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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전쟁에서는 잔혹 행위가 저질러진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가장 흔히 저질러지는 범죄가 아무런 힘도 없이 더이상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못하는 전쟁포로들을 죽이는 일이다.
전투 현장에서 전우들의 죽음을 지켜봤던 병사들이 포로들에게 보복 행위를 하는 것은 사실 참기 힘든 유혹일 것이다.
미국 독립전쟁도 예외는 아니었다. 1780 년 5월 29일, 북부와 남부 캘리포니아 주 경계선 근처에서
버네스터 탈러턴이 지휘하는 영국군과 에이브러험 뷰포드 대령이 지휘하는 버지니아 보병대가 전투를 벌였다.
뷰포드는 자신의 휘하에 400 명 가까운 병사들이 있었지만 영국군의 세력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어서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뷰포드의 부대원들이 흰 깃발을 들어올리자 곧 기수가 총을 맞고 쓰러졌다.
항복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뷰포드 부대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전투를 벌일 수밖에 없었지만,
결국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군의관으로 전투에 참가했던 로버트 브라운은 이렇게 증언했다.
"단 한 명의 목숨도 살려주지 않았다. 부대원들은 조금이라도 살아 있는 기색이 있는 녀석들을 모두 찾아내
총검으로 확인 사살까지 했다."
이 학살 행위가 전해진 후 의분에 찬 몇몇 병사들은 복수를 맹세했다.
한 민병대원의 다음 목격담에 이 사실이 잘 기록돼 있다.
동료 몇 명이 영국군 포로 녀석들을 구경하러 가자고 권했다. 여섯 명의 포로 녀석들이 잡혀와 있었다.
이런저런 논란이 있었지만 우리 병사들 중 몇 명이 "뷰포드를 상기하자"고 외치며
포로들을 대검으로 난자해 토막내어 죽여버렸다.
처음엔 아무런 감정 없이 이 장면을 그냥 보고 넘겼지만
잠시후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끔찍한 공포감이 엄습해 오기 시작했다.
그전에도 그후에도 결코 느껴보지 못한 공포감이었다.
숙소로 다시 돌아와 침대 위에 누웠을 때 새삼 전쟁의 참옥함이 떠올랐고
결국은 고통스럽고 우울한 감정에 빠져들어 의기소참해지고 말았다.
다음날 새벽 행군을 시작하고 나서야 이런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우리는 탈러틴 부대가 있던 곳까지 도착했지만 이미 적들은 막사에 불을 질러놓고 떠난 후였다.
다시 행군을 계속하던 도중 길 왼편에서 인간의 형상을 한 물체를 보았다.
가까이 가서 보니 열여섯 살 정도 된 민간인 소년이었다.
아마 호기심에서 영국군 병사들을 구경하러 나왔다가
우리들에게 정보를 제공할까봐 총검에 찔려 무고하게 죽음을 당한 것 같았다.
아직 완전히 목숨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아무 죄없는 이 불쌍한 소년을 보고 있노라니까 앞서 죽였던
영국군 포로들에 대한 고통스러운 죄책감이 사라졌다.
오히려 이 녀석들을 모두 없애버릴 기회가 빨리 찾아왔으면 좋겠다는 적대감이 불타올랐다.
칼 구스타프 톤키스트라는 스웨덴 장교는 독립전쟁 당시 프랑스 해군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한번은 그가 어떤 훌륭한 저택에 들어갔더니 방바닥에 온통 부서진 석고 조상 잔해들이 가득 차 있었다.
원래 조상들이 있던 벽장 안에는 사람의 머리 다섯 개가 대신 자리잡고 있었다.
또 옆방의 침대 위에서는 한 임산부가 수차례 칼을 맞고 살해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야만적인 적병 녀석들은 이 임산부의 가슴을 모두 칼로 도려냈으며,
침대 덮개 위에다 이렇게 휘갈겨 놓았다. "결코 반란자를 출산하지 말지어다!"
그녀의 자궁에서 도려내어진 태아는 집 밖 나무 위에 걸려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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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된 적개심을 넘어서: 적과의 화해
전쟁이란 참 이상한 것이다. 병사들은 국가에 대한 의무감이나 대의명분에 대한 믿음으로
전장에 나가 적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렇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서 적을 죽이는 일은 금지돼 있다.
눈앞에서 전우들이 비참하게 죽어가는 걸 지켜보며 모진 고통을 감내해야 하지만,
적을 포로로 잡았을 때 어떤 식으로건 그를 개인적으로 학대하거나 처벌할 수 없다.
