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남(三南)에 내리는 눈
황동규
봉준(琫準)이가 운다. 무식하게 무식하게
일자 무식하게, 아 한문만 알았던들
부드럽게 우는 법만 알았던들
왕 뒤에 큰 왕이 있고
큰 왕의 채찍!
마패 없이 거듭 국경을 넘는
저 보마(步馬)의 겨울 안개 아래
부챗살로 갈라지는 땅들
포(砲)들이 얼굴 망가진 아이들처럼 울어
찬 눈에 홀로 볼 비빌 것을 알았던들
계룡산에 들어 조용히 밭에 목매었으련만
목매었으련만, 대국낫도 왜낫도 잘 들었으련만,
눈이 내린다, 우리가 무심히 건너는 돌다리에
형제의 아버지가 남몰래 앓는 초가 그늘에
귀 기울여 보아라, 눈이 내린다, 무심히
갑갑하게 내려앉은 하늘 아래
무식하게 무식하게
-<평균율 1>(창우사, 1968)-
해 설
[개관 정리]
◆ 성격 : 비판적, 부정적, 반어적, 회고적, 참여적
◆ 표현 : 동학 농민 운동의 역사를 통해 당대의 현실을 비판함.
반어적인 표현이 두드러지게 드러남.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삼남 → 갑오 농민 개혁의 발원지이자 격전지
* 봉준이 → 민중을 대표하는 인물
* 무식하게 → 민중들의 진솔하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나타냄.
* 한문, 부드럽게 우는 법
→ 유식하고 세련되고 점잖은 태도로 꾸며 보이던 사대부 지배층의 위선에 대한
비판과 야유
* 큰 왕 → 더 큰 외세(청나라, 일본)
* 큰 왕의 채찍 → 동학혁명을 진압하려는 외세의 침략과 압력
* 보마의 겨울 안개 → 한반도에 가해지는 강대국의 횡포와 압력
* 부챗살로 갈라지는 땅들 → 외세에 의해 상처 받고 피해받는 우리 땅의 모습
* 계룡산에 들어 ~ 왜낫도 잘 들었으련만 → 동학혁명의 실패에 대한 회한과 안타까움
* 눈 → 전봉준의 시대에 대한 울분과 눈물
* 눈이 내린다.
→ 시상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부분(1894년에서 1960년대 말의 현재)
'봉준이의 눈물'이 '내리는 눈'으로 변형되어 나타남.
과거의 역사적 상황이 현재적 상황으로 전환되어 나타남.
과거의 문제 상황이 현재도 해결되지 않음을 강조하기 위해 유사한
문장구조를 반복함.
구한말의 역사와 똑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민중들의 고통과 분노의
눈물인 눈이 내림을 의미함.
* 형제의 아버지가 남몰래 앓는 초가 그늘에
→ 외세의 간섭과 독재에 고통받으며 신음하는 1960년대 말 민중들 형상화함.
* 귀 기울여 보아라 → 실패한 혁명가가 이 시대 고통받는 민중들에게 하고 싶어하는
말에 대해 군사 독재와 억압에 대한 관심을 호소하는 말
* 눈이 내린다, 무심히 → 반어적 표현
◆ 제재 : 삼남의 눈 = 전봉준의 눈물
◆ 화자 : 외세와 독재에 신음하는 1960년대 당시 시대 상황과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났던 1894년의 상황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여 현실을 비판하고 있음
◆ 주제 : 외세와 독재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민중의 고통과 저항 의지
억압의 현실에 대한 분노와 새로운 시대에 대한 갈망
[시상의 흐름(짜임)]
◆ 1 ~ 3행 : 전봉준의 울음에 담긴 울분의 역사 의식
◆ 4 ~ 12행 : 외세의 횡포에 짓밟히는 조국의 현실
◆ 13 ~ 17행 : 민중의 서러움과 분노의 눈물인 '눈'이 내림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1960년대의 우리 모습이 동학 농민 운동 때와 다르지 않다는 현실 인식을 보여 주고 있는 작품이다. 마패 없이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던 청나라와 일본 군대처럼 지금도 남의 나라 군대가 이 땅을 활보하고 있는 현실과, 그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민중의 고통과 저항 의지를 형상화하고 있다.
