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보호구역
배고픈 한 마리의 늑대가 밤을 물어뜯는다
고결(高潔)은 그런 극한에서 온다
야성을 숨기기엔 밤의 살이 너무 질기다
그러니 모든 혁명은 내 안에 있는 거다
누가 나를 길들이려 하는가
누가 나를 해석하려 하는가
발톱으로 새긴 문장이 하염없이 운다
부르다 만 노래가 대초원을 달리고
달이 슬픈 가계(家系)를 읽고 또 읽는다
그러니 미완으로 치닫는 나는 한 마리의 성난 야사(野史)다
하린 시집 《서민생존헌장》, 천년의시작, 2015
가장 먼 데서 시작하자. 인류는 야생 상태로부터 멀리 떠나왔다. 15만 년 전 변방의 존재에 불과하던 인류는 지구 생태계의 지배자로 군림한다. 인류는 화식(火食)과 직립보행을 하고, 어느 순간 대뇌가 커져 다른 동물보다 훨씬 더 큰 지력(知力)을 거머쥔다. 그러는 동안 문명은 자연과 ‘미개하고 무질서한’ 야성을 억누르고 박멸시키며 규모를 키워간다. 개발이라는 명분으로 열대우림을 밀어버리고, 물줄기를 가로막아 댐을 만들며, 산을 파헤쳐 온갖 광물들을 가로채고, 자신의 잇속을 챙기기 위해 수많은 생물 종들을 멸종에 이르게 했다. 인류는 보다 우월하게 진화된 종이지만, 포유동물의 영장류라는 속성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이건 늑대에 관한 시지만, 실은 늑대를 위한 시가 아니다. 자연에서 늑대는 거의 사라지고 없다. 그 사라진 늑대에 관한 생태 보고서도 아니다. 하지만 분명 늑대의 인류학적 생태에 관한 성찰을 담고 있는 시다. 늑대란 무엇인가? 늑대는 토벌된 것, 문명 바깥으로 추방된 것의 표상이다. 우리 안에서 멸종된 자연이다. 흔적도 없이 증발해버린 야성이고, 잃어버린 본성이다. 늑대는 문명의 변경 너머 어두운 숲에서 그림자처럼 흘러 다닌다. 늑대는 현재의 동물이 아니라 과거의 동물이다. 늑대는 과거의 시간 속에서만 출몰하며, 더 정확히는 우리의 정신과 무의식 깊은 곳에서만 나타난다.
어느 날 문득 시인은 제 안의 늑대를 자각한다. 이 자각의 핵심은 늑대의 흔적, 늑대의 결핍이다. 배고픔, 물어뜯기, 야성, 발톱, 대초원은 늑대의 형질에 속한다. 하린의 시 세계에서 자주 나타나는 늑대는 일종의 거울이다. 우리는 이 거울을 통해 문명화된 동물, 즉 우리 자신의 얼굴을 비춰볼 수 있다. 그 거울에 무엇이 비치는가? 그것은 오만한 정복자이자 추악한 약탈자의 얼굴이다. 그 얼굴은 지구 생태계에 해악을 끼치는 인류라는 ‘유해 동물’의 민낯이다. 시인은 “배고픈 한 마리의 늑대가 밤을 물어뜯는다”라고 쓴다. 밤을 물어뜯는 늑대는 바로 제 안에 살아 있는 야성의 존재를 가리킨다. 우리 안에는 문명이 길들이지 못한 야성이 아직 살아 있다. “우리의 정신 속에는, 상상 속에는, ‘우리’가 놓치지 않고 쫓아갈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말하자면 생각, 기억, 이미지, 분노, 기쁨 같은 것이 명령받지 않고도 솟아납니다. 마음의 심연, 무의식은 우리의 내적인 야생 지대이며 그곳이 바로 지금 살쾡이가 있는 곳입니다.”(게리 스나이더, 《야생의 실천》, 48~49쪽) 시인은 밤을 물어뜯는 제 안에 살아 있는 야생 지대에서 고결을 읽어낸다. 우리 마음의 심연, 무의식에는 늑대가 살아 있다. 고결은 문명의 극한 속에서 살아남은 순수한 생명의 궁극에서 솟구친다.