만약 그런 짓을 저지르면 전쟁범죄가 된다.
어떤 경우건 병사들은 개인적인 복수를 못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적들에 대한 적개심을 고조시키기 위해
정부가 시행하는 엄청난 선전을 생각한다면 쉬운 일이 아니다.
선전의 역할은 적을 비인간화시키는 것으로, 편견을 조장하고
적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묘사하는 방법을 동원한다.
2차대전 동안에 일본인들은 젭스나 닙스라는 경멸적인 이름으로 불렸으며,
감정도 없고 생각도 없으며, 모두 똑같은 외모에 두꺼운 안경을 쓰고 뻐드렁니가 난,
오로지 정부를 위해서 일만하는 로보트들로 희화화되었다.
이런 인종차별적인 선전은 특히 "타임" 같은 잡지에 심했는데 이 잡지는 일본인을 "어리석고 무식하며,
인간적인 면모가 전혀 없는 인물"로 묘사하곤 했다.
유감스럽게도 정부에서 적에 대해 편견을 조장할수록,
적과 닮은 사람에 대한 적개심까지 생겨나는 부작용이 생긴다.
예를 들어 2차대전 동안 충성스러운 많은 일본계 미국인들이 재판도 없이 검거, 투옥되고 전 재산을 몰수당했다.
(나치스의 만행과 비슷한 면이 있다. 아이젠하워 장군이나 니미츠 해군제독, 기타 많은 사람들이
독일인 가계를 이유로 요직에서 쫓겨나지 않은 게 신기하다.)
미국은 분명히 남부 월남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월남전에 참전했다.
그러나 남부 월남 사람들은 미군들에게 황인종이라고 불리며 열등한 취급을 당했다.
걸프전 때도 마찬가지다. 미국이 표방한 참전 이유는 사우디 아라비아를
이라크의 침공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고 쿠웨이트를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 본토에서는 이라크에 대한 적대감이 너무 고조되어, 아랍계 미국인들이 운영하는 많은 사업체,
심지어 사우디 아라비아나 쿠웨이트 출신 아랍계 미국인들의 업체까지도
공격을 당하고 창문이 박살나는 곤욕을 치루었다.
전쟁이 끝나면 선전도 끝난다. 그리고 종종 어제의 적이 친구가 되고 동맹국이 된다.
그러나 정부 차원에서는 이런 과거의 적국과 새로운 우호관계를 쉽게 맺어 나가지만,
쏟아지는 선전 속에서 전쟁 기간을 보냈던 일반 국민들은 마음속에 새겨진 적대감을 평생 지니며 사는 수가 많다.
이상적으로는 군인들은 전투가 끝나면 자신들의 감정까지 잘 추스리고 정리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적에 대한 반감을 접고 우호적인 관계를 정립하려면
세월의 흐름이 필요하다. "뿌리"의 저자 알렉스 헤일리는 "일본인에 대한 공포감과 증오심"을 극복하는 데
30 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그는 1977 년 일본 텔레비전 쇼에 출연해서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그때 사회자와 함께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갑자기 이들은 자신들이 메이너스 섬이란 곳에서 같은 전투에 참가했었으며 잘못했으면
서로 상대방을 죽일 뻔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눈물을 흘리며 서로 얼싸안은 뒤 알렉스 헤일리는
"서로 적이 되어 싸울 때보다 지금이 서로에게 훨씬 더 필요한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털어놨다.
한때 자신이 죽이려고 했던 사람을 갑자기 직접 얼굴을 대하며 만나게 된다는 것은 분명히 이상한 경험일 것이다.
종종 과거에 적이었던 사람들이 재회하기도 한다.
2차대전말엽 사이판 섬에서 5천명의 미 해군 병사들이 소규모의 일본군 부대를 공격하며 18개월을 보낸 적이 있다.
이들은 일본군 병사들을 서서히 점멸해 마침내 겨후 마흔네 명밖에 남지않게 되었다.
부대 책임자였던 사가에 오바 대위는 결국 부하들과 함께 1945 년 항복했다.
오바 대위는 하워드 커기스라는 젊은 육군 장교에게 지휘도를 넘겨주었으며,
커기스는 나중에 육군 중장으로 퇴역했다.
1986 년 커기스와 그의 전 부하 세 명이 로스엔젤레스에서 오바 대위를 다시 만났다.
