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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농의 아들에서 재계신화로...
소판 돈 들고 가출해 맨손으로 ’현대왕국’ 건설
한국 경제 기틀 마련..대북사업 미완성으로 남아
“스스로 땅을 찾아 말뚝을 박은 사람”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에 대한 수없는 평가와 찬사가 넘쳐나지만,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의 이 질박한 촌평이야말로 정곡을 찌르는 비유다.
강원도 산골에서 소판 돈 70원을 들고 가출해 맨주먹으로 세계 굴지의 기업을 일궈낸 그의 생애가
잿더미에서 땅을 찾아 우리 경제의 ’말뚝’을 박은 거인(巨人)의 행보였기 때문이다.
오는 21일로 정 명예회장이 타계한 지 10년이 된다.
그는 당장 먹고사는 사업에 연연하지 않고 조선, 자동차, 중공업, 철강 등에 투자했다.
단순히 재벌이나 대기업을 넘어 국가 경제의 역사를 새롭게 썼다는 점에서 그의 발자취는 독보적이다.
’한국 산업근대화의 주역’, ’아시아의 위대한 지도자’, ’한국 재계의 나폴레옹’, ’불가능했던 일을 실현한 사람’ 등
화려한 수식어를 뒤로하고 그가 또다른 ’말뚝’을 박으려 했던 ’대북사업’은 미완성이다.
정주영이 타계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그의 마지막 꿈은 아직 살아있다.
물론 그를 ’재계의 거목’에서 완전한 ’통일 선구자’의 반열에 올려놓는 일은 ’10주기’보다 더 긴 세월을 필요로 할지 모른다..
◇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정주영은 1915년 11월25일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아버지 정봉식과 어머니 한성실 사이에서 6남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코 흘리던 열살 때부터 아버지의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고 늘 배가 고팠다.
일제의 수탈이 심해지면서 아침에 밥을 먹고
저녁에는 배가 고파도 잠을 자면 그만이니까 죽을 쑤어먹던 이른바 ’조반석죽’이 다반사였다.
시골에서 보통학교만 졸업한 그는 교사가 되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 사범학교에 갈 수 없었다.
농촌에서는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무작정 가출을 시도했다.
원산으로, 서울로 두 차례 집을 나갔다가 아버지에 붙들려 집으로 돌아와야 했던 정주영은
세 번째 가출에 성공한 뒤 인천에서 부두 하역일과 막노동을 했다.
이때 나이 19세였다.
이곳저곳을 다니며 막일꾼으로 품을 팔던 그는 복흥상회라는 쌀가게에 취직하고 여기서 첫 성공을 이룬다.
정주영은 처음에는 쌀 한 가마니 값의 월급을 받고 세끼 식사는 그 집에서 먹는다는 조건으로 일을 했다.
이 가게에서 일한 지 3년쯤 된 어느 날, 가게 문을 닫겠다고 마음먹은 주인이 정주영에게 말했다.
“자네는 배달을 하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신용도 얻었으니 그대로 가게를 꾸려가면 어떻겠나?”
홀로 설 수 있는 첫 번째 기회가 생긴 셈이다.
쌀가게 주인이 된 정주영은 경일상회로 이름을 바꾸고 서울여상과 배화여고 기숙사에 쌀을 대면서 조금씩 돈을 벌었다.
황해도 연백 등 쌀 산지에서 쌀을 사들여 서울에서 도매와 소매를 겸했다.
이때 경일상회의 수익금으로 고향에 논 30마지기를 살 정도였다고 하니 아버지에게 면은 세운 셈이다.
그러나 1939년 일제의 전시체제령에 따른 쌀 배급제의 실시로 경일상회는 결국 문을 닫게 됐다.
이때 쌀가게 단골이자 서울 최대의 경성서비스공장의 직공이던 이을학씨를 만난 게 또다른 전기가 됐다.
“아현동에 아도서비스라는 차 수리공장이 있는데 그걸 한번 해 보지 그래요?”
산골 소년은 정비업체 사장이 됐고, 이는 후일 현대자동차라는 글로벌 회사가 탄생하게 된 씨앗이 됐다.
