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25일 [성주간 월요일]
요한 12,1-11
왜 자비로운 사람에게만 은총을 주시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전능하신 능력자 하느님으로 등장하십니다.
예수님은 방금 죽은 라자로를 살리셨습니다. 라자로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께 수천만 원에
해당하는 향유를 발에 붓고 머리를 닦습니다. 가리옷 유다는 그걸 가난한 자에게 주면 더 좋았을 것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부모에게 아끼는 사람이 형제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부모 때문에 형제를 사랑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에겐 은총입니다.
은총을 주시는데 전혀 반응이 없다면 그분도 더는
바보가 되려 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자비를 입으려면 먼저 자비로워야 합니다.
그 순서도 있습니다.
하느님, 부모, 형제, 이웃들입니다.
SBS TV 동물농장, 애니멀봐에서 같은 날 태어난 풍산개 남매가 서로 밥 먹을 때만 싸우는 내용이 나왔습니다.
평소에는 매우 친하지만, 밥만 나오면 유독 오빠 개는 자기 먹을 것은 먹지도 않으면서 동생 개가 밥을 먹지 못하고 뭅니다.
전문가들은 이것이 서열 정리라고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주인이라면 형제에게 자비롭지 못한 개에게 밥을 더 주겠습니까?
주인은 그 오빠 개를 묶어놓고 동생 개에게만 음식을 편히 먹을 수 있도록 줍니다.
그다음에 오빠 개도 주기는 합니다.
음식은 주는 일은 자비입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자기가 음식을 주는 대상도 자비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대상에게 자기가 자비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강탈당하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어린이를 사랑하여 ‘어린이날’을 제정한 아동 문학가 소파 방정환 선생의 일화입니다.
어느 날 밤, 방정환 선생의 집에 강도가 들었습니다.
칼을 든 강도를 만난 선생은 차분히 말했습니다.
“돈이 필요하면 그냥 달라고 하면 되지, 무슨 칼까지 들이대고 그러시오. 돈이 필요하다면 내가 주겠소.”
너무도 부드럽고 친절한 방정환 선생의 말에 강도가 더 당황했습니다.
선생이 준 뭉칫돈을 주섬주섬 챙겨 나가려 하는 강도에게 방정환 선생이 다시 말했습니다.
“이보시오. 달라고 해서 줬으면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 하지 않소.”
“고... 고맙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경찰에게 강도가 붙잡힌 것입니다.
방정환 선생 집으로 들어온 경찰과 강도를 본 선생은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허허. 또 오셨네! 방금 준 돈을 벌써 다 쓰셨단 말이오.”
그러자 경찰이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이 자가 여기서 강도질을 했다고 자백했습니다.”
경찰의 말을 들은 방정환 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사람은 강도가 아닙니다.
사정이 딱한 것 같아 내가 그에게 돈을 주었습니다.
내가 준 돈을 받고 고맙다고 인사까지 한 사람인데, 어떻게 저자가 강도입니까.”
방정환 선생의 말에 경찰은 의아했지만 어쩔 수 없이 강도를 풀어주었습니다.
경찰이 가고 나서 강도는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빌었습니다.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앞으로는 절대 나쁜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소파 방정환 선생은 강도에게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를 받아내려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강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면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억지로라도 선악과, 혹은 십일조, 혹은 작은 감사의 기도라도 받으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은총으로 악해지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자비로운 사람만이 자비를 입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25일 [성주간 월요일]
복음: 요한 12,1-11
오늘 우리는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도대체 무엇을 봉헌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도 유난히 가깝고 편안하고 절친한 가족이 있었으니, 바로 라자로와 그의 누이 마르타, 마리아네 집이었습니다.
공생활 기간동안 예수님께서는 끝도 없이 늘어선 환자들의 치유, 적대자들과의 거듭되는 논쟁으로
온 몸과 마음이 녹초가 될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즐겨 찾던 집이 베타니아의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의 집이었습니다.
휴대폰도 없던 시절, 예수님과 제자들은 갑작스레 우르르 들이닥치곤 했었는데, 그럴 때 마다 세남매는 그들을 극진히 환대하였습니다.
냉장고를 탈탈 털어 식사를 준비했고, 감춰두었던 값진 포도주를 내어놓곤 했습니다.
베타니아의 그 집은 예수님과 제자들에게는 일종의 오아시스이자 베이스 캠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을 목전에 두신 성주간 첫날 베타니아의 그 집을 또 다시 찾아 오셨습니다.
여느 때처럼 마르타는 마음이 급해지고 손길이 바빠졌습니다. 지지고 볶고, 삶고 굽고 정신없었습니다.
