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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8.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 금요일 강론>
<마르4,26-34>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26 말씀하셨다.“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27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28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29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30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31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32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33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34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
오늘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이전의 철학은 플라톤 철학이었습니다. 플라톤의 진리 추구 방법은 연역법(deductive method,演繹法)으로, 이미 알고 있는 하나 또는 둘 이상의 명제를 전제로 하여 명확히 규정된 논리적 형식들에 근거해 새로운 명제를 결론으로 이끌어내는 추리의 방법입니다.
플라톤은 선이라는 이데아가 있고 이 이데아를 우리가 부여받는다고 여겼습니다. 그는 육신을 영혼의 감옥이라고 했습니다. 이원론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이론은 그리스도께서 육화된 신비를 잘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시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번역이 되었습니다. 스승 플라톤이 사유를 통한 이데아의 세계를 추구했다면,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손으로 만져지고 경험할 수 있는 세계로부터 얻은 지식에서 보편적인 원칙을 도출하는 데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리 추구 방법은 귀납법(inductive method, 歸納法)으로, 구체적인 사실이나 현상에 대한 관찰로서 얻어진 인식을 그 유(類) 전체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으로 이끌어가는 절차이며, 인간의 다양한 경험, 실천, 실험 등의 결과를 일반화하는 사고 방식입니다.
플라톤은 육신과 영혼을 분리하는 이원론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과 육신의 통합이라는 일원론이며, 이것이 완덕이라는 것입니다.
경험하는 육신과 영혼의 통합을 통해서 지어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사추덕이라고 합니다. 즉, 용기, 절제, 정의, 지혜 입니다.
이런 사추덕은 몸으로 지어낼 수 있으면서 동시에 마음의 충만함을 얻을수 있어서 이것은 덕이되며 행복을 준다는 것이지요. 코로나19 이후로, 우리는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건가?” 생각하게 되었지요.
나 혼자만의 삶이 아니라 함께하는 삶이 답이다. 여기까지는 알았어요.
그러면 함께 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함께해야 하는가? 마크 트웨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인간은 배고프지 않으면서도 먹을 수 있고, 목마르지 않을 때도 마실 수 있으며, 그리고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데 배우지 못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면,
행복하지 못하고 불행하게 살고,
정신적으로 건강해야 하는데, 정신장애를 앓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디에서 연유할까요?
그것은 바로 자유의지를 서로 침해하면서 생긴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DNA를 통한 유전적 욕구들이 있지요.
생명보존, 사랑 소속, 힘 성취, 자유, 즐거움의 욕구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욕구들을 자기 혼자만 충족시키겠다고 하면 상대편의 자유의지를 침해하게 되고, 지극히 이기적인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 안에는 상대편의 자유의지를 침해하게 될 때 “어? 이렇게 되면 우리 관계가 깨질텐데?” 하는 경고 신호가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마음이 불편한 것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느님을 향하지 않고 나를 향하게 되면 상대편에 대해서 판단 평가하게 됩니다.
그리고 비판을 합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지요.
바벨탑을 쌓듯이 내 자아의 탑을 쌓는 것이지요.
나를 위해서는 이것이 옳고, 저들을 위해서는 이것이 옳다고 생각하며,
판단 평가해서,
비판하고 비난하고 불평하고 잔소리하고 벌주기, 통제 위한 상을 주기도 합니다.
결국에는 관계가 깨지기 때문에 슬픈 것입니다. 행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행복을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우리 육신에 병이 난 다음에 치료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합니다.
병원들은 수술할 때까지 기다리라 하지요.
예방의학이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환자 개개인이 수술비를 대기 때문이지요. 유럽은 수술비를 법으로 나라에서 주어야 하기 때문에 예방의학이 발달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미국의 의료법을 따라서 개인이 수술비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시스템이 바뀐다는 것이지요.
미국과 유럽의 의료법이 함께 통합이 된다는 것이지요.
환자가 병원에도 가서 수술도 받지만, 예방의학이 되도록 대기업에서 시스템화시켜 환자들의 예방의학을 위해 미리 돕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기업에서 ‘의료 서비스 (Health Care)’가 허가되어서 연구중이라고 합니다.
원격시스템으로 병의 예방을 위한 진단을 하고 조치를 취하기 때문에 병원에 갈 일이 별로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병원에서는 비상이 걸려서 육신적인 치료만이 아니라 전인적인 치료를 위해서 영적치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가기위해서는 ‘영spirit’의 반영인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마음은 내 감정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내 감정이 별로 즐겁지 않고 마음이 불편을 느끼는데 헤아리기 어려운 경우에 “내가 어떤 욕구가 충족되고있지 않지?” 하고 물어야 합니다.
