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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우주의 근본원리인 일원상(一圓相, 즉 O의 모양)의 진리를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삼는 종교로, 진리적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을 통하여 낙원세계를 실현시키려는 이상을 내세우고 있다. 교조 중빈은 전라남도 영광(靈光)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우주와 인생에 대한 회의를 품기 시작하였는데, 그의 머리에 가득찬 의문을 한학(漢學)공부로는 풀 수가 없었으므로, 범인(凡人)보다는 높은 차원의 경지에 있는 어떤 대상으로부터 의심의 해답을 얻고자 산상기도와 도사(道士)를 찾는 일에 열중하였다. 이같은 그의 구도정신은 결국 그를 외부로부터의 문제해결을 포기하고 독자적 수도 고행에 들어가게 만들었는데, 어떤 일정한 수행법을 택하지도 못한 채 망아(忘我)의 침잠(沈潛)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폐인이 되었다.
5년여의 침잠 끝에 1916년 4월 28일 마침내 깨달음을 얻고 깨어난 그에게는 우주와 세계의 새로운 질서가 뚜렷이 드러나 보였다는데, 그 질서를 “만유(萬有)가 한 체성(體性)이며 만법(萬法)이 한 근원”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불생 불멸(不生不滅)과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진리를 천명하였다. 그 후 그는 유(儒) ·불(佛) ·선(仙) 3교의 경전을 비롯하여 그리스도교의 성서 등을 두루 섭렵하였는데, 특히 《금강경(金剛經)》이 자신이 깨달은 진리와 일치함을 깨닫고 근본 진리를 밝히는 데는 불법(佛法)이 제일이라고 생각하여 석가를 선각자로 존숭하는 동시에 불교와의 인연을 스스로 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펴기 위하여서는 종래의 불교와는 크게 다른 새 불교 ·새 교단을 설립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물질이 개벽(開闢)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를 내걸었다. 동시에 그는 새 교단 창립과 새 세상 구제(救濟)의 대책을 법어(法語)로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수신(修身)의 요법(要法), 제가(齊家)의 요법, 강자 약자(强者弱者)의 진화상(進化上)의 요법, 지도인(指導人)으로서 준비할 점 등으로 되어 있다. 이같은 개교(開敎)의 기치 아래 최초의 법어로써 1916년 새 교단을 열 의사를 표명하자, 마을사람들을 중심으로 인근에서 40여 명이 모였다.
그는 이 가운데서 8명을 선발하고 후에 정산(鼎山) 송규(宋奎:후에 一代宗法師)를 맞아 도합 9명을 새 교단 창립의 첫 제자로 삼았다. 원불교에서는 이 해를 원기(圓紀) 1년으로 삼고 있다. 그는 불교의 현대화·생활화를 주장하면서 신앙의 대상을 불상(佛像)이 아닌 법신불(法身佛)의 일원상(一圓相)으로 삼고, 시주(施主)·동냥 등을 폐지하는 대신에 각자가 정당한 직업에 종사하며 교화사업을 시행한다는 이른바 ‘생활불교’를 표방하였다. 그리하여 1917년 저축조합의 조직을 필두로, 1918년에는 바다를 막는 간척사업을 시작하여 이듬해 2만 6,000평의 논을 조성하고, 그후 엿공장·과수원·농축장·양잠·한약방 등 생산적인 경영을 하여 새 교단 창립의 경제적 기틀을 마련하였다.
한편 1919년에는 9명의 제자와 함께 대기도(大祈禱)를 시작하여 3개월 후 최종 기도에서 ‘백지혈인(白指血印)의 법인성사(法認聖事)’라는 기적(奇蹟)을 낳고, 여기에서 무아봉공(無我奉公)의 정신적 기초를 확립하여 신성(信誠)·단결(團結)·공심(公心)을 더욱 굳건히 하였는데, 이것이 곧 교단 창립의 얼이 되었다. 1924년, 마침내 서중안(徐中安) 등이 발기인이 되어 전라북도 익산에서 불법연구회를 창설하고 중빈을 총재로 추대하였다.
1938년에는 《불교정전(佛敎正典)》을 간행하여 기본원리인 일원상의 진리를 포명(布明)하였으나, 일본 관헌의 탄압이 계속되어 겨우 교단을 유지해나갔다. 1943년 교주가 죽자 송규가 종법사(宗法師)가 되어 교통(敎統)을 계승하고, 광복 후 1947년에는 교명을 원불교로 개칭하는 한편, 교육·자선(慈善)·교화(敎化)의 3대 실천목표를 세워 포교에 힘쓰다가, 1962년 규가 죽자 김대거(金大擧)가 2대 종법사에 취임하였다.
