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22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요한 10,31-42
'하느님의 일'은 정확히 어떤 일을 말하는가?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대등하게 여기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우리도 그리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당신이 아버지처럼 하느님이 되시고 우리도 하느님임을 믿게 하는 것이라 하십니다.
이는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이 일을 믿으면 당신이 아버지한테서 왔음을 믿게 되리라고 하십니다.
엄마가 엄마로 믿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떤 일을 해서가 아니라 이미 우리는 본성상
인간이 되었음을 믿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통제를 심하게 하면서 무언가를 해야만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 존재라고 믿게 한다면 아이들은 엄마를 엄마로 인정할 수 없어집니다.
엄마는 아기가 탄생했을 때부터 온전한 인간이 되었다고 믿게 해야 합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 182회에 “‘엄마라고? 내 엄마 아니야’ 망상에 빠진 금쪽이는 가족의 존재까지
의심 중”이란 사연이 나왔습니다.
5학년 때까지 인기도 많고 6학년 반장 전까지 흠잡을 게 없던 모범생 아이가 갑자기 환청과 망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차를 탈 수도 없고 가족을 봐도 도망 다니고 기억력도 3~4주 없었습니다.
틱 증상도 보이고 있습니다.
심지어 가족에게 욕하며 살인자라고까지 말합니다.
병원에 가면서 핸들을 꺾고 탈출하려고까지 하였습니다.
아이는 울다가 웃다가 이상한 소리를 반복하기도 합니다.
엘리베이터에 타서 계속 열었다 닫기를 하면서 밤낮없이 꼬박 6일을 자지 않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밤에 나가서 막 걷다가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 왜 아무도 없을까?”라고 묻기도 합니다.
아이가 정말 엄마 말대로 귀신에 씌운 걸까요? 둘의 대화를 들어봅시다.
“내 엄마를 왜 죽였냐고!”
“기연아 약 먹어”
이 말에서 엄마는 아들이 인간 이하의 수준, 곧 약을 먹어야 정상이 되는 존재로 여기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기연이는 의심의 눈초리로 이렇게 묻습니다.
“... 엄마라고?”
“어?”
“그럼 과거에 뭐 했었는지 말해봐.”
“그럼 기연이 과거에 뭐 했었는지 말해봐.”
“‘뛰어, 뛰어, 뛰어, 뛰어, 뛰어’ 했던 거 기억나? 나 어렸을 때!”
“어, 엄마가 동영상 찍어줬잖아.”
“그때 같이 누구랑 있었지?”
엄마는 바로 대답합니다.
그런데 아이는 단호하게 결론을 내립니다.
“아니야. 내 엄마 아니야!”
기연이는 당연히 아빠도 의심합니다.
형도 의심합니다.
밥을 먹다가 말합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밥 먹기 힘들다.
진짜 맛없어. 예전에 그 맛이 아니잖아. 다 이상해.
다 이상하다고. 나도 이상하게 보이지 엄마?”
엄마가 대답을 망설이자 “왜 대답이 늦어? 아빠, 내가 이상하게 보여?”라고 묻습니다.
“아빤 네가 좀 이상하게 보여.”
“그래? 나도 아빠 이상하게 보이고 형도 이상하게 보이고 엄마도 이상하게 보여.”
사실 아이는 엄마에게 복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이는 엄마에게 자기 마음을 표현해 본 적이
없습니다.
엄마에게 날이 서 있습니다.
자기에게 섭섭하게 했던 것을 그대로 합니다.
엄마가 자기를 온전한 인간으로 취급해주지 않았으니 자신도 엄마에게 그렇게 대하겠다는 것입니다.
엄마는 아이의 문제가 아이 탓이라고 여깁니다. 이미 온전한 인간이 되었다고 믿어주지 않습니다.
저는 다행히 어머니께서 “엄마는 일곱 살까지만 키워주는 거야. 이제부터는 다쳐도 네가 잘못해서
다친 거고, 잘해도 네가 잘해서 잘 된 거야!”라고 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 일곱 살에 이미 온전한 성인으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때는 좀 섭섭하면서도 자존감이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어머니는 아이를 지독히도 통제하려 들며 뭐 말만 하면 “엄마는 네가 심리적으로 많이 아파 보여!”라고 합니다.
엄마는 어렸을 때 말도 못 하고 감정 표현도 못 하고 자기가 미운 아이였습니다.
늘 외로운 아이였습니다.
아이는 무서웠습니다.
사랑받지 못했었습니다.
엄마가 먼저 자존감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미 인간이 되어 저절로 클 수 있는 존재라고 믿게 해야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줄 때가 그랬습니다.
아기들이 비록 네 발로 걷더라도 엄마들은 언젠가 당연히 두 발로 걸을 것이라고 믿고 의심하지 않습니다.
