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27일 [성주간 수요일]
마태오 26,14-25
인생이 무대라 여기면 평화의 길이 보인다
무대공포증이란 게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공포를 느끼지 않으려면 무대에 서지 않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무대에 섰다면 무대공포증을 느끼는 것은 무대를 준비하고 그 위에 나를 세운 누군가를 배신하는 일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정해주는 역할을 거부한 가리옷 유다는 어떤 심판을 받았을까요?
예수님은 그를 두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무대는 누군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장소입니다.
그리고 그 작가가 준 역할과 대사를 완벽하게 구현하지 못하면 트라우마가 생기고 무대에 오를 때마다 공포에 휩싸여야 합니다.
무대에서는 그곳에 올려준 이의 의도대로 잘할 자신이 없다면 언제나 공포 속에서 올라야 합니다.
가수 보아 씨는 이른 나이에 일본에서 데뷔하게 됩니다.
십 대 중반의 나이에 춤을 추며 노래를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쇼케이스 무대에서 음 이탈을 몇 번 일으킵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비판의 목소리는 어린 보아를 주눅들게 하였습니다.
그녀는 무대에 오를 때마다 1년씩 늙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합니다.
만약 무대에 오를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면 노래 부르며 음 이탈을 겪는 것은 두려울 게 없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대가 아니라면 사람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양심상 죄를 지으면 하늘이 두려워지고 이웃에게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아무리 인생이 무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불안과 두려움, 긴장과 걱정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그냥 인생이 누군가에 의해 올려진 무대라고 여기면 어떨까요?
영화 ‘버드맨’은 20년 전 버드맨이라는 영웅물로 유명했던 한 남자배우가 이전의 영광을 다시
찾고자 하는 노력을 그렸습니다.
전 재산을 털어 연극을 만들었고 다행히 흥행합니다.
그런데 정작 영웅이 되는 것은 연극에서 주인공을 연기한 젊은 배우입니다.
자신도 그 연극에서 인정을 다시 받고 싶지만, 아무도 한물간 배우를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그의 귓속에서는 이전의 영광이었던 버드맨이 분명 이전의 영광을 다시 얻을 수 있다고 종용합니다.
그는 결국 진짜 권총으로 자기 얼굴을 쏩니다. 연극의 완성을 위해서.
연극은 자기 영광이 아닌 보는 관객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영화 블랙스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주인공은 자신 때문에 발레를 포기한 엄마의 뜻을 이뤄주기 위해 살인까지 불사합니다.
우리 안에도 우리만의 무대를 만들고 그 안에서 자기 영광을 추구하라는 유혹이 있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타인이 만든 무대에 서든지, 자기가 만든 무대에 서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유다는 자기 무대를 자기가 만들고 버드맨처럼 자기 영광을 추구하려 하였습니다.
결과는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해 공포에 휩싸여 자살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인생이 누군가에 의해 창조된 무대라고 여길 필요가 있습니다.
그때 감독이 원하는 배역과 역할만 제대로 할 수 있다면 공포로 살아갈 이유가 없어집니다.
배우 정유미 씨는 무대공포증과는 사뭇 다른 무언가를 겪고 있습니다.
연기를 할 때는 정말 신들린 연기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사람들 앞에 서면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심지어 울음을 터뜨리기까지 합니다.
대학생 때 연극 대사를 잊어버린 트라우마 때문에 그런다고 하지만, 사실 대인공포증처럼 보입니다. 그녀는 연기할 때는 그런 두려움이 거의 없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어떤 말을 하고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사실 나에게 배역이 주어지고 대사가 주어진다면 더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대로 충실히 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사람들 앞에서는 역할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마음의 평화를 원한다면, 그리고 혹시 심판이란 게 있어 태어나지 않는 게 좋았다는 심판을 받지 않으려면 그냥 이 무대가 창조되었고 그 창조자가 그리스도라는 분을 보내서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살면 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면 그대로 한 번 살아봅시다.
나쁠 게 없습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살면 그만입니다.
내가 이미 죽었으니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사니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삽니다.
그러면 감독과 관객 모두에게서 영광을 받게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27일 [성주간 수요일]
마태: 26,14-25
우리 주님께서는 때로 악에서 선을 이끌어 내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인류 구원 사업이 한 인간의 배신, 특히 당신이 사랑하셨던 제자의 배신으로부터 본격화된다는 것이 참으로 특별하고 아이러니합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의 배신을 잘 알고 계셨기에, 마음이 무척이나 산란하셨던 예수님께서
누군가를 직접 지목하지는 않으셨지만, 넌지시 한 마디 던지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그러자 제자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몹시 근심하며 다들 스승님께 이렇게 질문을 던집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참으로 놀라운 일이 또 벌어집니다.