교리
원불교는 법신불 일원상을 최고의 종지(宗旨)로 삼는데, 일원상의 신앙은 처처불상(處處佛像) 사사불공(事事佛供)을 목표로, 어느 곳 어느 때나 신앙심을 지키어 천지(天地)·부모·동포·법률의 4은(四恩)에 보답하는 것을 불공으로 삼고, 자력양성(自力養成)·지자본위(智者本位)·타자녀교육(他子女敎育)·공도자 숭배(公導者崇拜)의 4요(四要)를 실천함으로써 복락의 길을 닦자는 것이다. 일원상의 수행이념은 무시선(無時禪)·무처선(無處禪)을 표준으로 하여, 언제 어디서나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고 정신수양·사리연구(事理硏究)·작업취사(作業取捨)의 3학(學)을 수행하여 신(信)·분(忿)·의(疑)·성(誠)의 ‘진행 4조(進行四條:추진할 4가지)’로써 불신(不信)·탐욕·나(懶)·우(愚)의 ‘사연 4조(捨捐四條:버려야 할 4가지)’를 제거하는 8조의 실행에 의하여 원만한 인격을 양성한다는 것이다. 이를 요약하면, 법신불 일원상을 대상으로 신앙하고 수행하는 정각정행(正覺正行)·지은보은(知恩報恩)·불법활용(佛法活用)·무아봉공(無我奉公)을 4대 강령으로 삼고 있다.
현황
원불교는 전라북도 익산에 있는 중앙총부(中央總部)에서 교단을 총괄운영하고 지방에 교구(敎區)와 교당(敎堂)을 두고 있으며, 그 운영기구로서 종법사(宗法師)를 중심으로 수위단회(首位團會)·중앙교의회(中央敎議會)·교정위원회(敎政委員會) 및 교정원(敎政院)과 감찰원 등이 있다. 교당에는 교무(敎務)와 교도가 있는데, 교도는 10인을 1단으로 하는 10인 1단 교화단(敎化團)을 조직하는 것이 특색이다. 각종 연구소 외에 교육기관으로 원광대학교(圓光大學校)·영산원불교대학교(靈山圓佛敎大學校) 등의 종합대학, 전문대학 1개교, 중·고등학교 6개교, 선원(禪院) 3개처 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교당별로 설치한 유치원·유아원과 양로원·보육원·수양원 등 자선기관도 운영하고 있다. 문화사업으로 경전의 출판과 《원광(圓光)》 《원불교신문》 등 정기간행물도 간행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원불교 [Won-Buddhism, 圓佛敎] (두산백과)
천도교
최제우는 전통적 유교 가문에서 태어나 지방의 유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조선 후기는 국내적으로는 외척(外戚)의 세도정치와 양반·토호들이 일반 백성에 대한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자행하여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민란이 각지에서 발생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의 무력침략의 위기를 맞던 시대였다.
최제우는 21세에 구세제민(救世濟民)의 큰 뜻을 품고 도(道)를 얻고자 주류팔로(周流八路)의 길에 나서 울산 유곡동 여시바윗골, 양산 천성산 암굴에서 수도하고 도를 갈구하여 1860년 4월 5일 '한울님(하느님)'으로부터 인류 구제의 도인 '무극대도(無極大道)'를 받게 되었다.
따라서 처음에는 도의 이름을 '무극대도'라고만 하였다. 최제우가 포교를 시작하여 많은 교도들이 모이자, 관(官)과 유생들이 혹세무민한다는 구실로 탄압하여 부득이 전북 남원 교룡산성(蛟龍山城)으로 피신하였다. 이 때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많은 저술을 하였다.
특히, 1862년 1월경에 지은 《논학문(論學文:東學論)》에서 처음으로 무극대도는 천도(天道)이며 그 학은 서학이 아닌 ‘동학(東學)’이라고 천명하였다. 이로써 동학이라 지칭하게 되었다. 이 해에 다시 경주의 박대여(朴大汝) 집에 머물면서 포교하자, 충청·전라 지방에서까지 수천 명의 교도들이 모여들자 교도들을 조직적으로 지도하기 위해 1862년 12월 동학의 신앙공동체인 접(接)제도를 설치하고 접주(接主) 16명을 임명하였다.
최제우는 1863년 3월 경주 용담정으로 돌아와 대대적인 포교활동에 나섰다. 접주들로 하여금 교도들을 수십 명씩 동원하여 용담정에 와서 강도(講道)를 받게 하는가 하면, 동학 교단 책임을 맡을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해월(海月) 최경상(崔慶翔:時亨)을 선임하였다.