전반부(1행 ~ 12행)는 외세의 횡포와 지배층의 위선을 보며 느꼈을 봉준이의 울분을 떠올리고 있으며, 후반부(13행 ~ 17행)에서는 내리는 눈을 보며 과거와 똑같은 고통을 겪는 민중들의 분노와 서러움이 눈에 담겨 있다고 인식하고 있다.
이 시는 화자가 남부 지방을 여행하는 중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면서 외세(청, 일)에 빌붙어 권력을 유지하려 했던 당시 지배층을 비판하고, 외세로부터 나라의 독립을 강하게 열망했던 전봉준과, 1960년대라는 당대 민중의 강인한 역사의식과 민족애를 발견하고 있는 작품이다. 지배층 혹은 독재 권력에 대한 화자의 비판적 의도가 작품 전체를 통해 드러난 반어적 표현을 통해 효과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 감상을 위한 더 읽을거리
시인의 현실 의식과 자아의식이 강렬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빈한한 현실, 부조리한 현실과 그것을 감내할 수 없는 시인의 정의감이 전봉준이라는 역사상 인물을 통해 강하게 상징화되고 있는데, 행간의 단절이 심해 독자로 하여금 지적 훈련을 요구한다는 것이 특색이다. 그러나 그것은 시를 무분별한 저항의, 순화되지 않은 음색으로 나타나는 것들로부터 구제해 주는 장점을 이룬다. 반복되는 '무식하게 무식하게'의 부사가 던지는 연민, 하얗게 내리는 눈으로 표상되는 인생의 어떤 본질적인 기미, 이런 것들이 어울려 균형을 잡고 있다.
역사의 뒤안길을 살펴보면 비극적인 상황이 얼마든지 많다. 올바른 말이 통하지 않고 불의로부터 억압받으며 살았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하지만 역사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 말이 없다. 내리는 눈도 무심할 뿐이다. 시인은 내리는 눈 속에서 가엾은 민중을 생각하여 홀로 눈물 흘리고, 무심한 역사를 탓하면서 혼자 울고 있었을 100년 전쯤의 녹두장군 전봉준을 생각해 낸다. 역사 속에서 말없이 눈물 흘리고 있는 한 혁명가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다.
그는 한문도 모르는 일자무식이었지만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탐관오리를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백성들의 삶이 참기 힘든 지경에 이르자 그는 그저 '부드럽게' 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형제의 아버지가 남몰래 앓는 초가 그늘'을 그냥 지나쳐 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왕 뒤에 큰 왕이 있고', 그 '큰 왕의 채찍'으로 이 땅은 부챗살처럼 갈라지게 된다. 무능한 정부가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와 일본의 군사를 이 땅에 끌어 들였던 까닭이다. 동학농민군은 삼남지방을 휩쓰는 기세를 보이기도 했으나 결국 일제의 개입으로 실패하게 된다.
시인은 왜 그러한 비극적인 운명의 한 혁명가를 생각하게 되었는가. 갑갑하게 내려앉은 하늘 아래 무심히 내리는 눈을 맞으며, '무식하게 무식하게' 내리는 눈을 맞으며, 왜 실패한 한 혁명가를 생각하는가. 그에 대한 대답은 '귀 기울여 보아라'라는 시구에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무심히, 조용히, 내리는 눈 속에서 누군가 외치고 있다. 부드럽게 울 수만은 없어서 형제, 아버지의 고통을 못 본 체할 수 없어서 '무식하게 무식하게' 싸웠고 외쳤노라고. 그러나 그때 무식하고, 왜소하고, 비참했던 전봉준은 우리 기억 속에 남고 당시 힘있는 자들은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10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그런 역사적인 상황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떠올리기도 한다. (조남현 : <현대시 해설>)
[작가소개]
황동규 : 시인, 명예교수
출생 : 1938. 평안남도 숙천
소속 : 서울대학교(명예교수)
가족 : 딸 황시내, 아버지 황순원
학력 : 에든버러대학교 영어영문학 박사
데뷔 : 1958년 현대문학 '시월' 등단
수상 : 2016년 제26회 호암상 예술상
관련정보 : 네이버[지식백과] - 서정의 세계를 노래하는 시인
작품 : 도서 54건
1938년 4월 9일 평안남도 숙천 출생. 서울대 영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서울대 영문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1958년 『현대문학』에서 시 「시월」, 「즐거운 편지」 등으로 추천받아 문단에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어떤 개인 날』(1961), 『비가』(1965),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1978), 『악어를 조심하라고』(1986), 『몰운대행』(1991), 『미시령 큰바람』(1993), 『외계인』(1997), 『버클리풍의 사랑노래』(2000)등이 있으며, 『사랑의 뿌리』(1976), 『겨울의 노래』(1979), 『나의 시의 빛과 그늘』(1994), 『젖은 손으로 돌아보라』(2001), 『삶의 향기 몇점』(2008) 등의 산문집이 있다.