◇ 맨손으로 일군 ’현대 신화’
아도서비스의 성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자동차 일을 배우겠다는 열정으로 도색 일을 배우며 밤을 지샌 뒤 새벽에 세숫물을 데우려다
신나 통에 불이 옮아붙어 공장은 삽시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무허가 수리공장을 지었으나 1942년 5월 기업정리령에 의해 거리로 내몰렸고,
호구지책으로 뛰어든 운수업도 3년 만에 손을 놔야 했다.
1년간 무직 생활도 했지만 그는 다시 일어섰다.
1946년 4월 중구 초동에 ’현대자동차공업사’라는 간판을 내걸면서 ’현대’라는 상호를 처음 사용했다.
정주영은 어느 날 관청에 갔다가 건설업자들이 공사대금으로 뭉칫돈을 받아가는 것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어
’현대토건사’라는 건설사를 세웠다.
이 회사가 지금 현대건설의 전신이다.
그는 한국전쟁 때 미군 숙소를 짓는 일에 손을 대며 돈을 모았다.
1952년에는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 숙소 공사로 “현다이 넘버원” 소리를 들었다.
한겨울 부산 유엔군 묘지를 새파란 잔디로 덮어 달라는 제의에 낙동강가의 보리를 옮겨 심은 기지는 미군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이같은 노력과 아이디어로 현대건설은 1962년 국내 도급순위 1위에 올랐다.
이번엔 해외였다.
정주영은 1965년 9월 태국 파티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하면서 해외진출에 성공했다.
1966년 베트남 캄란만 군사기지 건설공사로 경험을 쌓았고
1968년에는 2년5개월이라는 세계 최단시간 완공의 기록을 남긴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했다.
고속도로 공사가 시작되자 정주영은 현장에 간이침대를 놓고 직원들을 독려했다.
건설과 자동차에 이어 그는 조선으로 시선을 돌렸다.
처음에 미쓰비시상사에 차관을 의뢰했다 실패하자
사업계획서 한 장과 울산 미포 만의 백사장 사진 한 장만 달랑 들고 1971년 9월 런던으로 날아갔다.
그는 여기서 우여곡절 끝에 돈을 빌리고 조선소도 없이
선박왕 오나시스의 처남인 리바노스로부터 26만t짜리 2척을 수주하는 거짓말 같은 일화를 만들어냈다.
1976년 정주영은 20세기 최대의 역사로 불리는 9억3천만달러 규모의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수주하며
중동 진출의 꽃을 피운다.
1966년 진출한 자동차 산업은 1974년에 순수 국산자동차 1호인 포니를 만들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시작했고
1억달러를 넘는 돈을 쏟아부어 연산 5만6천대 규모의 국산차 공장을 착공했다.
1986년에는 국내 처음으로 엑셀이 자동차의 본고장인 미국시장에 진출, 불과 4개월만에 5만2천400대를 판매하는 기염을 토했다.
중후장대형 사업의 여세를 몰아 정주영은 첨단전자 분야에 눈을 돌리고
1983년 현대전자를 설립해 세계적인 반도체업체로 성장시켰다.
기업인 정주영은 체육인으로도 눈부신 활약을 했다.
1981년 서울올림픽 유치위원장을 맡아 불가능하다는 예상을 뒤엎고 불과 5개월만에 서울을 올림픽 개최도시로 만들었다.
◇ 대권도전과 대북사업
한국 경제사의 살아있는 신화로까지 추앙받던 정주영은 1992년 대권도전을 정점으로 서서히 쇠락의 길을 걷는다.
주변 인물들은 그의 직관력(直觀力)이 흐려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라고 입을 모은다.
“총체적 난국이 나를 불렀다”는 시대적 소명론을 앞세운 정주영의 대권도전은
당시 세력 다툼으로 일관한 정치현실에 신선한 충격이었다.
’경제살리기’와 ’통일경제’라는 슬로건은 기업총수의 정치참여라는 사상 초유의 ’실험’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고조시켰다.
이는 1992년 1월11일 닻을 올린 정주영의 통일국민당이 창당 3개월 만인 3.24 총선에서 31석을 차지,
원내 캐스팅보트를 쥐게 된 데서 뚜렷이 나타났다.
같은 해 5월15일 대통령 후보로 추대된 정주영은
그 후 천문학적 자금투하와 그룹의 측면지원을 통해 새로운 정치신화에의 야욕을 불태웠다.
그러나 대선결과는 참패로 돌아갔다.