한편, 관의 탄압을 예견하고 그해 8월 14일에는 도통(道統)을 최경상에게 완전히 물려주었다. 날이 갈수록 동학 교세가 커지자, 놀란 조정은 그해 12월 10일에 선전관(宣傳官) 정운구(鄭雲龜)를 파견, 최제우를 체포하여 이듬해 3월 10일 대구에서 정형을 집행하여 최제우는 41세를 일기로 순도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천도교 [Chondogyo, 天道敎] (두산백과)
대종교
근본 교리는 성(性)·명(命)·정(精)의 삼진귀일(三眞歸一)과 지(止)·조(調)·금(禁)의 3법이다. 대종교는 종교로 출발하였지만 그 시기가 바로 일제(日帝)가 한국을 강점(强占)할 때였으므로, 종교로서보다는 항일독립운동에 더 많은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교조(敎祖) 나철(羅喆:1863∼1916)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간섭과 강박이 날로 심해지자 이를 항의하고자 3차에 걸쳐 일본에 건너갔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하여 구국운동이 몇 사람의 애국정객만으로는 이룩될 수 없음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국가의 기틀을 튼튼히 하고 민족을 부흥시키는 원동력은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909년에 동지 오기호(吳基鎬) 등 10명과 함께 서울특별시 종로구 재동(齋洞)에서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를 공포함으로써 고려시대 몽골의 침략 이후 700년간 단절되었던 국조 단군을 숭앙하는 단군교를 창시하였다.
시교(始敎)한 지 1년 만인 1910년, 교도수는 2만여 명으로 늘었고, 교명을 ‘대종교’로 개칭하는 한편, 같은해 만주 북간도(北間島)에 지사(支司)를 설치하였다가, 1914년에는 대종교 본사(本司)를 이곳으로 옮겨 포교 영역을 국내와 만주 일대로 확대시켰다. 1916년 나철이 죽자 제2세 교주 김교헌(金敎憲)이 취임하였는데, 그는 대종교의 종리(倧理)라 할 수 있는 《신단실기(神檀實記)》와 《신단민사(神檀民史)》를 저술하고, 3·1운동 이후 만주로 들어가는 동포들을 포섭하여 그들로 하여금 항일구국운동에 앞장서게 하였다. 그 실례로 1920년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의 주역이었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장병 대부분이 대종교인이었다. 1923년 김교헌이 죽을 무렵에는 한국·만주·노령(露領) ·중국 본토 등에 48개의 시교당(施敎堂)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일제의 탄압이 날로 심해져 3세 교주 윤세복(尹世復)이 취임한 이후 많은 교인이 체포·학살되었고, 1932년 이른바 만주국의 탄생과 함께 대종교도 지하로 숨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1937년 시교당의 수가 52개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포교활동은 곧 독립운동의 일환이었으므로 교세 확장은 바로 독립운동의 확대이기도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종교 [Daejonggyo, 大倧敎] (두산백과)
갱정유도
1945년 강대성(姜大成)이 창시한 종교.
정식명칭은 시운기화유불선동서학합일대도대명다경대길유도갱정교화일심(時運氣和儒佛仙東西學合一大道大明多慶大吉儒道更定敎化一心)이며, 일심교(一心敎)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체로 교단 명칭은 종래의 유교를 갱정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나 유교계의 신종교라 보기 힘들다.
왜냐하면 이 때의 유도란 유·불·선의 일심(一心)에 합하는 유도를 말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유교와는 다르며, 또한 갱정유도의 교리를 보더라도 한때 증산계 교단인 보천교의 신도이기도 하였던 강대성 자신의 독특한 종교 경험을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대성은 1890년에 전라북도 순창에서 농부인 덕진(德津)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33세 되던 해 혼란한 세상을 탄식하고 애국애족은 무력항쟁이 아니라 새로운 도를 깨우쳐 창생을 구제하는 것이라고 결심, 가족과 함께 산기도와 천신에 대한 고축(告祝)을 주로 행하였다.
부인과 10세된 아들 용학과 함께 수도 생활에 들어가면서 아들에게는 유교의 범절로 유도법(儒道法)을 닦으라 하고, 부인에게는 칠성존위(七星尊位)와 산신존위(山神尊位)를 모시고 불도법(佛道法)을 닦으라 하고, 자신은 옥황상제위를 모시고 선도법(仙道法)을 닦았다. 그러던 중 35세 때 심령이 밝아져 문리(文理)가 터졌다고 한다.