생존에 대한 것인지?
사랑에 대한 것인지?
소속에 대한 것인지?
즐거움이 채워지지 않아서인지?
힘 성취에 대한 것인지?
무슨 원인인지 찾아야 합니다. 생존이나 사랑에 대한 것은 금방 드러납니다.
어디에 소속되어 있다는 감을 느끼지 못해도 마음이 불편해 집니다.
즐겁지 않으면, 즐거운 것을 내가 능동적으로 찾아서 해야 합니다. 이것을 방치하면 불행이나 정신장애가 오게 됩니다.
뒤늦게 불행이나 정신장애를 수습하려고 돈을 들이지 말고,
행복을 위해서, 또 정신건강을 위해서 해야될 일이 무엇인지 찾아서 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나 혼자가 아닌 함께 해야하는데,
상호존중이 필요합니다.
방법은?
내 안에 하느님 계시듯이 저 사람 안에도 하느님이 계심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가 언젠가 그리스도로 변화될 수 있듯이, 저 사람도 그리스도로 언젠가 변화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밀떡이 성체로 변화되듯이, 같은 피조물인 우리도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항상 열어두고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즉, 외부통제가 우리의 인간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경험하면서 그러한 경험을 통해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우리의 에고를 부수었듯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배우려고 하는지가 정신건강의 준거 중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mark4,26-34>
26 He said,"This is how it is with the kingdom of God; it is as if a man were to scatter seed on the land
27 and would sleep and rise night and day and the seed would sprout and grow, he knows not how.
28 Of its own accord the land yields fruit, first the blade, then the ear, then the full grain in the ear.
29 And when the grain is ripe, he wields the sickle at once, for the harvest has come."
30 He said, "To what shall we compare the kingdom of God, or what parable can we use for it?
31 It is like a mustard seed that, when it is sown in the ground, is the smallest of all the seeds on the earth.
32 But once it is sown, it springs up and becomes the largest of plants and puts forth large branches, so that the birds of the sky can dwell in its shade."
33 With many such parables he spoke the word to them as they were able to understand it.
34 Without parables he did not speak to them, but to his own disciples he explained everything in priv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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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외부통제와 다른 기본적인 욕구들
마크 트웨인이 했던 말이 있다. 즉, 인간은 배고프지 않으면서도 먹을 수 있고, 목마르지 않을 때도 마실 수 있으며,/ 그리고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즉, 외부통제가 우리의 인간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경험하면서 그러한 경험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배우려고 하는지가 정신건강의 준거 중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사람과의 관계에서 당신이 그 관계를 소원하게 할 수 있는 행동이나 말을 하려고 할 때,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랑과 소속에 대한 욕구가 작동하여 주의 경고를 느낄 수 있게 되는데 이는 이러한 장치가 당신의 유전자 내에 내장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때 당신은 외부통제를 사용하면 그 관계에 많은 피해를 끼치게 되는데 그 결과 혹은 그러한 행동을 하기 전에 당신의 사랑과 소속의 유전자가 관계 절단의 우려를 인식하게 되어 그렇게 하지 말라고 경고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고를 통해 관계가 깨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외부통제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순간적으로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이는 흡사 낯선 장소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을 때 당신의 생존 유전자가 당신에게 주의를 줄 때 느끼는 감정과 유사하다.
관계를 파괴하는 말을 하기 전에 그러한 경고를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그 경고는 당신이 잘 되어 갈 수 있도록 기여할 것이다. 어느 하루 아주 기분이 좋을 때는 당신이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켰을 때이고,
기분이 나쁠 때는 당신이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하지 못했을 때이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자신의 감정에 귀를 잘 기울인다.
나는 아주 조그마한 불편함이라도 느끼게 되면 내 자신에게 순간적으로 “그래, 어떤 욕구가 충족되지 않고 있지?”라는 질문을 하곤 한다.
생존욕구나 자유에 대한 욕구는 아닐 가능성이 높다./ 목숨의 위험이나, 통제 받고 있는 것은 금방 인식되기 때문이다.
사랑과 소속에 대한 욕구일 수 있는데, 대체적으로 소속에 대한 욕구이다. 왜냐하면 사랑과 관련되는 것 역시 쉽게 인식되기 때문이다.
