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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23일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마태오 22,34-40
연애와 사랑은 무엇이 다른가?
2010년 한 여성이 치명적인 자동차 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당시 임신 4개월 때였습니다.
다행히 태아는 건강한 상태였습니다.
이후 그녀는 제왕절개 시술이 가능해질 때까지 5개월간 집에서 남편의 보살핌 속에 누워있었고, 9개월이 되자 병원으로 옮겨져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산모는 상태가 더 안 좋아졌습니다.
의사들은 산모는 회복하기 어려우니 준비하라고 말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를 지키던 가족들도 다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그녀를 지키는 이가 한 명 있었습니다.
바로 그의 아들 가오 친빠오였습니다.
아기는 엄마의 머리맡에 앉아 시간 대부분을 보냈습니다.
서툰 말투로 대화도 건네며 단 한 번도 칭얼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는데 이도 제대로 나지 않은 아기가 엄마의 병원 음식을 씹어 자기 입으로 엄마의 입에 넣어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치 어미 새가 새끼에게 먹이를 먹여 주는 것처럼 행동하던 2013년 5월, 아기가 작은 소리로 엄마를 부를 때 엄마가 눈을 떴습니다.
중국 장롱샹 씨의 기적 같은 이야기는 영국의 일간지 ‘데일리 메일’에 기사화 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인터뷰에서 엄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때야 3년의 세월이 지났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제 머리맡에서 미소 짓는 아기가 제 아들이라는 사실도 그제야 알게 됐고요.”
의사들은 의아해했습니다.
혼수상태에 빠진 엄마는 음식을 겨우 삼킬 수만 있었고 씹지 않은 것들은 소화를 시키지 못했습니다.
아기가 어떻게 이것을 알고 음식을 씹어 엄마의 입속에 넣어주었을까요?
[출처: ‘왓칭 2: 시야를 무한히 넓히려면’, 김상운, 정신세계사]
정말 대단한 아기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아기의 사랑은 정말 순수할까요? 아기가 무슨 정신으로, 어디서 배워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을까요? 아기는 엄마가 필요했기 때문에 그런 행위를 한 것입니다.
나중에 엄마가 다 나아서 아이에게 사랑을 퍼부어 줄 때 아기는 자신이 투자한 것에 비해 돌아오는 게 작다고 불평을 할 것입니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에서 아픈 여자를 위해 비를 맞으며 마지막 잎새를 벽에 그려 넣은 나이 든 화가는 정말 사랑이 많았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까요?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평생 그림을 그려왔지만, 누구도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자 그렇게라도 한 여자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너무 사랑 자체를 이기적인 것으로 비하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것을 ‘연애’라고 하겠습니다. 연애는 사랑이 시작되기 이전의 단계입니다.
많은 이들은 연애를 사랑으로 착각합니다.
좀 심하게 얘기하자면 연애는 모기 두 마리가 하는 거지만, 사랑은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가 하는 것입니다.
둘이 모르는 사이였을 때는 오히려 싸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둘이 서로 연애하게 되었을 때는 자신이 지금까지 투자한 것을 돌려받고 싶어 합니다. 원하는 것이 더 많아진다는 뜻입니다.
둘 다 똑같이 그렇습니다.
말은 하지 않지만 서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나를 이렇게 좋아하게 만드는 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네가 나를 좋아하는 감정으로 행복하다면 이제 나도 행복하게 해 줘야지!’
결국 사랑을 한 것이 아니라 투자를 한 것입니다. 연애는 투자입니다.
투자는 내가 투자한 것보다 더 벌어야 만족합니다.
그러나 서로 연애하게 된 이상 이전보다 더 열심히 투자가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서 서로 서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이 투자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계명 중 가장 큰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 하십니다.
그다음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하느님으로부터 계명을 받아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나의 사랑이 나 자신을 만족시키는 것을 넘어서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됩니다.
이것으로 이미 이웃에게 합당한 보상이 오지 않더라도 서운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이웃 사랑은 기필코 하느님 사랑과 연합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우슈비츠에 투옥되었던 동안 가족이 있는 다른 수감자와 교환하여 자신의 생명을 바친
성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의 예를 생각해보십시오. 성 막시밀리안의 사랑은 개인적 이익이나
감정적 감정에 기초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에 대한
순종의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사랑에 상대가 반응이 없어도, 오히려 나는 빵을 주는데 그 사람이 칼을 주더라도 나의 사랑은 멈추지 않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보상이나 인정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명령에 기초를 두었기 때문에
진실합니다.
그러면 언제 연애에서 사랑이 될까요? 하느님께서 상대를 사랑하라고 하신 명령을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따르기로 결심했을 때 그 사람은 이제 연애에서 사랑으로 옮겨오게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23일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복음 : 마태22,34-40
진정한 사랑은 역동적인 것,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저희 살레시오회 창립자 성 요한 보스코가 청소년 교육을 위해 창안한 교육 방식을 ‘예방교육’이라고 칭합니다.
예방교육을 한 마디로 ‘마음의 교육학’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저도 처음 이 용어를 접하고 마음의 교육학? 무슨 뜬금없는 말인가? 했습니다.
그런데 살레시오 회원으로 연륜이 조금씩 쌓이면서 아주 조금씩 마음의 교육학에 대해서 수긍을 하게 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습니다.
