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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10.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묵상글 (9/9. 21:10, 04:05, 07:30. )
1) 저는 아래 몇 분의 글만 공유합니다.
1차 공유하는 묵상글< 가능하면 전일 22시 이전> : 고인현 신부님, 호명환 신부님. (9/9. 21:10.)
2차 공유할 묵상글< 04 ~ 05시, 07시 이후 > :
< 김찬선 신부님: 04:05 추가. 호명환 신부님: 07:30 추가.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04:05 추가. >
2) 정회원님 중 다른 묵상글을 공유하실 분은 오늘 묵상글을 이 뜨락에 게재하여 주시고
지난 묵상글은 “5-1. 소금(나눔) 뜨락 1”에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3) 이 묵상글 뜨락은 8월 15일 이후에도 당분간 현재와 같이 운영*하며
전체 공지 "H. 260707" 2-1의 가-1), 나)를 실행할 계획입니다.
가-1) 프란치스칸 공동체나 개인 또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존중하는 분으로서 이 카페를 인계받아 운영할 의사가 있으신 분과 협의를 시작하고, 이 공간의 인계, 인수는 합의가 되는 대로 즉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 위 사항이 이루어지지 아니할 때는 11월 대림시기부터는 실질적으로 운영을 중단*하고, 카페의 여러 자료를 활용하실 분을 감안 당분간 존속시키고, 적당한 때(2027년 상반기 또는 그 이후) 폐쇄하도록 하겠습니다.
* * 위에 따르며 가능하면 1차 공유는 전일 22시전까지 2차 공유는 04시- 05시까지, 안되면 07시쯤 할 계획입니다.
이 시간대 이외 여러 묵상글을 보시려면 전체공지란 " H. 260707. 카페 운영에 대한 고견을 주세요." 의
2번에 들어 가셔서 안내를 받으세요 < 2026. 09.04. 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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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약한 형제들의 양심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8,1ㄷ-7.11-13
형제 여러분, 1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성장하게 합니다.
2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알지 못합니다.
3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도 그를 알아주십니다.
4 그런데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관련하여, 우리는 “세상에 우상이란 없다.”는 것과 “하느님은 한 분밖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5 하늘에도 땅에도 이른바 신들이 있다 하지만 ─ 과연 신도 많고 주님도 많습니다만 ─
6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
7 그렇지만 누구나 다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아직까지도 우상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정말로 그렇게 알고 먹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약한 양심이 더럽혀집니다.
11 그래서 약한 그 사람은 그대의 지식 때문에 멸망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형제를 위해서도 돌아가셨습니다.
12 여러분이 이렇게 형제들에게 죄를 짓고 약한 그들의 양심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13 그러므로 음식이 내 형제를 죄짓게 한다면, 나는 내 형제를 죄짓게 하지 않도록 차라리 고기를 영영 먹지 않겠습니다.
복음<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27-3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29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두어라.
30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31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32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33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34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 준다.
35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37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38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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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10.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2026.09.09 21:06
2026년 9월 10일 목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학교 말씀 기도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루카 6,27-38
복음에서 가장 어려운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대개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너무 높은 이상이라 여겨 밀어 두거나,
나에게는 원수가 없다며 슬쩍 비켜 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드신 예들을 보면
그것이 먼 이야기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미워하는 자, 저주하는 자, 학대하는 자,
뺨을 때리는 자, 내 것을 가져가는 자.
거창한 적군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대개 가까운 데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의 구조를 보면 흐름이 분명합니다.
먼저 세 번의 물음이 나옵니다.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되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세 번 모두 같은 말을 하십니다.
그것은 ‘죄인들도 하는 일’이라고.
곧 주고받는 셈이 맞는 사랑은 누구나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의 표시는 사랑을 하느냐가 아니라
셈이 맞지 않는 사랑을 하느냐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근거가 마지막에 나옵니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비를 내리실 때
그분께서는 사람을 가리지 않으십니다.
