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강아지풀
김 영 림
충주 비내길을 걷는 저녁 무렵
강아지풀이
비스듬한 저녁 햇살의 기울기 안으로
순하게 머리를 조아리자
황금 갈기같이 빛나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네
그 순종의 고개 숙임이
빳빳한 머리의 꽃들보다
더 마음 깊이 새겨지는 건
보드라운 감촉 때문은
아니라는 것
기도하는 이들의 무릎 꿇음에
귀 기울이듯
햇살은 몸을 낮추고
내 인생의 저녁이 저러하기를,
나 또한 공손히 고개 숙이었네
**적어도 불혹(不惑)이나 지천명(知天命)에 이르러서야 저러한 풍경이 눈에 들어오리라.
이 시를 읽으니 언젠가 나도 한번 본 것 같다는 기시감이 들면서, 약간은 비탈진 땅에 무리진 강아지 풀들이, 고개 숙이듯 바람에 일렁이는 광경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때마침 ‘비스듬한 햇살의 기울기 안으로/ 순하게 머리를 조아리자/ 황금 갈기같이 빛나기 시작하는’ 이러한 광경은, 나이든 이에게는 인생의 황혼과 맞아떨어지면서 뭔가 우주 자연과 자신이 합일하는 듯한 일체감 같은 것을 느낄 듯하다.
시인은 ‘그 순종의 고개 숙임이/ 빳빳한 머리의 꽃들보다/ 더 마음 깊이 새겨’진다면서 거기 ‘겸손’을 보았고, 그것은 강아지풀의 그 ‘보드라운 감촉 때문은/ 아니라’고 하여 단지 가벼운 감각에서가 아니라, ‘기도하는 이들의 무릎 꿇음에/ 귀 기울이듯’ 마음 깊이 겸허함을 느끼고 있다는 걸 읽을 수 있다. 그리하여 ‘내 인생의 저녁이 저러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공손히 고개 숙’인다고 하였다. 읽는 사람도 숙연하게 고개숙여지는 대목이다.
위의 시로 보아 시 속의 화자는 ‘빳빳한 머리의 꽃’에 더 마음이 가는 젊은이가 아니라, 꽤나 인생을 살아온 원숙의 경지에 이른 지천명 이상의 연륜대일 것이라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자연과 사물에서 삶의 지혜를 깨쳐 얻기도 하지만, 그것은 이미 우리 안에 그러한 지혜의 싹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김영림 시인의 기도하는 자세 같은 겸허함을 감명 깊게 읽어보았다.
몽돌
김종웅
나를 깎지 못한 생각들
또르르 굴러다니다
누군가와 부딪치면 아픈 소리가 난다
겸연쩍더라도 한 번만이라도 굴러보았더라면
구르다 눈 먼 미소 하나쯤
얻어 걸쳤을 수도 있었을 텐데
처량한 핀잔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거칠고 모난 것들
저 몽돌
모나고 거친 생각 매끈하게 뭉그러질 때까지
세월을 깎고 수양한 결실이다
뭉글다는 건
사랑해도 좋다는 품격이다
내 안에 거칠고 모난 생각들
다듬고 다듬어
네게로 가도 좋다는 허락이다
어느날부터 나는
줏어 온 몽돌 하나 눈 높이에 두고 습관처럼 보고 본다
**여름 바닷가 모래사장을 거닐면서 추억처럼 돌을 줍는다. 동글동글하고 예쁜 돌을 주우면서 우리의 마음은 꿈을 꾸는 듯, 그지없이 평화롭다. 그러나 그 돌들이 원래부터 그렇게 동글동글하고 예쁘게 생겨났던 것은 아니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 속에, 차르르 차르르 파도에 밀려 구르는 몽돌 소리를 놓쳐서는 안된다. 몇천 년, 몇 억년 그렇게 파도에 부딪히고 밀려서 바위는 부서지고, 모난 돌은 깎이고 깍여서 그렇게 반질반질하게 닳고, 동글동글하게 예뻐진 것이다.
우리들의 모난 생각이나 성질머리도 이 몽돌과 같이 그렇게 부딪히고 닳아야 하리라. 이 시의 화자는 바닷가 절벽 밑에서 몽돌 구르는 소리를 듣는다. ‘나를 깎지 못한 생각들/ 또르르 굴러다니다/ 누군가와 부딪치면 아픈 소리가 난다’고 하였다. 시인은 몽돌 구르는 소리를 들으면서 세상의 누군가와 부딪히는 아픔을 느끼는 것이다. 아픔을 참고 그렇게 부딪히고 닳아야 동글동글한 품성이 길러지리라. ‘겸연쩍더라도 한 번만이라도 굴러보았더라면/ 구르다 눈먼 미소 하나쯤/ 얻어걸쳤을 수도 있었을 텐데/하고 후회도 해본다.
아직도 ‘처량한 핀잔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거칠고 모난 것들/ 저 몽돌/ 모나고 거친 생각 매끈하게 뭉그러질 때까지/ 세월을 깎고 수양’을 해야 한다고, 허우적대는 늪에서 빠져나와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짐하고 채찍질한다.
시인은 ‘뭉글다는 건/ 사랑해도 좋다는 품격이’라 정의(定義하)고, 그 사랑을 위하여 ‘내 안에 거칠고 모난 생각들/ 다듬고 다듬어/ 네게로 가도 좋다는 허락’을 얻고자 한다.
그리하여 ‘어느 날부’턴가 ‘줏어 온 몽돌 하나 눈 높이에 두고 습관처럼 보고 보’면서 스스로를 갈고 닦기를 게을리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단단히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