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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09.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묵상글 (9/8. 21:35, 05:20, 05:45 )
1) 저는 아래 몇 분의 글만 공유합니다.
1차 공유하는 묵상글< 가능하면 전일 22시 이전> : 고인현 신부님, 호명환 신부님. (9/8. 21:35.)
2차 공유할 묵상글< 04 ~ 05시, 07시 이후 > :
< 김찬선 신부님: 05:20 추가. 호명환 신부님: 05:45 추가.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아직. >
2) 정회원님 중 다른 묵상글을 공유하실 분은 오늘 묵상글을 이 뜨락에 게재하여 주시고
지난 묵상글은 “5-1. 소금(나눔) 뜨락 1”에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3) 이 묵상글 뜨락은 8월 15일 이후에도 당분간 현재와 같이 운영*하며
전체 공지 "H. 260707" 2-1의 가-1), 나)를 실행할 계획입니다.
가-1) 프란치스칸 공동체나 개인 또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존중하는 분으로서 이 카페를 인계받아 운영할 의사가 있으신 분과 협의를 시작하고, 이 공간의 인계, 인수는 합의가 되는 대로 즉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 위 사항이 이루어지지 아니할 때는 11월 대림시기부터는 실질적으로 운영을 중단*하고, 카페의 여러 자료를 활용하실 분을 감안 당분간 존속시키고, 적당한 때(2027년 상반기 또는 그 이후) 폐쇄하도록 하겠습니다.
* * 위에 따르며 가능하면 1차 공유는 전일 22시전까지 2차 공유는 04시- 05시까지, 안되면 07시쯤 할 계획입니다.
이 시간대 이외 여러 묵상글을 보시려면 전체공지란 " H. 260707. 카페 운영에 대한 고견을 주세요." 의
2번에 들어 가셔서 안내를 받으세요 < 2026. 09.04. 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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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그대는 아내에게 매여 있습니까? 갈라서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대는 아내와 갈라졌습니까? 아내를 얻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7,25-31
형제 여러분, 25 미혼자들에 관해서는 내가 주님의 명령을 받은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자비를 입어 믿을 만한 사람이 된 자로서 의견을 내놓습니다.
26 현재의 재난 때문에 지금 그대로 있는 것이 사람에게 좋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27 그대는 아내에게 매여 있습니까? 갈라서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대는 아내와 갈라졌습니까? 아내를 얻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28 그러나 그대가 혼인하더라도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또 처녀가 혼인하더라도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혼인하는 이들은 현세의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그것을 면하게 하고 싶습니다.
29 형제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30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31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20-26
그때에 20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21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22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23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24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25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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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09.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2026.09.08 21:19
2026년 9월 9일 수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학교 말씀 기도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루카 6,20-26
루카의 ‘행복 선언’은 마태오보다 더 직접적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그냥 ‘가난한 사람’,
그리고 곧바로 ‘불행 선언(화 있으라)’이 뒤따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값을 정면으로 뒤집으십니다.
가난·굶주림·눈물·미움받음을 ‘행복’이라 하시고,
부유함·배부름·웃음·칭송을 ‘불행’이라 하십니다.
이는 가난을 미화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낮은 이들 편에 서서 돌보심’을 선언하시는 것이며,
동시에 ‘스스로 가득 찼다’ 여기는 마음을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배부르고 이미 위로받았다 여기는 이는,
남을 돌아보고 돌볼 ‘빈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가 새겼듯,
하느님의 돌봄은 ‘가득 찬 높은 자리’가 아니라
‘비어 있는 낮은 자리’로 내려옵니다.
그러니 돌봄은 그분을 따라 ‘아래로’ 향합니다.
세상이 갈라 내치던 이들 ― 가난한 이, 우는 이, 미움받는 이 ―
그 낮은 자리로 내려가 그들과 함께 서는 것입니다.
오늘 함께 기리는 성 베드로 클라베르가
바로 이 행복 선언을 몸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가장 높은 자리에 머물 수 있었지만,
스스로 ‘가장 낮은 자리(노예들의 노예)’로 내려가
버려진 이들을 씻기고 먹이고 돌보았습니다.
그 낮은 돌봄 속에서 그는 피부색의 벽을 넘어,
그들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돌봄과 일치는 이렇게,
‘내가 낮아져 함께 돌보는’ 데서 태어납니다.
돌봄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이렇게 묻습니다.
‘너의 돌봄은 어디를 향해 있는가?’
돌보기 쉬운 이, 나에게 이로운 이만 돌보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의 돌봄은 늘 ‘가장 낮은 한 사람’에게 먼저 갑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이미 배불러’ 남을 돌아볼 빈자리를 잃지 않았는가?