성 대 바실리오는 이 대목을 두고,
우리가 자비로울 수 있는 까닭은
우리가 먼저 자비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새겼습니다.
받은 적 없는 것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이를 악물고 참으라는 명령이 아니라
이미 받은 것을 흘려보내라는 초대입니다.
마지막 그림도 아름답습니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그 시대 시장에서 곡식을 되어 팔 때의 모습입니다.
정직한 상인은 곡식을 되에 붓고 눌러 담고
흔들어 빈 곳을 채우고 넘칠 때까지 부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되어 주시는 방식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이 우리를 세웁니다.
‘너희가 되어 주는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내가 남에게 쓰는 되가 곧 나에게 쓰일 되라는 것입니다.
인색한 되로 재면 인색한 되로 돌아옵니다.
돌봄 주간의 눈으로 보면
오늘 복음은 돌봄의 범위를 다시 그립니다.
우리는 대개 돌볼 사람을 고릅니다.
고마운 사람, 갚을 사람, 알아줄 사람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죄인들도 하는 일이라 하십니다.
참된 돌봄은 자격을 따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우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됩니다.
닮음으로 자녀 됨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의 사랑은 셈이 맞는 사랑이 아닌가?
나는 돌볼 사람을 고르고 있지 않은가?
내가 남에게 쓰는 되는 얼마나 큰가?
나는 먼저 받은 자비를 기억하는가?
주님,
셈이 맞는 사랑에 머물지 않게 하소서.
돌볼 사람을 고르지 않게 하시고,
제가 받은 그 후한 되로 남에게 되어 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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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10.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2026.09.09. 17:45
의심이 가져다주는 값비싼 대가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여러분은 믿음의 눈으로 볼 수도 있고, 회의주의의 눈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의심이 없는 신앙...
의심이 가져다주는 값비싼 대가
2026년 9월 9일 수요일
브라이언 맥라렌(Brian McLaren)은 의심으로 인한 고통스러운 체험들을 신앙의 여정 안에서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바라봅니다:
"의심"(doubt)이라는 말의 뿌리를 살펴보면 그 고통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의심(doubt)"은 "둘(duo)"과 "이중(double)"이라는 단어에서 비롯된 말로, 의심한다는 것은 두 마음 사이에 머무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는 믿으려 하고, 다른 하나는 믿지 않으려 하는 것이지요. 이 두 마음은 긴장 속에서 씨름하며, 우리를 양쪽으로 끌어당기고 결국 내적 고통 속에 머물게 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눈으로도 볼 수 있고, 회의주의의 눈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이중적 시선, 곧 내적 분열을 경험하게 됩니다.
의심 이전에는 그저 믿고 있었습니다. 마음은 순수하고 나뉨이 없었으며, 하나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불안이 아닌 편안한 확신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수함, 그 단순함, 그 평화로운 일치와 맑은 시선은 이제 의심의 첫 희생물이 되어 서서히 사라져 갑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이들에게 신앙은 곧 현실을 이해하는 지도이며, 우주를 바라보는 지도입니다. 신앙은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를 지나왔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디로 방향을 틀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뢰하던 그 지도가 더 이상 현실과 맞지 않게 되는 순간, 우리는 길을 잃은 듯 혼란스러워집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사람들은 마음속 지도, 곧 세계관이나 삶의 틀이 무너질 때 깊은 상처를 경험합니다. 과학자들조차도 자신들의 개념적 지도가 더 이상 맞지 않아 근본적인 가정을 다시 질문해야 할 때, 그 경험을 감정적으로 격렬한 언어로 표현하곤 합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의지하던 과학적 지도가 더 이상 맞지 않는 데이터를 마주했을 때의 경험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마치 발밑의 땅이 갑자기 사라져 어디에도 단단한 기초가 보이지 않는 듯했고, 그 위에 무엇을 세울 수도 없는 상태였다." [1]
과학적 지도나 사고의 틀이 무너질 때 이렇게 큰 불안을 일으킨다면, 종교적 세계관을 잃는 것은 얼마나 더 큰 충격이겠습니까? 이러한 상실은 우리를 더 큰 두려움으로 몰아넣습니다. 곧 하느님 자체를, 혹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보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위협입니다. 진실한 신앙인에게 이보다 더 두려운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 두려움은 특히 하느님을 전능하시고 절대적인 완전과 복종을 요구하시는 분, 엄격하고 요구가 많은 아버지, 그리고 냉정하고 엄정한 심판자로 배우며 자라온 이들에게 더욱 실제적인 현실로 다가옵니다. 물론 우리는 하느님께서 사랑과 은총, 용서를 베푸신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위에 요구되는 단 하나의 조건은 바로 의심하는 이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입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흔들림 없는 굳건한 신앙을 요구하시며, 우리는 그것을 '올바른 믿음을 지키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따라서 그 믿음을 질문하는 순간, 하느님께서 언제든 우리를 거슬러 서실지도 모른다는 생각, 즉 하느님께서 우리를 벌하시고, 버리시고, 심지어 올바른 믿음을 끝까지 붙들지 못하면 지옥에까지 보내실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가능성이 열리게 됩니다….
