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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학연구소, 2024. 여름호>
나의 시, 나의 시론 / 박일만 -
【신작시】 - 2편
꽃샘
신께서는 초지일관 집정하고 계시는 거라
아득한 옛날부터,
지구를 빚어 우주에 던져 놓고
이리저리 굴리며 색칠하고 배치하고
공기놀이하고 계시는 거라
산천을, 물줄기를, 바람과 나무, 새와 꽃을 앉히고
맨 끝자리에 인간을,
수십 억 년을 떠도는 지구
욕망덩어리 인간이 제멋대로 살고 있는 거라
참으로 가관인 돌덩이,
인간 욕심은 넝쿨처럼 자라 세상을 뒤덮고
점점 혼란과 피폐와 아우성으로 끓는 거라
배를 까뒤집고 누운 산천, 목을 꺾고 뒹구는 나무,
냄새나는 바람 줄기까지
물은 피 맛으로, 새들은 노랫말을 까먹고
종내에는 꽃들이 통곡하며 모가지를 내밀 무렵,
신께서는 여전히 통제하고 계시는 거라
지구를 심판대에 올려놓고
꽃들의 옆구리를 찔러 얼굴을 찡그리게 한 거라
말미암아 인간들은 추위를 더 감내해야 하고
꽃은 저만치에서
오던 걸음을 멈추고 서성대고 있는 거라
잠시, 그것인거라
숲의 정령들
화살처럼 빛이 쏟아지는 숲
나무들이 푸른빛으로 살을 맞는다
머리에 새 둥지를 얹고
혹은 꽃잎을 틔워 자손 번식 한창이다
산을 지키고
숲의 주인으로 묵언 수행하는 나무들
스스로 절이 되고 중이 되고
독경소리 풀어 산 아랫마을을 적신다
해가 갈수록
쌓여가는 연륜이 중심을 더욱 깊게 한다
둥글게 부푸는 나이테가 땅속에서
기운을 힘차게 끌어 올린다
숲을 지배하는,
영혼을 성장시키는 진통은 늘 서늘하다
군장을 갖춰 메고 숲을 지키는 초병의 모습으로
처연하게 숲속을 응시하는 나무들
세상을 온몸으로 음미하며
제사장처럼 두런거리는 나무들
표창 같은 햇살을 손에 쥐고 숲을 지킨다
서로의 몸에 귀를 대고
짧은 생을 길게 점쳐 본다
【자선시】 - 3편
누보 로망을 위하여*
한가지 미소로 피지 않습니다
동시다발로 나타나지 않지요
저마다의 얼굴과 보폭으로 세상에 옵니다
떼로 몰려 살지 않습니다
끼리끼리 모이거나 울타리를 세우지도 않지요
꿀 따는 벌이나 나비처럼 혼자 삽니다
무게를 잡지도 않습니다
펜으로 권력을 세워 상을 주거나 무기로 쓰지도 않지요
떨어지는 꽃잎을 차곡차곡 쌓아 거름으로 씁니다
더더욱 유파를 만들지도 않습니다
차갑고 냉철한 이성으로 정수리에 꽃잎을 피우지요
저만의 향기를 품어낼 뿐 바람에 묻혀 퍼뜨리지 않습니다
꽃들은 그렇게 스스로 재단한 옷을 걸칩니다
모더니즘, 리얼리즘으로 직조하지 않지요
꽃들은 그렇게 스스로 발효시킨 향기를 두릅니다
낭만주의, 사실주의로 몸치장하지 않지요
뽐내거나 내세우는 일 없이 철마다 세상에 향기를 날립니다
꽃은,
*알랭 로브그리예의 문학전반에 대한 반성 이론서
『시산맥』2022년 봄호
프로파간다
웃음을 감춘 야성
자비나 선정은 반역인 거다
사마귀가 거대한 앞발로 옥죄이듯
한번 잡은 대세를 지키려고 혈안인 거다
그들만의 잔치에 인간들을 동원하는 거다
시대가 꽃을 피우는 꼬락서니를 못마땅해 하고
오직, 경직된 현재만 좇는 거다
자유와 사상과 더불어
그 아무런 실체도 허용하지 않는 거다
정신을 말뚝에 묶어 놓아야 시대가 바로 선다고
주장하는 거다
가끔, 그들이 쳐 놓은 철조망에 걸려
파닥거리게 하는 거다
그들이 허락한 자유란 허울 좋은 전략일 뿐
무참한 세계에 생의 이치를 강제 주입하는 거다
표정 잃은 바위가 돼가는 인간들을 향해
더욱 모범적, 모범적이어야 한다고
채찍질하는 거다
얼굴에 짙은 분장을 하고 사뭇 진지한 몸놀림으로
사랑이란 문화를 좀 먹는 거라
규정하는 거다
그러므로
