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역사소설^태종•이방원:⤵
태종 이방원 제126편: 임금님의 첫날밤
( 하늘을 바라보며 악이라도 써보고 싶었다 )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 이천우, 칠성군(漆城君) 윤저, 대사헌(大司憲) 박경, 지의정부사
(知議政府事) 이응이 제조(提調)가 되고, 좌사간(左司諫) 정준과 신개가 가례색 별감(別監)이 되었다.
가례색 별감은 예쁘고 잘생긴 처녀를 끌어오는 데 있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감투다.
가례색에는 가례(嘉禮)와 길례(吉禮)
가 있다. 가례색은 법통과 직접 관련
이 있는 왕과 세자 또는 세손의 혼례
를 주관하는 임시기구이고 길례는 왕과 세자를 제외한 왕실 가족 즉, 왕자와 왕손, 공주, 옹주, 그리고 왕세자의 적녀와 왕세자의 서녀의 혼례를 맡아 하는 임시부서를 말한다.
의정부에서 오부(五部)에 명하여 전국에 혼인을 금지시켰다. 금혼령이다. 금혼령이라고 해서 모든 혼례가 금지된 것은 아니었다. 13~17세에 해당하는 규수가 대상이었다. 좋은 처녀를 골라내기 위한 조치다. 별감으로 임명된 정준은 개성으로 향했고 신개는 충청도로 뛰었다. 물 좋고 때깔 좋은 양갓집 규수를 찾아내기 위해서다.
조선 후기의 금혼령은 팔도에 방을 붙이고 혼례를 금지했다. 하지만 이것은 요식행위에 불과했고 정치적
인 이해타산에 따라 명문 사대부가
(家)의 규수가 미리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별감이 지방으로 뛰는 태종의 금혼령은 실질적인 규수를 찾아내기 위한 방편이었다.
여기저기에서 처녀 단자가 들어왔다. 처녀 단자란 처녀의 사주, 사는 곳, 아버지와 할아버지 그리고 증조할아
버지의 이력과 외할아버지의 내력을 적은 문서를 이르는 말이다.
요새 말로 풀이하면 서류심사를 받기 위한 준비물이다. 사가(私家)에서의 혼인은 신랑의 사주단자를 신부 집에 보내는 것이 예법이지만 왕실에서는 그 반대였다.
하얀 피부와 골반이 간택의 기준
왕실에서 간택 기준은 가계 혈통과 규수의 부덕, 그리고 미모였다. 미모에서 제일 관심 깊게 보는 것은 피부 색깔과 골반이었다.
피부에서 으뜸으로 친 것은 우윳빛 하얀 피부였다. 현대인들의 건강 미인으로 꼽히는 까무잡잡한 피부는 천박하게 봤으며 하얀 피부는 귀티로 봤다. 골반은 왕자 생산능력의 척도였다.
드디어 규수가 선정되었다. 삼간택의 관문을 통과한 처녀는 판통례문사
(判通禮門事) 김구덕의 딸이었다. 이렇게 간택된 규수는 본인은 물론 가문의 영광이었고 내명부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이 관례였지만 오늘의 간택은 그렇지 않았다. 중궁전에 정비 민씨가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녀를 맞이하여 새 장가 들게 된 태종이 지신사 김여지에게 물었다.
"판각(判閣)이나 근시(近侍)의 벼슬
은 빈(嬪)의 아비로 시킬 수 없을까?"
"전례로는 마땅히 군(君)을 봉하여야 합니다."
이미 왕자(경녕군)를 생산한 효빈 김씨의 아버지와 소빈 노씨의 아버지 노귀산에게 벼슬을 내려줄 방법을 찾아보라는 얘기다.
태종의 혼인은 차질 없이 진행되었
다. 영의정 하륜이 가례사의(嘉禮事宜)를 올렸다.
"가례 때에 임헌명사(臨軒命使)·
납채(納采)·문명(問名)·납길(納吉)·
납징(納徵)·고기(告期)·고묘(告廟) 등 모든 절차를 예조로 하여금 시행하게 하소서."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의혼. 납채. 납폐, 친영. 부현구고. 묘현의 여섯 가지 절차로 변형되었지만 초기에는 좀 더 까다로웠다. 중매를 넣고 약혼식을 하며 폐백을 받고 신랑이 신부의 집에 가서 신부를 데려오는 등등의 절차를 행하자는 것이다.
"천자(天子)도 후(后)를 맞이하는 것 외에는 이 예를 행하지 않는데 하물며 제후(諸侯)가 빈잉(嬪媵)을 들이는 것이겠느냐?"
연화방 동궁에 신방을 차려라
태종은 간소하게 하라 일렀다.