이미 스승님을 배신하기로 굳게 마음을 먹은 유다 역시 똑같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배신자 유다의 그 속 보이는 질문에 예수님의 마음은 더욱 참담해지고 암울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끝끝내 공개석상에서 결정적 배신자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존중해주십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그런 태도는 마지막 순간까지 유다가 돌아올 것을 기다리신다는 표현이 아니었을지...
이처럼 우리 주님께서는 때로 악에서 선을 이끌어 내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의 인류 구원을 위한 축제의 무대는 지극히 성스러운 장소가 아니라 배신과 타락,
죄와 이기심이 난무하는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한복판입니다.
뿐만아니라 오늘 우리의 거듭되는 배신과 반역에도 불구하고 우리 죄인을 위한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은 흔들림 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가장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등에 비수를 꽂힌 적이 있습니까?
가장 절친했던 친구로부터 사기를 당한 적은 없습니까?
가장 가까운 사람, 가장 사랑했던 사람으로부터 치떨리는 배신을 당한 적은 없습니까?
어찌 보면 유다의 배신, 베드로 사도의 배신, 요한 사도를 제외한 나머지 사도들의 배신은 오늘 우리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사랑했던 제자로부터 배신당했지만, 그래도 그를 향한 연민과 측은지심의 시선을 보내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유다의 결정적 배신으로 인한 수난과 죽음의 길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혹독한 것이었지만, 그것마저 아버지의 뜻임을 알아차렸기에,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의 모습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주간 수요일 강론>
(2024. 3. 27. 수)(마태 26,14-25)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마태 26,14-16).”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셨다.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마태 26,20-25).”
여기서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라는 제자들의 말은, “주님, 그게 혹시 저입니까?” 라는 뜻이고,
유다가 한 말은, “저는 아닙니다.” 라는 뜻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스승님’이라고 부른 것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선생님’이라는 일반적인 호칭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다른 제자들과 달리 유다만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존경심을 모두 버렸음을 나타냅니다.>
“주님, 그게 혹시 저입니까?” 라는 제자들의 질문은,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었음을 나타냅니다.
“혹시 내가 배반자가 되는 것은 아닐까?” 라고 불안해했다는 것인데, 그 불안감을 좋은 쪽으로 생각하면, 배반자가 되지 않으려고 애를 쓴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른 쪽으로 생각하면,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고, 그들 자신들도 그것을 의식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아닙니다.” 라는 유다의 말은 그냥 ‘빈말’이고, ‘거짓말’입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너의 말이 빈말이고 거짓말이라는 것을 너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라는 말은,
‘가족 공동체’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나에게는 가족과 같은 이 공동체 안에서 배반자가 생겼다.” 라는 뜻이고,
당신의 비통한 심정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배반이란 그만큼 큰 죄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사도들 모두가 예수님께는 가족과도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시기도 했습니다(요한 20,17).
도대체 유다는 왜 예수님을 배반했을까?
‘돈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한 것으로 흔히 생각하는데,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그가 받은 돈의 액수가 너무 적습니다.
비록 배반의 대가로 돈을 받긴 했지만, 그가 먼저 돈을 요구한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좀 더 근본적인 이유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1)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잃은 것이 첫 번째 이유일 것입니다.
그렇게 추정할 수 있는 ‘단서’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한 말입니다(루카 24,19ㄴ-21ㄱ).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실망하는 것으로 그쳤지만, 유다는 실망이 좌절로, 좌절이 배반으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마지막 단계까지 가서 실망했지만, 유다는 예수님께서 자꾸만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것을 보면서 일찌감치 예수님에 대한 기대와 믿음을 버린 것 같습니다.
유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가 먼저 예수님에게
배신감을 느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실망했다면 그냥 떠나면 그만이지, 왜 배반을 했을까?” 라고 물을 수 있는데, 예수님을 떠나서 박해자들 편으로 넘어간 것은 자기만이라도 살 길을 찾으려고 그랬을 것입니다.>
2) ‘믿음’은 ‘희망’과 직결됩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잃었으니,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 하늘나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도 모두 잃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희망’에 대해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5).” 라고 말합니다.
‘보이는 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 또는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뜻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것을 뜻합니다.
신앙인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언제 이루어질지 알 수도 없는 것을 믿고 희망하기 때문에 인내하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유다는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믿음도 희망도 인내심도 모두 버렸을 것입니다.
3)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잃은 것도 큰 이유가 될 것입니다.
그가 언제부터, 어떤 이유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잃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복음서 후반부에 나오는 유다의 모습들을 보면 사랑이 완전히 식어 있는 모습들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도 희망도 사랑도 없었으니, 그는 예수님 곁에 있는 동안에도 영혼 없는 빈껍데기 상태였을 것입니다.
<사랑을 버리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