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읍 관청리 441번지, 강화 도령 철종(1831∼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 19세까지 살던 집이다. 원래는 보통의 민가였으나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강화유수 정기세(鄭基世)가 철종 4년(1853)에 건물을 새로 짓고 용흥궁이라 했으며, 고종 때(1903) 청안군 이재순이 중수했다. 현재 건물은 내전과 외전·별전이 각각 1동씩 남아 있고,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潛邸]이라는 잠저구기비각(潛邸舊基碑閣)이 서 있다. 넓지않은 고샅안에 대문을 세우고 행랑채를 두어 이중의 건물로 되어있는데, 창덕궁의 연경당과 낙선재처럼 살림집의 유형을 딴 소박하고 질박한 기풍이 있다. 건물은 전체적으로 홑처마에 팔작지붕이고 주심포양식을 취했다. 철종의 운명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마다 봄이 되면 흰목련과 붉은작약이 흐드러지게 피어 지붕을 덮을 지경이고, 가을이면 토종밤이 여물어 떨어진다. 왕은 왕이되 누대(累代)의 슬픈 운명이 강물처럼 고여와 그에게서 멈춘 듯하다. 어릴적 이름이 원범(元範)인 철종은 영조의 고손자이며 사도세자의 증손자이다. 정조대왕의 이복동생 은언군(恩彦君)이 할아버지, 전계군(全溪君)이 아버지다. 증조할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은 우리가 익히 아는 바이고, 할아버지 은언군은 아들 상계군(常溪君)이 반역을 꾀했다해서 강화에 유배되었다. 원범이 가족과 함께 강화에 유배되어 온 것은 11세. 그의 나이 19세 때(1849), 헌종이 후사없이 세상을 떠나자 6촌안에드는 왕족이 하나도 없었다. 이에 헌종의 7촌아저씨뻘되는 강화도의 나이어린 농사꾼 원범이 돌연 왕위를 물려받게 된다. 안동김씨 세도정치를 이뤄낸 순원왕후의 순발력있는 조처였다. 순원왕후는 서둘러 친정 조카뻘인 김문근의 딸을 철종의 비(妃)로 책봉하니 이때부터 철종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희생물이 되어 갔다. 세도정치의 폐단은 전국에서 극심해 급기야 삼정(田政·軍政·還穀)이 문란해졌다. 1862년 봄 진주민란을 시작으로 삼남지방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철종은 삼정이정청을 임시기구로 설치하여 삼정의 악습을 제거하는 정책을 수립하는 등 민란수습에 전력을 기울이지만 민폐의 도는 이미 극에 달해 민란은 동학운동으로 확산된다. 수습할 길없어 고뇌하던 철종은 가장 밑바닥 인생에서 왕위에 오른지 14년 6개월만인 33세의 젊은 나이로 한많은 세상을 뜨고 만다. 철종의 능은 경기도 고양시에 있으며 능호는 예릉(睿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