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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8일 [연중 제20주일]
요한 6,51-58
성체와 에너지 보존의 법칙
오늘 복음도 예수님께서 성체성사의 신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하느님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주셔야 하는 분임을 이해하지 못할까요?
당신을 따라온 이들은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라며 말다툼합니다.
하느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법칙 중 ‘열역학 제1법칙,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믿어야 합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란 “에너지는 생성되거나 소멸되지 않으며, 단지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변환된다.”입니다.
이 법칙을 받아들인다면 사실 빅뱅으로 우주가 생겨나거나 무생물에서 생물이 생겨나고 또 하등동물에서 고등동물로 진화한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모든 존재는 에너지입니다.
어떻게 에너지가 없었는데 온 우주라고 하는 어마한 에너지 체계가 저절로 존재할 수 있을까요? 생명체도 무생물보다는 높은 에너지입니다.
생명체가 죽어서 에너지가 빠져나가면 무생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등동물도 하등 동물보다 에너지 체계가 높습니다.
그래서 고등동물이 세포가 분해되는 건 있어도 무성생식을 하는 단세포동물이 양성생식을 하는 복잡한 체계를 가진 동물로 저절로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위반됩니다.
아무리 진화론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이 모든 게
확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음도 알게 합니다.
그런데 육체만 에너지가 필요할까요? 우리는 정신적인 에너지도 에너지라고 말합니다.
사랑도 에너지입니다.
사랑할 사람이 없고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죽고 싶어집니다.
에너지가 다 떨어진 것입니다.
특별히 부모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이들은 자신 안에 사랑을 간직하지 못한 채 언제나 배고프게 살아갑니다.
톨스토이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부모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자랐습니다.
두 분 다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사랑의 배고픔을 쾌락으로 채우려 했으나 채워질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자 50세가 넘어 자살 시도까지 합니다.
이때 그는 만들어진 것은 창조자에게서만 에너지를 받을 수 있음을 알고 그리스도께 기도하고 그분이 원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는 “내가 진정으로 따르는 신앙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존재가 존재를 낳고 생명이 생명을 낳으며 사랑이 사랑을 낳는다는 말을 뒷받침합니다.
우리의 생명은 누군가 생명의 희생으로 받은 생명입니다.
보리스 콘펠드 박사는 러시아에 살던 유대인 의사였습니다.
그는 거기서 의사로서 죄수들이 병을 핑계하지 않고 죽도록 일하다가 일터에서 죽게 하는 일과, 난치의 환자는 목숨을 연장하지 말고 죽도록 하여 경제를 낭비하지 말라는 명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받아들였고 한 장암 환자를 치료해줍니다.
암 환자는 “왜 당신은 이렇게 위험한 시도를 하면서 나를 살리려 합니까, 당신은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까?” 라는 질문을 의사 보리스에게 던집니다.
보리스는 “괜찮아요. 염려 마셔요.
이미 당신과 나를 살리고자 죽으신 분이 계시거든요.”라고 대답합니다.
“도대체 그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조용히 미소를 흘리며 의사 보리스는 “그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그 후 의사 보리스는 이 사람을 살린 것이 알려져 밤에 습격받아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의 죽음을 보며 솔제니친은 땅에 엎디어 흐느끼며 “보리스, 알겠습니다.
이제는 저도 저의 최선을 바쳐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그리고 저도 그분의 이름을 전하겠습니다.”
라는 고백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솔제니친은 197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합니다.
에너지도 저절로 생겨날 수 없는 것처럼, 사랑도 생명도 받아야 합니다.
톨스토이는 “뉘우치고 회개한다는 말은 모든 사람에게 자신이 악하며 약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또한 자기가 지은 모든 잘못된 행위를 인정하고 영혼을 깨끗이 함으로써 신성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에너지는 저절로 생성되거나 저절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확실한 죽음 앞에서 생명력이 풍부한 사람이 됩시다.
톨스토이는 마지막에 신상에 귀의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18일 [연중 제20주일]
복음: 요한 6,51-58
그냥 흘려보내는 시간이 아니라 충만한 의미로 가득한 시간!
오늘 우리는 참으로 은혜로운 주님 말씀을 접합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찾고 갈구하던 주님께서 멀리 다른 하늘 아래 계시는 것이 아니랍니다.
아주 가까이 지척에 현존하신답니다.
놀랍게도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 안에 주님께서 계신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 56)
더 은혜로운 일이 한가지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이 언제나 우리 안에 머물도록 하기 위한 방법이 너무나 쉽다는 것입니다.
엄청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미사에 참석하면 됩니다.