의심은 우리가 안전하다고 느끼던 심리적 성벽을 무너뜨릴 수 있으며, 세상을 살아가는 길잡이로 삼던 내적 지도를 찢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은혜와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할 위험을 안겨줍니다.
(그러나 의심은 우리를 불안과 혼란 속에 빠뜨릴 수 있지만, 동시에 더 깊은 신뢰와 참된 신앙으로 나아가게 하는 은총의 문이 될 수 있습니다. 의심 속에서도 하느님께 매달릴 때, 우리는 더욱 굳건한 믿음을 선물로 받기 때문입니다.- 번역자 주)
우리 공동체 이야기
인간의 조건과 자유의 선물을 생각할 때, 우리 안에 의심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의심이 없다면 믿음도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결국 우리를 하느님의 참된 본모습인 사랑으로 인도합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방식으로 그분을 만나며, 그 위대한 신비 안에서 그분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Mason M.
References
[1] “Autobiographical Note” in Albert Einstein: Philosopher-Scientist, ed. P.A. Schilpp,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49), 45.
Brian D. McLaren, Faith After Doubt: Why Your Beliefs Stopped Working and What to Do About It (St. Martins, 2021), 8, 9–10.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Jenna Keiper, CAC Environment, 2019-10-09, Photograph, CAC campus, Albuquerque NM. "되어 가는 여정" 위에서 짐을 내려놓고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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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10.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9.10 03:02
- 사랑이 내 안에 차오르도록
“그러나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해 주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오늘 말씀은 어제 불행 선언 다음에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래서일까 ‘그러나’로 말씀을 다시 시작하시고
당신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말씀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오늘 원수를 사랑하라는 엄청난 말씀은 어제 불행 선언을 들은,
그런 사람들과 달리 당신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것이고,
이 엄청난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들과 달리 행복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 엄청난 말은 아무나 듣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말씀을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차버리며
들으려고도 하지 않거나 듣더라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말씀을 누가 듣고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하지 않고 듣고 있는 것이고,
주님 말씀이니 분명 나의 행복을 위해 하시는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이 들을 것이고
행복 의지가 있는 사람이 주님이 말씀하신 원수 사랑의 의지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원수 사랑하라는 말씀은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나의 행복을 위해 하시는 말씀,
다시 말해서 원수의 행복이 아니라 나의 행복을 위하여 하시는 말씀이고,
하느님 자녀들이 원수지간으로 불행하게 살지 말고 모두 행복하게 살라는 겁니다.
문제는 주님의 사랑을 믿고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려고 할지라도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그 사랑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 그것이고,
원수 사랑의 의지만으로 원수 사랑이 가능하겠느냐 그 말입니다.
당장은 불가능하고
우리의 의지적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하고,
그래서 주님께서는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원수 사랑하려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그 사랑의 능력을 주시고,
원수 사랑하려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그 사랑의 힘을 주십니다.