오바는 커기스에 대해 "나는 그를 친구로 여기게 되었다"고 말했다.
1977 년 미 보병 제70 사단 예비역 군인들은 독일 제6 산악사단 바펜 SS부대 출신 예비역 군인들과
2 년마다 한 번씩 독일에서 재회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물론 유태인 지도자들의 반발이 있었다.
모임에 참가한 미국 예비역 군인 한 명은 자신들과 모임을 갖기로 한 SS부대는 잔혹 행위로 유명한 SS부대와는
다른 부대이며, 독일 정규군이었다고 재회 모임을 정당화했다.
또 다른 미국인 참가자 다라일 옴홀트 시는 "우리는 함께 둘러앉아
그들의 맥주를 마시며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이런 모임은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2차대전 직전 독일 루프트바페 부대는 리히토펜 비행편대를 재건했다.
'붉은 남작'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만프레드 폰 리히토펜 남작은 1차대전 중 전사하기 전까지
무려 80 대의 전투기를 격추시킨 유명한 격추왕이었다.
리히토펜의 80번째 희생자였던 영국의 D. G. 루이스 소위는 공격당한 후 요행이 목숨을 건졌는데,
1938 년 리히토펜 비행편대를 재건하는 데 초청받았다.
유감스럽게도 이 초청에 대한 그의 소감이 어땠는지, 혹은 그가 과연 이런 초청을 수락했는지는 알 수 없다.
독일의 아돌프('돌포') 갈란트 소장에게도 유사한 상황이 벌어졌다.
2차대전 당시 그는 독일의 전투기 편대장이었으며 무려 104 대의 연합군 전투기를 격추시킨 최고의 격추왕이었다.
갈란트는 짐 피네간이라는 미국의 젊은 조종사에게 격추당했다.
1982 년 갈란트는 샌프란시스코의 피네간을 방문했다.
그는 피네간의 네 살짜리 손자에게 무릎에 난 심한 상처자국을 보여주면서
"이게 네 할아버지가 내게 입힌 상처란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미국에 머무르며 그는 자신의 펜팔 친구였던 에드 러드카 소령도 만났다.
사실 러드카 사촌의 단짝 친구 두 명이 갈란트의 엘리트 비행편대와 공중전을 벌이다가 전사했었다.
지휘관들에게는 불만스러운 일이지만, 이따금 전쟁 기간에 갑작스런 우정이 싹트기도 한다.
1차대전 기간 중인 1914 년 12월 크리스마스 때 일어난 사건이 가장 유명한 사례 중 하나이다.
영국군 총사령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메시지를 발표했다.
"크리스마스나 새해를 이용해서 적이 공격해 올지도 모른다. 전 군은 이 기간에 특별 경계를 계속하라."
그러나 이런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몇몇 부대는 벌써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그 다음에 벌어진 일은 영국 로열 필드 포병부대 제5 포병중대 포병대원 허버트 스미스가
당시에 쓴 편지에 잘 설명돼 있다.
크리스마스 이브엔 교전이 없었다. 오후 6시 이후부터 어떠한 폭격도 진행되지 않았다.
독일군 녀석들은 참호에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하고 참호벽을 따라 장식용 종이 등불을 달아놓았다.
갑자기 독일군 녀석들이 우리 쪽을 향해 "형씨들, 이리 좀 건너오쇼, 예기 좀 합시다"라고 외쳐댔다.
우리는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중대원 중 괴짜 녀석 한 명이 참호하게 나가 과감히 독일군 경계선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독일군 중 한 명이 중간 지점까지 나와 그를 맞이했으며, 둘은 악수를 나누고 곧 친해졌다.
얼마안 있어 이 괴짜 녀석이 다시 돌아왔고 다른 동료들에게 갔다 온 얘기를 했다.
이어서 더 많은 동료들이 차례로 독일군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지휘장교는 한 번에 세 명 이상씩 가는 것은 허락하지 앟았다.
나는 혼자 가서 담배를 설탕과 교환했다.
이 게임은 크리스마스 이브부터 박싱 데이(집배원, 고용인 등에게 선물 상자를 주는 날로
크리스마스 다음 날이다: 역주) 자정까지 단 한 차례의 교전도 일어나지 않은 채 계속되었다.
내가 만났던 독일군은 런던에서 웨이터로 일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영어를 약간 할 줄 알았다.
