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저런 얼굴로 뭘!
우리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이 말은 어려서부터 듣고 배워온 우리 생활에 아주 익숙한 용어이다.
원래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정치적 동물”(Zoom Politikon)이라 명했다.
그런데 세네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텍스트를 라틴어로 변역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동물”(Animal Socialis)l)로 전환시켰다.
인간은 결코 정치공동체(사회공동체)를 떠나서는 한 순간도 혼자 살 수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도 인류시조 아담을 창조하신 후에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 하여 돕는 배필로 하와를 그에게 주시지 않았는가?
이것이 바로 사회적(정치적) 공동체의 시작이며 이렇듯 필연적인 공동체 생활 속에서 상호간의 관계는 매우 중요한 변수가 된다.
“저 사람은 인상이 참 좋아”
“저 사람은 인상이 별로네”
“저런 인상으로 무엇을”
하는 말들은 생활 주변에서 흔히 듣고 또 자주 사용하는 말들이다.
인상이 좋다는 말은 그 만큼 호감이 간다는 말이어서 상호 관계를 맺고 싶다는 의향이 배인 말이다.
인상이 좋은 사람은 그만큼 사회 공동생활에서 이득을 얻게 되고 상대에게 후한 대우를 받게 된다.
반면에 인상이 좋지 않은 사람은 사회생활과 상호관계에서 공연히 불이익을 당하거나 편견에 휘둘릴 수가 있다.
인상(人相)이란 어떤 대상에서 느껴지는 느낌이나 감정으로, 대체로 사람의 얼굴에서 풍기는 면모(面貌)를 일컫는 말이다.
얼굴에 그 사람의 삶의 여정이 담겨 있다는 뜻이다.
하여, 사람의 인상은 그 사람의 삶의 이력서다.
그 사람의 영혼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그 사람의 얼굴(인상)이라 한다.
링컨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람은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고도 했다.
관상가들은 마음과 생각을 다스리면 인상이 바뀌고 인상이 바뀌면 그 사람의 운명이 달라진다 한다.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에 보면 선생이 젊었을 때 과거시험에 번번이 낙방한후 ‘마의상서’라는 관상책을
구해 거울을 갖다 놓고 자신의 관상을 보니 가난과 살인, 풍파, 불안, 비명횡사 할 액운이 다 끼어 있었다.
최악의 관상인 자신의 관상에 탄식하던 김구의 눈에 책의 마지막 구절이 들어왔다.
상호불여신호(相好不如身好)
신호불여심호(身好不如心好)
'얼굴 잘생긴 관상(觀相)은 몸이 튼튼한 신상(身相)만 못하고,
몸이 좋은 신상은 마음씨 좋은 심상(心相)만 못하다.'
얼굴보다 마음가짐이 제일 중요 하다는 얘기였다.
용기를 얻은 그는 책을 덮고 좋은 심상을 만들지를 생각했다.
좋은 마음이란 덕을 쌓는 마음을 가리킨다.
그리고, 덕에는 음덕(陰德)과 양덕(陽德)이 있다
음덕이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은연중에 덕을 쌓는 것이요
양덕은 자신의 선행을 드러내면서 쌓는 덕이다.
맑은 인상, 밝은 인상의 온전한 주인은 그가 곧 음덕을 쌓는 사람이다.
요즈음 젊은이들 사이엔 남녀 구별 없이 성형수술이 유행이다.
얼굴에 칼을 대어 타고난 운명(?)을 한번 바꿔보겠다는 심사인 듯하다.
서양에서는 ‘다비드 상“이나 ”비너스 상“의 얼굴을 최고로 치는 상(相)이라면, 동양에서 최고의 관상은 단연 “부처”의 얼굴이다.
부처의 “염화미소”엔 만복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얼굴에 담겨 있는 복은 미소(웃음)로 피어나는 모양이다.
웃는 얼굴에는 감히 침도 뱉지 못한다는 오래된 우리들의 속담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의 관상(인상)은 어떠해야 하는가?
원래 우리 사람들의 관상(얼굴))은 하나님의 형상(관상)을 담고 태어났다
하여, 세상 관상가들이 좋다고 말하는 “봉황상”이나 “사자상” 또는 “호랑이상”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스스로 존재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관상”의 모형이 아니던가?
비록 오랜 세월동안 우리의 관상(얼굴)이 험하게 일그러졌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본래의 관상을 찾을 수 있다.
세상 관상가들도 입을 모아 관상을 너무 맹신하진 말고 스스로 열심히 마음을 다스리며 살아갈 것을 권장한다.
관상이 별로 좋지 못했던 베드로도 여인들을 향하여 그대들의 단장을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것이 곧,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기 때문이다(벧전3:3-4)라고 말한다.
지상에 계실 때의 예수님의 관상은?
성경 말씀은 이렇게 증명하고 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53:2)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관상” 같은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본래 하나님의 형상(관상)으로 지음을 받았으니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상관) 속에 살아간다면 참으로 우리들의 관상은 최고의 관상이 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선 "성품변화"가 곧 관상(얼굴)을 바꾸는 이른바 "성형수술"인 것이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
본래의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 되어야 한다.
타고난 관상이 우리들의 운명을 결정 지울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들의 변질된 얼굴(관상)을 본래의 타고난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는 것이 최고의 안전한 성형 수술대인 것이다!
[카스다/임세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