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논란이 오가고 있는 듯 합니다만, 저는 두 가지 축으로 나눠 설명해 보려 합니다.
1. 전선의 고착
648년 김유신이 3만여 명을 베고 20여 성을 빼앗았다는 그 대목은, 의직의 독산성 전투 이후의 역습 형태로 기재된
것입니다. 백제본기/신라본기 양측에서는 물론 이 악성/진례성 전투만 딱 빼고 감물-동잠 전투, 독산성 전투, 바로 은상의
도살성 전투 등 상세한 전쟁 기사들이 '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그 대전공 하나만 빼고 ' 바로바로 이어지죠...
이는 구당서 백제전/신라전을 비교분석해 봐도 대략 비슷한 구도가 그려집니다. 구당서 백제전에서 백제가 침략하여
빼앗은 신라에 대한 원정 전과, 그리고 신라의 SOS에서부터, 이후 전투에서 백제를 맞아 막아 내고 크게 이김을 당에
보고한 전과 등은 삼국사기 본기 등과 비교하여 틀 상 큰 차이가 없습니다.
자 이제 659년의 상황을 보죠... 647년 의직이 공격했다는 감물, 동잠, 그리고 이후 쳤다는 독산성...
659년에 그 성들을 백제가 다시 공격합니다. 즉 본기대로만 본다면 647년부터 659년까지 곳곳에서 일진일퇴를 벌였지만
실상 양측이 대치하는 라인은 낙동강 일대로 그 십여년 동안 고착되었다라는 얘기지요...
어떤 분들은 655년의 30여성의 전과로 648년에 잃은 20여 성을 백제가 상당부분 탈환했을 거라 보시는 분도 있겠지만,
분명 신라본기에서도 ' 북계 ' 라고 썼습니다. 신라 북방의 여러 땅들을 잃었다는 얘기입니다. 따라서 이것이 곧 가야 지역
및 백제 동부, 신라 서부의 전선이 되기는 어렵다 생각합니다. 고구려, 말갈과 연합한 백제라는 주체가 들어가 있는 걸로
보아, 백제가 영토 잠식이 아니라 그 전선에서 무력시위라든지 주력을 묶어두는 공작활동의 일환으로 그냥 전투 정도야
했을 가능성은 있겠습니다만...
즉, 아무 전후관계나 정황도 없이 느닷없이 슬쩍 낀 듯한 648년의 악성 진례 전투의 전과가 개입되 버리면 우리는 삼국사기
자체의 신빙성을 크게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20여 성에 3만명 이상이 죽었다 라는 전공을 사실이라 쳐 보지요...
백제 입장에선 국가적 비상이 걸려도 이상치 않고, 신라 입장에서는 김유신의 입지는 물론이요 갖가지 논공행상으로
중요하게 다뤄질 그 전투를 열전에서 소략된 이유를 설명할 수 없고, 열전에는 기재되었는데 왜 본기에는 그 내용을 참작하여
넣지 않았는지 역시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누락? 열전에는 넣고 본기에는 빼는 누락도 있습니까?
더 작은 단위, 한 개의 성을 침공하는 전투 및 전쟁 기사도 해마다 발발할 때 다뤄주는 본기가 그 정도의 스케일과 중요성의
전공을 누락시키거나 놓치는 거라면, 이는 둘 중 하나겠지요~
삼국사기 본기의 입장이 김유신의 전공과 전과를 애써 덮어버리고 은폐하려 들었다거나,
아니면 김유신 열전을 완성하는 김유신 집안 및 후손의 입장에서, 김유신을 빛내고 자신의 가문에 대한 정치적 입지 강조를
위해 전투의 전공을 과장시키고 김유신 신격화의 일환으로 열전 곳곳에 과장된 기록을 넣었다거나...
이것을 어느 쪽이 더 합당하다 믿는지는 받아들이는 사람 몫일 수밖에 없을 거 같습니다. 역사서에 뻥이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어느 쪽이 됐든...
물론 저야 후자 쪽이라 봅니다만...