그는 사실 싸우기가 싫다고 말했는데 나는 그의 말이 진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즈음 독일군들이 쏘아대는 총탄은 평상시의 절반도 되지 않는 양이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악수를 하며 상대방 손을 으스러져라 꽉잡고 흔들어대는 독일군을 상상해 보라.
며칠 후 독일군들이 다시 공격을 시작했지만 내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혹시 독일군 녀석들이 거대한 음모를 꾸며놓고 우리에게 낭패감을 맛보게 하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들었지만 우리들도 만반의 준비는 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들도 그날 우리와의 거래를 통해 많은 것을 얻었으리라는 인상을 받았다.
(1888 년 독일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 수상은 사무아 군도에 독일 식민지를 건설하기로 결정하고
이 군도를 점령하기 위해 함대를 파견했다. 이들은 원주민 마을에 폭격을 퍼부었고,
섬에 있던 미국의 재산을 파괴했으며 미국 국기를 찢어떼어냈다.
미국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미국도 함대를 파견했다.
그런데 사모아 항에서 양국의 함대가 막 교전을 시작하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허리케인이 불어닥쳐 양쪽 함대를 급습했다.
독일과 미국의 해군들은 너나없이 서로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양국 군사들에게서는 곧 적대감이 사라져버렸다.
만약 허리케인이 며칠만 뒤늦게 불었어도 미국과 독일 양국은 전쟁까지 갔을 것이다.)
영국군 로열 필드 포병부대 제135 포병중대의 시릴 드러몬드 소위도 똑같은 일을 경험했지만
그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 같다. 오히려 그는 이런 일이 다소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크리스마스 다음날(박싱 데이) 우리는 관측 지점이 있던 성이본 마을까지 걸어갔다.
그런데 항상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던 지점까지 왔는데도 너무 조용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몇 야드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곳에 최전방 참호들이 있었는데,
영국군 병사들과 독일군 병사들이 각각 보였지만 상대방에게 총을 쏘지도 않으면서
참호를 파고 고치고 있었다. 무척 이상한 광경이었다.
마침 아래쪽 강에서 아는 장교 한 명을 만났다.
그와 같이 걸어가며 70야드쯤 떨어진 독일군 쪽 참호를 바라보자,
독일군 병사 한 녀석이 손을 흔들며 "이리 좀 오시오"라고 말을 걸었다.
우리는 "할말이 있으면 당신이 건너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정말로 참호에서 기어나와 우리 쪽으로 왔다.
우리는 결국 만나서 진지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곧 몇 명의 독일군들이 가세했고 우리측에서도 더블린 퓨질리어(수발총) 연대원 몇 명이 참호에서 나와 가세했다.
독일군 장교는 오지 않았고 대개 사병들의 모습만 보였다. 우리는 주로 불어로 얘기를 나누었다.
내 독일어 실력이 형편없었고 독일군 중에서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럭저럭 의사소통은 가능했다. 독일군 중 한 명이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당신들을 쏘고 싶지 않소. 당신들도 마찬가지 아니오? 그런데 왜 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요?"
그들은 우리에게 독일 담배와 시가를 주었다. 아주 맛좋은 제품들이었는데
이런 것들을 충분히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에게 혹시 잼이 없냐고 물었다.
더블린 퓨질리어 연대원 한 명이 얼마 덜어 먹지 않은 개봉한 잼 한 깡통을 가져와서 담배를 준 독일군에게 주었다.
나는 이들을 모두 정렬시킨 뒤 기념사진을 찍었다.
같은 사건에 대한 상대방 독일군의 흥미로운 시각이
독일군 제133 로열 색슨 연대의 요하네스 니에만 중위에 의해 묘사되었다.
우리는 우리 연대와 스코틀랜드 시포드 하일랜더스 부대가 대치하고 있는 전선의 참호들을 접수하기 위해 도착했다.
별이 총총 빛나는 추운 밤이었다. 스코틀랜드 병사들이 우리 앞 약 100여 미터 떨어진 참호 속에서
우리처럼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중대장님과 나는, 오랜만에 찾아온 어색한 정적을 만끽하면서,
연락병들과 함께 참호 속에 만들어놓은 크리스마스 트리 주위에 둘러앉았다.
갑자기 특별한 이유도 없이 적들이 우리 쪽 참호를 향해 공격하기 시작했다.