라자로는 예수님 맞은 편에 앉아 귀빈 접대를 하느라 바빴습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과 영적으로 깊이 일치하고 있었던 마리아였습니다.
그녀는 직감으로 알아차렸습니다.
이제 드디어 사랑하는 주님과 작별할 날이 가까이 다가왔구나.
이제 드디어 그분을 떠나보내 드려야 하는구나.
뭐라도 해드려야겠다는 마음에 마리아는 자신의 소지품들 가운데 가장 값진 것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즉시 찾아냈습니다. 자신의 소지품 가운데 가장 아끼던 물건,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챙겼습니다.
식사 중이던 예수님 발치 앞에 엎드린 마리아는 그 비싼 순 나르드 향유를 아낌없이 통째로 예수님 발 위에 부어드렸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둘러 앉아 있던 사람들은 웅성대기 시작했습니다.
저런저런 저게 얼마나 비싼 향유인데...저런 행위는 아무 사이나 하는 행위가 아닌데...공개석상에서 무슨 꼴불견이람.
그러나 마리아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너무나 당당하고 거리낌없이 자신의 긴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렸습니다.
여인들이 아주 중요시 여기는 머리카락으로 누군가의 발을 닦아드린다는 것, 보통 일이 아니겠습니다.
너무나 그를 사랑한다는 표현, 내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대상이라는 표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실 마리아가 보여준 특별한 행위는 일종의 장례 절차였습니다.
돌아가시고 나서 해드리는 것도 좋지만, 살아생전 해드릴 수 있는 가장 극진한 예를 주님께 바치는
마리아의 모습이 참으로 갸륵해보입니다.
가장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자신이 지니고있는 가장 귀한 것을 봉헌하는 마리아의 모습이
참으로 크게 다가옵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도대체 무엇을 봉헌하고 있습니까?
내가 지닌 가장 귀한 것을 대체 어떻게? 어디에? 사용하고 있습니까?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3월25일 [성주간 월요일]
복음: 요한 12,1-11: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예수님께서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1절) 베타니아로 가셔서 라자로의 집에서 식사하신다. 그 식사는 유대인들의 관습이었다. 파스카 양을 준비하기 전에 잠시 흥겨운 시간을 가졌는데, 양을 마련한 후에는 축제 때까지 단식이나 정화하는 데 마음을 쏟았기 때문이다. 마르타는 식사 준비를 하고 그리스도께 시중을 들었다. 라자로는 예수님과 함께 앉아 식사하는 영예를 갖는다. 마리아는 비싼 나르드 향유를 가져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가족의 시중드는 것을 흐뭇해하시면서 받아주신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다. “그러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3절) 향유를 부어 그 향기가 가득 차게 하는 것은 그 행위가 하느님 때문에 그리고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행은 좋은 냄새를 풍기는 향유이다. 자선을 베풀고, 병자를 찾아가고, 낯선 이들을 맞아들이는 일과 겸손, 친절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것이다. 이 향유가 온 집안 즉 그리스도의 교회를 향내로 가득 채우는 값진 향유가 될 것이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5절) 유다는 열두 사도 중의 하나였고, 돈주머니를 관리하며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믿음이 없고 사악한 유다는 자신을 믿어준 사람들을 잊어버리고, 자신이 맡고 있던 돈주머니를 횡령하는 것은 물론 자신을 믿어준 주님을 배반하고 만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7절) 여기서 보면 유다가 순수하게 말하고 주님께서는 마리아의 행동에 당신 신비를 설명해 주는 것 같다. 즉, 당신이 곧 돌아가실 것이며 향료와 향유로 당신의 장례가 치러질 것이라고 하신다.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8절)
많은 사람이 예수님과 그분이 살려주신 라자로를 보려고 몰려왔다. 그러니까 수석 사제들은 라자로도 죽이려고 결의한다. 다시 살아난 사람을 죽이려 하는 것은 바로 눈먼 자의 눈먼 생각이다.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분이 당신을 죽이더라도 당신은 다시 살아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셨다. 죽은 이들이 생명으로 돌아오고 죄를 용서받아 되살아나는 것을 보고 그들을 시샘하며 그들이 다시 죽기를 바라고 죽이고 싶어 하는지도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한다. 예수님께로 가는 것을 무엇으로 막을 수 있겠는가? 유대 지도자들은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막으려고 살해에 또 살해를 저지를 생각을 한다. 라자로를 죽이면 그 기적의 힘도 지울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러면 나는 선행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는 삶을 살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며 부활을 준비하고 있는지 성찰하면서 주님을 따르는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도록 기도하면서 이 성주간을 지내야 하겠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