2. 열전의 과장
김유신 열전에서 과장으로 의혹된 표현이 들어갔다면, 김유신 열전만 그랬을까요? 예전에도 한번 글로 소개된 적이 있는 걸로
기억합니다만 김인문 열전에서도 느닷없이 등장하는 ' 신라 20만 군 ' 이 나오지요... 백제 정벌할 땐 5만 정병으로 신라의 주력
대다수를 끌고 왔던 입장에서; 백제 멸망 과정과 부흥운동간의 전투를 다 거치고 나서 다시 20만을 뽑아낸다? 이런 기록 역시
사실로 믿어 버린다면 또 억지춘향 끼워맞추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백제 부흥군이 활약할 때는 그 20만 뽑아낼 국력으로
다 뭐하고 신라는 1만 정도만 사비에 남기고 철수했던 걸까요? 아니, 애시당초 20만을 뽑을 수 있을 정도였으면 당에 구원 요청
은 왜 했을까요? 그럼 백제의 군사력 규모부터 다시 상정해야 하는 걸까요?
그리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20만이라는 표현 역시 본기에는 없습니다.
요컨대 본기에 비해 열전을 과신할 이유는 없습니다. 열전을 남기는 야사격의 역사들은 정사를 다루는 측의 시각과는
다릅니다. 제가 졸업하는 저희 학교에서 마침 역사 및 설화 쪽에 큰 연관을 갖고 계시는 전공의 선생님을 만나 여쭤봤습니다.
본기와 열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고.
그 분 대답으로는, " 본기는 그 국가의 입장에서 벌어졌던 일들에 대한 굵직굵직한 정리이고, 열전은 그 주인공이 된 사람
개인이나 그 가문에 있어 큰 뜻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일들을 개인적으로 쓰는 것이다 " 라는 요지의 답을 해주시더군요.
(20성을 빼앗고 3만여 명 이상을 사살한 대전과가 백제군의 감물/동잠성 침공이나 독산성에서의 기습전 승리 같은
전투 기록 같은 기사보다 더 굵직하지 못해 누락의 여지가 있는 하찮은 스케일이라 받아들이는 입장이라면 할 말이
없겠습니다만)
열전을 처음 남겼던 그 당사자 후손들은, 열전을 통해 자신의 나라에서 벌어졌던 역사 체계를 객관적으로 기록하고 이럴 책임,
의무 같은 건 없습니다. ' 우리 가문과 그 당사자를 빛내기 위해서라면 과장과 오버도 서슴지 않을 수 있는 ' 입장이니까요...
좀 비유가 다르겠습니다만 건국 설화... 이걸 전승하여 받아들이는 설화적 입장과 역사적 입장의 차이가 같을 순 없지요~
그래서 중국 사서와 삼국사기 초기 기사도 끊임없이 부딪치는 거구요.... (물론 양자 어디가 딱히 지극히 맞다고만은
볼 수 없는 문제입니다.)
자, 역사적 해석에서 열전을 대하는 데에서도 이러한 원리가 크게 다를 게 있을까요?
얘기가 좀 먼 데로 왔습니다만,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열전의 내용만을 지나치게 신뢰해서 짜맞추기보다는
악성 및 진례에서의 전투 역시, 따라서 저는 의직군을 깨뜨린 신라군의 공세를 이어 가야 지역에서의 신라의 공격이 이어지다
어느 정도 지나자 언제까지 전투만을 할 수는 없기에 양측이 철수하고 전선은 고착화... 단지 이 정도로만 봅니다.
물론 그렇다 하여 아무 전공이 없을 수만은 없었겠죠... 포로를 잡았든, 추가로 백제군을 더 사살했든....
허나 그 때의 전공이 열전에서 기록된 사항을 사실로 받아들여 전황을 바꿔버릴 만큼 큰 것은 아니라 생각하고, 악성이나 진례성
등을 단지 경유했던 전투일진대 임의적 과장이 들어간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예전에 어떤 얘기에서 나온 것처럼 3만이
넘는 인원을 다분히 지어냈다기 보다는 양민의 학살이었을 가능성 역시 어떤 면에서 일리는 있습니다만, 굳이 양민의 학살
이라고 3만 이상의 대인원을 끼워맞추는 데 대해서는 확신하기 힘들 듯 합니다.)