누가 나를 길들이려 하는가
누가 나를 해석하려 하는가
길들임은 야생을 죽이고 순치하는 일이다. 해석은 야생의 원초적 생명력에 대한 분해 행위다. 시적 화자는 그 길들임과 해석에 저항하며 맞선다. 그것이 제 존엄과 고결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길들여지고 해석된 ‘늑대’들은 가축화된다. 개는 사람이 던져주는 먹잇감을 기꺼워하며 사람에게 복종한다. 개는 늑대가 가축화된 결과다. 시인은 비굴과 패배의 표상인 ‘개’가 아니라 늠름한 야성의 존재인 ‘늑대’로 살아남기 위해 싸운다. 우리는 누구나 애초 ‘늑대’로 태어나지만 그 늑대는 곧 박멸되고 만다. “길들여진 우리들의 삶 속에서 유년기는 야생의 독립국가이다.”(크리스티안 생제르, 《우리 모두는 시간의 여행자이다》, 61쪽) 인생의 주기에서 유년기는 우리 안에 늑대가 살아 있는 유일한 시기다. 학교, 군대, 사회와 같은 훈육 기관들은 지속적인 학습과 훈련을 통해 사납고 쾌활한 늑대를 명령에 따르는 개로 순치시킨다. 국가의 통제 질서에 저항하는 잠재적인 힘, 혁명의 불씨인 우리 안의 야생성은 분노의 표적이 되고, 그 영토는 사회와 산업 질서에 의해 말살되어 버리는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늑대로 살아남으려는 이 기획은 무모한 도발이고, 일종의 혁명이다. “모든 혁명은 내 안에 있는 거다”라는 구절은 시적 화자가 그 사실을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늠름한 혁명의 기세는 꺾이고 마모되어 희미한 흔적으로 남는데, 그게 바로 ‘헝그리 정신’이다. 헝그리 정신은 늑대의 것이기보다는 시체 처리반으로 활동하는 하이에나의 것에 더 가깝다. 이것은 비루하다. 그 비루함은 하늘과 땅의 유대에서 떨어져 나와 누추한 현실에 내팽개쳐짐에서 비롯한다. 그 구체적 국면은 혁명의 전복성을 잃은 채 “스스로 잔업 전선에 참여하고 월차를 반납하는 정신을 드높”(〈서민생존헌장〉)이는 것에서 또렷해진다. 우리 곁에 무수한, 혹은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한, 생활 전선에서 복무하는 ‘근면한 서민’이란 그 혁명에 실패하고 주린 배로 먹잇감을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와 같은 부류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이것이 우리 “슬픈 가계(家系)”의 얼굴이다.
아무도 늑대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늑대-되기는 야생의 실천이다. 소수자인 시인과 샤먼 부류들만 문명의 길들임에 저항한다. 그 저항의 늑대-되기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실패 뒤 남은 것은 무엇인가. 부서지고 망가진 개인들. 대초원을 질주할 기회를 빼앗긴 그들에게 배당되는 ‘반지하 인생’은 그 현 실태다. 그들은 생활에 찌들리고 생존의 절박성에 내몰리며 독방에 유폐당한다. 그들은 꿈의 파편과 잔해들을 어루만지다가 쓸쓸한 종말을 맞는다. 꿈의 파편과 잔해들은 곧 늑대의 “발톱으로 새긴 문장”이고, 그리고 늑대의 울부짖음으로 “부르다 만 노래”다. 우리의 늑대-되기는 “미완으로 치닫”고, 그 끝은 언제나 “한 마리 성난 야사(野史)”다.
하린(1971~ )은 전남 영광 출생이다.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를 나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2008년 《시인세계》를 통해 등단하고, 첫 시집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두 번째 시집 《서민생존헌장》을 펴내며 주목받는 젊은 시인군에 합류한다. 그는 줄기차게 제 계급 기반인 서민의 ‘생존’과 ‘생활’에 초점을 맞춘 시를 써왔다. 하린에게 시는 “우울한 자기복제 또는 자기증식”(〈H씨 죽음을 수령하다〉)의 한 기술인데, 그의 시에서 생활의 실감은 구체적이며, 생존 의식은 치열하다. 이를테면 “일당과 시급을 숭상하고, / 비정규직과 아르바이트에 뿌리박은 상부상조의 전통을 이어받아, / 명랑하고 따뜻한 헝그리 정신을 북돋운다”(〈서민생존헌장〉)와 같은 풍자적 구절에서 그 초점은 또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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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