그들은 종내 무너지는 거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영혼이 자유로운 존재
그 앞에 그들이 무릎을 꿇는 거다
몸은 체제에 억눌려도
사랑은 영원한 거라는 걸 그들이 간과한 거다
야성의 종말은 그런 거다
『현대시학』2023년 3~4월호
명불허전
벽을 부수고 나아가기보다
벽을 타고 넘는 거라
직면한 현실을 회피하지 않는
대담한 정신이 가미된 생은
늘 호쾌한 거라
잘 발효된 체험도 존재하고
잘 숙성된 정신도 존재하여
곧게 발아하고 성장해 얻은 열매,
그 씨앗이 매달아 놓은
목표 지향적 도달인 거라
무엇이든 다 포용하고
무엇이든 고루 버무릴 줄 아는
생이 낳은 능력이라고
호명되기도 하는 거라
수 많은 별들이 사윌 때 오히려
홀로 빛을 발하고
완성이라는 정상은 애초부터 없었으므로
때로는 부드럽고 때로는 날카로운 삶이
인생이라는 맡은 배역을 거뜬히 소화해 낸 결실,
생이 다하는 순간
이름을 남긴다는 것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라
그럴 만한 운명인 거라
『문파』2023년 겨울호
∥나의 시론∥
계절을 마름질하는 재단사는 지구
나는 자연주의자다. 자연 속에서 시의 소재를 찾고 자연에서 사람을 찾는다. 그러므로 사람 관계도 자연현상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궁극적으로 자연과 사람은 동일체이다.
이 두 관계 속에 시의 싹이 있고, 가지가 있고, 열매가 열린다. 그것을 믿기 때문에 내 눈은, 내 의식은 늘 자연과 사람에게 머물러 있다.
계절을 주시하고 시절을 느끼며 밤과 낮, 그리고 시간을 주시하는 자연주의자이다.
인간과 자연은 필연적인 관계이다. 절대적인 관계이다. 이를 토대로 인간은 태곳적부터 조물주가 재단해놓은 관계 형성망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어느 날부터인가 이 관계를 거부하거나 거역하면서 살아왔다. 마치 적을 대하듯이 맹목적으로 대치해왔다. 보이는 것마다 소유하려 들고 닥치는 대로 이용하며 훼손하면서 살아왔다.
그러한 역사가 아주 오랫동안 지속하면서 인간과 자연은 자연스럽게 적대적인 동지의 관계로 발전하였다.
현세대를 살펴보면 명약관화해진다. 인간이 제아무리 자연을 친하게 개발해도 자연은 오히려 이를 거부한다. 이 거부반응의 양상은 때로는 폭우로, 때로는 폭설로, 때로는 산사태로, 때로는 물난리 등으로 보여준다.
이로 인해 인간은 생활에 제약을 받는다. 결과적으로 자연이 인간에게 재앙을 주는 꼴이다.
추위도 그중 하나이다. 지구가 회전하면서 인간 세상에 봄이 올 때가 되었지만 자연은 보란 듯이 이를 늦추거나 앞당긴다.
때아닌 추위를 동원하여 인간에게 멋있게, 기대치에 치명타를 입힌다. 이것이 꽃샘이요 자연의 위대함이다.
인간이 저지른 패륜 앞에 지구가 관장한 또 하나의 응징으로 나타난 현상이 곧 코로나 팬데믹(pandemic)이었다. 자연은 인간을 향해, 전염병을 온 누리에, 인간이 거주하는 곳마다 퍼뜨렸다. 매우 넓게 매우 깊게 저주를 퍼부었다.
이 바이러스는 그러므로 사람과 어울리며, 사람들 속에서 생성되고, 사람 사는 곳을 점령했다. 원인도 알 수 있고 결과도 뻔히 가늠할 수 있었지만 인간은 무방비 상태로 숙주가 될 수밖에 없었고, 한동안 그들과 함께 아우성치며 살았다. 그리고 바이러스는 더욱 창궐했다.
인간이 오기 전에 지구는 마냥 파랗고 청량한 행성이었다. 원시림에서 부는 바람은 맑은 햇빛과 만나 대지와 사랑을 하고 온갖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했다. 지상은 낙원이었다.