첫댓글 열전에 넣고 본기는 국가적인 입장에서 굵직 굵직한 정리이고 열전은 그 주인공이 된사람의 일을 쓴다는 것이라는 원칙은 맞지요 그러나 삼국사기가 그런 원칙을 철처하게 지켜왔는지요?..그리고 열전에 있는 내용이 반드시 본기에 있어야만 된다는 법칙이라도 잇는지요?..그런 법칙을 철저하게 지켰다면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동일 자료를 가지고 끼어넣기 맞춤식으로 편찬했을 경우는 님의 주장이 물론 옳습니다 하지만 술이부작을 원칙으로 하는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각기 다른 사료로 열전편찬자와 본기편찬자들이 다를 경우는 얼마든지 똑 같은 사건일지라도 다르게 표현되며 때에 따라 누락될 수도 있지요
물론 전쟁에 있어서 사상자의 수는 일일히 사람수를 점호하듯 세어가면서 게산하지 않았을 것으로 미루어 다소 과장적인 측면은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그리고 대야성을 그냥두고 양측이 철수하여 전선이 고착화 된다면 그 전선이 어느 부분까지를 이야기 하는지요? 낙동강으로 전선이 고착화 되어 경남지역 대부분이 백제지역이었다면 660년 백제정벌시 압량주 군주를 빼어낸다는 것은 엄두에도 둘수 없지요..그렇다면 섬진강으로 전선이 고착화 되었다면 절대로 대야성이 백제의 것이 될수가 없는 형편입니다..과연 전선어디에서 고착화 되었을까요?
642년 임명된 압량주 군주였던 김유신이 660년 그때에도 ' 그냥 단지 압량주 쪽을 지키는 지방 군단장 ' 이었는지, 아니면 명실공히 신라의 일원화된 군의 주축이었는지는 생각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 아닐까요? 그리고 설사 압량주 군주였다손 쳐도, 가야지역에 백제군이 있다 하여 백제를 멸망시킬 총공세를 위해 압량주 군주를 빼내오지 못할 이유는 뭐지요? 어느 쪽이 더 큰 중대사안인지요? 설마 가야지역에 백제 주둔 = 신라의 특급 비상시국 이 공식의 명제를 순진하게 믿고 계십니까? 642년에 40여 성 및 대야성을 함락한 이후 실질적인 백제 동부 전선의 라인은 659년까지 크게 변한 게 없다는 게 제 지론입니다.
술이부작이라...? 왜 그것을 과신에 대한 원칙으로 생각하시나요? ' 지어내지 않는다 ' 가 곧 ' 과장, 축소하지 않는다 ' 를 뒷받침해 주는 사항은 아닙니다. 기록한다면 누구에 의해 어떤 이해관계에 따라 어떤 시각으로 어떻게 형용하여 기록하느냐가 문제지요... 그렇기에 특해 고대사는 어느 한 사서에 적힌 기록을 ' 그대로 사실로 언뜻 받아들이지 않고 비교 검증과 다양한 고찰 해석 ' 이 오가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전선이 섬진강 쪽이라 함은 또 왠 뜬금없는 발언인가요...? 이미 언급했잖습니까? 659년엔, 가야지역 지배 이후 647~8년에 쳐들어갔던 독산성과 동잠성을 백제가 또 공격하고 있는 걸로도 나오듯 백제 왕조가 건재할때까지만 해도 낙동강 유역에서 백제 신라 양측은 대치하는 형국이 지속되었고, 더구나 백제 부흥운동때 백강전투 이전까지 버텼던 곳이 경남 거창과 함양입니다. 대야주 설치는 661년에 이루어지지요... 기사 어딜 봐도 642년과 660년 사이에 신라가 대야성을 탈환한 걸로 추정될 만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데요?