즐거움에 대한 욕구일 때가 있는데, 따분하고 배울 것도 없는 상황에 있으면서 무엇인가 하고자한다면, 당신의 현재 감정에 대해 불평하는 대신 즐거움을 추구하는 쪽으로 관심을 가져보라. 우리 모두는 행복의 기회를 가져야한다는 인식 하에 법의 제정 및 법적 제도의 마련, 학교나 대학, 사회복지활동, 의학, 정신치료, 심리학, 군대, 교도소 등에 엄청난 돈을 투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노력이 과도한 외부통제가 우리에게 미치는 피해를 줄이기 위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막대한 노력은 불행이나 정신장애에 과심을 두기보다는 행복이나 정신건강에 관심을 둠으로써 줄여나갈 수 있을 것이다.
(경고: 정신과 치료가 당신의 정신건강에 피해를 줄 수 있다, 생활심리 시리즈 31, William Glasser, M.D. 저, 박재황 역, 도서출판 계림, 2015,p150-152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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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제5계명
사람을 죽이지 마라
398 그리스도인은 평화주의자여야 하나요? 교회는 평화를 위해 전력을 다하지만, 극단적인 평화주의를 설파하지는 않습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의 군대와 공동체로부터 정당방위나 무기를 이용한 기본적인 방어 권리를 빼앗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도덕적인 측면에서 전쟁은 오직 최후의 수단으로만 용인될 수 있습니다.[2308]
가난한 이들의 생활 여건을 개선하는 것이 무기를 사는 것보다 더 나은 전략이라고 생각합니다. 테러리즘과의 전쟁은 군사 행위를 통해 성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무하마드 유누스(1940년 출생), 노벨 평화상 수상식에서)
전사자의 수는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여러 역사가의 견해에 따르면, 16세기에는 전 세계적으로 전사자의 수가 약 150만명에 이르렀고, 17세기에는 약 600만 명, 18세기에는 약 650만 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19세기에는 그 수가 4000만명에 까지 이르렀고, 20세기에는 전쟁과 그와 유사한 사건을 통해 1억 800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교회는 매우 분명하게 전쟁에 반대합니다. 전쟁을 피하려면 그리스도인들은 사전에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들은 무기 축적이나 무기 거래에 반대하고, 인종적, 민족적, 종교적 차별에 맞서 싸우며, 경제적, 사회적 불의를 종식하는 데 기여함으로써 평화를 공고히 해야 합니다.->283-284
(YO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314)/ —//— 제5절 다섯째 계명 살인하지 못한다(출애20,13) “살인하지 마라, 살인하는 자는 누구든지 재판을 받아야 한다.”. 하고 옛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을 받아야 한다(마태5,21-22). ->2308 모든 시민과 모든 위정자들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전력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전쟁의 위험이 있고 적절한 힘을 지닌 관할 국제 권위가 없는 동안에는, 참으로 평화 협상의 모든 방법을 다 써본 정부들의 정당 방위권은 부정할 수 없다.”(사목 헌장, 79항)(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827)/ I.창조에 관한 교리교육
->283 세계와 인간의 기원 문제는 많은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러한 연구는 우주의 생성 시기와 크기, 생명체의 등장, 인간의 출현 등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풍부하게 해 주었다. 이러한 발견으로 우리는 더욱더 창조주의 위대함을 찬미하고, 그분의 모든 업적과, 학자들과 연구자들에게 주신 지능과 지혜에 대해 감사한다. 그들은 솔로몬처럼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은 나에게 만물에 대한 어김없는 지식을 주셔서 세계의 구조와 구성 요소의 힘을 알게 해 주셨다……만물을 만드신 하느님의 지혜의 가르침을 받아서…..그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지혜7,17-21).
->284 이러한 연구에 큰 관심을 기울이다 보면 자연 과학 고유의 영역(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138)/
을 넘어서는 다른 차원의 질문들로 강렬한 자극을 받게 된다. 이 질문은 단순히 언제 어떻게 우주가 물질적으로 생겨났는가, 또는 인간은 언제 발생했는가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러한 기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다. 그 기원이 우연이나, 맹목적인 운명이나, 이름 모를 필연성의 지배를 받는지, 또는 하느님이라고 불리는, 지성을 지닌 선한 초월적 존재의 지배를 받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만일 세계가 하느님의 선과 지혜에서 연유하는 것이라면, 왜 악이 존재하는가? 악은 어디에서 오는가? 악은 누구의 책임인가? 악에서 해방될 수는 있는가? 하는 것들을 묻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139)/
천주교 식사동성당 (성체성혈) | 2022.1.28.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 금요일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