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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성재
이른바 민주화 세력의 사고방식 중에 경제에 관한 공통분모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재벌에 대한 고정관념이다. 재벌이란 군사정부가 정통성에 대한 콤플렉스를 극복할 겸 국민을 경제성장으로 호도하기 위해, 국내외 자금을 끌어 모아 정치자금을 두둑이 받고는 일부 사이비 기업가에게 팍팍 안겨 주고 국내 시장을 독과점 시켜 줌으로써 단기간에 거품처럼 부풀어 오른 것이다.-- 대략 이런 생각이다.
일견 그럴 듯하지만, 이것은 실증적 검토 없이 믿고 싶은 바를 반복해서 믿고 또 믿고 온갖 '카더라 방송'의 뉴스를 모아 소설을 쓴 것이다.
만약 이 말이 맞으려면, 이 세상에서 아마 가장 거대한 재벌은 비록 국가 소유이지만 공산국가에서 탄생했어야만 했다. 거기는 확실하게 국영기업에 돈이든 자원이든 인력이든 아낌없이, 정말 아낌없이 팍팍 밀어 주었다. 그러나 초창기에는 무어 조금 성장하는 듯했지만, 그것은 아무 효율성이 없는 수치놀음에 지나지 않았음이 금새 드러났다. 이 거대한 부실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해서 정부가 모든 것을 통제하고 지시하고 명령하고 '호통'치다가, 끝내 국가 전체가 파산하고 말았다.
유일한 예외가 공산국가에서도 가장 가난하던 중국인데, 거기는 저 위대한 등소평이 벌떡 일어나서, 공산주의 국가에서 기도 안 막히게 '사유재산'을 단계적으로 인정하고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사악한' 기업가에게, 제 주둥아리만 아는 농부에게 사업을 허용하고 농토를 돌려 주었기 때문이다.
정부가 돈만 몰아 주면 재벌이 탄생한다면, 모든 후진국에는 세계적인 재벌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야 했다. 그러나 어디 대한민국 외에 선진국을 위협할 재벌이 일어난 후진국이 있는가? 섬유, 전자, 조선, 자동차, 제철, 석유화학, 반도체 등 대한민국의 대기업은 정말 괄목상대할 만한 성장을 거듭했다.
정부가 돈을 몰아 준 것도 사실이지만, 정부의 주도면밀한 장기 계획과 철저한 중간 점검 및 냉정한 사후관리가 뒤따른 것과 기업인 측에서는 국내에서 복수의 대기업이 생김으로써 치열한 경쟁을 해야만 했고, 무엇보다 작은 국내시장에 안주하지 않고 정부가 채찍질하고 달래는 대로 드높은 태평양의 파도를 넘어 국제 시장에서 당당히 외국 상품과 대결하여 빈 틈을 파고들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국제 경쟁력을 갖춤으로써 계속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어려움이 많긴 하지만, 어떤 선진국이 이런 정도의 위기를 겪지 않은 나라가 있는가? 서구 열강과 일본제국주의는 오늘날 한국처럼 과잉설비에 과잉생산으로 전국가가 멸망의 위기에 처하자, 막대한 수요를 창조하기 위해서 어떤 짓을 서슴지 않고 했던가?
그렇다. 그들은 전쟁을 밥먹듯 일으켰다. 급기야 세계대전을 두 번이나 일으켰다. 그 책임을 순진하이 짝이 없게 독일에게 다 덮어씌워선 안 된다. 누군가 일으키게 되어 있었다. 양차 대전으로 서구열강과 일제는 과잉설비, 과잉생산 문제는 일거에 해결했던 것이다. 1차 대전 후 본토에서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무수한 군수 물자를 수출하여 단연 세계 1위의 경제대국으로 올라선 미국도 그 후 어떤 어려움에 빠졌던가?