낙동강 유역이라면 김해, 마산, 창원 역시 낙동강 서부에 위치하지요 그런데 그곳이 모두 백제 지역이었나요??좋습니다 낙동강 중,상류로 옮겼을때 압량주는 고령에서 매우 가까운 백제 근접지역이 되지요..그런데 님의 주장대로라면 압량주 군사를 빼어 내어 올인한다구요?..그런 빈집을 백제가 대야성이나 고령지역에서 강건너 불구경하다가 망했다는 것이외 다른 설명이 될 수가 있는지요?
백제를 멸망시킬 총공세 때문에 가능하다고 했는데 신라가 서라벌 최후의 방어선인 압량주를 비워 놓고 경기도 이천까지 북상했다가 남하하는데 그 사이에 서라벌 빈집털이도 못하는 백제는 망할수 밖에 없는 병법의 무지와 적정을 살피지도 못하는 한심한 국가 더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뜻이 되는군요..다만 대야성이 이미 신라의 것이라면 신라가 백제 정벌시 군대이동이 어느 정도 납득이 되지요!
빈집털이 핑계로 따지자면, 역사 속에 참 그 말씀하시는 쉬운 빈집털이 하나 못해서 망한 국가가 한둘이 아니군요? 병법 논리만으로 전쟁 기사 하나만 그렇게 쉽게 풀이한다면 애시당초 대야성이 있었어도 660년의 나당침공에서 신라가 쳐들어올 틈이나 있었겠습니까? 대야성이 신라 것이어야 나당 침공이 가능하다라 허허허.......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군요... 마치 꼭 ' 그 시기 대야성은 신라 것이었으면 좋겠다 ' 는 어리광으로 받아들여야 되는 건지 뭔지.. 659년에 백제가 친 독산성과 동잠성은 그럼 어디 경북 말고 다른 데 있답니까? 백제군은 그런 성을 대야성과 가야지역 건너서 칠 신통한 능력이라도 가졌나 보지요?
전 국가단위로 일원화된 군사 체계와, 국내 정세의 변화만을 빼고 오로지 무슨 시뮬레이션 게임의 영토 따먹기 싸움 같은 고정된 틀로만 정세를 바라본다면 당연 소호금천씨 님 같은 논리도 나올 수가 있지요.. 대야성의 존재 유무 때문에 백제 660년 침공 여부까지 가름하다니, 아니 그럼 그 논리로 5만 정병을 끌어다 썼으면 백제는 대야성이 누구 땅이 된들 어느 지역인들 빈집털이를 못할까요? 왜, 또 그거에 대해 ' 당시 신라는 5만보다 또 국토 방위 하기도 따로 갖추어져 있는 방어병력도 짱짱한 킹왕짱 국가였다능 ' 이 반박 하려고 하십니까? 이러면 역사가 아닌 ' 신라 포장 ' 의 결과밖에 더 될까요?
대야성 존재유무로 백제 660년 침공까지 가늠하지 못할 이유도 없지요..지리적인 요소가 그러하니 그렇게 추론되는 것이지요.그렇다고 대야성 보복전투에 나서서 승리하고도 그토록 중요한 성을 버려두고 엉뚱한 곳을 휘젓고 다니는 황당한 장수도 있답니까??..각자 나름대로 지리적인 요소와 병법적인 전쟁 방법에 의한 추론이지요..물론 사료에 함락이라는 단어가 없다는 이유를 근거로 주장을 할 수가 있지요..그런데 분명한 것은 백제정벌시 신라전병력을 박박긁어서 총동원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대야성을 두고 압량주를 비울수 있다는 논리에 반론하는 것인데 그것이 뭐가 문제가 되는지요?
