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다니는 학교 일에 관심을 갖고 있는 대학생은 몇이나 될까? 요즘 대학생, 대학 문화
는 개인주의로 흐르고 있다.
한해가 끝나가는 11월 무렵이면 캠퍼스에서 볼 수 있는 광경이 있다. 아침 일찍 학교 정문
에서 인사를 하는 무리. 정장을 쫙 빼입고 90도로 고개 숙여 인사하며 “열심히 하겠습니
다” “기호 ○번, 꼭 뽑아주세요” “약속은 꼭 지키겠습니다”라고 외쳐대는 모습들. 어느
대학이든 이 시기가 되면 ‘총학생회 정.부회장’선거로 떠들썩하다.
이들은 벌써 다음해를 준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으레 이런 행사가 있을 때면 학생들 사이에
서 이번엔 누가 나오지 하는 약간의 술렁임과 함께 관심을 보이는 게 당연할텐데 언제부터
인지 정문에서 누가 인사를 하건 말건, 수업 중간에 누가 들어와 자기를 소개하면서 고래고
래 소리를 지르건 말건 수업시간만 채워 주면 좋다는 생각이 강의실을 가득 채우고 있다.
한 예로 어느 대학 총학생회 선거에서는 수업시간 한시간 내내 선거 참모들을 궁지에 몰아
넣는 질문으로 시간을 때우더니 고작 투표는 3분의 1정도밖에 안했다고 한다. 그것도 선거
참모들이 학생 개개인을 포섭한 끝에 나온 결과일 것이다. 언제 투표가 있는지도 모르고 누
가 나오는지도 모르는 것은 학교에 대한 학생들의 주권을 버리는 일일 뿐 아니라 선거 결과
에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대학은 학생 대부분이 성인이 돼 처음으로 맞이하는 작은 사회공간이다. 그러므로 학생회장
선거 투표는 국민투표로, 학생회장은 작은 대통령으로 비유할 수 있다. 이런 학생들이 흔히
우리나라를 원망하거나 정치를 술안주로 삼는다는 것은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대학생들의 무관심은 학교 투표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학교 체육대회나 과 행
사가 있으면 대부분 도망갈 궁리부터 하고 있을 것이다. 편한 것만 찾아서, 머리를 쓰거나
스트레스를 받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자기 자신에게 득이 되는 일만 하려는 철저한
개인주의로 자신들을 무장하고 있다.
현 대학의 각 기구에서도 신입생들이 없어 힘들어하고 있다. 필자가 생활하는 신문사를 보
더라고 현재 수습기자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학기 초에는 그 나름대로 열심히 해보겠다
고 찾아오는 신입생들이 많았는데, 며칠 가지 않아 그만두고 나갔다. 그 이유는 너무 힘들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는다는 것이다. 신문사 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필자조차 편한
일만 찾게 되는 듯하다.
전체적인 사회의 흐름일지는 몰라도 현재 대학에 만연한 개인주의 풍토는 앞으로 사회를 이
끌어 나갈
젊은이들의 협동심을 저하시키는 요인이 된다고 생각한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지
나오면서 우리는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대학에 입학함으로써, 즉 성인이 됨으로
써 행동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렇지만 이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 개인주의로 전이되는 듯
하다. 날카롭게 비판하고, 선두에 서서 모든 일을 해결하려는 대학인의 적극적인 모습은 어
디로 갔는가. 우리의 모습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할 때이다.
(김정은.한라대학 학보사 총무부장)
<2000지금대학은] ① '단체활동 싫다' 학생회 구성도 못해>
`엔(n)세대' 대학생들은 자유분방하고 자기표현에 솔직하다. 그 어느 시대의 대학생들보다
개성이 강한 것처럼 보인다. 반면 이웃과 공동체, 정치엔 무관심하다. 비판적 지식탐구와 실
천을 추구하던 예전 대학생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도서관의 최고인기대출 서적 가운데
하나가 무협지이고, 학생들이 텔레비전 토크쇼류의 가벼운 말장난에 익숙해져 가는 것을 어
떻게 봐야 할까. 2000년대, 엔세대 대학생들이 일궈가는 대학문화와, 그 속에 흐르는 의식의
변화를 몇차례에 나눠 싣는다. 편집자
지난 19일 오후 2시 서울 연세대 도서관 앞 민주광장. 4·19혁명 40돌을 기념해 학교 주변
을 달리는 단축마라톤대회가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행사 시작 시각이 지났는데도 모인 인원
은 50여명뿐이었다. 행사는 가까스로 치렀지만, 40년 전 선배들을 기리려던 주최쪽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한때 학생운동의 `메카'였던 전남대와 조선대 총학생회도 이날 마라톤 행사
를 열기로 했으나 학생들이 모이지 않아 “학생회 간부들끼리 달리기를 하느니 안 하는 게
낫다”는 판단에 따라 행사를 취소했다.