우리가 모두 행복하길 바라시는 하느님께서는
기도하는 나에게는 당신 사랑이 내 안에 차오르게 하시고,
원수에겐 당신 사랑과 나의 사랑에 반응하게 하실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계속 기도하면 원수가 벗으로 바뀌게 해주십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주어라.’
하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우리가 발자취를 따라야 할 주님께서 당신을 넘겨준 사람을 벗이라고 부르셨기에
우리에게 부당하게 번민과 괴로움, 부끄러움과 모욕, 고통과 학대,
순교와 죽음을 당하게 하는 모든 이들이 바로 우리의 벗들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끼치는 그것들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기에
우리는 그들을 극진히 사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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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10.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2026.09.10. 05:24
그리스도인 삶의 길!~~~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삶을 길을 우리의 주님이요 스승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당부하시며 당신 스스로 이런 삶의 길을 몸소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폭력이 제어되지 않고 방치된다면 세상은 이 폭력으로 인해 파멸의 길을 걸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가 증명해 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반대의 길을 걸으며 인간 존재의 의미를 하느님 사랑의 차원으로 승화시켜 준 사람들도 우리 인류 역사 안에는 많이 있어왔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을 말하는 것은 공상적인 이상주의가 아니라, 가장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길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인간의 삶은 악몽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내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요소를 도입합니다.
일전에도 한 번 언급해 드렸지만... 이는 마치 수학에서 '0'이 전체 체계를 자유롭게 하고, 다른 모든 수를 움직이게 하며, 온전한 수학을 가능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0'은 없는 것이지만 있습니다. 참 묘한 역설이지요?!
이 없는 '0'이 없다면 숫자는 마치 교통이 꽉 막힌 상태처럼 아무것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이 '0'이 지닌 힘은 그야말로 엄청납니다. 없는 것 같지만 있는 것, 이것이 바로 '0'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 아닐까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
사랑은 미움에 대한 '0의 응답'이며, 폭력의 교착 상태와 막다른 길, 얽힘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마술과 같은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 삶의 방식을 살아낸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일 뿐만 아니라,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고 싶어 하는 삶의 길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우리 삶의 경험으로 잘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삶의 길에 대해 깊이 성찰하고 새겨 보고 싶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또 압니다. 이 삶의 길만이 인간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는 폭발물을 해체하는 길이며, 폭력을 종식시키는 영적인 예술이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사실 이 삶의 길은 우리가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과 그 상처만 바라보며 '내' 에고의 세계를 잘 살펴보지 않는다면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 길입니다. 사실 우리는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내적 기제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것이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대개 우리가 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존재라는 사실을 잊고 살아갑니다. 약하고 상처받기 쉽기에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인과응보적인 반응을 하며 살아갑니다. 특히 우리가 상처를 받았을 경우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 삶의 방식이 정상적인 삶의 방식인 것처럼 우리 정신구조에 깊이 뿌리 내려 있는 것이고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일상적인 만남과 그 만남 안에서 이루어지는 관계들을 이런 상거래적인 정신구조로 이해하지 말고 오히여 없는 듯 있으며 사람을 완성으로 이끌어가는 '0'과 같은 "사랑" 실천의 장으로 여기라고 권고하시는 겁니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이 망가지게 되었을 때 그것을 아주 정성스럽게 고쳐 보았던 기억을 우리는 다 갖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이 관계성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정성스럽게 수리해야지, '이제 쓸모가 없으니 버리려고 한다면' 거기서부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폭력이 시작되는 것이고요. 왜냐하면 버림을 받는 쪽 역시 기계가 아닌 감정을 지닌 존재, 즉 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 관계의 가장 미묘하고 복잡한 부분 아닐까요?!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이런 관계성 안에서 살아가도록 창조해 주셨기에 우리가 우리 삶을 완성해 가는 것은 오직 이 관계성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성녀 마더 데레사가 한 말이라며 종종 인용되는 조언이 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분과 하느님 사이의 일이지, 결코 여러분과 그 사람들 사이의 일이 아닙니다."
