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26일 [성주간 화요일]
요한 13,21ㄴ-33.36-38
적어도 연옥에라도 들어가는 사람의 수준은?
초나라 장왕이 있었습니다.
왕은 신하들과 더불어 연회를 베풀고 있었는데 낮에 시작한 파티가 밤이 깊도록 계속되자 연회석엔 무수한 촛불들을 밝혀 놓았습니다.
이렇게 연회의 흥취가 무르익고 있을 때였습니다. 왕은 자기가 아끼고 사랑하는 허희라는 여인에게
여기 참석한 신하들에게 술 한 잔씩 따라드리라고 했습니다.
왕의 특별한 호의였습니다.
한참 허희가 술을 부어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일진광풍이 불어 촛불이 모조리 꺼져버리자 연회석은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둠에 휩싸여 버렸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누가 허희의 가냘픈 허리를 감아 당기는 것이었습니다.
허희는 순간적으로 그 사람의 갓끈을 끊어 쥐고 몸을 뺀 다음 왕에게로 달려가 이런 일이 있었다고 보고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순간 왕은 불을 켜려는 시종들의 동작을 제지하면서 말했습니다.
오늘은 군신 간의 허물없는 즐거움을 위하여 마련한 자리니 경들은 지금부터 거추장스러운
갓끈을 모조리 끊어 팽개치고 마음껏 술을 들자고 권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갓끈을 끊어버리고 마음껏 즐기다가 돌아갔습니다.
그로부터 수년이 흘렀습니다.
당시 최강을 자랑하던 진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때 선봉을 자청한 당교라는 장수의 특별한 지략으로 예기치 못한 전과를 올리자 왕은 그에게
특별한 상을 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당사자는 이미 왕으로부터 한없는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 더 이상 상을 받을 수 없다며 그 옛날 연회 석상에서 허희의 허리를 안은 사람이 바로 자기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때 왕은 호탕하게 웃으며 그에게 큰 상을 내렸다고 합니다.
이것이 군주나 보스의 자세여야 할 것입니다. 자칫 나에게 유익이 될 사람을 너무 엄하게 판단하여 끊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희망이 없는 유다와 같은 존재가 되면 끊어야 합니다.
그 기준을 너무 높이 잡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요즘 구역 판공을 하며 면담하는데, 의외로 아니 어쩌면 당연한 건지 모르는데 성당에서 상처받아서 냉담한 교우들이 많았습니다. 그중에서 고해성사 때 상처받아 냉담한 경우도
많았는데, 이는 거의 사제의 탓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고해소까지 들어왔다면 이미 큰 용기를 낸 것이고 상처를 드러낸 상태이기에 아주 작은 질책에도 기겁하고 아파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알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자신은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자기 처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처지는 지옥-연옥-천국 중 하나에 속해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사실 첫영성체를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에 속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제야 연옥에 들어간 것입니다.
연옥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의 죄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전쟁에서 50보 도망간 사람이 100보 도망간 사람을 탓할 수 있을까요? 연옥의 상태를 우습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누구도 판단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야 지옥에서 비로소 연옥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래야 타인에게 자비로울 수 있습니다.
예전에 한 중년 신사분이 찾아와서 아픔을 호소하였습니다.
이 분은 사회에서 성공하고 존경받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자살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신에게 그런 식으로 보복한 아들이 도저히 용서되지 않아 손이 부들부들 떨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어쩌면 이분은 아직 아버지 될 자격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자녀의 기준을 너무 높이 잡아놓아서 자녀가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부모도 자녀와 같이 성장하는 중입니다.
이분은 자녀에게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를 너무 주었고 사실 죽은 자녀에게 오히려 용서를 청해야 하는 상황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연옥, 아니면 지옥 수준에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신자들에게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히브 12,4) 라고 말합니다.
아직 천국에 오를 수준이 안되었다는 뜻입니다.
천국에 오르려면 그리스도처럼 복음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도 순교할 당시가 직 천당에 오를 수준이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잘난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집트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도망쳐보니 자신도 별거 아니었습니다. 미디안 땅에서의 40년간의 도피 생활, 그것이 그의 연옥이었습니다.
불붙은 떨기나무의 하느님을 만나 소명으로 죽기 전까지.
작은 죄를 많이 짓는 것이나 큰 죄를 하나 짓는 것이나 큰 차이가 없습니다.
연옥에라도 들어가기 위해서는 누구도 심판할 수 없는 죄인인 처지임을 잊지 맙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26일 [성주간 화요일]
복음: 요한 13,21-33.36-38
그래서 필요한 것이 어떻게서든 주님과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몸부림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손금 들여다보듯이 환하게 꿰뚫고 있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당신을 은돈 서른 닢에 팔아넘기며 배신할 것인지?
누가 결정적인 순간에 당신을 모른다고 3번이나 부인할 것인지?
누가 당신 홀로 체포 당하실 때, 뒤도 안 돌아보고 줄행랑을 놓을 것인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만일 제가 그 상황에서 예수님이었다면, 즉시 노발대발했을 것입니다.
급한 성격에 제자들을 총집합시켰을 것입니다.
배신감에 치를 떨며 제자들을 일렬로 쭉 세워놓고 일장 훈시를 했을 것입니다.
한명 한명 이름을 불러대며 인간이 어떻게 그러냐?