일부 대학들은 학생회조차 꾸리지 못했다. 서울 성신여대는 올 1학기 개강 때까지 8개의 단
과대 가운데 사회대 등 4개 단과대학에서 학생회장을 뽑지 못했다. 후보자가 없었던 탓이다.
일부는 다시 선거를 치러 단독후보자를 학생회장으로 선출했지만, 사회대와 미대는 아직까
지도 학생회장을 뽑지 못하고 있다. 전남대 가정대도 학생회장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군복무를 마치고 이번 학기에 복학한 성연철(25·고려대 국문과)씨는 “군대에 가기 전엔
고교동문회에 최소 50여명은 모였는데 복학해보니 동문회 모임 자체가 없어졌다”며 “동아
리도 영어나 컴퓨터 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라고 말했다.
서강대생 강진호(19·경영학부 2)씨의 말은 요즘 대학생들 의식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동
아리 활동을 하면 동아리의 규칙을 따라야 하고, 그런 조직 생활에 묶이는 게 싫어 동아리
에 가입하지 않았어요.”
이 때문에 대학가에 피시방을 찾는 `나홀로족'이 늘어나고 디디아르나 펌프 앞에 학생들이
줄을 서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현상이다. 강씨는 “강의가 없을 때는 뭘 하고 놀아야 할지
고민할 때가 많다”며 “주로 친구들과 잡담하며 시간을 보내거나 피시방을 찾게 된다”고
말했다.
이런 대학생들의 의식과 문화는, `그나마 학생들 사이에 대중성이 있다'고 각 대학 총학생회
가 판단하는 등록금투쟁조차 시들해지고 있는 데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고려대와 연세대
총학생회는 학교쪽의 등록금 인상 방침에 반발해 총학생회에 등록금을 납부하는 이른바 `민
주납부 투쟁'을 벌였지만, 고려대는 안암교정 학생 1만7000여명 중 15명, 연세대는 신촌교정
전체 1만7천여명 가운데 180여명만 동참했다. 조선대와 전남대도 120여명과 80여명에 불과
했다.
각 대학 총학생회는 영화제나 록밴드공연, 디디아르대회 등 대중적인 행사를 개최하며 관심
끌기에 안간힘을 썼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학생회 간부들의 삭발이나 본관 점거 농성 등
강경투쟁도 고독한 외침일 뿐이다.
연세대생 부아무개(20·사회과학계열)씨는 “문제의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공
부다 연애다 개인적인 일이 바빠 다른 일에 신경쓸 틈이 없다”고 말했다.
지난 4·13 총선에서도 20대의 투표율은 30%대에 불과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시민단체
의 낙선운동이 사회를 뒤흔들었지만, 대학가는 `평온'을 유지했다.
고려대 임지훈(20·공학부 2)씨는 “정치에 관심이 없어 이번 총선에선 같은 하숙집 학생
13명 중 2명만 부재자 신고를 했다”고 말했다. 그 때문에 이번 총선에 출마했던 상당수 후
보들로부터는 “20대의 사회개혁 욕구가 40, 50대보다도 못했다”는 지적도 많았다.
서울대 사회학과 임현진 교수는 “자동차와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서구의 개인주의가 젊은이
들을 중심으로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며 “여전히 근대적 모순을 해결과제로 안고 있는 우
리 사회로서는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했다.