우리 병사들이 참호 위에 조그마한 크리스마스 트리들을 걸어놓고 그 위에 양초를 켜 달아놓았는데
아마 그 붗빛을 보고 적들은 우리가 기습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러나 자정 무렵이 되면서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다음날 아침 새벽 안개가 서서히 걷힐 무렵, 담당 전령이 참호 안으로 뛰어 들어와서,
우리 병사들과 스코틀랜드 병사들이 참호에서 나와 전선 근처에서 서로 우의를 다지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쌍안경을 집어들고 참호벽 너머로 조심스럽게 살펴보니 놀랍게도 우리 병사들이 적 병사들과 담배,
진(술), 초콜릿을 교환하는 모습이 보였다.
얼마 후 어디서 났는지 스코틀랜드 병사 한 명이 축구공을 들고 나타났으며 곧 진짜 축구시합이 벌어졌다.
스코틀랜드 병사들은 자신들의 이상한 모자로 축구 골대를 만들었으며 우리 병사들도 따라했다.
꽁꽁 얼어붙은 땅 위에서 축구시합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양측 병사들은 규칙을 엄격하게 지키며 열심히 경기했다.
시합은 심판도 없이 한 시간 가량이나 진행되었다.
패스는 수없이 빗나갔지만 선수들은 완전히 지쳐버릴 때까지 아주 열심히 뛰었다.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 스코틀랜드 병사들의 치마가 걷혀 올라갔다.
그 속에 아무런 속옷도 입지 않은 것이 보이자 우리 독일 병사들은 배꼽이 빠져라 웃어댔다.
'어제의 적들' 중 한 명의 엉덩이가 힐끗 보일 때마다 우리들은 휘파람을 불고 소리를 지르며 낄낄거렸다.
그러나 한 시간 동안 놀았을 때, 우리측 지휘관이 보고를 받고 시합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얼마후 우리는 다시 각자의 참호로 돌아갔고 적과 형제처럼 즐겁게 보냈던 시간은 끝났다.
게임은 결국 독일이 스코틀랜드에게 3 대 2의 승리를 거둔 채로 끝났다.
영국군 사령부의 지휘관들은 이 일에 대해 매우 못마땅해 했으며
곧 이런 비군사적인 행동에 연류된 모든 부대가 전선의 다른 지역들로 이동 배치되었다.
전장에서는 한때 친구였던 사람들이나 친척 관계에 있던 사람들이
적으로 만나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상황도 벌어진다. 이런 일은 특히 남북전쟁 때 흔히 벌어졌다.
가족들이 서로 갈리고, 많은 장교들이 함께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했다가 서로 다른편으로 갈리기도 했다.
미국 독립전쟁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전쟁은 단순한 영국인 대 미국인들의 싸움이 아니었다.
영국을 지지하며 영국편을 들었떤 미국의 독립반대파(왕당파, 토리당파)들도 있었다.
벤자민 프랭클린 자신도 가족 중에서 아들 윌리엄이 반대편에 속했다.
반면 독립반대파의 장군 티모시 러글스는 아내와 형제들, 그리고 자녀 일부가 자신과 반대편이었다.
독립반대파 판사 데이비드 오그던은 다섯 아들 중 세 명이 독립반대파였고 두 명은 독립지지파였다.
1777 년 베닝턴 전투에서 싸웠던 한 독립반대파 장교는 나중에 이렇게 썼다.
독립반대파가 항복하기 직전, 반란군(독립지지파)들은 내가 지휘하는 독립반대파 군대의 전선을
강력하게 밀고 들어왔다. 그때 갑자기 나에게 총을 쏘던 한 남자가 "피터스, 이 망할 토리당파 녀석아,
너는 내 손 안에 있다"고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그가 휘두른 총검이 내 왼쪽 가슴 바로 밑에 박혔지만 갈비뼈에 의해 가까스로 방향이 틀어졌다.
간신히 총에 총알을 장전하고 자세히 보니 독립지지파 장교였던 그는 나의 학교 동창생이자
아내의 친척이었던 옛날 친구였다. 그의 총검이 내 몸 안에 박힌 상태에서
그를 총으로 쏘아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너무도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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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탄 파편 장난감: 어린아이와의 전쟁
어린아이는 종종 전쟁의 참혹함을 잘 의식하지 못한다.
아마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거나 위험한 상황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사살이 잘 인식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유야 어떻든 어린아이는 전쟁에 대해 어른과 다른 시각을 갖는다.
흥미로운 예가 조지 맥베드의 "전쟁과 어린이"라는 책에 나온다.
이 책은 독일군이 1940 년 런던을 폭격하던 당시 그곳에 살고 있던 한 어린아이의 성장 과정을 기술한 책이다.