하지만 인간이 나타나고부터 지구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고 인간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긁히고 파이고 오염되고 부패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야생에서 저희끼리 잘 살아가고 있는 동물을 잡아먹고, 학대하고, 온갖 야만적인 행위를 일삼는 인간, 인간의 잔인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래서 지금도 지구는 여전히 골병을 앓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자각하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파괴행위를 하고 있는 인간, 인간이라는 암종들이 득실대고 있는 지구의 현실은 참으로 참담하다. 우리는 지금 이렇게 무지몽매한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하여 참다못한 조물주가 바이러스를 지구에 내려 보내서 소리 없이 인간을 단죄하고, 괴멸시켜서 원래대로 지구를 푸른 낙원으로 복원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업보(業報)이다. 코로나-19가 그 증거로서 충분하다. 인간들의 자성이 필요한 시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파괴행위는 중단돼야 한다. 지구에게 사과해야 한다. 용서를 빌고 지구를 치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류는 결국 소멸될 것이다.
시로서도 소설로서도 또는 예술로서도 사과하고 용서를 빌며 위로해 줘야한다. 그것이 자연 속에서 시(詩) 또는 예술을 창조하는 가장 위대한 행위이다.
숲의 제사장인 나무들이 세상에 이르러
세상에 인간이 있다면 숲에는 나무가 있다. 나무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주인의 위치에 있다. 인간이 제아무리 숲을 헤집고 다녀도 나무는 의연하다. 왜냐하면 숲은 나무를 절대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무는 명실공히 숲의 주인이다.
그렇다고 나무는 숲을 지배하거나 개발하지 않는다. 그저 인내하며 숲을 지킬 뿐이다. 그럼으로써 나무는 숲을 관장하는 정령이 되는 셈이다. 조용히 세상을 응시하며 고행을 하듯 한자리를 지키면서 서로서로 연대를 이루며 살아간다. 그것이 나무의 주어진 숙명이라 여긴다.
나무는 세속에 나가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탓하지 않는다. 나무는 산을 주재하는 신령이다. 신의 경지를 넘어선 존재이다. 그러므로 나무는 죽어서도 뼈를 숲에 묻는다.
숲은 세상을 키우고, 세상은 예술을 키우고, 예술은 문학을 키우고 문학은 시를 키운다. 이처럼 어우러진다는 목표의 중심에는 늘 시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숲속에 마을이 있었다. 마을 입구에는 숲속을 나온 정자나무가 있었고, 마을 뒷산 초입에는 당산나무가 있었다. 정자나무가 마을 앞을 지키는 파수꾼이라면 당산나무는 배후에서 감싸 안는 자세로 품에 안듯 마을을 지키고 서 있는 경비병인 셈이다.
어떤 마을에서는 당산나무가 뒷동산에 마치 수호신처럼 서 있다. 수령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큰 고목이다. 수백 년 전부터 마을의 성쇠를 지켜보며 살아왔을 것이다.
나무 아래 그늘은 사람들에게는 휴식처가 되기도 하고, 마을의 안녕을 비는 당산굿이 열리는 장소이기도 했다. 물론 아이들의 놀이터이기도 했다. 사람들, 특히 아이들은 놀이기구처럼 당산나무를 타고 오르내리곤 했다. 새처럼 바람처럼 다람쥐처럼.
일찍이 마을을 떠났던 사람들이 늙어서 귀향하여 살펴본 당산나무가 그랬을 것이다. 숲의 입구를 우뚝한 자세로 지키고 있는 거목들은 대부분 숲의 역사에 익숙하다.
시와 사람이 그렇듯 숲과 나무는 보완관계이며 동일체라 할 수 있다.
소속되지 않은 주변인의 장르
애초에 예술의 시작은 하나였다. 한 몸이었고 함께 뒹굴며 살았다. 그리고 역사를 함께 써 왔다. 그런 하나의 시대가 변하면서 둘로 나뉘고, 둘은 넷으로 나뉘고, 넷은 무한히 씨앗을 퍼트렸다.
그 결과 예술은 이합집산을 자랑으로 삼고 살고 있다. 오늘날의 현상이 모두 그 분파행위의 결과이다. 여기저기서 자랑삼아 패거리를 조성하고 다른 집단을 터부시한다. 저희끼리 모여 희희낙락하고 저희끼리 피 터지게 경쟁하고 싸우기도 한다.
그것이 오늘날의 예술현장이다. 상을 만들고, 분파를 만들고, 사상을 만들고, 주의 주장을 내세우면서 자랑스러워하며 살아가는 예술이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고찰을 바탕으로 그것에 일침을 가하는 생각도 존재한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라 할 것이다.