<어떤 사설>
공동체를 생각하는 대학생이 되길
다가오는 4·13 총선을 두고 온 나라가 요란하다. 선거철에 나라가 요란한 것은 늘상 있는
일이겠지만 올해는 사정이 좀 다르다. 부패한 정치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시민의 단
호한 의지가 행동으로 표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결과를 지켜봐야 알겠지만 일단 반가운 일
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 비추어 우리 대학을 바라보는 심정은 대단히 당혹스럽다. 거창 한 총
선은 말할 필요도 없다. 지난해 학내에서 치루어진 총학생회 투표율이 50%를 간신 히 넘었
고, 최근 실시된 모 학부의 학생회장 선거 역시 저조한 투표율을 기록했다. 출마 자나 학생
회 조직에 대한 강한 불만이 투표율의 저하로 이어졌다면 그래도 위안을 삼을 수 있다. 그
러나 지나친 무관심의 결과라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학내에서 실시된 설문조 사에 의하면
선거 자체에 아예 관심이 없다는 학생이 40%를 웃돈다. 확실히 개인과 직 접적인 관련이
없는 주위의 일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과거 대학은 나라가 나아가야 할 바른 길을 제시하는 파수꾼으로서의 역할을 자임해 왔다.
80년대만 해도 대학은 이 땅의 민주화 운동을 선도하는 기능을 담당했고, 그 처절 한 투쟁
을 바탕으로 민주화를 일구어 냈다. 대학생의 본분인 학업을 등한시했다는 비판 을 받을지
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대학은 얄팍한 지식인을 양성하는 곳이 아니라 불의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비판적 지성인을 양성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 말은 곧 대학은 자기 일신의 안일보
다는 공동체의 행복을 먼저 생각할 줄 아는 정신을 배우는 곳임을 의미한 다. 이로 인해 과
거 대학은 민족의 양심으로 자처하기에 부끄러움이 없었고, 대학생의 행동이 기성세대에 편
입된 시민들의 마음마저 움직일 수 있었다.
최근 우리 대학가에서 이러한 비판적 지성의 모습이 잘 찾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 거
같으면 대학생이 주도가 되어 선거 혁명을 이끌어 나갔을 법한데 오히려 끌려 다니고 있다.
심지어는 아예 관심도 없다. 대신에 취직할 직종을 먼저 찾아 취업 준비에 열을 올린다. 개
성과 발랄함이라는 미명 하에 국적도 없는 가벼운 대중문화 길들이기에 혼신 의 힘을 기울
인다. 반드시 나쁜 일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진정한 삶의 정 체에 대한 고민과
인문학적 가치에 기반한 문제의식이 그 구심점에 놓여야 할 것이다. 만약 그러한 구심점을
찾지 못한다면 이제 대학은 한낱 사치의 공간으로 전락할 위기를 맞이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미 이기적 개인주의의 팽배 혹은 저속한 상업문화와의 결탁 이라는 오명을 대학생 스스로
가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모두의 행복이 없다면 개인 역시 결코 행복할 수 없다. 만약 개인이 홀로 행복해 질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엄청난 불행을 자초하는 길이 될 것이다. 주위의 공동체 나아가
사회 전체에 대해서 무관심한 사이, 어떤 정치적·사회적 음모가 자행되어 결국 은 자신을
억압하려 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러한 이율배반의 모습을 너무도 많이 보아왔다.
아직도 늦지 않았다. 조금만이라도 이기(利己)를 양보하고, 더 넓은 공동체로 눈을 돌 려보
도록 하자. 굳이 4·13 총선과 같은 정치 문제가 아니어도 좋다. 다만 공동체에 대 한 관심
이 결코 학업과 별개가 아니며, 또한 개인의 안일과 멀리 동떨어져 있지 않음을 이번 기회
에 숙고하도록 하자.
<어떤 기자의 변..-_-;;>
대학 주변에 있는 상점들 중 대부분이 노래방이나 술집 같은 유흥업소들이다.】
처음 대학 문을 들어설 때 학생들은 많은 기대를 가지게 된다. 자신이 고등학교 때까지 해
보지 못한 일들을 대학이라는 곳에 들어와 자신의 꿈을 펼치고자 한다. 하지만 막상 대학에
서 하는 일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친구들에게 떠밀려 무의미하게 동아리에 가입하
여 생활하는 것이 대학생들의 하루 일과이다. 그렇게 대학 생활을 하다가 학년이 올라가면
서 취업준비 하느라 대학이라는 곳에 가졌던 꿈과 낭만은 사라진 채 대학 생활을 마치게 된
다. 결국 처음 대학 생활을 시작할 때의 마음가짐은 실종된 채 졸업장 하나만이 대학 생활
의 전부로 남는 경우가 많다.
대학 문화 공간의 부재
그렇다면 왜 이러한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것일까?