또 말을 못하고 옹알이만 해도 언젠가는 저절로 말을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렇게 믿어줘야 아이들이 불안하지 않습니다. 불안하면 세.육.마.에 빠져 나뿐인 아이, 곧 나쁜 아이가 됩니다.
이렇게 해 주는 것이 곧 어머니의 일이고 그것이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아이는 엄마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엄마, 나 믿어줘서 고마워. 평생 믿어줘!”
누군가를 창조자로 믿게 하려면 그 누군가를 에덴동산에 살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그렇게 하셨고 가톨릭교회를 그렇게 하라고 파견하셨습니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성체만 영하면 이미 주님의 자녀이기에 우리는 선악과를 바치고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만 하면 되는 존재라고 알려줘야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통해 사람들은 우리가 창조자로부터 파견된 존재임을 저절로 믿게 될 것입니다.
불안이 아니라 평화를 주는 존재만이 아버지에게서 파견된 어머니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22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복음: 요한 10,31-42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요즘 계속 봉독되는 복음은 예수님과 유다인들 사이에서 벌어진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논란입니다.
이제 지상에 머무실 날은 그리 오래 남지 않았는데, 끝까지 당신을 주님으로 고백하기는커녕 무시하고 죽이려고 돌까지 손에 드는 동족을 향한 예수님의 비애감은 혹독했을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9월 중순에서 10월 중순 사이에 초막절 축제를 성대하게 벌이는데...이 축제 후에
또 하나의 축제가 남아있습니다.
11월 중순부터 12월 중순까지 이어지는 봉헌 축제입니다.
점령군들로 인해 심각하게 훼손된 예루살렘 성전을 유다 마카베오가 독립 항쟁을 벌여 탈환한 뒤 실시된 성전 정화작업의 결실로 새롭게 건립한 제단을 하느님께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축제입니다.
존경하는 송봉모 토마스 모어 신부님 표현에 따르면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던 때는 겨울이었는데, 예수님의 생애에서 겨울이 다가오고 있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유다 지도자들의 불신과 거부의 찬바람이 이제는 파국을 향해 치달아 내년 봄 파스카에는 예수님이 돌아가실 것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의 아레오파고스, 즉 토론의 장소라고 할수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자 유다인들은 즉시 예수님을 둘러쌌습니다.
그들의 의도는 오직 하나! 예수님의 입에서 나는 메시아다라는 말을 끌어내어 로마에 고발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적 정체를 말씀하실 때마다 귀를 막고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신적 정체에 대해 처음부터 무시하고 불신한 것입니다.(송봉모, 요한복음 산책. 제3권, 바오로딸 참조)
유다인들과의 논쟁 중에 예수님께서는 거듭거듭 밝히셨습니다.
당신은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어 이 세상에 오신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이다.
아버지와 당신은 하나이다.
나를 보는 것은 곧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다인들은 끝끝내 예수님을 거부하고 무시하고 손에 돌까지 들었습니다.
눈앞에까지 다가온 구원과 영생을 발로 차버렸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저 그런 예언자 중에 한 사람입니까?
나와는 전혀 무관한 역사 속의 한 인물입니까?
나의 창조주요 구원자,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십니까?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3월22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복음: 요한 10,31-42: 요르단강 건너편으로 가시어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32절).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33절) 그들은 그분이 하느님이심은 알지 못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에 인간이었다가 나중에 하느님이 된 분이 아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하느님이셨고, 나중에 인간이 되셨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것은 우리 인간을 당신과 같이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말씀에 참여함으로써 하느님과 같이 되고, 아들과의 친교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들이 된다.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하고 말할 수 있느냐?”(35-36절). 사람들이 하느님과 같이 될 수 있도록 하느님의 말씀이 세상에 오셨다면, 하느님과 함께 계시는 바로 그 하느님의 말씀이 하느님이 아닌 다른 무엇일 수 있는가?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인간이 신(神)이 된다면, 그들이 참여하는 그분이 하느님이 아닐 수 있는가? 우리는 빛에 다가가 빛을 받고 하느님의 자녀들이 된다. 그러나 빛에서 물러나면 어둠 속에 있는 자가 된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신들이 되게 한다면 하느님의 말씀은 당연히 하느님이시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37-38절)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모든 일은 바로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이었으며 그분의 뜻을 온전히 이루신 것이었다. 그분이 하신 일들은 모두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이었다. 그분이 아버지의 일들을 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증거이다. 아들의 일은 아버지의 일임을 알아야 한다. 유다인들은 다시 예수님을 잡으려 하였지만,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 “요르단 강 건너편, 요한이 전에 세례를 주던 곳으로 물러가시어 그곳에 머무르셨다.”(40절). 예수님께서 유다를 떠나 다른 민족들에게로 가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다인들에게서 다른 민족들로 건너가셨고, “많은 사람이 그분께 몰려와” 그리스도에 관하여 한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다.”(41-42절 참조) 우리도 항상 아버지의 일을 살면서 그분의 사랑받는 자녀들이 되어야 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