새로운 것은 늘 도전을 받기도 하고, 헤쳐 나가야 할 경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애를 쓰기도 한다. 나는 그 속에서 사실적으로 살아가려고 한다. 자연인처럼 시를 쓰려고 애쓴다.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시대일망정 그것을 추구한다.
체제의 유한성에 기댄 시대의 우울함
권력을 잡으면 그 족속들은 변한다. 애초에 약속했거나 표방했던 이념을 여지없이 무시하고 변경하여 구성원들을 지배한다.
구성원들이 제아무리 부정하고 거부해도 권력자들은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장르에 맞는 울타리를 쳐 놓고 이들을 가두려 한다.
사상을 주입하고 이념을 강제하여 자신들이 최고라고 우겨댄다. 그러면서 절대복종을 강요하고, 강요를 정책이라는 도구로 희석시킨다.
그들의 주장에는 자비가 없다. 자기들만의 잣대를 규정해 놓고 그 울타리 안에서만 살아가라고 강조한다. 그것이 체제라고, 그것이 역사라고, 역사는 지켜야 한다고 주입 시키는 것이다.
언론을 장악하여 정권의 시녀로 앞장세우려 하고, 문화예술인들의 목을 죄어 이리저리 길들이려 하고, 토론은 사라지고 시는 위축되고 사람들은 점점 말을 잃어간다.
구성원들이 권력자를 선택한 사실을 후회해도 이미 때는 늦은 것이다. 그러므로 구성원들은 그 부류에 자신도 모르게 종속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권력자들은 서서히 구성원들에게 동화된다.
구성원들의 사이에서 살아난 강한 주제의식과 사랑의 포용성에 빨려들어 나아갈 방향을 잃고 헤맨다. 그러므로 체제의 종말은 사랑과 포용이 내뿜는 경계를 뛰어넘지 못한다.
한평생 칼만 잡던 검객이 운 좋게 우두머리가 되었다
평생 붓만 잡던 샌님이 어쩌다 졸개가 되었다
졸개가 두목 되고, 두목이 졸개가 되고 나서부터
세상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람 사는 세상
사람은 없고, 사랑도 없고 무지막지한 계략들만 난무했다
우리 동네 무단가출한 똥개들의 세계가 그렇다는 얘기다
야음을 틈타 마을을 이리저리 들쑤시고 뛰어다니며
패거리 싸움하고, 이놈 저놈 협잡하고 흘레붙고
붙었다 떨어지고 떨어졌다 붙고,
날이 새면 남는 것은 쑥대밭 마을 그 꼬락서니뿐인 거였다
- 졸시 「정권政權」 중에서
욕망이라는 기차는 편도
이유 없는 무덤이 없듯 이유 없는 출세도 없다. 저절로 이루어지는 세상사도 없다. 무엇인가를 향해 끊임없이 정진하여야 얻을 수 있는 영역이다. 인간은 애초부터 주인공의 기질을 타고났으나 살아오는 과정에서 조연도 되고 주연도 되고, 저마다의 길로 향하는 것이다.
그 길의 선택이 어느 것이든지 간에 결실은 결국 한가지이다. 그러므로 남는 것은 운명인 것이다. 운명에 굳이 근사한 이름을 붙여줄 필요는 없다. 최후에 남는 것이 그의 운명인 것이다. 생은 그렇게 출발점도 종착점도 스스로 재단하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다. 그것이 돈일 수도 있고, 명예일 수도 있고, 먹고사는 문제일 수도 있다. 인간의 이러한 욕망은 본능적이거나 아니면 후천적이거나 이다.
욕망이 인간을 행복하게도 하고 불행을 갖다 주기도 한다. 그러나 욕망을 쫓는 일의 과정은 고통만 따를 뿐이다. 결과적으로 아무런 소득도 남지 않는다. 그러므로 살아간다는 일은 욕망을 비워가는 일이어야 한다.
학습을 통하여 인간만이 가진 이성적 지혜나 깨달음으로의 삶을 지향해야 한다. 인간 본연의 정체성을 잃고 정신없이 돈과 명예에 골몰하며 생을 낭비하는 어리석은 인간이 되지 말아야 한다.
한 생애를 살아가면서 좌충우돌하는 인간일지언정 이성만큼은 지니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삶은 짐승의 삶과 다름이 아니다. 지금부터라도 고요해지고 싶다.
시의 종말을 점치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나는 감히 시 쓰는 일을 저지르며(?) 살고 있다. (박일만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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