지극정성으로 영성체를 하면 됩니다.
주님께서 제정하신 성체성사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참여로 인해 나는 주님 안에 있고,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시게 됩니다.
그렇다면 저같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성체성사에 참여하긴 하는데, 도통 주님 현존 체험보다는 부재 체험으로 기우는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관건은 타성에 빠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저 의무요 습관처럼, 후딱 해치워야 할 숙제처럼 성체성사를 대한다면, 거기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마치 돼지 목에 걸린 진주 목거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는 타성에 빠지지 않기 위한 좋은 제안을 몇 가지 건네십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시간을 잘 쓰랍니다.
그냥 흘려보내는 시간이 아니라 충만한 의미로 가득한 금쪽같은 시간을 잘 사용하랍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미사 입당송의 한 말씀이 가슴에 사무칩니다.
“당신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사옵니다.”
오늘 우리의 매 시간들이 하릴없이 무의미하게 지나가는 시간이 아니라 주님 뜨락에서 지내는
거룩한 시간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또 한 가지 권고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로 서로 화답하고,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그분을 찬양하십시오.”
우리의 하루 하루는 우리를 위한 주님의 놀라운 업적과 자비와 사랑에 대한 감사의 찬미가로
표현되어야 마땅합니다.
이웃을 향한 험담과 불평불만을 멈춰야 하겠습니다.
지난 시절 어두웠던 상처는 자비하신 주님께 맡겨드려야 하겠습니다.
내일에 대한 근심과 걱정도 모두 섭리의 손길에 맡겨드려야 하겠습니다.
그저 오늘 주님 현존 안에 기쁨의 찬가를 불러야 하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0주일 강론>
(2024. 8. 18.)(요한 6,51-58)
<예수님과 하나가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3ㄴ-58).”
1) 여기서 ‘먹는다.’는 말은, ‘믿는다.’는 말을 아주 강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말은, 먹는다는 말을 더욱 강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일’을 ‘먹는 일’로 표현하신 것은,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또 믿는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 당신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야 온전히 믿는 믿음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신앙이란, 믿는다고 생각만 하거나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으로 그쳐도 되는 일이 아니라, ‘믿는 대로 사는 일’입니다.
<‘온 삶’을 다 바쳐서 믿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은 곧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앙과 생활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2) 예수님께서는, 여기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는 것만 강조하셨는데, 나중에 최후의 만찬 때 성체성사를 세우셔서 신앙인들이 당신의 살과 피를 실제로 받아먹을 수 있도록 구체적인 방법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모두 이 잔을 마셔라.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태 26,26-28)”
성체성사는 ‘영적인 일’이면서 동시에 ‘실제적인 일’입니다.
<‘상징적인 일’이면서 동시에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영성체는 예수님의 ‘생명력’을 받아먹는 ‘영적인 일’이면서 동시에 우리 가운데에 살아 계시는 예수님을 받아먹어서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실제적인 일’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은 ‘영적인 생활’이면서 동시에 ‘실제적인 생활’입니다.
<온 삶으로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지 않는 사람의 신앙생활은 취미생활로 전락하거나, 아니면 기복신앙으로 변질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주님이시며 메시아이신 분으로 믿는다고 해도, 예수님께 현세적인 소원을 비는 것으로 그치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나도 희망해야 하고, 예수님의 기쁨과 슬픔이 곧 나의 기쁨과 슬픔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그것은 바로 나의 구원이고,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쁨은 내가 구원받는 것을 보는 것이고, 예수님의 슬픔은 내가 멸망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3) ‘살과 피’에 관한 예수님 말씀은 단순한 초대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당신을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멸망을 경고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53절의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라는 말씀이 바로 ‘경고 말씀’인데,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너희는 멸망한다.”입니다.
당신을 믿기를 거부하고, 당신과 하나 되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멸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영원한 멸망입니다.>
멸망을 피하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
반대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고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라는 말씀을, 시간 순서대로 다시 정리하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나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인데, 표현되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서게 되고, 마지막 날에 그 생명이 완성된다.”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이 지금은 너무 멀게 느껴지고, 너무 막연하게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덕분에 ‘인생의 허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 이미 영원한 생명이 시작된 것입니다.
신앙인의 신앙여정은 ‘이미 시작된’ 영원한 생명의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순례 여행입니다.>
4)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은 당신만이 주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라는 말씀은, 성체성사 때에 일어나는 일을 설명하신 말씀인데, 영성체를 통해서 우리가 실제로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고,
당신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요한 15,4)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과의 일치 없이는 영원한 생명도 없다는 뜻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