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신체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신성한 부분이며 인간에게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영혼과 함께 인간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라고 본다. 사실 몸은 외형적인 것이기에 그 사람의 생계
수단으로도 생각될 수 도 있고, 일부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기에 신비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
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몸에 대하여는 정말 할 말이 많다. 인간의 외모, 외형,
성적인 수치심, 노출의 미학, 누드 이 모든 것이 인간의 몸 즉 인간의 신체와 관련 된 것들이기 때
문이다.
지난 신문의 기사를 살펴보면 유림의 질책에 못 이겨, 또 성범죄 증가의 가능성에 미리 능동적으
로 대처한다는 명분 아래 대한민국 경찰은 마침내 몸의 노출에 대해 법의 심판을 가하기로 결정
했던 것을 볼 수 있다. 가슴과 둔부가 노출되는 옷과 공공장소에서의 알몸 목욕 등이 단속 대상
이 될 것이라 하는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란 얼마나 절묘한 표현인지를 다시 한번 실감하였던 웃
지 못할 사건이었다. 하여간 갑자기 시계바늘은 20여년전 으로 되돌아가, 경찰관들이 자를 들고
미니스커트의 무릎위 길이를 재는 일이 앞으로도 재연될 전망인가? 어느 일간지는 사설에서 재
미있는 지적을 하나 더 보태 사람들을 또 한번 웃게 만들었다. 단속에 나설 젊은 의무경찰들과
여성들 사이에서 벌어질 실랑이가 오히려 더 외설스러운 장면을 연출할 것이 우려된다는 내용
의 사설이었다.
웃고만 넘어갈 일은 분명히 아니다. 몸은 이제 일부 의식 있는 사람들이 위험수위에 이르렀다고
판단할 만큼 해방되기에 이르렀고, 경찰이 핑계로 내세운 유림을 비롯한 기성체체는 단호하게
몸의 해방구를 봉쇄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논설위원의 우려는 참 현명한 것이었다. 지금 배꼽
과 어깨와 허벅다리를 해방시킨 여자들은 20여년전, 경찰이라면 일본순사를 연상하며 울음부터
터뜨리던 그 여자들이 아니다. 경찰이라고 다른가? 이 느닷없는 노출 단속령은 아무래도 지금
의 몸에 대한 컬트 현상을 확인 또는 강화시키는 해프닝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올해 무던히
도 무더웠던 여름날의 한가지 현상으로 치부하기에는 조금 따져볼일들이 많다.
“이제 몸에 대해 이야기하자 이제 몸이 문제다. 숨기고 억압하던 몸에서 드러내고 즐기는 몸으
로 바뀐 세상. 왜 여성들은 목숨을 걸도 다이어트에 매달릴까? 몸은 어떻게 스타를 만들고, 돈을
만들까? 사람들의 피부색을 바꾼다면 세상은 어떻게 달라질까? 이매진이 보여주는 몸과의 근접
조우” “몸은 아름다운 것이다. 몸은 마음보다 우선한다. 몸은 보여지기 위한 것이다. 몸은 스스
로 만드는 것이다. 몸은 소비의 대상이다. 몸은 표현의 수단이다. 몸은 저항의 수단이다. 몸은 단
지 몸이 아니다.” “신세대에게 있어 몸이란 표현과 자기실현으로서의 몸이다. 부의 혜택을 받고
자란 그들에게 몸은 더 이상 노동이나 생존의 수단이 아니다. 신세대 문화에 활력이 있다면 그
문화가 살아 있는 몸, 바로 그곳에 뿌리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
21세기 문화 특급 `이매진`이 몸을 특집으로 다루며 내세운 수많은 현학적 또
는 선언문적 글들은 한 장의 흑백사진 과는 비교가 안될것이다. 상체를 벌거벗고, 눈을 감거나
선글라스로 가리고, 고개를 뒤로 젖혀 입을 벌리고, 서로의 하체를 근접시킨 채, 손을 잡고 있는
두 남자의 사진이다.
`꿍따리 샤바라`의 클론이다. 사진에는 이런 설명이 붙어 있다. “남성스타들에게도 육체적인 매
력은 인기의 비결이 되었다.” 그들이 워낙 육체파 가수라는 사실은 만인이 다알고 있는 바다. 이
상한 일은 따로 있다. 왜 `이매진`의 사진가는 클론의 두남자로 하여금 손을 잡
고 오르가즘의 표정을 짓게 했을까? 상상이 어렵다. 이제 남자도 여자 못지않게 몸에 대해 신경
써야 할 시대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이라 생각한다.
