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앞으로 당신이 공자나 소크라테스처럼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평천하(平天下)를 위해
열국을 주유하거나 진리를 위해 독배를 들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동서양 인문학의 시작이자
끝인 두 사람의 돈을 바라보는 관점을 배우라는 의미입니다.
많은 사람이 공자나 소크라테스가 산속에 은거하며 극빈층에 가까운 생활을 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공자는 취푸(곡부, 曲阜)에서 살았고,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살았는데 고대에 이 두 도시는 오늘날의 뉴욕이나 파리 같은 매우 번화한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공자의 집은 평민과 비교할 때 최소 여섯 배 이상 컸고, 위나라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는
연봉으로 한 사람이 약 280년 동안 먹을 수 있는 곡식을 받았습니다.
또한 공자의 뒤를 잇는 유학의 대가 맹자는 제나라에서 관직에 있을 때 한 사람이 대략 4만
6480년 동안 먹을 수 있는 곡식을 연봉으로 받았고, 7500명의 병사와 100필의 말을 70일 동안
먹일 수 있는 양의 황금을 소유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공자나 맹자처럼 많은 부를 소유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대신 매우 가난했다는
기록이 있지요.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가난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가난과는 성격이
좀 다릅니다. 당시 아테네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노예였는데, 소크라테스는 자유민이었습니다.
즉 소크라테스는 기본적으로 중류 계급에 속했습니다.
또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대부분 아테네 귀족가문 출신이었기에 소크라테스가 접했던 문화는
주로 귀족문화였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공자, 맹자, 소크라테스가 물질적인 삶을 산 것은
아닙니다. 이 세 사람은 온 마음을 다해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했습니다. 하지만 또 그렇다고
무턱대고 물질을 배격한 것도 아닙니다.
만일 그랬다면 공자와 맹자는 관리로 일할 때나 학교를 운영할 때 돈을 일절 받지 않았을 것이고,
소크라테스는 상류층 자제들과 절대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세 사람은
물질을 어떻게 바라봤을까요? 초월적인 태도였다고 생각합니다. 쉽게 말해서 공자나 맹자가
서민보다 더 적은 재산을 소유했든 고대 중국 최고의 재벌이었든,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에서
노예로 살았는 최고 부자로 살았든, 이에 상관없이 세 사람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공자,
맹자, 소크라테스가 됐을 거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나라 인문학의 양대 산맥인 율곡과 퇴계의 삶은 이를 좀더 직접적으로 이해하게 해줍니다.
율곡은 평생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세상을 떠날 때는 장례를 치를 돈조차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율곡의 가족은 수의조차 빌려서 입혀야 했습니다. 반면 퇴계는 오늘날로 치면 100대
재벌 정도 되는 부자였습니다. 이는 장남에게 남긴 유산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퇴계는 장남에게
367명의 노비와 3100여 마지기의 전답, 다시 말해 약 34만평의 논과 밭을 물려줬습니다.
한마디로 조선 양반 사회에서 율곡은 경제적으로 최하층이었고, 퇴계는 최상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재산의 양은 두 사람의 내면세계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고, 그들은 조선 인문학의
가장 빛나는 두 별이 될 수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돈의 소중함은 세상이 가르쳐줍니다. 인문학의
소중함은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가르쳐줍니다. 하지만 돈을 초월해서 사는 삶의 태도는
그 누구도 가르쳐 줄 수 없습니다. 이는 지식의 영역이 아닌 지혜의 영역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돈과 인문학의 간격 때문에 고민하고 방황할 시간에 소크라테스, 공자, 맹자, 율곡, 퇴계 같은
인문학 그 자체인 학자들의 정신과 삶에 대해서 깊이 연구해보면 어떨까요?
그리고 그들의 정신과 삶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해보면 어떨까요?
그들의 말과 글이 아니라 정신과 삶을 말입니다.
- 이지성 저, ‘에이트 씽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