이 말에서 중요한 핵심은 우리가 살아온 관계성들이 결국 하느님 앞에서 온전히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전히 "저 사람이 이래서..." "그 사람이 그랬기 때문에..." 등의 이야기를 하느님 앞에서 변명으로 늘어놓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조언은 우리에게 소중한 선물로 주신 그 관계성들이 다치고 상처받았을 경우 싸매 주고 낫게 하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정성을 기울였는지를 하느님께서는 일일이 다 헤아리신다는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와야 하겠지요?!....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빛을 향해 뚫고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인가가 풀려야 합니다." 우리를 붙잡는 것은 원수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원수가 우리를 막는다고 믿는 한, 우리는 결코 길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이 길은 결코 쉽지 않은 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길 자체이신 주님께서 우리 삶의 여정에 가장 가까이에서 동반해 주신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곁에, 그리고 우리 안에서 여전히 사랑할 힘을 불어넣어 주시는 주님을 믿고 용기와 희망과 사랑을 마음에 굳게 품은 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오늘 하루의 여정을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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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10.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2026.09.10 01:26
가을 편지는 그리움으로 씁니다.
가을 해가 조금씩 기울고 어둠이 먼 산등성이에서 천천히 걸어 내려오면, 오래도록 시간 속에 묻어두었던 그리움 하나가 살며시 고개를 듭니다. 오늘은 그 그리움 하나를 꺼내어 편지의 사연을 쓰려고 합니다. 잊은 줄 알았던 이름과 지나간 얼굴과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어느 날의 풍경이 저녁빛을 따라 마음으로 돌아옵니다. 가을은 이상한 계절입니다. 떠나는 것들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남아 있는 것들이 더 선명해지는 계절입니다.
바람의 결은 하루가 다르게 서늘해지고, 숲과 들머리는 제 빛깔을 조금씩 바꾸어 갑니다. 나무들은 여름 내내 움켜쥐었던 푸른빛을 하나둘 내려놓고, 길가에 떨어진 마른 잎 하나는 아무 말 없이 한 계절의 끝을 받아들입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게 됩니다.
어쩌면 가을은 우리에게 떠나는 법보다 남겨지는 법을 가르쳐 주는지도 모릅니다. 무엇인가 떠나고 난 뒤에도 그 자리에 남는 것이 있다는 것을, 사람이 떠난 뒤에도 온기가 남고, 시간이 지나간 뒤에도 기억이 남으며,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빛 하나가 남는다는 것을 가을은 말없이 보여줍니다. 창가에 내려앉은 늦은 오후의 볕이 제 온기를 다 비우고도 차마 마루를 떠나지 못하는 날이 있습니다. 울컥 쏟아져 내릴 눈물은 아니어서 슬픔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고요하고, 옷깃을 여미며 훌훌 털어내기에는 가슴 한쪽이 오래 저물어 쓸쓸함이라 하기에는 너무 깊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 마음에 꼭 맞는 이름을 나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그리움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오래되었고, 외로움이라 하기에는 너무 따뜻하며, 슬픔이라 하기에는 이상하리만큼 평온한 마음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오래 사랑한 것들이 우리 안에 남겨놓은 흔적일 것입니다. 다 식어버린 찻잔 바닥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향기처럼, 지난 계절의 외투 주머니 깊은 곳에서 문득 손끝에 닿는 바스락거리는 종이 한 장처럼, 이미 지나간 시간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오늘의 마음 한편을 가만히 건드립니다.
그럴 때면 어디쯤 가닿아 있을지 모를 그 이름을 굳이 소리 내어 부르지 않습니다.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리움이 너무 선명해질 것 같아서, 문을 닫으려다 말고 열어둔 틈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한동안 뺨으로 받아냅니다. 바람은 아무것도 묻지 않습니다. 어디에서 왔는지, 누구를 기다리는지, 아직도 무엇을 놓지 못하고 있는지 묻지 않습니다. 그저 잠시 머물렀다가 지나갑니다. 그런 바람 앞에서는 나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람에게는 설명할 수 없는 마음 하나쯤 있어도 좋겠습니다.