나는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보기만’ 하지 않는가?
나는 낮은 자리로 내려가 ‘함께 서서 돌본’ 적이 있는가?
나는 세상이 내치는 ‘가장 작은 이’를 돌보는가?
주님,
‘이미 가득 찼다’는 마음을 비우게 하소서.
높은 자리에서 내려와 가장 낮은 이를 돌보게 하시고,
그 낮은 돌봄 안에서 갈라진 이들과 하나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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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09.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2026.09.08. 17:14
신앙의 중심과 신앙의 변두리(안전하고 확실해 보이는 자리와 불확실하고 의심이 생기는 자리)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우리가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분명하게 말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분을 하느님으로서 신뢰하며 맡길 수 있겠습니까?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의심이 없는 신앙...
신앙의 중심과 신앙의 변두리(안전하고 확실해 보이는 자리와 불확실하고 의심이 생기는 자리)
2026년 9월 8일 화요일
저는 종교적 확실성보다 거룩한 무지를 더 귀하게 여기게 되었고, 같은 자리에 이르게 된 다른 동료들을 찾게 되었습니다.
—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Barbara Brown Taylor), 교회를 떠나며(Leaving Church)
작가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는 성공회 사제로서의 사목직을 그만두면서, 하느님을 더욱 깊이 신뢰해야 했습니다:
제가 그레이스-캘버리 교회에서 사임할 즈음, 저는 신앙을 확실성보다 신뢰와 더 깊이 연결된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하느님이 누구신지 분명히 말할 수는 없었어도, 그분을 하느님으로서 신뢰하였습니다. 저는 세상이 어떻게 유지되는지 분명히 설명할 수는 없어도, 하느님께서 세상을 붙들고 계심을 신뢰하였습니다.
저는 하느님께서 저와 제가 사랑하는 이들을, 삶과 죽음 안에서 붙들어 주신다고 신뢰하였습니다. 그것이 참되다는 확실한 증거 한 조각조차 주어지지 않았음에도 말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제게 신앙을 명사에서 동사로 바꾸어 주는 은총의 효과를 가져다주었지만, 동시에 그것은 제가 저의 옛 영적 지도(spiritual map)의 중심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떠나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깨달음이기도 했습니다.
다른 지도와 마찬가지로, 제 지도에도 중심과 가장자리가 있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교회가 서 있었는데, 신실한 여성들이 성체성사를 위한 빵을 굽고, 제대보를 다림질하며, 여러 세대 동안 교회 공동체에 전해 내려온 은기물을 닦았습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을 세례성사에 데려왔고, 그 아이들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자기들의 이름을 기억해 주고 따뜻하게 돌봐주는 수많은 어른들 속에서 자라났습니다…. 이 중심에 있는 이들이야말로 그 지도가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그 지도를 꼭 붙들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알고 보니, 그 지도의 가장자리는 중심에서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지 교회 밖으로 걸어 나가, 성소의 불빛이 더 이상 어둠을 밝히지 못하는 곳까지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슬레이트 지붕도, 화장실 안내판도, 예식 순서를 알려주는 인쇄된 주보나 친절한 안내 봉사자도 없었습니다. 그곳에는 단지 인간의 틀이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하느님과의 예기치 못한 만남만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감히 다 표현할 수 없는 신비였고요…. 그리고 바로 이 가장자리에 서 있는 이들이야말로, 신앙의 지도가 단순한 형식이나 관습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그 신앙의 지도를 꼭 붙들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중심과 가장자리는 영적인 지형을 형성하는 데 있어 모두 꼭 필요합니다. 이 둘은 서로가 정말로 다르긴 하지만 말입니다…. 이 두 곳에는 모두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너무 달라서, 많은 이들이 두 자리가 같은 지도 위에 함께 속한다는 사실에 동의하기를 어려워합니다. 중심에서는 분명하게 여겨지던 많은 것이, 중심에서 벗어나 광야로 나오면 더 이상 확실하지 않고 흔들리게 됩니다. [1]
브라운 테일러는 자신의 소명이 사제직 이상의 그 무엇을 계속해 가는 것이라고 느낍니다:
저의 소명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어디서든, 누구와 함께든, 성직자의 칼라를 착용하든 하지 않든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사제로서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제라는 정체성을 살아가는 사람이었던 겁니다. 이 새로운 빛 속에서, 아무것도 허비되지 않았습니다. 지나온 모든 것은 축복이었고, 앞으로 올 모든 것은 더 큰 은총이었습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인간의 조건과 자유의 선물을 생각할 때, 우리 안에 의심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의심이 없다면 믿음도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결국 우리를 하느님의 참된 본모습인 사랑으로 인도합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방식으로 그분을 만나며, 그 위대한 신비 안에서 그분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Mason M.