초호황을 거듭했지만, 주식과 채권도 천장부지로 뛰어올랐지만, 신기술이 속속 개발되어 끝없이 부가 쌓여갔지만, 국내에서든 국외에서든 더 이상 소비가 뒷받침되지 않자, 1929년 일거에 주식이 대폭락하면서 하루아침에 전쟁보다 더 무서운 대공황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수요를 창출하기 위해 루즈벨트 대통령이 뉴딜 정책을 펼쳤지만, 그건 심리적 효과만 있었을 뿐 실지로 경제에 거의 도움이 안 되었다. 10년을 허덕였었다.
바로 이 때 '천사'가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악마 히틀러였다. 엄청난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전쟁은 거의 무한한 수요를 창출했다. 그리하여 미국은 순식간에 과잉설비, 과잉생산의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했던 것이다. 만약에 만약에 말이다. 1997년에 중국에 천하대란이 일어났다 해보자. 우리 나라 재벌의 과잉설비, 과잉생산은 일거에 해결되었을 뿐만 아니라, 있는 설비의 두 배 세 배로 아니 열 배로 늘려도 모자랐을 것이다. 덕분에 우리 나라는 세계 제일부국이 되었을 것이다.
슈퍼 301조다, WTO다, EU다, NAFTA다, 무역외 장벽이다, 세계화다, 금융자유화다, 하여 사실은 경쟁력이 만만찮은 우리 재벌의 생산품이 선진국 시장을 공략하지 못하도록 그물을 이중삼중으로 쳐 놓아서, 우리 경제가 어려워진 사실은 조금도 인식하지 못하고 오로지 재벌을 성토하기에 바쁜 사람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다.
어떻게 하면 선진국이 쳐 놓은 교묘한 무역장벽을 뚫고 우리 생산품을 팔 수 있게 만들까, 그들이 사지 않을 수 없도록 상품을 매력적으로 만들까 도와줄 생각은 않고, 오로지 천신만고 끝에 키운 세계적인 대기업을 죽이려고 애만 쓴 사람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들인가.
우리는 전쟁을 통하지 않고 평화롭게 당당히 교역으로써 세계 시장을 파고들려다가, 미처 선진국의 무역장벽과 금융자본을 뚫지 못하여 이른바 호두까기(nutcracker) 안의 호두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이걸 기술과 경영 문제로만 이해하면 서구에 놀아나는 짓이다.
힘있는 선진국들은 세계 최초로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하려는 한국이 사실은 눈엣가시였다. 조선업은 이미 다 먹혔고 전자와 반도체, 자동차까지 밀고 들어오자, 재빨리 무차별적으로 '덤핑'의 굴레를 덮어씌웠다. 실사해 보면, 오히려 국내 가격이 더 싼 경우도 그들은 조사 기간이라며 1년, 2년 질질 끌어 우리 기업을 하나 둘 고사시켰던 것이다.
그러면서 전가의 보도처럼 세계적인 과잉설비와 과잉생산을 들먹였던 것이다. 그런 식이라면 후진국은 영원히 아무 것도 생산할 필요가 없다. 선진국의 설비만으로 얼마든지 아프리카 오지까지 쓰고도 남을 만큼 생산 가능하니까.
도대체 그런 억지가 어디 있는가. 후진국에서 가격 경쟁력을 갖추고 나날이 제조기술이 발달하여 자기들보다 별로 차이가 없는 품질의 상품을 생산하자, 그대로 두면 자기들 나라의 공장 문을 다 닫게 되는 게 불을 보듯 뻔하니까, 줄기차게 후진국 특히 거대기업이 만만찮게 성장한 한국을 집중적으로 각종 수치를 들먹여 들이친 것이다.
자유무역이라 하여 내버려두었다가 일본에게 워낙 많이 당하여 독일 외에는 서구의 제조업이 초토화되었던지라, 그대로 두면 제2의 일본이 될 게 뻔한 한국을 서구와 일본이 함께 집중적으로 두들겨 팬 것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똑똑한' 사람들은 이를 도와줄 생각은 않고 '도덕성'을 잣대로 재벌 패기에 지난 90년대 내내 영일이 없었다.