대학생들이 대학생활을 무의미하게 보내는 이유 중 하나가 대학 문화를 누릴 수 있는 공간
의 부재이다. 대학생 하면 떠오르는 풋풋한 열정과 도전은 학교 안에서는 벌써 잊혀진 지
오래이다. 학교 주변도 이러한 현상은 매한가지이다. 우선 우리 대학을 살펴보자.
우리 대학 주변에 있는 상점들 거의 대부분이 술집과 식당이다. 서점이나 레코드 점과 같은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공간을 우리 대학 주변에서 찾아보기가 힘들다. 대학생들의 기본 요건
이라고 할 수 있는 서적을 학교 주변에서 구입하기 힘들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서
점도 학교 내에 있는 서점이 전부이고, 이 서점 또한 규모가 작아 신학기가 되어 책을 구입
하려고 해도 줄을 서서 기다리는 형편이다. 또한 음악이나 연극 등을 볼 수 있는 공간은 기
대하지 않더라도 음악 테이프나 CD 등을 구입할 수 있는 곳도 없다는 것은 대학 문화 공간
의 허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열악한 환경 탓에 대학생들이 가는 곳
은 PC방이나 오락실, 그리고 밤이 되면 술집에 모여서 친목도모를 내세워 술 마시는 것이
대학생들의 일과이다. 이것은 우리 대학뿐만 아니라 다른 대학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다. 대전에서 가장 알려진 충남대학교만 하더라도 이러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충
남대학교 주변에 상점이 많이 분포되어 있지만 이러한 상점들의 대부분이 음식점, 오락실,
술집이라는 것은 우리 대학과 별로 다를 바 없다. 그 밖에 화방과 소극장이 있지만 대학생
들의 열정과 꿈을 담아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공간들이다. 한남대학교나 목원대학교는 더
열악한 상황이다. 그에 비해 한밭대학교나 혜천대학교 같은 경우에는 학교 내에 대학생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이 다른 대학보다는 많아서 학생들의 편의를 돕고 있다. 하지만 이런 학교
들도 학교 주변은 다른 학교와 별 다를 바 없는 실정이다. 대학생들의 문화 공간의 부재는
대학생들을 한정된 사고력에 머물게 할 뿐 아니라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존재로 만든다.
대학생들은 지금 풍요 속의 빈곤
지금은 세계화 시대이다. 인터넷이 세계를 하나로 이어주고 있고 그 속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인터넷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순 없다. 대학생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직접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인 것이다. 수도권 지역은 지방 대학에 비해 문화공간을 접할
기회가 많다. 그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직접 몸으로 체험할 수 있고, 지방 대학생들 보
다 먼저 자신의 꿈을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 서울에는 연극이나 무용, 뮤지컬 등 예
술 공연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널려 있고, 그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낼 수 있다. 그
들은 주변의 내포되어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잡기 위해 우리 보다 한발 앞서서 나아가고 있
는 것이다. 대학생이라는 이름에 설레이는 것은 그들의 무한한 도전과 새로운 것에 대한 열
망이 있기 때문이다. 70, 80년대 대학생들의 생활은 지금 대학생들의 생활보다 풍요롭지는
않았지만 그들에게는 사회에 대한 아픈 의식이 있었고 그들만의 낭만과 열정이 있었다.
미래를 짊어지고 가야 할 대학생들에게 그들만이 가질 수 있는 열정이 보이지 않는 것은 왜
일까? 지금 세대들이 풍요 속의 빈곤에서 살아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제는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은 손쉽게 볼 수도 가질 수도 있다. 보기에 좋고,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세
상에 널려 있는데 그들의 마음은 왜 더 빈곤해지고 있는 것일까?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운데
마음의 여유는 바닥을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회에 대한 무관심과 자기 이기주의
에 빠져 치열함이라는 것은 잊고 살아가고 있다. 예전의 대학생들처럼 투쟁과 자기애와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사랑과 믿음은 실종된 지 오래이다. 지금 그들에게 진
정 필요한 것은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진실한 시간과 주위를 생각할 수 있는 따뜻한 체온
일 것이다.