물론 대야성 함락건은 적어도 병법적인 상식선에서 님들이 부정하는 것과 달리 오히려 사료의 진행상 함락시켰어야만이 660년 백제정벌이나 압독주를 대야주로 옮기는 내용이 자연스럽게 보이기 때문이지요..물론 부여장님의 눈에는 별로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을지라도..부여장님 일단은 참고 넘어갑니다만 위의 댓글은 아무래도 눈에 거슬립니다...일단 지워 주시지요.!..님의 조치를 보고난뒤에 앞으로 님의 글에는 무조건 이에 걸맞는 댓글로서 대해 드릴까 합니다만..-_-;;
지리적으로 그러하다라... 대체 어떤 게 지리적으로 그러하여, 신라가 대야성을 다시 탈환하지 않는 이상 백제 정벌 시도는 불가능하다고 하는 건지요? 대야성이 있는 상태와 없는 상태에서 5만이라는 미증유의 병력 동원이 신라의 수비 지역에 대해 대체 뭐가 큰 차이를 갖습니까? 백제의 도성으로 그 대군이 진격하는데, ' 만약에 그 당시 대야성이 백제 영토였으면 빈집털이를 안 가는 게 이상한 거 아니냐 ' 라는 반박은 지리나 병법 따지기 이전에 정세와 전황을 파악 못하는 반론 아닌가요? 칠중성 역시 ' 빈집털이 당할 각오로 ' 감행했던 게 백제 원정 아니었나요?
대야성을 함락 안 시켰으면 백제로의 660년 침공의 바탕이 마련되지 않으며 앞뒤 관계가 별로 자연스럽지 않다? 그렇게 단정내릴 이유가 어디 있는가요? 님이 말씀하시는 지리적으로도 병법적으로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만? 대야성이 함락된 이후에도 감물, 동잠, 독산, 옥문곡 등 곳곳에 수비 요충지에서 차후 백제 공세를 막아냈던 신라입니다. 660년 당시 그 대군이 탄현만 넘으면 바로 평지에다 도성까지 금방인 대백제 원정의 입장과 비교가 된다 생각합니까? 사료의 진행상이라는 (사실 님의 사료 진행이라는 해석 방향도 별로 동의를 못하겠지만) 임의적 판단 아래 사료에도 없는 대야성 함락 추정, 아무리 봐도 이해가 안 가는군요
그리고 제게 자삭이니 뭐니 따지시기 전에 제 반론에 대해 님이 어떤 식으로 똑같은 고집으로만 일관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하다못해 차후 관계로 따져 봐야 할 백제의 659년 독산성과 동잠성 공격은 이미 본문에도 써 놨는데, 기어코 이건 무시하는군요~ 앞뒤 관계는 다양하게 따지지 못하고 님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하고 싶은 말만 하려 든다면, 저 역시 님의 표현에 걸맞는 답글을 달 수밖에 없습니다. 위 댓글들도 그러했구요...
그래요 고집이냐 님의 본문이나 댓글의 반론이 본인을 이해시키지 못하니 그렇고 본인 역시 님을 이해시키지 못해서 그렇다 칩시다..그런데 어리광이라니 말씀을 그런식으로 비꼬시겠다...음!..댓글 안지우고 앞으로 계속 그런식으로 진행하자는 것인가요?..님의 글에 딱 님의 방식대로 그대로 반론을 해드리도록 노력해드리겠습니다..의자왕 19년 독산 동잠성 공격이 뭐 어쨌다는 건데요?..깔짝거리다가 이듬해 카운터 펀치 맞고 K.O당한것 이외 뭐가 있지요????
대야성 함락이후 감물,동잠,독산, 옥문곡은 압량주가 있었기에 모두 김유신에 의해서 방어되거나 반격을 한것이지요..그래서 하는말이 잖아요?...대야성이 버젓이 있는데 어떻게 압량주를 비우고 그렇다고 백제 왕성인 부여를 직공한 것도 아니고 남천정으로 올라갓다가 덕물도에서 회합을 하고 비로소 부여를 공격하기 위해 내려옵니다..약 한달동안 비웠는데..그게 예사로 넘어갈인가요?..그래서 빈집털이라고 했지요?..뭐가 잘못 되었나요??..659년 독산 동잠성 공격이 뭐가 문제이죠..별로 신통찮은 공격이었는지?..양쪽 다 별다른 반응은 없고 신라는 카운터 펀치를 노릴 뿐이네요..뭘!