김영삼 후보를 내세운 당시 노태우 정부의 ’흠집내기’와 함께 정치권의 진입 장벽이 걸림돌로 작용한데다
무엇보다도 민심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던 정주영의 일생에 결정적 실패로 기록된 셈이다.
정주영은 애써 의연한 태도를 보였지만
정신적 충격에서 쉽게 헤어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결국 현대그룹은 문민정부 5년간 ’괘씸죄’로 톡톡한 대가를 치렀다.
▲북한으로 가는 소떼 행렬
그러나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정주영과 현대그룹은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맞는다.
정주영의 ’통일경제론’과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이 결합하면서 남북경협 시대가 본격 개막된 것이다.
정주영은 1998년 6월17일 85세 고령에 소떼 500마리를 끌고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프랑스 문명비평가인 기 소르망은 이를 두고 “전위예술적 작품”이라고 했다.
소떼 방북 3개월 뒤 현대 금강호가 출항했고, 현대의 대북사업이 본격화됐다.
대북사업은 남북교류의 물꼬를 텄고 3년 뒤인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정주영 필생의 과업인 대북사업의 성공은 그가 일군 현대그룹의 몰락을 가져오는 역사의 아이러니로 귀결됐다.
수익성이 없는 대북사업에 대한 ’과다출혈’은 그룹의 부실을 심화시켰고 시장은 더 이상 현대그룹을 신뢰하지 않았다.
1999년 말부터 정주영의 건강에 이상증세가 나타나자
그의 카리스마에 의존해온 그룹의 일인지배체제는 급속도로 균열되기 시작했다.
그 틈에 몽구(MK).몽헌(MH) 형제간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정주영은 MH에게 그룹의 적통을 물려줬지만 장성한 아들들 간의 재산관계를 명쾌히 정리하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2000년 3월14일 밤 MH의 핵심 가신인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을 MK가 전격경질하면서 촉발된 세칭 ’왕자의 난’은
급기야 그룹의 모태인 현대건설의 유동성 위기로 이어졌다.
가신그룹의 이기주의까지 가세한 형제들의 경영권 다툼은 점입가경으로 치달았고
그러는 사이 건설을 포함해 전자. 상선.투신.증권 등 그룹의 전 계열사가 도미노식으로 부실화됐다.
정주영의 기력은 현대사태가 최고조를 이루던 6월 말 방북을 계기로 급속도로 쇠약해지기 시작했고,
결국 2001년 3월21일 86세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개인의 죽음을 넘어 한 시대의 종언이었다.
현대그룹 창업주 아산 정주영 21일 10주기
1990년대 후반 미국에서 현대차는 ‘싸구려’의 대명사였다.
리콜 요청이 쇄도했고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는 당시 미국 정부의 잘못된 정책 결정을 현대차 구매 결정에 비유하곤 했다.
1986년 미국 진출과 동시에 ‘엑셀’ 16만 대를 팔아치운 현대차의 판매는 계속 감소하더니 1998년엔 간신히 9만 대를 넘겼다.
미국 진출 이후 10만 대 아래로 떨어진 건 처음이었다.
1999년 현대자동차 회장에 취임하자마자 미국을 방문한 정몽구 회장은
한국에서 열심히 만들어낸 차량이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있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자존심도 많이 상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정 회장은 곧바로 ‘품질경영’을 시작한다.
그러기를 10여 년, 현대자동차그룹은 지난해 미국에 모두 89만 대의 자동차를 팔았다.
1998년에 비해 10배가 늘었다.
21일은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타계한 지 10년이 되는 날이다.
타계 전 해에 벌어진 ‘왕자의 난’으로 아산이 이룩한 현대그룹은 크게 현대차, 현대그룹, 현대중공업 등으로 쪼개졌다.
그룹의 뿌리였던 현대건설은 매각되는 시련을 맞았고,
1990년대 1등이었던 전체 현대그룹의 재계 순위도 삼성그룹에 밀리면서 1위를 빼앗겼다.
하지만 쪼개진 범현대가 기업들은
‘해봤어?’와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로 요약되는 아산의 도전정신과 끈기, 신념을 유산으로 물려받아
예전의 영광을 회복해나가고 있다.
현대건설도 다시 현대가의 품으로 돌아왔다.
아산이 타계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그의 경영철학과 한국을 한 단계 끌어올린 유전자(DNA)가 다시 빛을 발하고 있는 셈이다.