1998년 『황동규 시 전집』이 간행되었다. 그의 시 세계는 초기 서정시편에서 출발하여 「비가」 연작시를 거치면서 심화되고, 1970년대의 현실을 반영하는 「겨울의 빛」을 거치며 극서정시로 나아가고, 여기서 다시 선시풍의 연작시 「풍장」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초기 시인 「시월」이나 「즐거운 편지」 등은 그리움과 기다림이 담긴 적막하고 쓸쓸한 내면풍경을 담은 시이면서 시인의 남다른 개성이 엿보이는 시이다. 그는 「비가」를 통해 우울한 내면세계의 묘사에서 현실의 고뇌를 껴안으려는 정열을 드러낸다. 「비가」는 방황하는 자, 혹은 내몰린 자의 언어를 통해 자아와 현실 사이의 갈등을 드러내고 있는 작품으로, 시인이 구체적인 현실세계로 진입하는 계기라고 볼 수 있다.
이후 그의 시에는 자아와 현실 사이의 갈등이 도사리고 있으며, 꿈과 이상을 억압하는 현실에 대한 부정이 시적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그는 현실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한 채 고통스러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비극적 아름다움을 시적 주제로 삼는다. 「태평가」를 비롯해 「삼남에 내리는 눈」, 「열하일기」는 이러한 주제를 담고 있으면서도 감정을 통어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반어적 울림으로 드러난 경우이다.
시적 대상에 대한 거리 유지는 그가 현실에 함몰되지 않도록 하는 방어기제이자 시적 긴장을 유지시키는 근원적 힘이라고 여겨진다. 일그러졌거나 위악적인 자아의 모습은 사회구조에 대한 시적 거부의 의미를 지니며, 파편화되고 공포에 질린 모습은 부조리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시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읽히기 때문이다.
고통스런 시대를 살아가는 아픔이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의 전편을 휘감고 있다면 「겨울의 빛」은 그의 시가 합치되고 또한 분기되는 갈림길이다. 초기 시의 눈과 겨울의 이미지들이 시인 혼자만의 것이었다면 「겨울의 빛」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풍장 연작시에서는 삶과 죽음을 하나로 감싸안으며 허무주의를 초극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죽음에 대한 반추로써 삶의 무게를 덜고, 나아가 죽음조차 길들이겠다는 의지의 자유분방한 표현이 「풍장」 연작인 것이다. 황동규의 시적 어법은 「견딜 수 없이 가벼운 존재들」에 이르러 더욱 유연함을 얻는데, 이 시가 드러내는 일상적이고 자유분방한 시적 짜임새는 주체적 삶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담고 있다.
그 존재의 발견은 크고 위대한 것들에게서가 아니라 한없이 작고 가벼운 것에서 얻어진다. 가볍다는 것에서 자유로움을 얻고, 그 자유로움으로써 속박을 벗어나는 시적 깨달음은 초기 시의 현실과 자아 사이의 내적 갈등을 담은 비극적 아름다움의 세계를 거쳐 다져진 원숙함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황동규 [黃東奎]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권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