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법 상가분양이 또 말썽이다. 허가를 받은 면적보다 더 많은 상가를 분양하는 바람에 325명의 상가 계약자들이 큰 피해를 볼 위기에 놓였다. 문제의 상가는 경기도 일산 신도시 백석동에 들어설 예정이던 고속버스터미널 내 판매시설.
사업 시행자인 일산종합터미널㈜는 거의 손을 놓은 상태다. 채무 상환이 어렵기 때문이다. 시공사인 신세계건설도 사실상 시공권을 포기했다. 주거래 은행인 조흥은행은 조만간 공매를 통해 청산 절차를 밟는 방안까지 신중히 검토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터미널 상가를 분양받은 계약자들은 계약금을 날리고, 대출받은 중도금까지 갚아야 하는 딱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자칫하면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서울 동대문 굿모닝시티 쇼핑몰 사기분양 사건의 후속판이 될 수도 있어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일산發 사기분양’ 되나
일산 고속버스터미널은 지난해 1월 백석동 8680여평에 지하 5층, 지상 5층 규모로 착공돼 내년 1월 개장 예정이었다. 문제는 분양 과정에서 발생했다. 2002년 말 고양시와 경기도가 내준 건축허가는 터미널과 판매시설(상가)을 50%씩 짓는 것으로 돼 있었다.
그러나 시행사는 수익이 맞지 않는다며 터미널 시설은 30%로 줄이고 상가는 70%로 늘려 분양했다. 상가를 실제보다 더 분양한 것이다.
결국 감사원 감사에 적발됐고, 시행사는 설계변경을 추진해 왔다. 그러나 시행사가 상가를 임의로 늘려 편법 분양하자 고양시가 설계변경 허가를 내주지 않았고, 지난해 10월 공사가 전격 중단됐다.
시행사가 분양한 상가는 3∼5평짜리 IT상가(전자ㆍ가전제품), 음식점ㆍ잡화점 등 647개 중 회사 보유분을 뺀 400여개이며 계약자는 325명이다. 이들은 계약금 10%와 중도금 50%를 낸 상태여서 600억원 정도가 물려 있다. 작게는 1인당 4000만원에서 많게는 5억원까지 투자금이 묶여 있는 것.
시행사가 땅을 담보로 금융권에서 빌린 돈은 1차 담보권자인 조흥은행 313억원과 중도금 대출을 한 2차 담보권자 제일저축은행의 320억원, 3차 담보권자 에이스저축은행 215억원 등이다.
시공사는 당초 신세계건설이었으나 사업이 난항을 겪자 시공권을 사실상 포기했다. 계약자비상대책위 관계자는 “시행사가 허가면적보다 상가 수를 늘려 편법 분양한 뒤 분양대금을 다른 곳에 투자한 것을 나중에 알았다. 시공사 브랜드를 믿고 분양받았는데 시공사조차 발을 빼다니 이런 무책임한 경우가 어디 있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해법 없나
조흥은행은 일단 9월 6일까지 시한을 준 뒤 공매 공고를 내고 청산 절차를 밟는다는 입장이다. 시행사에 빚을 갚거나 대안을 제시하도록 통보했으나 아무런 답변이 없고, 계약자대책위도 마땅한 자구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어 공개매각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은행 측의 주장이다.
그러나 대책위는 강력 반발하고 있다. 자구책을 마련할 여유도 주지 않고 금융권이 밀어부치고 있다며 공매 처분을 연기해 줄 것을 은행에 요청했다. 대책위 김영길 감사는 “고양시가 추진해온 사업이고, 땅에 대한 담보권이 확실해 시행사만 바꾸면 사업을 재개할 수 있는데 은행이 일방적으로 밀어부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계약자들은 일단 시행사로부터 권리포기 각서를 받는 한편, 시행사 대표를 검찰에 업무상 횡령 등으로 고발하기로 했다. 또 다른 시공사와 시행사를 물색해 사업을 계속 추진할 방침이다.
다만 사업이 정상화하기까지는 첩첩산중이다. 다른 시행사를 찾지 못하면 계약자들이 직접 공매로 부지를 낙찰해야 하는데, 계약자가 워낙 많아 이들의 의견을 한데 모으기가 쉽지 않다. 공매로 낙찰하더라도 취득에 따른 세금만 30억원 이상이 들 것으로 보인다. 매달 나가는 이자만도 10억원이 넘는다.
대책위가 사업권을 넘겨받는다 해도 근원적인 문제인 설계변경 허가가 나지 않으면 사업을 진행하기 어렵다. 고양시는 당초 대로 면적을 4만8000평으로 하고, 터미널과 상가의 비율을 5대 5로 하지 않으면 허가를 내줄 수 없다는 입장이다.
2006년 이 지역에 대한 지구단위계획이 나올 예정인데 대책위는 여기에 일말의 희망을 걸고 있다. 그 이후에는 설계변경 등이 가능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사업을 재개한다는 게 대책위의 복안이다.
시행사의 부도덕한 편법 분양 때문에 신도시 최대 규모의 터미널 건설이 무산 위기를 맞고, 공공시설이 들어설 것으로 철썩 같이 믿고 투자한 계약자들이 소중한 재산을 날릴 위기에 놓인 것이다.
지금도 편법ㆍ과장 분양이 난무하는 상가 분양시장에서 소비자들이 얼마나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잇는 지, 또 투자자들이 얼마나 신중하게 대처해야 하는 지를 시사하는 또 하나의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