태양을 가득 품은 그들에게
대학생들의 문화 공간의 부재와 정신의 일탈은 대학의 질을 떨어뜨리고 더 나아가 사회의
발전을 저해시킨다.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대학생들이 누릴 수 있는 문화적 공간을 확
충하는 것이 시급한 문제이다. 또한 정부는 지방과 수도권의 문화적 차이를 줄이는 것에 지
원을 아끼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대학생들이 가져야 하는 마음
가짐이다. 젊기에 더 많은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고 그것을 발산할 수 있는 용기도 있는 것
이다. 단순한 즐거움을 찾기 위해 술을 마시고 사람을 만나기보다는 자신에 대해 깊게 바라
보고 자신이 원하는 해답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대학생의 도전과 패기
로 우리 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로 도약할 수 있는 젊은이가 더 많아지길 기대한다.
<강민지 기획특집부장>
이것도 무관심의 일종이라 볼 수 있겠군요..^^
느티나무길목 - 대학생과 에티켓
최정혜(경상대 사범대 가정교육 부교수)
이것도 무관심의 일종이라 볼 수 있겠군요..^^
오색 단풍잎들이 캠퍼스 곳곳을 수놓고 있는 아름다운 가을이다. 야외의 유명한 산을 따로
찾아가지 않아도 대학구내의 나뭇잎들이 절묘한 색의 조화를 보여주는 요즈음 이야 말로 대
학문화라는 단어가 가장 어울리는 계절이 아닌가 생각한다. 풍요로운 대학문화를 이끄는 가
장 핵심적인 주체는 바로 대학생들이다.
대학생은 모든 자유로움 속에서 자신의 자아를 개발해 가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누구보다
타인의 인격을 존중하고 대학 공간을 지성이라는 단어에 걸맞게 가꾸어가야 하며, 그 중의
필수적인 한 부분이 에티켓(예의)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어느 때부터 인가 마치 대학
생은 에티켓과는 상관없는 사람인 냥 행동하는 경향이 현저히 증가하고 있다.
예를 들면, 강의실 안에서 모자를 쓰고 있으면서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모자는 실내
용이 아니라 실외용이다. 몇 년 전 호주 출신 영어강사가 한국에 와서 2년을 지내는 동안
가장 의아스럽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대학생들이 실내에서 모자를 쓰고 앉아있는 것이
었다. 태양열이 강한 호주에서는 피부암에 노출될까 두려워 손목까지 오는 긴소매 스타일의
수영복에 모자를 쓰고 수영하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지만 그래도 실내에서는 모자를 벗는데
한국인은 이상하다는 것이다. 나는 그때 대답할 말이 없었다.
또한 커피를 마신 종이컵이나 음료수를 마신 빈 컵 등을 강의실에 고스란히 버려 두는 행동
들은 이미 초등학교 수준에서 완성되어야 하는 기본 에티켓이 아닌가! 강의실 바로 밖에는
쓰레기통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휴지조각을 비롯한 각종 쓰레기를 강의실에 뒹굴게 두면서
전혀 잘못된 행동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오히려 초등학생은 자신이 생활
하는 공간을 깨끗하게 사용하고 있는데 말이다. 우리 집안이나 방안이라면 이런 행동을 하
겠는가? 강의실은 바로 우리의 방이 아닌가?
캠퍼스를 걷다보면 자주 눈에 띄는 풍경하나가 대학생들이 걸어가다가 바닥에 침을 뱉는 광
경이다. 우리 과 학생이 아니기 때문에 지적도 할 수 없다. 아니 이미 성인을 자처하는 대학
생에게 어떻게 그런 초보적인 에티켓에 대해 논한단 말인가!
나는 스스로 민망스러워 못 본 척 고개를 숙이거나 돌려버린다. 그러면서 자괴감이 고개를
든다. 대학의 구성원이면서 기본 에티켓도 지키지 못하는 것을 지도하지 못하고 방치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선생의 태도인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면서 최근에 대학을 옮긴 탓
에 아직 학생들을 잘 몰라서 꾸중을 못한다는 변명 아닌 변명을 나 자신에게 해본다.
최근에는 어느 곳에나 환경에 관한 문제가 급부상하고 있다. 굳이 환경운동가가 아니라 할
지라도, 타인의 삶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은 삶
의 기본자세이다. 흡연장소를 지정하는 문제나 주변환경을 깨끗하게 하는 문제는 모두 본질
적으로는 공동체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대학의 공간 역시 예외일 수는 없다.
언제쯤이면 “대학생은 에티켓이 완성된 지성인이다”라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까?
2000년 중앙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교지 "누리하나" 문학상 당선작
대학생활에 대하여..