매사에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수많은 교사들을 만났는데, 아이들을 위한 마음이 조금도 없는 교사들도 계시더군요. 마음이 없으니
열정도 없고, 사랑도 없습니다.
아이에 대한 기대도 없고, 그저 때되면 월급 나오고, 일년 지나면 헤어지고...마음이 없는 교사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반면에 마음이 있는 선생님들, 스승님들, 정말이지 대단합니다.
아이들에 대한 마음이 관심을 지닙니다.
그의 미래에, 그의 성적에, 그의 내면에 신경을 씁니다.
그를 위해 시간을 내고, 그를 위해 헌신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아이들 하나하나가 내 자식 같습니다.
마음이 없는 사목자들도 만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을 위한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의 마음이 늘 다른 데 가 있습니다.
양들의 영혼, 그들의 건강과 행복, 구원과 영생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습니다.
마음이 없으니 헌신도 희생도 없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그들은 삯꾼일 뿐입니다.
그저 자기 자리 잘 보전하고 자기 한 몸 지키는데 급급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성장이나 쇄신은 조금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 없이 드리는 제사, 건성건성 바치는 봉헌, 습관처럼 해치우는 미사, 그저 하나의 요식행위일 뿐입니다.
목숨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숨이라고 다 같은 목숨이 아닙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파리목숨 같은 목숨도 있고, 너무나 어이없고 하찮은 목숨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한번 뿐인 이 목숨, 얼마나 소중한 것인데 말입니다.
가끔 후배들에게 한 마디 할 기회가 생기면 어쩔 수 없이 ‘왕꼰대’가 되고 맙니다.
“여러분들, 시편 말씀 기억하십니까?
우리가 아무리 난다긴다 할지라도 숨 한번 끊어지면 즉시 흙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뭐 그리 아끼고, 애지중지하고, 그렇게 목숨 걸고 관리합니까?
움직일 수 있을 때, 누군가에게 도움 줄 수 있을 때, 아낌없이 팔 걷어붙이고 움직이십시오.
진정한 사랑은 역동적인 것, 누군가를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강론>
(2024. 8. 23. 금)(마태 22,34-40)
<사랑은 이론이나 지식이 아니라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4-40).”
1) 여기서 ‘시험하려고’는 ‘함정에 빠뜨리려고’입니다.
이 말은 앞의 15절, “그때에 바리사이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면 말로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울까 하고
의논하였다.” 라는 말에 연결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예수님께 질문을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논쟁을 하고 싶어서, 그리고 그 논쟁에서 무엇이든지 꼬투리를 잡아서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질문을 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안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교회와 신앙인들을 공격하려고, 또는 시빗거리를 찾으려고 의도적으로 성경이나 교리에 관해서 질문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일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이 말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며,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시니, 그러한 당신 자신을 부정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설전을 벌이지 말라고 하느님 앞에서 엄숙히 경고하십시오.
그런 짓은 아무런 이득 없이, 듣는 이들에게 해를 끼칠 따름입니다.
그대는 인정받는 사람으로, 부끄러울 것 없이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일꾼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2티모 2,11-15).”
신앙을 증언하는 일과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자신의 신앙에 대한 확신과 ‘믿는 대로 사는 삶’으로 이루어집니다.
언제나 항상 말보다 삶이 먼저입니다.
말을 잘하면 논쟁도 잘하겠지만, 논쟁으로 상대방을 감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반감과 적대감만 더 키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속마음을 알고 계셨겠지만 개의치 않으시고, ‘사랑’이 모든 계명들과 율법들의 근본정신이라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여기서 율법학자는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는 뜻으로 ‘가장 큰 계명’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라는 말은, ‘계명의 근본정신’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계명들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 자체로 ‘사랑’이기 때문에, 계명을 실천하는 일도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2)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다하고 당신의 목숨을 다하고 당신의 정신을 다하여 너를 사랑하시니 너도 그렇게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그 사랑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1요한 4,9-10).”
<이 말을, 하느님께서는 뒤로 물러나 계시고 아드님만 세상에 보내서 희생시키셨다는 말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삼위일체 안에서, 아버지께서 외아드님의 목숨을 내주신 일은 곧 당신의 목숨을 내주신 일입니다.>
그런데 사랑의 계명에 대해서, “사랑이란, 내가 원해서, 또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인데 ‘해야 한다.’ 라는 계명으로 정해서 명령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사랑’을 ‘명령’할 수 있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말과 ‘계명’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긴 합니다.
여기서 ‘계명’은 강압적인 ‘명령’이 아니라, 예수님의 간곡한 심정을 나타내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라는 말씀으로 당신의 심정을 나타내셨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 또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것, 바로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3)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라는 계명은, 표현만 다를 뿐이고, 뜻은 ‘하느님 사랑’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요한 3,16).”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당신 자신처럼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믿는다면 우리도 그렇게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당연한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요한 15,12).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4) 신앙은 이론이나 지식이 아니라 ‘삶’입니다.
그것과 똑같이 ‘사랑’도 이론이나 지식이 아니라 ‘삶’입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몰라도 괜찮고, 사랑이란 무엇인지 설명하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온 마음과 온 삶을 다하여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만이 중요할 뿐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