References
Brian D. McLaren, Faith After Doubt: Why Your Beliefs Stopped Working and What to Do About It (St. Martins, 2021), 206, 207, 212.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Jenna Keiper, CAC Environment, 2019-10-09, Photograph, CAC campus, Albuquerque NM. "되어 가는 여정" 위에서 짐을 내려놓고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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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09.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9.09 05:10
- 발돋움할 기회로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이미 위로를 받았기에 불행하다는 오늘 루카 복음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라는
마태오 복음처럼 말씀하시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루카 복음은 마태오 복음과 달리 왜 듣기 거북한 불행 선언도 하셨을까요?
이 말씀이 불행해지라는 저주가 아니니 듣기 싫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행복 선언보다 듣기 싫은 것은 사실이잖습니까?
사실 우리는 불행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 듣기 싫어하고 두려워하잖습니까?
그런데 불행을 직면하지 않으면 진정 행복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불행을 직면하지 않으면 불행의 문제만 직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행복의 문제도 직면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적당히 불행하지 않은 것으로 행복하다고 강변하고,
실은 불행한데도 불행하지 않다고 강변하기 일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즘은 ‘소확행’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거짓 행복에 안주합니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뜻의 ‘소확행’이 행복 욕심의 측면에서는 맞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 인간의 가장 큰 욕심은 행복 욕심입니다.
돈 욕심이 가장 큰 것 같아도 그것이 실은 행복 욕심의 하나일 뿐이고,
행복 욕심은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상태를 욕심내는 것이기에 더 크며,
웬만한 행복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욕심이기에 제일 큰 욕심입니다.
그러므로 이 욕심의 차원에서는 작은 행복으로도 만족할 줄 아는 것이
지혜롭고 행복의 길이지만 행복 추구의 차원에서는
특히 천국의 행복을 추구하는 차원에서 ‘소확행’은 얼치기 행복에
안주케 하는 거짓 행복일 뿐입니다.
아무튼 우리 인간은 불행을 입에 올리면 불행해질까 봐 얘기하지 않으려는데
루카 복음은 이런 우리의 소극적 자세를 정면으로 깨기 위해
불행 선언을 굳이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미 위로를 받는 것이 불행하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저는 고독사에 대한 뉴스를 볼 때마다 저의 고독사에 대해서도 생각합니다.
죽을 때 정말 아무도 없더라도 나는 평화롭게 또 행복하게 죽을 수 있을까?
오늘 위로를 이미 받은 사람은 불행하다는 말씀을 묵상하면서도
저의 고독사에 대한 생각을 다시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위로 없이도 나는 평화롭고 또 행복하게 죽을 수 있을까?
아니 지금 이미 하느님의 위로만으로도 나는 충분하게 행복한가?
솔직히 저를 들여다보면 저의 행복은 인간의 위로에 많이 의존하고 있기에,
아무도 없고 아무 위로도 없이 나 혼자 죽을까 봐 많이 두려워하고 있으며
그래서 상상 임신을 하듯 지금부터 저의 고독사를 자주 상상하고는 합니다.
말하자면 이렇게 고독사를 대비하는 것이며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위로를 이미 받은 사람의 불행을 생각하며
지금부터 하느님의 위로만으로도 행복한 저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위로를 지금 받지 못할 때 위로해 주지 않는다고 탓하기보다
하느님의 위로만으로 충분히 행복한 나로 발돋움할 기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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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09.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2026.09.09. 05:41
이 순간에도 하느님께서는 서서히 당신 은총의 물방울을 계속 떨어뜨려 우리 존재를 부드럽게 다듬어 주고 계십니다!
루카 복음서 6장 17절에는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지점부터 6장 끝까지의 말씀은 마태오 복음서의 "산상설교"(마태 5–7장)와 달리 "평지설교"라고 불립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같은 설교이며, 다만 표현과 강조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루카 복음에서 산은 기도와 계시의 장소로 여겨지기에, 루카는 군중이 산에 오르는 대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려오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루카 복음의 진복팔단에서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바로 "가난"입니다. 루카 복음 전체에서 가난에 대한 특별한 강조가 드러납니다. 루카는 우리가 이를 단순히 영적인 의미로만 돌려버리지 않도록, "영(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 5,3)이라고 하는 대신 "복되어라, 가난한 사람들!"(루카 6,20)이라고 하며 단도직입적인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못 알아들을까 봐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루카 6,24)이라는 경고까지 덧붙입니다.