그 뒤 1929년 7월 우뢰 같은 소리와 함께 도통을 하고 다시 7일간의 기도를 행하여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이 때 도를 이룬 강대성이 하늘에 올라가 상제로부터 광제창생하라는 대임을 받고 지상에 내려와 부부자(夫婦子) 3인이 세상을 구원할 막중한 책임 때문에 사흘 동안 울며 흘린 눈물을 나누어 마시는 누건수(漏巾水)의 상징 행위와 부·부·자(夫·婦·子) 3인이 영혼을 서로 바꾸는 생사교역(生死交易)을 치렀다.
1949년 2월 대포덕운동을 전개하여 제자 7명을 한 조로 하여 36조를 만들어 전국에 파송하였고, 1951년 본부를 전라북도 김제군 광활면 학당리로 옮기고 체제를 정비하였다.
그러나 교인이 늘어나고 교세가 확장되던 1954년 대한민국을 전복하고 중흥국을 건설하기 위해 UN에 메시지를 보냈다는 혐의를 받아 국가보안법, 간음, 혹세무민, 금전갈취 등의 죄목으로 전주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수감 중 고문으로 인한 병 때문에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1954년 8월 전주도립병원에서 사망하였다. 창교주가 사망한 뒤 3년이 지난 1957년 김갑조(金甲祖)가 법통을 이어 제2대 교주가 되었고, 본부를 전라북도 남원군 남원읍 도통리로 옮겼다.
그는 1961년 지리산 노고단에 수련당을 마련하고 수많은 제자들을 모아 수련을 시키면서 동시에 지방포교에 진력하였다. 1965년에 5백여 명의 신도들이 상경하여 시민들에게 남북통일과 외세 경계 등의 내용을 담은 유인물을 배포하면서 비화된 이른바 서울시위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로는 1984년 3월 임진각에서 남북통일과 세계평화를 비는 대제(大祭)를 거행하고, 1985년 3월에는 단군숭봉전국협의회, 독립유공자협회, 민족종단협의회의 후원 아래 도의앙양실천대회를 주관하는 등 주로 사회 도덕성 회복운동에 주력하고 있다.
갱정유도의 교리체계는 신앙대상인 선당궁(仙堂宮)과 경전인 ≪부응경 符應經≫, 그리고 기본교리인 생사교역(生死交易)으로 이루어져 있다. 선당궁은 만선(萬仙)이 강림한 곳으로 제성제불제선(諸聖諸佛諸仙)과 충효열(忠孝烈)의 일기(一氣)가 모인 상징적인 표현이며, 신자들은 선당궁 앞에서 치성을 올리고 신인합일(神人合一)을 빌고 지상천국의 도래를 염원한다.
≪부응경≫은 365권으로 이루어진 한문경전으로 강대성이 쓴 영서(靈書)와 토설(吐說)을 모은 것이다. 생사교역이란 천지(天地)가 거꾸로 지천(地天)이 되었다가 다시 천지로 바뀌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선천세계가 그 기운이 다하고 노쇠하여 혼돈의 세계로 화한 것을 본래적인 세계로 돌이킨다는 의미를 지닌다.
신자들은 4시에 기상하여 영선도인법(嬰仙導引法)을 실시한 뒤 그들 특유의 두발을 손질한다. 이들은 모두 한복을 입는다. 갱정유도의 큰 행사의식은 3대 기념일과 24절후 치성이 있다. 3대 기념일은 음력 4월 8일의 지제(地祭), 음력 8월 16일의 영신당주임화생일(迎新堂主任化生日), 음력 10월 8일의 천제(天祭)가 있으며, 천제와 지제를 합쳐 천지대제(天地大祭)라고 한다.
이 날은 신자들의 축제일로 7일 전부터 목욕재계를 하고 도포를 입는다. 대제가 끝나면 전국에서 모인 신자들이 마당에서 큰 잔치를 벌이는데, 잔치가 절정에 이르면 학동(學童)들에 의한 영가무도(詠歌舞蹈)가 흥겹게 벌어진다.
조직으로는 도중대표(道中代表)와 그 아래에 총무·재무·교무·포덕의 4부와 감사·간사를 두고, 지방에는 지례장(智禮長)과 예사(禮司)를 두고 있으며, 집행부의 임기는 1년으로 매년 선출하고 운영위원 30명이 운영을 맡아본다.
1996년 현재 전북 남원시 도통동 300번지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교단 대표는 이성수(李性洙) 도정이다. 교세로는 교당 36개 소가 있고, 178명의 교역자와 4만 9,450여 명의 신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