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셋째 주 그룹큐티나눔
행동하는 사랑
누가복음 10:25-42
마음 열고, 찬양과 나눔
•네 맘과 정성을 다하여서(찬송 218장, 구 369장)
•지난 한 주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근황을 나눠봅시다.
누구나 인정받고 칭찬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좀 더 훌륭하게 보이도록 포장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신을 포장하려 한 말이 도리어 자신의 부족함이나 편협함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율법교사가 그러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율법에 합당한 자인지 증명하려 시작한 말이 결국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마음 다해, 말씀과 나눔
1. 율법교사가 예수님과 율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25-28절).
1) 영생을 얻는 율법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27절)?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율법교사는 예수님에게 영생에 대한 질문을 한다.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질문으로 대답을 갈음한다. ‘율법에는 어떻게 기록되었는가?’라는 질문은 율법을 다루는 율법교사에게는 매우 적절한 접근법이라 할 수 있다. 유대인은 율법의 가짓수를 총 613개로 생각한다. 그 수많은 율법 중에서 영생을 얻는 것과 관련된 율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율법교사는 어렵지 않게 대답했다. 그의 대답은 신명기 6:5과 레위기 19:18을 결합한 것이다. 이 대답은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십계명의 문장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다. 어쩌면 율법교사는 ‘율법의 지향점이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통해 이 대답을 도출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도 ‘너의 대답이 옳다’고 인정하신다.
2) 율법의 가르침에 대하여 예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28절)?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분명 예수님은 율법교사의 대답이 ‘옳고 바른 대답’이라고 여기셨다. 그러나 그의 대답과 삶의 모습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신 듯하다. 이어지는 “이를 행해라”라는 명령 때문에 과연 율법교사는 어떤 삶을 살았을지 궁금해진다. ‘아는 것과 사는 것이 다를 수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보게 된다. 하지만 정작 율법교사는 그런 예수님의 뉘앙스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아마 자신은 모든 정답을 알고 있다는 자만심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눔 1 예수님은 율법교사의 대답이 율법의 정수라는 점에서 옳다고 인정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의 차이를 언급하시며 ‘이것을 실천하며 살아가라’고 강조하십니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2.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그에게 답하십니다(29-37절).
1) 율법교사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잘 지킨다는 점을 보여주려고 한 질문은 무엇입니까(29절)?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율법교사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한 것이 틀림없다. 오히려 자신의 선행을 드러낼 기회로 여긴 듯하다.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라는 문장이 이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어쩌면 율법교사가 자신이 얼마나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지를 말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대화다. 그런데 율법교사는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질문한다. 이 뜬금없는 질문이 누가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 할 수 있다. 목축업을 주로 하던 시대에 이웃은 ‘동료’를 의미했다. 함께 일하는 사람인 친족 혹은 친구가 이웃이었다. 농경사회에 와서도 비슷한 맥락으로 사용되었다. 특별히 유대인은 정결법에 따라서 부정하게 여기는 이들과는 함께 일하거나 근처에서 살지 않았다. 따라서 신약 시대를 살던 율법교사에게 이웃이란, 정결한 유대인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통해 ‘이웃’의 의미를 달리 보여준다.
2) 예수님의 비유에서 ‘이웃을 사랑한 사람’은 누구입니까(36, 37절)?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
예수님의 이야기에는 몇 사람이 등장한다. 강도 만난 어떤 사람,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인. 이 중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분명 유대인이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과 같은 민족이지만, 북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이방 민족과 혼혈된 역사가 있는 사람들이다. 여기에서 불분명한 것은 강도 만난 어떤 사람이다. 그가 어느 민족인지, 어느 종족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는 ‘강도 만난’ 사람일 뿐이다.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이고, 고난 가운데 머물러 있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유대인이 생각한 이웃의 범주를 바꾸신다. 어려움에 처한 자에게 자비를 베풀어 어려움과 고난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돕는 자가 이웃이며, 그런 자세가 율법이 말하는 사랑의 핵심이라고 전한다. 율법교사가 ‘내 이웃이 누구인가’를 규정하려 했다면, 예수님은 ‘나는 누구에게 이웃이 되어줄 것인가’를 중요하게 다룬다.
나눔 2 이웃을 사랑하고 있다고 자부하던 율법교사는 사랑해야 할 이웃의 범위를 한정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웃의 범주를 제한하지 말고, 민족과 문화의 경계를 넘어 자비(긍휼)를 실천하는 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이웃 사랑’임을 강조하십니다. 나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까? 내가 먼저 이웃이 되어주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3. 마르다는 자신을 돕지 않는 동생 마리아가 못마땅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42절)?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마르다가 예수님을 위해 봉사와 헌신을 다하는 인물이라면, 오히려 마리아는 혼자 분주한 언니를 돕지 않는 얌체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동생 마리아를 두둔하신다. 이 단락 역시 앞에 나오는 이야기와 연결하여 생각하는 것이 좋다. 완벽하진 않으나 마르다는 제사장 그리고 레위인과 평행을 이루고, 마리아는 사마리아인과 평행을 이룬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자신들의 소임을 위한 정결에만 신경을 썼다면, 마르다는 예수님을 초대한 장본인으로서 잔칫상에만 신경을 쓴다는 점에서 통한다. 반면 사마리아인이 여행 중이라 해도 불쌍한 사람을 보고서는 그에게 집중했듯이, 마리아는 언니와 마찬가지로 손님을 초대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게 집중했다는 점에서 통한다. 예수님은 마르다를 책망하지 않으신다. 다만 마리아의 자세를 더 높게 여기셨을 뿐이다.
나눔 3 제사장과 레위인이 하나님께 드릴 제사에 집중한다는 핑계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웃 사랑’을 놓쳤듯이, 마르다는 예수님께 드릴 ‘많은 음식’에 집중하느라 정작 예수님을 놓쳤습니다. 반면 마리아는 오롯이 ‘예수님’에게 집중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은 있으나 정작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까?
마음 모아, 함께 기도
삶 _ 말씀을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는 대로 살게 하소서.
공동체 _ 모이는 예배에 힘쓰는 만큼, 일상으로 흩어졌을 때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낼 수 있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