인생 그렇게 살지 말라며 호통을 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 혹독한 배신감과 고독함, 그로 인한 극도의 산란함 속에서도 철저하게도 제자들의 배신을 함구하십니다.
결정적인 배신자가 누구인지 궁금했던 제자들이 계속 캐물었지만, 끝끝내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서 예수님의 그런 태도를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속 깊숙이 들어가 보지 않은 이상, 쉽게 해석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은 다양한 해석을 시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데 있어서 각 개인의 자유의지를 철저하게 존중해주신다고. 절대로 강요하지 않으신다고. 당신을 철저하게도 배신하고 죽음의 길을 가는 것조차 본인의 선택에 맡긴다고?
실수도 하고 방황도 하면서 변화되고 성장하는 존재가 인간이니, 스스로 잘못을 인식할 때 까지
기다려주시는 예수님이시니, 그런 배신의 기회조차도 제자들에게도 체험하게 하는 것이라고?
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 한 가지는?
영원하신 하느님, 절대 진리이신 하느님에 비해 우리 인간은 너무나 가변적이고, 지극히 가벼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어제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바칠 기세였지만, 오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신의 잇속과 안위만을 궁리합니다.
어제 금강석보다 더 굳은 신념으로 결심하였지만, 오늘 속절없이 허물어지고 마는 나약한 존재가 우리 인간인 것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너무나도 나약한 우리 인간 존재 곁으로 사탄의 강력하고도 집요한 유혹은 끝도 없이 계속됩니다.
우리의 취약함 부분을 거듭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어제의 대단한 결심을 오늘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어제 당당한 주님의 제자였지만, 오늘은 배신의 참담함에 눈물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어떻게서든 주님과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몸부림입니다.
비록 오늘 죄와 배신의 늪 속으로 깊이 빠져 들어갔다 할지라도, 다시 한번 고개를 주님께로 돌리며 그분의 크신 자비를 구하는 노력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주간 화요일 강론>
(2024. 3. 26. 화)(요한 13,21ㄴ-33.36-38)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얘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너희는 나를 찾을 터인데, 내가 유다인들에게 말한 것처럼 이제 너희에게도 말한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요한 13,33)”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베드로가 다시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 13,36-38)”
1)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습니다(마르 14,50).
공관복음서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으니, 우리도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요한복음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요.’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다.‵ 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들은 가게 내버려 두어라.’ 이는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사람들 가운데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하고 당신께서 전에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요한 18,7-9).”
더욱이 베드로 사도는 가지고 있던 칼을 뽑아서
예수님의 체포를 막으려고 했습니다(요한 18,10).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난 것은 아닌 것입니다.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을 합해서 생각하면, 제자들은 비겁하게 달아난 것이 아니라, 상황이 그렇게 되어서 흩어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것을 예고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떨어져 나갈 것이다.
성경에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고 기록되어 있다(마르 14,27).”
이 말씀에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배반한다는 뜻이 아니라, 목자를 잃은 양들이 흩어지는 것처럼 제자들이 구심점을 잃고 흩어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흩어짐’은 잠깐 동안의 일이었고,
제자들은 다시 모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들은 한 자리에 모여 있었습니다(요한 20,19).
제자들의 공동체가 붕괴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좀 더 적극적으로 방어하거나 예수님을 보호하려고 했어야 하지 않은가? 그것이 제자의 도리가 아닌가?”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하신 다음 말씀을,
그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청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실 것이다.
그러면 일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태 26,52-54)”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 군대는 로마제국의 전체 군대보다 훨씬 더 수가 많고, 로마제국 군대를 하느님의 힘으로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군대입니다.
(그 당시 로마제국의 군대는 9군단까지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힘이 없어서 당하신 일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또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당신이 스스로 목숨을 내주신 일입니다.>
2) 유다의 배반은 예수님에게서 떨어져 나가서
반대쪽으로 간 일, 즉 박해자들 편에 선 일입니다.
<완전히 편을 바꾼 일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흩어진 일이나,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한 일은, 겁에 질려서 그런 것이지 편을 바꾼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나 다른 제자들의 행동을 배반이라고 표현하지는 않는데, 유다의 경우에는 ‘배반자 유다’ 라는 고정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3) 배반자 유다는 자기 잘못을 뉘우쳤지만 회개하지는 않고 자살해 버렸습니다(마태 27,3-5).
그것은 큰 죄를 더 큰 죄로 덮으려고 한, 어리석은 선택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말했지만 크게 통회하고 바로 돌아왔습니다(마르 14,72).
그 차이는 대단히 큽니다.
배반자 유다의 운명은 그것으로 끝나버렸지만, 베드로 사도는 위대한 사도요 순교자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도들에게는 성 목요일 밤부터 일요일 아침까지의 시간이 참으로 힘들고 어렵고 복잡한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시간은 그들을 모두 위대한 사도요 순교자로 변화시키는 ‘담금질’ 같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4) 우리의 신앙 여정도 온갖 걸림돌들을 극복하는
담금질 과정의 연속입니다.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고, 주저앉아 있기도 하고,
중단하고 싶어질 때도 생깁니다.
그러나 사도들처럼 다시 일어나서 걸어가면 됩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계속 노력하면,
주님께서 분명히 지켜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루카 22,32).
주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