앞서 살핀 바와 같이 몸은 자연적으로만 주어진 것도 `정신`을 담고 있는 영원한 그릇도 아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지배와 피지배, 권력에 의한 양생과 관리와 훈육 등 으로 짜였다. 다시 짜이고,
그 짜임의 반복을 통해 나날이 새롭게 지각되고 확신되고 만들어지는 역사적인 영역이자 장
이다. 한가지 예를 들어 광고적 육체를 생각해 보자. 광고를 통해 우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남녀
공히 이상화 된 육체를 본다. 광고를 통해 우리 앞에 폼 잡고 나타나는 이정재나 이소라의 광고
적 혹은 영상적 육체는 절대로 거리를 나다니지 않는다. 대중목욕탕에서도 볼 수 없다. 그 까닭
은 육체는 살아 있는 현실의 육체가 아니라 광고를 위해 각종 소프트웨어로 `연출`어 탄생한 육
체일 뿐이기에 그렇다. 그 육체는 만인을 위해 순간 쓰러지는 육체다. “일상의 우리는 그 신기
루 육체의 인공미학을 동일화의 절대양식으로 삼고 그 육체에 가까이 가기 위해 갖은 수고를 아
끼지 않는다.” 이처럼 광고적 육체는 현대의 자본의 관리자, 매스컴의 소유자 등에 의해 짜인 육
체이고 우리는 그 짜인 육체를 기준 삼아 다시 우리의 육체를 짜 맞춘다. 여기서 새로운 현대적
육체가 탄생한다. 그런 만큼 몸이라는 화두는 아직 수많은 탐험을 기다리고 있는 거대한 대륙이
라 할 만하다.
몸에 관한 책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몸에 관해, 몸의 해방에 관해, 몸을 둘러싼 자본주의 농간
에 관해, 그리고 당연한 수순으로 , 몸과 마음의 이분법을 극복하는 방법론에 관해, 또 서양과 동
양의 몸관이 어떻게 다른지에 관해, 산더미처럼 책과 잡지, 글과 사진과 그림이 쌓여 있다. 나는
몸의 해방에 전적으로 찬성하지만 그러나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벌어지는 몸에 대한 숭배에는
눈살을 찌푸린다. 찌는 한여름에도 남자들은 긴 바지를 입어야 한다는 시대착오도 나쁘지만, 굶
어 죽어간다는 동포들이 있는데 다이어트 시장에 수천 억원을 쏫아붓는 불감증도 역시 나쁘기
때문이다. 단, 몸에 대한 숭배가 자본주의의 특산품이라는 오해는 그만 풀었으면 좋겠다. 헤라클
레스와 나르시스가 그 우람한 몸과 잘생긴 얼굴로 웅변하고 있다. 아름다운 몸에 대한 숭배는 결
코 독점자본에 의해 처음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동화와 신화들은 당당히 선언한다. “잘 먹
고 잘살아 봐! 우리처럼 아름다워 질 수 있어.” 아름다운 몸은 생물학적 본능이다, 또는 생물학
적 진화의 방향이다. 자본은 그런 생물학적 힘을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신성한 정신은 건전한
육체에서 나온다.”는 체육 정신의 원리를 뒤집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건전한 육체는 신성
한 정신에서 나온다.”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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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대학교/사고와표현2/금요일3,4교시/법정학부/200404044/정지숙
앙증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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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0.09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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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3] 클론이 나와서 반가웠습니다. 하하^^* 수고하셨습니다. 내용도 좋았고 거기에 맞는 표현도 좋았고, 의견,생각들도 조았구요
(3)자신의 생각을 잘 표현한 글이네요.. 수고 하셨습니다
[3]미처 다루지 못한 부분을 보완하신다면 정말 좋은 글이 될 것 같네요.. 고생 많으 셨어요..^^
[3] 주제를 잘 담고 있는 글인듯 합니다.
[3] 그러네, 아름다운 몸에 대한 나름대로의 견해를 잘 제시하고 있는데...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몸이 음성적으로 팔려나가는 데 있다는 거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