시장경제를 키워 주고 연구개발을 장려하고 대학 교육을 혁신하여, 탐스런 상품을 만들게 하여, 한국 재벌도 떳떳하게 초우량 다국적기업으로 만들어 주고 거기 납품하는 중소기업도 다 살려 주고, 선진국 시장을 매혹시키게 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한국을 중심으로 '아시아 경제협력체'를 결성하여 서구가 아니더라도 아시아끼리 얼마든지 먹고 살 수 있게 하여, 저들이 오히려 문을 더 열게 만들어 줄 생각은 털끝만큼도 않고 그나마 있던 대기업을 다 죽여 버렸던 것이다.
자, 이제 냉정히 살펴보자. 과연 돈만 퍼 주면 저절로 되던가? 6공화국 이후, 여야가 합하여 농어촌에 퍼부은 돈이 얼마인가? 김영삼 전태통령까지 42조원에 현 정부 들어서도 20조원은 확실하게 더 쓸 것이다. 3조원(정확히 말하면 1970년부터 1980년까지 2조7천5백21억원)도 안 든 새마을운동과 어느 것이 더 나은가?
새마을운동은 정말 돈이 거의 들지 않았다. 최소한만 지원하고 5천년 잠자던 농부의 야성을 일깨어 '스스로' 일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어촌구조개선사업이라고 무려 1억, 10억, 심지어 유리온실 같은 경우에는 100억도 농부들에게 지원하자, 농민들은 급격히 근로 의욕을 상실하여 '눈먼 돈' 서로 차지하여 땀 안 흘리고 호의호식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멀쩡한 농민을 도리어 버려 놓았던 것이다.
자, 또 보자. 공적 자금 109조원. 거기다가 56조원의 국가 부채가 113조원으로 늘어나면서 들인 돈, 57조원. 더하기 새로 조성된 40조원의 공적 자금. 무려 200조원을 퍼부어 무엇을 만들어내었나? 딱 하나 있다.
--도덕적 해이!
(앞으로 들 40조원은 다를 거라고?)
정보화 시대를 화려하게 개화시킨다고 정부가 앞장서 우렁차게 팡파르를 울린 저 코스닥을 통한 벤처 기업의 양성은 또 어떻게 되었는가? 벤처기업 10만 개 만들어 일자리 100만 개 만들고, 대기업 위주의 한국의 고질병까지 고친다고 얼마나 기세등등했던가? 수십 조원의 예산을 들인 데 이어, 일선 은행 지점장을 다그쳐, 해괴하기 짝이 없는 벤처기업의 정의를 만들어 마구잡이로 벤처기업을 지정하여, 돈을 막 퍼 주고 코스닥을 붕붕 띄운 결과는 어떠한가? 멋모르고 서민들이 주머니돈 쌈지돈 다 긁어모아 일확천금을 노리다가 순식간에 알거지가 된 것 외에 무슨 소득이 있는가?
벤처기업의 '벤'자도 모르는 정책 당국자들이 돈만 들이면 저절로 되는 줄 알고 돈을 수십 조씩 퍼 주자, 그 눈 먼 돈 서로 먹으려고 오히려 벤처기업의 토양을 더욱 척박하게 만들지 않았던가? 절대 돈이 먼저 아니다. 사람이 먼저다. 기술이 먼저다. 지식이 먼저다. 정보가 먼저다. 계획이 먼저다. 연구가 먼저다.
평생을 남 욕하는 것만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이 막상 정권을 담당하자, 돈만 있으면 모든 게 저절로 되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마구마구 지난 40년 동안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돈을 풀어주었다. 선진국에 대한 불타는 희망을 가슴 가득 안고서.
한국의 기업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서구 열강의 재벌에 비해서 얼마나 '깨끗하게' 성장했는가, 피눈물나게 일어났는가를, 단 한 번도 생각 안 해 본 사람들이, 졸부가 돈으로 자식을 망치듯이 나라 경제를 천문학적인 돈으로 도리어 망친 것이다. 40년 피같이 모은 천문학적인 돈을 단 3년에 다 써 버리고 경제는 더 엉망으로 만든 것이다.
