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조선족의 유래 1】
앞서 연재했던 '1945년 이후 중국 조선족, 중국 정착 과정에서의 슬픈 역사'는 현대사의 부분에 들어가지만
일제강점기 이전에도 간도지방으로 넘어갔던 조선인들은 많았습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조선족의 30%는 전쟁 중 사망했고,
20%는 포로가 됐으며 살아남은 사람 중 30%는 북한에 정착,
20%만이 중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북한에 정착했던 조선족들도 북한에 오래 살지 못하고 56년도에 많이 돌아갔답니다.
조선족이 가장 많이 살던 연변에서는 2만 명이 참전해서 6981명이 전사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한국전쟁 때 중국 조선족은 북한 돕기 성금을 모았는데 당시 전투기 7대를 구입할 수 있는 액수였습니다.
북한에 주둔했던 중공군은 58년도에 중국으로 돌아갔지만 반대로 조선족들은 58년도에 북한의 경제복구를 위해 약 30만 명이 다시 북한으로 들어왔습니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조선족은 문화혁명 때 많은 고난을 겪었다고도 합니다.
우리 민족의 슬픈 역사의 한 부분인 중국 조선족의 유래에 관한 설명입니다.
"조선족"이란 단어는 20여 년전만 해도 조금 생경한 단어였지만, 지금은 우리나라의 어느 한 지역 출신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익숙해졌습니다.
중국의 조선족은 언제부터 어떤 이유로 중국 대륙에 거주하게 되었는지에 관한 내용입니다.
임계순 저 "우리에게 다가온 조선족은 누구인가"를 참조했고,약 17~18회 분 정도의 연재 분량입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중국 동북지역,즉 간도지역의 역학관계의 변화가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1635년부터 스스로를 滿州라 호칭한 여진족은 청나라를 건국하고 1627년과 1636년에 조선을 침략한 뒤 조선 왕조를 종속시킨 후 압록강 하류 남반 지방부터 봉황성을 거쳐 얘양,성창,왕청변문에 이르는 방어선을 구축하고 중요한 지점에 보루를 쌓아 조선인이 방어선을 절대 넘지 못하도록 하였다.
청나라는 1658년에 백두산 이북 400km를 封禁지대로 설정하고 조선인의 진입을 금지했다.
그 이유는 이 지역이 그들 조상의 발상지이며 유사시 청 왕조가 만리장성 이남 지역의 중원으로부터 후퇴할 경우를 대비한 전략상의 기지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담비 가죽,
인삼,진주 등의 풍부한 자원과 비옥한 토지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청 조정은 이 지역에 황제를 위한 사냥터를 여러 곳 조성하고 조선인뿐만 아니라 중국인도 요동에서 더 이상 북진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청 조정이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에 봉금을 실시한 이후 조선인이 중국 동북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농토가 척박하여 수확량이 적은 함경북도와 평안북도의 농민 중에는 봉금령이 완화된 틈을 이용하여 처음에는 아침에 강을 건너 경작하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다가 점차 봄에 농기구를 휴대하고 소를 끌고 강을 건너 농사를 짓고 가을이면 수확한 곡식을 가지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후에는 아예 가족과 함께 강을 건너 집을 짓고 살면서 토지를 경작하였다. 조선인이 고국을 떠나 이주하게 된 배경은 당시 조선의 정치,사회,경제의 변화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
조선 후기 농촌에서는 영농 기술이 개선되어 생산력이 증대되고 투입 노동력이 감소하여 일부 농가는 경작지를 확대할 수 있었다. 경작지를 확대한 농가는 부농이나 지주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많은 농가는 경작할 소작지마저 잃게 되어 雇農이 되거나 流民이 되었다. 더욱이 17~18세기에 자주 발생한 자연 재해로 흉년과 전염병이 촌락 사회를 붕괴시켰으나 조선 정부는 이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잡다한 토지세와 군역에 대한 부당한 징수, 그리고 정부의 곡식 대여와 환수를 둘러싼 부패 및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개혁할 수 있는 행정력과 경제력이 없었다.
이러한 정부의 무능력과 지도층의 부패로 사회,경제가 불안하여 고향을 떠나는 농민들이 늘어났다. 조선인이 주로 중국 동북 지역으로 이주하게 된 이유는 이 지역의 지리적,자연적 조건 때문이기도 하다. 자연적으로 두만강에는 수량이 감소할 때 걸어서 건널 수 있는 곳이 10여 곳이나 되었고,겨울철이 되면 두만강 하류가 결빙되었기 때문에 조선인이 두만강을 왕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국경 경비도 철저하지 않은 상태에서 바로 강 건너에 농사짓기에 적합한 토질,경작에 충분한 습도와 기온을 유지할 수 있는 평원과 계곡이 위치하고 있다는 것은 조선인의 이주를 부추기기에 충분하였다. 이러한 비옥한 농토에서의 수확량은 함경도 지방보다 3배나 많았다. 밭농사와 벼농사를 할 수 있는 무한한 황무지가 개간을 기다리고 있었고,울창한 산림 속에서는 산삼도 캘 수 있었으며 수렵과 벌목이 가능하여 가난한 조선인이 이주하기에 적합하였다.
중국 동부 지역의 지리적,자연적 조건 이외에 조선인이 이 지역으로 이주한 중요한 이유는 조선인에 대한 청나라 정부의 관대한 정책과 통치력의 부재 때문이었다.
청 관료들은 자신들 문화의 우수성에 긍지를 갖고 있어 어떤 외국인이라도 결국 중국화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외국인에게 비교적 관대하였다. 또한 중국인은 조선의 문화가 유교 문화권에 속하므로 조선인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그래서 이주한 조선인에게 거처와 식량은 물론 일자리를 제공하기도 하고 때로는 이들과 결혼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봉금이 해이해져 많은 수의 가난한 청 유민과 조선 농민이 중국 동북 지역으로 잠입해 들어간 시기에는 청조의 국방을 담당하던 팔기군과 치안을 담당하던 녹영군의 기강이 무너져 청 조정은 태평천국의 봉기와 서구 열강의 침략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