그리스어에서 "가난한 사람"을 뜻하는 단어는 πτωχός(ptochos: 프토코스)입니다. 이 말은 구걸하거나 자선을 청하는 상태, 재물이나 권세, 지위, 명예가 없는 상태, 스스로 어떤 목적을 이룰 힘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프토코스(πτωχός)가 "몸을 웅크리다"라는 뜻의 ptosso(프토소)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는 것입니다. 즉, "가난한 사람"은 무릎을 굽히고 상체를 앞으로 숙인, 겸손히 웅크린 사람을 가리킵니다. 세상 기준에서는 종종 무시당하고 멸시받는 자세이지요.
그런데 이 자세는 불쌍하게 웅크리고 있는 자세로 이해하기보다는 참된 것을 인내심과 겸손으로 기다리는 자세로 이해하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은 서서히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를 부드럽게 깎아내듯이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우리에게 다가오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이 하느님 은총은 금방 어떤 효력을 내는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에 그냥 무심코 생각하면 지금 어떤 은총이 나에게 주어지고 있는지를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느님께서는 서서히 당신 은총의 물방울을 계속 떨어뜨려 우리 존재를 부드럽게 다듬어 주고 계시다는 사실을 의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루카 복음의 내용은 마태오 복음의 내용과는 달리 '불행 선언'을 넣고 있습니다. 대칭을 이루는 구조가 시적인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루카 복음 저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이런 문학적인 측면이 아니라, 세상적 가치 대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 자기 힘이나 능력에 의존하는 삶 대신 하느님께 의탁하는 삶, 즉 하느님과 연결된 삶으로의 전환을 촉구하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과 연결된 삶이란 하느님께서 끊임없이 당신 은총의 물방울을 우리 존재에 떨어뜨려 주고 계시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삶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유함 자체가 문제일까요? 아닙니다. 문제는 재물이 아니라, 우리가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고 또 사용하지 않는가에 있습니다. 인간은 이기심과 탐욕에 빠지기 쉽고, 이는 다른 이들의 필요를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루카 16장의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처럼 말이지요. 재물은 또한 우리를 다른 사람이나 사건,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으로부터 독립적이라고 착각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한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물리적인 장소가 아니라 "관계성"이라면 우리는 하느님과는 물론이고 모든 존재와 연결되어 있는 우리 존재의 근본적인 현실을 자주 의식하며 살아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가난해서 복된 이는 자기 존재부터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까지 다 '나' 이외의 다른 모든 존재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가난한 사람'이란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결국은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겠지요?!
복음서에 나오는 부자 청년(루카 18장, 마태 19장, 마르 10장)을 떠올려 봅니다. 인도의 가톨릭 수도자 사하자난다(1955년생)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재물과 동일시했습니다. 재물이 없으면 그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겼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 재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문은 좁기 때문이다. 공간적으로 좁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본질만이 그 문을 통과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획득한 모든 것은 문 밖에 두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모든 인간 존재의 본질입니다…. 이 보물은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습니다. 도둑이 빼앗을 수도, 좀이 먹을 수도 없습니다."
'내'가 얻은 모든 것을 문 밖에 두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모두 '내' 본질을 망각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얼마나 자주 불안에 사로잡혀 주님께서 모든 것을 채워주신다는 믿음을 잊고, 초점을 잃어버리고 살아갔는지... 제 성공을 제 능력이나 노력 덕분으로만 여기고, 감사하지 못했던 순간들도 얼마나 많았는지를 다시 한번 성찰해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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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09.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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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기도 1 하느님께서 들어오시는 거룩한 여백 ( 2026.08.26. 10:41 )
http://www.ofmkorea.org/ofmkfb/584127
가난과 기도 2 팔을 벌리시는 하느님과 포옹의 사랑 ( 2026.08.27. 01:21 )
http://www.ofmkorea.org/ofmkfb/584146
가난과 기도 3 십자가를 바라보는 눈과 존재의 가난 ( 2026.08.28. 03:06 )
http://www.ofmkorea.org/ofmkfb/584207
가난과 기도 4 형제 안에서 배우는 가난과 무소유 ( 2026.08.29. 03:36 )
http://www.ofmkorea.org/ofmkfb/584312
가난과 기도 5 사랑의 아름다움과 위대한 교환 ( 2026.08.30. 05:42 )
http://www.ofmkorea.org/ofmkfb/584342
가난과 기도 6 보게 되는 사람에서 기도가 된 사람으로 ( 2026.09.02. 06:35 )
http://www.ofmkorea.org/ofmkfb/584513
가난과 기도 7 가난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 ( 2026.09.04. 19:57 )
http://www.ofmkorea.org/ofmkfb/584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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