○ 현대차의 뚝심
1999년 당시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가운데)이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과 함께 인수한 기아자동차 화성공장을 둘러보며 관계자들을 격려하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 제공
미국에서 실망하고 돌아온 정몽구 회장은 1999년 미국시장에 ‘10년 10만마일 워런티’를 내세웠다.
현대차 스스로에게 처방하는 ‘충격요법’ 내지는 ‘벼랑 끝 전략’이라는 의미도 있었다.
도요타나 혼다 등 일본의 경쟁사들은 ‘미친 짓’이라고 비웃었다.
당시의 서비스는 ‘2년 2만4000마일 워런티’가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차는 흔들리지 않고 꿋꿋이 밀고 나갔다.
10년이 지나 현대차의 10만 마일 서비스는 결국 성공으로 판명됐다.
비웃던 경쟁 회사들이 서비스 기간과 마일리지를 늘리며 현대차를 따라오고 있다.
10여 년 전 정몽구 회장이 현대차를 물려받았을 때
아무도 세계 5위(기아차 포함 2009년 기준)의 자동차회사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17일 미국에서 발표된 현대차의 내구품질 순위도 일반 브랜드 중 도요타와 뷰익에 이어 3위고 기아차도 9위를 차지했다.
김신 경희대 경영학과 교수는
“지금 현대차그룹의 성장에는 아산의 개척정신이 자리 잡고 있다”며
“과감한 결단과, 일단 결정을 내리면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기업가 정신이 정 명예회장의 기업철학이고
그게 지금의 현대차에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과감함은 실적으로 나타났다. 아산이 타계한 2001년 현대차그룹의 매출액은 45조9000억 원이었으나
2009년 94조6500억 원으로 늘었다. 2000년 2조8600억 원이던 순익 규모는 2009년 8조4300억 원이 됐다.
○ 현대중공업의 혁신
아산의 진취적인 기질을 가장 많이 계승한 건 현대중공업이다.
1971년 아산이 조선업에 진출하려고 했을 때 걸림돌은 돈이었다.
아산은 몇몇 국가와 끈질긴 협상 끝에 영국과 스위스에서 1억 달러의 차관을 받아낸다.
하지만 영국 금융권에서는 그 당시 전무한 수주실적을 요구했다.
이에 아산은 그리스로 날아가 거북선이 새겨진 500원짜리 지폐와 울산 미포만의 백사장 사진으로 260만 t급 유조선 2척을 수주했다.
현대중공업은 이후 조선 분야에서는 줄곧 세계 1위를 지켰지만
시장이 한정된 조선 분야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새로운 사업에 진출하고 있다.
배는 잘 만들지만 선박용 엔진은 수입하던 현대중공업은 1990년부터 10여 년 동안 총 400억 원의 연구개발비를 투입해
2000년 국내 최초이자 유일한 독자개발 엔진인 ‘힘센엔진’의 개발을 완성했다.
또 태양광과 풍력 등 신재생 에너지 사업에 뛰어들었고
국내에서 유일하게 산업용 로봇을 생산하며 KTX 등의 핵심 설비인 전기 추진 장치도 만든다.
이 덕분에 아산 타계 당시 전체 매출의 50%에 이르던 조선분야 매출을 30% 선으로 낮출 수 있었다.
김진수 중앙대 창업경영대학원 교수는
“아산의 경영은 혁신성 진취성 위험감수성으로 정리되는데
범현대가 기업들은 여기에 글로벌한 경영감각이 더해졌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현대중공업그룹의 전체 매출액은 2001년 8조4000억 원에서 2010년 말 기준 50조 원으로 늘어났다.
○ 대북사업과 흩어진 가족
겉돌고 있는 대북사업과 화합하지 못하는 현대가는 아산의 뜻을 잇지 못한 아쉬운 부분이다.
1998년 6월의 역사적인 ‘소떼몰이’ 방북으로 대표되는 아산의 숙원인 대북사업은
정몽헌 회장의 자살과 정치적인 이유로 아직도 미완으로 남아 있다.
가족적인 가치를 매우 중시하던 현대그룹이 ‘왕자의 난’ 이후 갈등을 이어가고 있는 점도 현대가의 숙제다.
현대건설 인수를 놓고 앙금이 깊어진 현대차그룹과 현대그룹은 아직도 갈등의 골이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