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샘추위
灘川 이종학
사오일 동안 섭씨 영상 10도 이상의 기온이 계속되더니 갑자기 나목(裸木)들이 아파트 창 너머로 아련하게 연두색을 칠한 듯 변해 보였다. 저건 나무에 물이 오 르고 있는 게 아닌가? 가슴이 설렌 나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달려나갔다. 북극권에 들어 있어 겨울이 긴 이곳, 캐나다 에드몬톤에도 입춘 우수 경칩이 다 지나고도 감 감 무소식이던 봄이 기어이 오는가 보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 뭐 이런 수사적인 의 미에서가 아니라 나이 든 사람들에게 봄소식은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확인하는 기회를 갖게 한다. 한 해를 무사히 넘기고서 새로움을 다시 맞을 수 있다는 요행과 기쁨이 어울어저 가슴을 따스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길가에 늘어선 나무에 가까이 다가서서 앙상한 가지를 잡고 들여다 봤다. 있 었다. 어제까지도 보이지 않았던 여초록색 아기잎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여기저 기 탄생하고 있었다. 조석으로 지나다녔음에도 미처 눈여겨보지 못했던 싱그러운 광경이다. 조심스럽고 수줍은 듯 살포시 고개를 내미는 새잎이 있는가 하면 고사리 처럼 쪼글거리는 머리 를 내민 놈들, 소녀의 젖꼭지를 연상케 하는 몽실몽실한 놈 들도 있다. 생명의 기운을 머금은 모색은 무엇이든 감동으로 다가온다. 새 생명을 볼에 대고 소생의 기운을 같이 마셔본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모진 바람 앞에 무슨 그리움으로 눕지도 않고 서서 하늘을 향해 춤추던 벌거숭이 나무들은 바로 이 경이 로운 생명을 남몰래 잉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곧 녹음방초의 새로운 세상이 펼처질 것이다. 때마침 남동풍이 살랑거린다. 나 뭇가지를 희롱하듯 푸드덕거리는 새들의 목소리도 더없이 청아하다. 당장 어디선가 나비가 춤을 추며 날아들 것만 같다. 그러나 성급한 착각이었다. 경이롭고 싱그러운 새 생명의 축전에도 적자생존의 엄격한 자연법칙은 역시 비켜가지 않았다. 옷깃을 세울 틈도 주시 않고 갑자기 잎샘추위가 닥친 것이다. 기온이 밤사이 곤두박질치더 니 겨울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 못난 매운바람이 사납게 나뭇가지를 흔들어댔다. 냉 기를 품은 바람이 불면 체감온도가 10여 도씩 예사로 떨어지는 게 이곳 기후의 특징 이다. 그래서 잎샘추위나 꽃샘추위는 너무나 혹독하다. 한국에서는 2월을 ‘시샘달’ 이라고 한다. 꽃샘추위와 잎샘추위가 동시에 들이닥쳐 여린 생명에게 상처를 남긴 다. 이곳은 보통 새잎이 나오고 나서도 한참 뒤에 꽃이 피기 때문에 잎샘추위와 꽃 샘추위 사이에는 한참 간격이 뜨막하다. 4월 중순에서 5월 중순에 걸친다.
잎샘추위나 꽃샘추위라는 말은 순수한 우리말인데 정말 신산스럽고 얄미운 현실감 을 유감없이 들어내지만 한편으로는 맛깔스러운 여운을 남기는 말이다. 기대는 언제나 배신을 당하기 위해서 탐스럽게 열린다더니 한참 신바람이 나서 콧노래를 부르는 판국에 느닷없이 찬물을 끼얹는 형국이다. 잔뜩 겁을 먹은 새잎들은 몸을 떨며 추위를 견디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다. 기가 꺾이고 호흡도 멈춘 듯한 형국 으로 위축되어 버렸다. 바람이 불면 순순히 눕는 풀처럼 조용히 순응하는 생태적 인 습성을 갖고 태어났느지도 모른다.
새잎은 앞으로 계절의 여왕으로 칭찬을 자주 받겠지만, 반면으로는 정말 많은 일을 해내야 한다. 녹음 천지를 이루어 꽃도 피우고 열매를 맺어 씨를 뿌려야 한다. 그늘 을 만들어 날짐승과 곤충에게 안식할 낙원을 제공할 소명도 갖고 있다. 그리고 앞 으로 끊임없이 닥칠 폭풍우와 갈증의 시련을 이겨내야 한다. 걸핏하면 달려드는 병 충해의 위기까지도 극복하자면 강인하고 굳건한 저항력이 절실하다. 잎샘추위는 바 로 이런 예정된 단련을 시키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 위기를 당하면 최선을 다해 저 항하고 극복하는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양적인 조절을 통해서 질적 향상을 도모 하는 오묘한 자연의 섭리가 때맞추어 하모니를 이루는 것이다. 새잎을 시샘하는 게 아니라 연단으로 생존력을 키우는 것이다.
오래지 않아 화려한 앞날을 기약하는 통과 의례적인 시샘추위를 오히려 자양분으로 삼은 새잎들은 거침없이 자라 강렬한 햇빛과 더불어 진녹색 향연을 구가하리라, 그 리고 숙명처럼 어김없이 찾아올 꽃샘추위 때에는 꽃들을 향해 의연하게 체험자로서 위로와 격려의 한마디를 빼놓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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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생님의 좋은 글 감상 잘했습니다.
새잎:바람이 불면 순순히 눕는 풀처럼 조용히 순응하는 생태적 인 습성을 갖고 태어났느지도 모른다.
'생명의 기운을 머금은 모색은 무엇이든 감동으로 다가온다.
새 생명을 볼에 대고 소생의 기운을 같이 마셔본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모진 바람 앞에 무슨 그리움으로 눕지도 않고 서서 하늘을 향해
춤추던 벌거숭이 나무들은 바로 이 경이 로운 생명을 남몰래 잉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감상 잘 하고 갑니다. 선생님 늘 건안 하소서!.
고맙습니다.
위기를 당하면 최선을 다해 저 항하고 극복하는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양적인 조절을 통해서 질적 향상을 도모 하는 오묘한 자연의 섭리가 때맞추어 하모니를 이루는 것이다. 새잎을 시샘하는 게 아니라 연단으로 생존력을 키우는 것이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이국의봄기운을 보는것 같군요 건강하세요
" 기대는 언제나 배신을 당하기 위해서 탐스럽게 열린다더니
한참 신바람이 나서 콧노래를 부르는 판국에 느닷없이 찬물을 끼얹는 형국이다.
...잎샘추위는 바 로 이런 예정된 단련을 시키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 ".
좋은글 잘 감상했습니다. 선생님 건강하시고 행복하소서.
훌륭한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