국제관계 4학년 최 현 성
언제나 2월 말쯤이면 대학에서는 새내기 새로 배움터가 시작된다. 그리고 캠퍼스는 새로운
얼굴들로 가득 차게된다. 이제는 4학년이 된 나에게도 '새내기'란 이름이 익숙하던 시절, 그
동안 기다리던 대학생활의 첫 걸음인 새로 배움터에 빠질 순 없었다. 그 곳에서 어느 선배
님이 꿈에 그리던 대학생활을 시작하려던 우리들에게 정말 잊을 수 없는 말을 해 주셨다.
대학생활은 고등학교와 달리 모든 것을 자신이 직접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숟가락으
로 밥을 입에 넣어주던 사람들은 이제 너희들 곁에 없다. 하지만 숟가락의 종류를 선택할
수 있으며, 숟가락 위에 놓여지는 것 역시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는 말씀이었다. 그 때에
는 선배님의 말을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고, 단지 '자유'라는 한 단어로 함축하여 받아들이
며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고 지나쳤다. 하지만 새내기의 봄, 그 좋다는 시절 나는 대학에 대
한 허무감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그 선배님의 말을 떠올리며 많은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
게 되었다. 그러면서 대학생으로 나의 존재를 찾아가기 시작하였다.
새내기 시절 나에게 대학의 의미는 단지 더 넓고, 새로운 세상으로 혹은, 자유롭게 하고 싶
은 것들만 할 수 있는 곳, 꿈과 낭만이 언제나 넘치는 곳으로만 생각되었다. 하지만 현실에
있어서 대학은 그런 곳이 아니었다. 내가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었다. 나의 이상향으로 대학과 현실에 있어서 대학은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그 거리감
속에서 나는 허무함을 느꼈던 것이다. 이런 허무함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그 선배님의
말속에 있었던 것이다. 나의 숟가락 크기와 그 위에 놓이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
가 선택해야만 하는 것 이였다. 하지만 내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더 많은 음식을 추구
했던 것이다. 이런 것들을 떠올리며 대학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대학이라는 곳은 말 그대로 큰 학문이 있는 곳이다. 하지만 난 그러한 대학 안에서 학문을
뒤로한 체,
다른 것들만 찾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의 허무함이나 왠지 모를 부족함은 바로 여기에서부
터 왔던 것이다. 즉 학문의 장에서 학문을 생각하지 않았기에 나의 대학생활은 처음부터 잘
못된 시작이었다. 대학생활에 있어서 학문을 배제했다는 사실 자체가 실수였던 것이다. 즉
대학에서 학문을 멀리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 후 학생의 본분은
공부라는 것을 망각하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또한 대학은 학사증이라는 졸업증서 외에는 나에게 직접 주는 것이 하나 없는 듯하다. 그러
나 주변의 선배님들 중에 너무도 많은 것을 대학에서 가져가시는 분들이 있었다. 그 분들의
생활들을 열심히 살펴보았다. 그러면서 나는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다. 학교에는 많은 동아리
와 작은 모임들이 있었고, 그 곳들은 회원이 되는 것은 필수가 아닌 선택적인 사항이었다.
그런 모임들을 무관심하게 바라본다면 정말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곳이었다. 또한 학
교에서는 항상 크고, 작은 행사들이 열린다. 이 행사들도 역시 무관심하게 바라본다면 모두
남의 행사인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대학생활, 내가 그리던 꿈의 대학생활들은 모두 그 속
에 있였던 것이다. 대학생활의 주체는 친구나 선배가 아닌 바로 나였다. 주체로서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과연 의미가 있는 존재라 할 수 있을까...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하는 곳이 바로 대학이었다. 그 속에서 더 많은 나의 가치를 창출하고자 노력하였다.
대학 이 곳, 저 곳에서 몸으로 느끼며,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울 수 있었다. 그 속에서 또 다
른 나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수많은 모임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소속을 알려주는 과 학생회와 단대
학생회... 이런 학생회 활동이었다. 새내기 때부터 가장 익숙하게 접하게 되는 과 선배님들과
함께 한다는 사실도 좋았지만, 나와 같은 학문을 하는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것, 그 자체가
나를 학생회라는 조직으로 이끌었다. 또한 학생회 활동을 한
다는 것은 가장 기초적인 대학생활을 시작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애교심과 동
기애, 끈끈한 선-후배간의 관계를 피부로 접할 수 있었고, 사회 생활에서 필요한 많은 것들
을 배우게 되었다. '과'라는 기초적 단위에서 활동과 단대 학생회라는 좀 더 넓은 학생회 활
동을 하면서, 세상에 있는 조직에 일원이 된다고 하더라도 잘 적응 할 수 있는 준비를 철저
히 한 것 같다. 대학 4년 동안 한번쯤 학생회 간부가 되어 많은 사업들을 직접 준비 해 본
다는 것 정말 추천 해 주고 싶다. 하지만, 봉사를 한다는 각오가 적거나 없다면 아마 매우
힘든 생활이 될 것이다.
