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2주일(마르12,38-44)평신도 주일
계산법을 달리하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지켜주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늘 불안하고 또 부족합니다. 이 시간 하느님께서 사랑의 마음을 키워주시고 더 많이 헌신할 수 있는 은총을 내려주시길 간구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응답을 기쁨으로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교회는 하느님을 섬기는 곳이지 돈을 벌기 위한 장소는 아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에 하느님을 섬기기보다 돈의 노예가 된 사람이 있다. 성직자들이 돈에 얽매인 것을 보면 매우 슬프다"고 하셨습니다. 이 시간 물질에 대해서 좀 더 초연할 수 있기를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과부의 헌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헌금함에 돈을 넣는 것을 보고 계셨는데 마침 부자와 가난한 과부의 대조적인 모습을 보았습니다. 부자들은 여럿이 와서 큰돈을 넣었는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은 렙톤 두 닢을 넣었습니다. 렙톤 두 닢은 오늘날 200원 정도 되는 아주 적은 돈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큰돈을 넣은 부자들을 제쳐두고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셨습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넣었기 때문이다”(마르12,44).
부자들은 가진 것의‘일부’를 내었고, 가난한 과부는 있는 것‘전부’를 바쳤습니다. ‘일부’는 그 액수가 얼마든 ‘전부’보다 결코 많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가졌다 해도 소유물이 그것을 소유한 사람보다 크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는 렙톤 두 닢과 함께 자기 자신을 바친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바친 것입니다.” 우리는 헌금을 할 때 ‘각자 자기 분수대로 하면 되지’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 분수나 여분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하느님께 바쳐져야 하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써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것을 잠시 관리할 뿐입니다. 관리자이지 소유자가 아닙니다.
계산법을 달리하면 값이 달라집니다. 어떤 기업인이, 대통령이 자기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재단을 설립했는데 그 재단의 돈을 자기의 미래를 준비하는 데 사용하며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도록 해놨습니다. 겉모양은 환원이지만 속을 보면 재산축적입니다. 세계 부자 워렌버핏은 재산(440억달러)의99%를 기부하기로 약속하였는데 자기 부인이 운영하는 자선재단에 기금을 기부하지 않고 세계 부자 2위인 빌게이츠재단에 거금을 기부했습니다. 자기가 운영하는 재단, 부인의 재단보다 가슴이 따뜻하고 더 잘 운영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부자가 누구인지를 알게 합니다.
과부의 헌금에 대한 말씀은 가족의 생계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재산을 다 팔아 성당이나 교회에 바치는 것이 최고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재산이나 시간, 근심 걱정, 내면의 상처,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까지도 봉헌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헌신을 뜻합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 삶의 첫 자리를 차지하셔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사렙다 마을의 과부는 극심한 가뭄으로 고생하다가 마지막 남은 음식으로 아들과 함께 그 음식을 먹고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렵고 고통스러운 처지에서 하느님의 사람 엘리야를 만났습니다. 그러고는 생명과도 같은 마지막 음식을 자기들이 먹지 않고 그에게 바칩니다. 그는 그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대접했는데 그로 인해 그 집 “단지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는 기름이 마르지 않았습니다”(1열왕7,16). 그는 그야말로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의 천사를 대접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넘치는 축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만약 이 과부가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 하느님을 믿지 않고 음식만을 의지했다면 아마도 한 끼의 음식을 먹고 굶어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렙다 마을의 과부는 배고픔과 굶주림 속에서도 하느님의 사람 엘리야 예언자에게 사랑을 베풀어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사렙다의 과부는 자기 자신을 다 바침으로써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반드시 하느님께서 넘치도록 채워주십니다. “너희는 십일조를 모두 창고에 들여놓아, 조금도 덜지 말고 성전 곳간에 가져다 넣어 내 집에 양식이 넉넉하게 하여라. 그렇게 바치고 나서 내가 하늘 창고의 문을 열어 너희에게 복을 넘치도록 쏟아붓지 않나 보아라.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말라기3장10). 반드시 갚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행함을 통해서 약속을 지키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감사함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은혜가 함께 하길 기도합니다. 사도행전에는 “믿는 사람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한마음이 되어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보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을 날마다 늘려 주셔서 신도의 모임이 커갔다”(사도2,44- 47)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 것을 내놓음으로써 하느님을 찬양하고 구원받을 사람이 늘어갔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것을 이 세상에서 잠시 관리할 뿐입니다. 생각해 보면, 하느님께서는 알몸으로 태어난 우리에게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다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진 가장 좋은 몫을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사실 십일조라는 것은 물질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하루 24시간 중에 하느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며 기도하는 시간, 말씀을 실천하는 시간을 말입니다. 또한 공간도 살펴보십시오. 우리 집이 넓은데 주님과의 만남을 위한 공간을 특별히 배려하고 있는지요? 그저 십자고상을 걸어두고 성모님을 모셔놓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시간과 공간, 물질, 하느님께서 주신 탈랜트를 봉헌하는데 결코, 인색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번 한 주간도 하느님께서 흔들어 넘치도록 주신다는 약속을 믿는 가운데 행복하시길 빕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첫댓글 아멘!~~~"하느님의 사랑"
묵상 하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