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22. 큐티
마태복음 23:29 ~ 39
예수님의 한탄
관찰 :
1) 화 있을찐저
- 29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꾸짖으심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곱 번째 주님의 경고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들을 경고하십니다.
- 30절.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 이들의 외식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면서 만일 자신들이 과거에 선지자들과 의인들을 만났었다면, 선지자들의 피를 흘리는데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 31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 주님의 말씀은 그렇게 말하는 것을 통해서 그들 스스로가 선지자들을 죽인 자의 자손이라는 것을 증거함이라고 지적하시고 있습니다.
2)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 32절.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 대단히 무서운 말씀입니다. 이들이 조상을 따라서 선지자, 즉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 할 것을 이미 아시는 주님은 그것을 두려워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할 것을 종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주님의 의도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악하기 때문에 그러한 악행을 하는 것을 통해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힘이 없어서, 무지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알고 계셨지만, 그것을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몰랐지만 어찌하다보니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시는 것입니다.
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 33절.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 사탄의 궤계에 빠져서 선악과를 따먹은 자들의 자손들, 즉 죄인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여자의 후손의 발뒤꿈치를 물지만 결국은 그 머리가 박살나게 됩니다. 사탄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옥의 판결을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지옥은 실재하는 것이고, 그 심판은 분명히 존재하며, 그것이 가장 극렬한 고통일 것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화 있을찐저’라는 말씀에 대한 심판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4) 선지자들을 보내신 분이 예수님이시기에 그들의 순교의 피도 기억하심
- 34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 주님은 다시금 위에 있는 말씀들을 정리하시면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십니다. 즉,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자신들이 과거에 있었다면 선지자들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외식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대하여, 그 선지자들을 보내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 때 선지자들을 줄줄이 죽인 자들이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하등의 다를 바가 없다고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지금도 예수님을 죽이려들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시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들은 알아먹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구체적으로 실현되었습니다.
- 35절.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 땅 위에 흘린 의로운 피의 책임이 뱀들, 독사의 새끼들에게 있음을 주님은 지적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댓가를 치루게 할 것이라고, 이 핏 값이 너희에게 돌아가고 다 이 세대 즉 주님이 오시는 올 세대 이전의 시기까지 다 돌아가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 36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 => 주님은 이 때 장차 오실 이 땅에서의 카이로스의 마지막을 보시면서 말씀하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5) 예수님의 한탄
- 37절.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 하나님의 도성이 되어야 할 예루살렘 성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야 하는 이 백성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잡아 죽이는 일에 앞장서는 것으로 심판을 면하지 못하게 됨을 인해 주님은 안타까와 하시는 것입니다. 매우 속상해 하시고 슬퍼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누가는 이것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셨다’라는 동사 에크라우센(εκλαυσεν)은 ‘일반적인 울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통곡’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방성대곡’을 하신 것입니다.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슬픔을 견딜 수 없어서 목 놓아 우시는 깊은 슬픔, 애간장이 저미는 슬픔을 쏟아내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 38절.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어떻게 망할 것인지를 주님은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 39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 주님은 이제 재림을 말씀하시기 시작하십니다. 비록 그 때까지는 예수의 승천 이후에 보지 못하게 될 것이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다시 오실 것입니다. 다만 그 때가 언제인지는 얼마나 오래 있다가 오실지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언급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모든 권한을 하나님 아버지께 내어드린 것입니다.
가르침 :
1)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화는 결국 그들 스스로가 자초한 것입니다. 선지자들을 죽이고 또 죽였고, 이제 예수님의 피도 흘리게 할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원하심과 배치되는 이러한 모습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피를 자신들과 자신들의 후손에게 돌리라고 함으로 실제로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얼마나 개고생을 하고 살게 되었습니까? 이들 스스로가 주님의 복음을 거부함으로 인한 댓가를 치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고자 하기에 그런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2) 의인의 핏 값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 보자면, 의인의 핏 값이 그 의인이 피를 흘리게 한 자를 저주하는 것으로만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벨의 피를 흘린 가인이 곧 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벨의 피 때문에 특별한 표식을 받고 그의 생명이 길어졌습니다. 땅에 흘린 아벨의 피가 부르짖은 것은 자신의 핏 값에 의해 가인을 죽여달라고 한 것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피를 보아서라도 형 가인을 살려주시고, 기회를 더 달라는 것이었을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김서택 목사의 의견입니다. 상당히 일리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견해에 따르면 선지자들의 핏 값으로 이스라엘이 그나마 주님의 백성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기회가 더 이어졌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핏 값에 대해서 자신들이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 말하는 이들에 대해서 주님은 더 이상 인내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화 있을진저”라 말씀하시며 그들의 종국과 그들의 자손의 고난을 언급하시는 것입니다.
3) 주님은 더 나아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은 선지자들을 잡아죽였고, 그 피로 지금껏 그 역할이 그나마 유지되었지만 이제 예수님을 잡아 죽여 그 피를 흐르게 함으로 무너지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의 완전한 멸망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해 새 예루살렘 성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자신이 다시 오실 것을 언급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뜻을 반대하여 선지자들을 죽이는 뱀들, 독사의 새끼들의 행태와 그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예수님의 구원의 경륜을 엿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적용 :
1) 주님은 시간과 공간에 제한되시는 분이 아니시기에 때론 그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들이 있고, 너무 많은 갭을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 오직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에 그렇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목전에 두신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매우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진노를 발하시고 저주를 퍼부으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언급하셨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는 끔찍한 일이지만, 우리 이방인에게는 또한 역설적 은혜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방인이었던 우리가 영적 이스라엘로 이해하는 교회를 이루는 존재로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책망과 선포하시는 화에 해당하는 외식을 밥 먹듯이 하는 상황을 염두에 둘 때, 그 진노도 동일하게 받아야 하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에 속해있어도 그것을 모르는 것, 하나님을 방해함에도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착각하는 것, 겉과 속이 다르게 신앙생활하는 것, 주님을 섬긴다 하면서 자신의 잇속을 더 많이 챙기는 것, 이런 외식하는 것들은 심히 두려운 일입니다.
2) 미얀마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너무나 무기력한 나 자신을 봅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분명히 일하시는 예수님을 의지합니다. 그리고 현재의 나 자신에 대해서도 이렇게 연약하고 무기력한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되시는 예수님이 계시기에, 주님이 일하심을 의지함으로 이 시간이 흘러가고 있음에 조급하거나 두렵지 않습니다.
3) 주님의 한탄의 대상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시고 믿음을 더욱 공급해 주시길 간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