왜 그 이름을 아직 기억하는지, 왜 어떤 저녁이면 오래전 풍경 하나가 갑자기 가슴을 적시는지, 왜 다 지나간 일인데도 어느 음악 한 소절과 어느 냄새와 어느 계절 앞에서 걸음을 멈추게 되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좋겠습니다. 사랑했던 것은 쉽게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떠나도 그 사람이 내 안에 남겨놓은 눈빛은 오래 머물고, 손을 놓아도 한때 잡았던 손의 온기는 기억 어딘가에 남아 있으며,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조차 마음 깊은 곳에서는 저마다 작은 방 하나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기억한다는 것은 붙잡는 일이 아니라 어쩌면 조용히 놓아주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돌아오라고 부르지 않으면서도 잊지 않는 것, 다시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때 내게 주어졌던 것을 고맙게 품는 것, 사라진 것을 억지로 되살리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내 삶에 남겨놓은 빛을 소중히 간직하는 것. 그것이 세월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그리움의 방식인지도 모릅니다. 가을꽃이 수줍게 봉오리를 열 때쯤이면 이 편지가 어디엔가 닿아 있겠지요. 그러나 어쩌면 이 편지는 처음부터 누군가에게 보내기 위해 쓴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릅니다.
주소도 없고 우표도 붙이지 못한 편지, 받는 이의 이름조차 적지 못한 편지. 나는 다만 가을이 깊어가는 어느 저녁, 마음속에 오래 머물던 말을 꺼내어 하늘에게 건네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늘에게, 바람에게, 나무에게, 그리고 한때 나와 같은 시간을 걸었던 모든 존재에게. 당신이 내 삶을 지나가 주어서 고마웠다고. 당신과 함께 바라보았던 하늘이 있었고, 함께 걸었던 길이 있었으며, 함께 웃었던 순간과 말없이 곁에 머물렀던 시간이 있었기에 내 삶의 어느 계절은 참 따뜻할 수 있었다고. 그리고 이제는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서 사랑했던 시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다시 만날 수 없다고 해서 함께했던 날들이 거짓이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월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져가지만 이상하게도 가장 깊이 사랑했던 것들의 흔적까지 가져가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군더더기는 떨어져 나가고 한 사람에게서 받았던 작은 친절 하나, 말없이 건네받았던 따뜻한 눈빛 하나, 힘겨운 날 곁에 있어 주었던 침묵 하나가 더욱 또렷해집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어쩌면 기억해야 할 것과 놓아주어야 할 것을 조금씩 구별해 가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기에 내려놓고, 모든 사람을 붙잡아 둘 수 없기에 보내주며, 모든 시간을 되돌릴 수 없기에 오늘을 조금 더 오래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을은 나에게 가르칩니다. 사랑은 반드시 곁에 있어야만 사랑인 것이 아니라고. 어떤 사랑은 떠난 뒤에야 더 깊어지고, 어떤 만남은 끝난 뒤에야 그 의미를 알게 되며, 어떤 사람은 멀어진 뒤에야 내 삶에 얼마나 깊은 빛을 남겼는지 알게 된다고. 그러므로 그리움은 사랑이 실패했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그리움은 사랑이 아직 내 안에서 살아 있다는 조용한 증거입니다.