소호님, 대야성에서 압독주까지 직선거리는 대략 90km로 차로 가도 1시간30분가량이 걸리는 지역으로 바로 접경해 있는 지역이 아닙니다. 비슬산이나 팔공산 같은 험한 산세에 둘러쌓여 가는길도 험하고요. 또한 백제부흥운동을 한 거열성(경북거창)에서 압독주까지의 직선거리도 대야성과 거의 비슷한 90km정도 됩니다. 오히려 신라조정이 백제 거열성이 건재하고 있는대, 압독주를 비웠으니 병법에 무지한건가요??
90km거리면 기병으로 천천히 가도 한나절 거리이지요 그런데 대야성과 압량주사이에 요새가 될만한 방어지역이 없다는 것입니다..그래요 대야성과 거열성이 있는데 어떻게 압량주를 비우고 백제정벌에 올인을 한답니까?..그것을 그냥 냅둔다면 병법의 무지정도가 아니라 아예 바보도 그런 바보가 따로 있는게 아니지요!
그래서 묻는겁니다. 거열성은 백제부흥운동이 일어난 지역으로 백제멸망직전까지 백제의영토였습니다. 그런 거열성이 건재한대, 왜 압독주를 비우냐는거죠
신라인들이 정말 병법에 무지한건가요?
전혀 상대방의 주장에 대해 말귀 조차 못알아 듣고 동문서답하는 님에게 이것으로 토론을 끝내는 것이 좋겠군요....^^*
소호님의 논리로 하자면, 백제 무왕이 좌평 해수에게 무려 4만의 대군을 일으켜 아막성을 치는대, 이들이 만약 수도에 상주하는 상비군이라면, 불과 말타고 반나절 거리에 있는 삼년산성의 병사들은 백제 도성의 방비가 허술했을텐대 왜 사비성과 웅진성을 안친거죠? 그뒤로도 백제는 삼년산성을 안치고 대야성과 미후성을 치는등의 행동을 보이는대, 왜 백제는 불안요소를 계속 남겨둔걸까요? 사리상 앞뒤가 안맞으니, 삼년산성이 언젠가 백제의 영토로 편입된건가요? 그게 아니라면 신라인들이 병법에 무지한건가요? 아니면 백제가 병법에 무지한건가요? 아니면 기록이 잘못된건가요?
삼년산성에서 부여성으로 가는 외길에 탄현고개가 천헤의 요새라는 것도 모르시나요?..이건 뭐 비교될 수 잇는 것을 비교해야지 어린애 장난도 아니고 당시 부여에서 남원의 아막성으로 병력을 칠때 백제 도성의 주위의 국경수비대까지 모조리 긁어왔다는 보장이 어디 있으며 호남지역의 병력을 보충받을 경우는 왜 생각을 안하시는지요?..그리고 신라는 백제 정벌시 병력을 모조리 싹스리로 겨우 충당했다면서요?..그런식으로 주장을 해놓고서는 무슨 뚱단지같은 소리를 하는지? 도대체 이해가 되어야 반론을 하든지 말든지 하지요.
제가 4만명이 상비군들로 이루어져있을것이라고 추정하였지 이들 상비군을 모조리 긁어왔다고 말한적은 없습니다만... 그 4만명의 병력외에도 백제이 수비군은 인근에 거주는 하겠죠. 다만, 많아봐야 수도에 상비군은 평소보다는 극히 적을게 분명하다는 것이지 텅텅비었다는 소리 한적 절대 없습니다. 소호님이야 말로 제가 한 발언이 없음에도 마치 한것인양 오해하여 감정적 대응을 하시는거 같습니다
하하 백제사랑님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요?..신라가 백제를 정벌했을때 박박긁어서 겨우 나당연합군을 결성하여 백제를 공격했다는 사람들이 있어서 하는 말인데 왜 자꾸 동문서답을 하시는지요?..4만명 상비군에 대해 제가 뭐라고 했나요?..
토론이 과열양상으로 치닫으면서 비꼼과 상대방을 무시, 극단적인 언사, 예시들이 오가고 있는데, 제 개인적으로는 세 분 모두에게서 배우고 있는 입장이기에 경고 받아서 일주일 활동정지 되거나 강퇴당하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세 분 모두 이쯤에서 진정들 하시고 차분히 토론에 임하셨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