이러고도 아직도 전정권 탓을 하고 수구 기득권 세력에 이를 부득부득 가니; 우리 서민들은, 택시 타기를 호사스러워 하고, 마을 버스비가 아까워 운동한다며 으슥한 밤을 지갑 든 주머니를 꼭 잡은 채 재게재게 걷고, 시간이 걸려도 차비 한 번만 내려고 돌아, 돌아, 돌아가는 버스를 타고, 소갈비 한 번 먹고 10년 후에 꼭 다시 오자고 자식들에게 굳게 약속하는 우리 서민들은 목놓아 꺼이꺼이 산 속에서, 이불 속에서 울 수밖에 없다.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바히 모르나이다. --
(2000. 12. 8.)
*이 글을 쓴 지 3년이 지난 지금도, 정부의 퍼 주기는 끝없이 이어진다. 이미 62조원이 들어간 농촌에 향후 10년간 119조원을 지원한다고 한다. 농촌에 가 보라. 그 누구도 돈 갚을 생각하지 않는다. 계속 버틴다. 도리어 큰소리친다. 총선을 앞두고 금융개혁에 처절하게 실패한(2004년 현재 한국의 금융은 세계 평균 C 플러스에 훨씬 못 미치는 평균 신용등급 D 마이너스) 이헌재가 IMF 곧 미국 말 잘 들었다고, 미국이 한국의 외환위기 와중에 목돈 왕창 챙기게 해 주었다고 그들이 큰 상을 주는 등 치켜올리자 정말 제가 잘 난 줄 착각하고 다시 경제수장이 되자 짐짓 표정관리하면서 제법 그럴 듯한 말을 하는가 싶더니, 느닷없이 열우당의 교묘한 선거운동원 노릇을 자청하여 도덕적 해이를 부추기고 있다. 성실한 신용불량자의 원금을 깎아 준단다. 이제 꼬박꼬박 이자를 갚던 사람마저 버티기 작전으로 나가기 시작한다. 돈 갚을 사람들이 너도나도 배짱을 내밀며 큰 소리친다. 벤처 거품이 꺼지면서 부랴부랴 20001년에 정부 보증으로 빌려 준 2조3천억원의 원리금 상환일도 5월부터 도래한다. 우량 벤처기업도 갚을 여력이 없다고 한다. 그대로 두면 줄줄이 도산이다. 두고 보라, 틀림없이 또 퍼 줄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호전적이고 정치적인 한국의 노조만 다른 나라처럼 나긋나긋하게 만들면, 기업은 절로 살아나고 신용불량자도 절로 줄어든다. 그게 정도(正道)이다. 이런 정도를 버리고 사도(邪道)에 올라서서 이전의 군인 출신 대통령들이 30년간 벌어놓은 돈을 여기저기 마구 퍼 주니까, 심지어 가만 두었으면 벌써 김정일이 쫓겨났거나 설령 그가 건재하더라도 최소한 베트남 정도로 개혁개방하지 않을 수 없었던 북한 정권에 갖은 명목으로 피 같은 달러를 아낌없이 퍼 주니까 김정일 정권은 스스로 벌어먹을 생각을 않고 구걸과 협박으로 먹고 살 궁리만 한다. 그뿐이랴, 도리어 기세등등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여 한국을 접수하기 일보직전이다. 물에 빠진 놈 살려 놓으니까 내 보따리 내 놓아라, 하는 격이 아니라 칼을 들이대며 한 평생 먹을 것 입을 것 갖다 바치라고 협박하는 격이다. 무식한 졸부가 돈으로 자식 망치듯 말만 번드레한 무식한 정부가 나라를 철저하게 망치고 있다. 극심한 도덕적 해이로 스스로도 망할 판인데 깡패 나라까지 불러들여 평화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나라를 누란의 위기에 올려 놓고 있다. 이제는 '길거리 정치'로 민주주의의 벼리인 법을 휴지 조각으로 만들고 있다.
(2004. 3.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