아침마다 클라크하우스 로드를 따라 산책을 하곤 했다.
하지만 포탄 파편을 줍기 위해 길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포탄 파편 모으는 일이 유행이었고, 마치 고통과 폭력으로 어우러진 퍼즐 게임의 조각 같은,
울퉁불퉁한 녹슨 파편들을 주머니 가득 넣고 돌아오지 않는 날이 없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이런 파편들이 고통과 폭력의 조각들로 보이지 않았다.
그것들은 런던 식물원에 가면 주울 수 있는 마로니에 열매나 멜보른 가에 가면 주울 수 있는
도토리 열매처럼, 하늘에서 떨어진 재미있는 장난감으로 보였다.
이 시간이면 레스토랑들이 잼을 넣은 간소한 롤빵이나 미트볼을 팔았다.
우리 식구들도 주로 리솔(파이 껍질에 생선, 고기를 넣고 튀긴 음식: 역주)이나
푸석푸석한 애플 스폰지빵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워낙 실림꾼이었기 때문에 갑자기 음식이 부족하다거나 배가 고프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다.
가장 부족한 물품은 설탕이었다. 이빨을 썩게 만드는 달콤한 샤베츠,
사탕과자, 아이스크림 같은 것들은 더 이상 없었다. 좀처럼 구할 수도 없었고 아주 제한된 양만 보급되었다.
최악의 상태로 변한 물품들 중의 하나가 초콜릿이었다.
우유 부분과 초콜릿 자체의 부분으로 나누어져 만들어지던 멋진 모양의 초콜릿이
레이션 초콜릿이라는 명칭으로 아무렇게나 변형되어, 반투명의 포장지에 싸여 만들어졌다.
마치 종이를 씹는 것처럼 맛도 없었다. 충치 때문에 고생을 하면서도 제대로 된 초콜릿이 무척 먹고 싶었다.
6. 공식문서 속에 담긴 역사의 희극성
미 해군의 징벌방법
군대에서는 군기 유지가 매우 중요하다. 다음은 1848 년 미 해군이 군기를 유지한 방법들이다.
기강이 해이해진 사병에게 가했던 이 징벌 기록은 호라스 그릴리의 "1838--1868 년 트리뷴 연감"(1868)에 나온다.
요리를 잘못한 자: 채찍질 12 대
소령의 가발을 훔친 자: 채찍질 12 대
일을 게을리 한 자: 채찍질 12 대
육지에서 빚을 진 자: 채찍질 12 대
해군 프록 코트를 찢은 자: 채찍질 9 대
불결한 자: 채찍질 12 대
교관을 구타한 자: 채찍질 12 대
술취한 자 및 주류보관실 침입자: 채찍질 12 대
병사에서 떠든 자: 채찍질 6 대
욕을 한 자: 채찍질 12 대
옷이 더럽거나 옷을 빨아입지 않은 자: 채찍질 12 대
정규 일과시간 후 침낭에 들지 않은 자: 채찍질 12 대
배 바깥으로 타구 뚜껑을 버린 자: 채찍질 6 대
오븐에서 빵을 꺼내 먹은 자: 채찍질 9 대
장비 정리를 게을리 한 자: 채찍질 12 대
육지로 군복을 갖고 나가 판 자: 채찍질 12 대
배의 장비 위를 떠들며 뛰어다닌 자: 채찍질 6 대
갑판 위에서 벌거벗은 자: 채찍질 9 대
오븐에서 빵을 꺼내 먹는 일이 어째서 타구 뚜껑을 바다에 함부로 버리는 일보다
더 무거운 벌을 받아야 했는지 이해가 안 된다.
또 최근 해군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여러 가지 군기 위반 사례들이 당시에 있었다면 어떻게 처벌했을지 궁금하다.
1991 년 미 해군의 한 징벌 조사 위원회에서 다루었던 군기 위반 사례들이 국방성 문서에 기록된 적이 있는데,
제목들을 보면, '스트리킹(벌거벗고 뛰기)', '엉덩이 내보이기', '다리털 면도하기', '닭싸움 시키기', '엉덩이 찌르기' 등
희한한 것이 많다. 내 생각에 스트리킹 같은 군기 위반은 갑판에서 벌거벗기와 큰 차이가 없었을 것 같다.
다만 요즘에는 오븐에서 빵을 꺼내 먹는 일이 군기 위반 사례로 적발되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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