(1만 863 m)이 있다.
* 세미라미스 공중정원 - BC 500년경 신(新)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왕비 아미티스를 위하여 건설한 정원.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서, 실제로 공중에 떠있는 것이 아니라 높이 솟아있다는 뜻이다. 지구라트에 연속된 계단식 테라스로 된 노대(露臺)에 성토하여 수목을 심어놓아 마치 삼림으로 뒤덮인 작은 산과 같았다고 한다. 유프라테스 강물을 펌프로 끌어올려 물을 댔다고 한다.
첫댓글 좋으네요..잘 읽었습니다. 읽는 동안 좀 괴롭긴 했지만. 그래도 이 글을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name' 님이 읽기 편하게 수정해 주셨어요. 감사합니다. ^-^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입니다. ^^*
글을 읽다보니 스스로를 텅 빈 껍데기로 만들어버리고 살아감을 꿈꾸던 사내가 생각나는군요.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부탁드리겠습니다.
앗, 내가 아는 사람하고 비슷하게 쓰신다..^^;;
순정만화의 이미지를 지나치게 쫓지는 않았나요. 작가로써의 푸념이 많이 담긴 것 같아요. 주제의식도 빈약해 보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