나의 대학생활에 대해 짧은 시간동안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던 시간이 있었다. 지난 학기
'당신의 대학 4년 동안의 기회비용을 쓰시오.' 라는 시험 문제를 푼 시험 시간이다. 그 질문
은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문제 중 하나였다. 하지만 난 1억원 이라는 엄청나게 큰 숫자의
답을 계산해냈다. 대학 4년의 기회비용을 구하라는 질문의 답은 기회비용이라는 개념에 맞
추어 풀면 별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질문과 나의 답은 시험이 끝난 후 지금까
지도 머리 속에 그대로 남아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내가 학교 생활에 익숙해진 다음부터
나의 대학생활에 대해 한번도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가 그 시험시간을 통해 짧게라도 1학
년부터 4학년까지의 나의 모습들을 정리해 보았고, 많은 자책과 더 많은 도전 의식이 생겼
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 계산의 총 합 1억원을 구하는 순간 나의 머리 속에 '나에게 대
학 4년이 경제학에서 말하는 합리적 선택이었나?' 라는 질문이 계속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1억원 이상의 가치를 대학에서 얻어가야만 난 합리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평생을 두고 생각할 경우 합리적 선택이었다고 자신에게 말할 수 있다. 내가
이렇게 자신을 가지고 대답을 할 수 있는 것은 대학이라는 곳에서만, 혹은 대학시절에만 할
수 있는 돈으로 사지 못하는 경험을 몇 가지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것도 그 경험 중에 하나인 것이다. 나의 사랑스런
후배들이 자신의 대학생활이 비합리적인 선택이었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
학 4년 동안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정하고 하나씩 실천한다면 합리적 선택이 이었다고 자
신을 가지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학에서 생활하는 동안, 또는 대학생이란 신분을 소유하고 있는 동안에만 할 수 있는 것들
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학생에게 주어진 특권이라는 방학 기간을 잘 활용하는 것, 홀로 떠
나는 장기 여행과 회원들의 단합을 증가 시켜주는 각종 모꼬지에 참여하는 것, 학교 내에
있는 언론 단체의 편집위원이나 기자, 아나운서가 되어 무엇인가를 열심히 쫓아다니는 일,
어느 모임에서 책임자가 되어 최선을 다하는 모습, 오랜 기간 무엇인가를 연습하여 남 앞에
서 자신의 실력을 보여 주는 것..... 아마 이런 일들은 사회에서도 할 수 있겠지만, 대학생에
더욱 어울리는 일들이다. 또한 사회에서 하기엔 무척 힘든 일들이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4년
이란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이 무엇하나를 했다는 것 평생에 기억될 좋은 추억이자,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할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졸업한 선배님들에게 학생 시절이 그립다는 말을 자주 듣곤 한다. 이런 말들을 접할 때마다,
선배님들의 학창시절에 좋았던 추억들과 그 시절에 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아쉬움들이 뒤섞
여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나 역시 열심히 대학 생활을 했다고 생각 하지만, 아직도 해보
진 못 한 것들에 대한 미련들이 많이 남는다. 다시 새내기가 된다면 지금보다는 더욱 많은
것들을 배우고 경험하기 위해 좀 더 노력하는 삶을 살 것 같다. 아직은 재학생이지만, 벌써
학교가 그리워진다. 도전하는 청년은 아름답다고 한다. 대학 시절 무엇이든지 도전해 보는
후배들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정리하겠다.
휴...너무 많네요..-_-;; 하여튼 한번씩 꼭 읽어보시구..^^
참, 이번에 성대 신문에도 선거에 관한 얘기가 있으니 한번 슥~보시구요~^^
위에서 천천히 보시다가 이 마지막 글까지 보신 분은 제가 개인적으로 밥을 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