옛 법에는 있지만 천자도 하지 않는 일을 하물며 왕이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옛 법을 거론했지만 실은 새신랑도 아닌 구 신랑이 민망하고 겸연쩍다는 쑥스러움의 또 다른 표현이다. 또한 왕이 처녀의 집에 가서 혼례를 치르고 처가에 묵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하여 특별조치가 취해졌다. 대궐 안에 규수의 거처를 임시로 만드는 것이었다. 국가에서 몰수한 이무의 집을 의령군(宜寧君) 남재에게 주었다. 남재의 집으로 동궁(東宮)을 만들고 연화방(蓮花坊) 동궁에서 가례(嘉禮)를 행하기 위함이었다.
드디어 44살 새신랑 태종이 처녀를 맞이하여 새 장가 드는 날이 돌아왔
다. 혼례를 치른 임금이 신방에 들었
다. 시월 스무이레, 음기가 가장 세다
는 그믐 하루 전이다. 밤을 새우면 그믐날이다. 연화방 동궁에 마련된 신방을 밝히던 등촉이 살랑거린다. 참새의 심장처럼 펄떡거리던 처녀의 가슴이 바람을 일으켜서일까. 가느다랗게 흔들리던 등불이 꺼졌다.
같은 시각. 중궁전을 지키는 정비 민씨는 시종하는 시녀를 물리치고 혼자 있었다. 밤은 깊어가건만 두 눈은 오히려 초롱초롱하다. 앉아있는 모습이 흡사 돌부처 같다. 29년 전. 열일곱 살 처녀가 두 살 아래 꼬마
신랑 이방원을 맞이하여 치르던 첫날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름다운 추억이지만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뭣이라고? 형들밖에 없었는데 누나 같다고? 두 살 연상이니까 누님같이 좋다고? 품속을 파고들던 네가 동생같이 대해주라고 했지? 그래, 누나같은 이 가슴에 이렇게 대못을 박아도 되는 거냐? 누님 같은 이 가슴에 비수를 꽂아도 되는 거냐고? 네가 내 가슴을 파고들며 포근하다고 흥얼거리던 이 가슴을 이렇게 갈기갈기 찢어놔도 되는 거냐고?"
칠흑같이 어두운 밤 이경(二更). 밤하늘을 지키던 별들도 졸고 있다. 정비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악이라도 써보고 싶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천벌을 받을…."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면서도 마지막 '놈'이라는 말은 입에 담지 못했다. 적어도 한 나라의 국모로서 그런 천박한 말은 입에 담고 싶지 않았다. 비록 지아비가 '놈' 같은 짓을 해도 차마 그 말은 입에 담을 수 없었다. 그런 말을 입에 담거나 입 밖에 내뱉으면 자신이 더 추하다고 생각되었다.
첫날밤을 치른 태종은 이미 가슴에 품은 김점의 딸을 빈(嬪)으로 봉하고, 노귀산의 딸과 김구덕의 딸을 잉(媵)
으로 삼았다. 품계로는 김점의 딸 김씨는 명빈(明嬪)이 되었고, 노귀산의 딸 노씨는 소혜궁주(昭惠宮主), 김구덕의 딸 김씨는 숙공궁주
(淑恭宮主)가 되었다.
'투기는 국법으로 다스리겠다'는 의지의 표현
법도에 따른 빈(嬪)의 신분은 두 가지다. 궁녀에서 어느 날 갑자기 왕의 승은을 입어 빈이 되는 경우와 정식 혼인 절차인 가례색을 통하여 간택되어 궁에 들어와 빈이 되는 경우다. 김점의 딸 효빈김씨와 노귀산의 딸 소혜궁주는 전자의 경우이고 김구덕의 딸 숙공궁주는 후자의 경우이다.
태종의 새 장가는 중궁전을 지키는 정비 민씨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일이었다. 이제까지는 사사로운 부부의 문제였지만 지금부터는 국법의 문제였다. 이제부터 투기는 국법으로 다스리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혼례를 끝낸 태종은 인사이동을 단행했다.
"하구와 노귀산을 좌군총제(左軍摠制)로, 김구덕을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로, 한옹을 한성부윤(漢城府尹)으로, 김점을 공조참의(工曹參議)로, 맹사성을 판충주목사(判忠州牧事)로, 탁신을 동부대언(同副代言)으로 한다."
하구(河久)는 하륜의 아들이다. 처음 하구를 도총제로 삼았으나 '도총제는 원로 장수의 직책인데 하구가 나이 젊고 아는 것이 없으니 이 직책에 합당하지 않다'는 하륜의 주청을 받아들여 한 등 내린 것이고 임금의 지근거리에 있던 맹사성의 충주행은 하방이었다.
태종•이방원^다음 제127편~
첫댓글 감사합니다.즐거운 추석 보내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