보고 싶다는 말보다 깊은 곳에서, 돌아오라는 바람보다 더 고요한 자리에서, 그 사람이 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랑이 조금씩 맑아지는 것입니다. 소유하려던 사랑은 세월 속에서 내려놓는 사랑이 되고, 붙잡으려던 사랑은 축복하는 사랑이 되며, 함께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사랑은 마침내 멀리서도 한 사람의 평안을 빌어줄 수 있는 기도가 됩니다. 어쩌면 우리의 가장 깊은 그리움은 그렇게 조금씩 기도가 되어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말하지 않아도 닿는 마음, 만나지 않아도 품을 수 있는 마음, 내 곁에 없어도 그 존재를 축복할 수 있는 마음. 그리움은 마침내 사랑이 제 욕심을 내려놓고 얻는 가장 맑은 얼굴인지도 모릅니다. 저녁은 더 깊어지고 창가에 머물던 볕도 이제 거의 사라졌습니다. 마루 끝에 길게 누워 있던 빛이 조금씩 몸을 거두어 갑니다. 나는 그 빛을 붙잡지 않습니다. 머물러 달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빛은 떠나야 저녁이 오고, 잎은 떨어져야 겨울을 맞으며, 어떤 만남은 끝나야 비로소 기억이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 안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다만 마지막 빛이 사라진 자리를 한동안 바라봅니다. 그곳에는 연한 그늘 하나가 남아 있습니다. 아프지도 않게 번지는 오래된 물자국처럼, 굳이 지워내지 않아도 좋은 담담한 흔적처럼, 마음의 가장 고요한 가장자리에 누군가 머물다 간 자리 하나가 남아 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그 그늘을 슬픔이라 불렀을 것입니다. 외로움이라고도 했을 것이고, 아직 놓지 못한 미련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습니다. 그늘이 남아 있다는 것은 한때 그곳에 빛이 머물렀다는 뜻이라는 것을.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것은 한때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뜻이며, 마음이 저려온다는 것은 그 시간이 내게 참으로 소중했다는 뜻이라는 것을. 그러므로 나는 더 이상 마음의 그늘을 지우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빛만으로 이루어진 삶은 없으며, 사랑만큼 깊은 그늘을 만드는 것도 없다는 것을 이제 조금은 알기 때문입니다. 그늘은 빛의 반대편이 아니라 빛이 지나간 자리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마음 한쪽에 연한 그늘 하나를 남겨둡니다. 그곳에 지나간 사람들을 앉혀두고, 오래된 시간들을 쉬게 하고, 미처 다 하지 못한 말들을 바람에게 맡겨둡니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말합니다. 고마웠습니다. 당신이 내 삶의 어느 계절에 와주어서 고마웠습니다. 함께 바라본 하늘이 있어서, 함께 걸었던 길이 있어서, 말없이 곁에 머물던 저녁이 있어서 고마웠습니다.
이제 당신이 어디에 있든 평안하기를 바랍니다. 내가 당신을 기억하는 일이 당신을 붙잡는 일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 그리움이 당신을 향한 요구가 아니라 축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언젠가 나 또한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그렇게 남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크고 눈부신 빛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잠시 창가에 머물다 사라지는 늦은 오후의 볕처럼, 다 식은 찻잔에 희미하게 남는 향기처럼, 문을 닫으려는 순간 문틈으로 들어와 한 번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가을바람처럼 그렇게 조용히 남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사랑했다는 흔적 하나만 남기고 떠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가을 편지는 그래서 그리움으로 씁니다. 떠난 것을 다시 불러오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나간 것들이 내게 얼마나 큰 선물이었는지를 기억하기 위해 씁니다. 그리고 이 편지의 마지막에는 아무런 주소도 적지 않습니다. 바람이 알아서 데려가도록. 저물어 가는 하늘이 알아서 품도록. 그리운 모든 이름들이 있는 곳까지 가을이 대신 전해주도록. 나는 다만 창가에 앉아 마지막 볕이 사라진 자리를 오래 바라봅니다. 그리고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남은 연한 그늘 하나를 가만히 어루만집니다.
이제야 알겠습니다. 그 그늘은 어둠이 남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때 그곳에 참 따뜻한 빛이 머물렀기에 남겨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그리움도 슬픔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지나간 사랑이 아직 내 안에서 따뜻하다는 증거이며, 떠나간 것들을 붙잡지 않고도 끝까지 사랑할 수 있게 하는 가을의 오래고 깊은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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