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석 신당의 길
96년 대구 총선결과 둘러싼 상황인식 논란
신당 바람과 정치 세력화의 간극 직시해야
민주화 이후 대통령당과 대통령 반대당으로 굳어진 거대 양당 대결구도를 깨자는 시도는 많았지만 실제 성공한 정치인은 김종필(JP), 박근혜, 안철수 정도다. JP와 안철수는 신당을 창당해 제3지대에서 교섭단체(원내 20석 이상)를 만들었다. 박근혜는 당시 한나라당에 잔류했지만 당내 친박 세력과 함께 당 밖에서 불었던 ‘친박연대’ 돌풍에 힘입어 ‘여당 내 야당’이라는 독특한 세력화에 성공했다. 모두 높은 대중적 지지가 난관을 돌파할 수 있었던 동력이었다.
제3지대 세력화는 기존 세력의 ‘핵분열’에서 출발했다. JP는 집권 민자당에서 쫓겨난 뒤 반김영삼(YS) 정서와 충청 표심을 기반으로 신생 자민련을 안착시켰다. 박근혜는 대선후보 경선 라이벌이었던 이명박 주류를 향해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며 공천 판을 흔들었다. 당내에 남아서 독자 세력화에 성공한 독특한 경우다. 안철수는 친노 패권주의에 염증을 느낀 호남권을 공략해서 제3당 리더에 올랐다. 모두 자신들이 속한 정치집단 내 주류-비주류 간 쌓였던 앙금이 신당 창당의 불씨가 된 것이다.
22대 총선을 5개월 앞두고 이준석이 제3지대 신당 창당에 나섰다. 야권에선 막판에 윤석열 정권과 다시 손을 잡는 반전 카드 아니냐고 의심하지만 이미 선을 넘은 듯한 분위기다. 이준석이 연일 윤석열 정권, 국민의힘 지도부를 조롱하고 비판하는 것은 더 이상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한때 당 대표가 먼저 나간다고 할 수 없으니,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만들었다는 명분 축적에 가깝다. 손을 내민 혁신위원장을 향해 ‘가해자의 사과’ 운운하면서 뿌리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일 터다. 주류의 독주에 맞선 비주류의 반격이라는 제3지대 창당의 길을 밟은 것이다.
이준석은 보수의 심장인 대구에서 총선 출마도 회피하지 않겠다고 했다. 여당의 텃밭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둬야 한다는 전략적 계산을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1996년 15대 대구 총선을 성공 사례로 들었다. YS 집권 여당이 대구 13석 중 2석 확보에 그쳐 참패했다. 대구 민심이 집권당을 만들고서도 심판하는 변화의 메시지를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대구에선 대구·경북 출신인 전두환-노태우 구속 등으로 인해 반YS 정서가 선거판을 휩쓸었다. 앞으로 어떤 변수가 생길지 알 수 없지만 지금 윤석열 정권이 27년 전만큼 이곳에서 배척당한다고 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대구 시민을 향한 이준석의 ‘어게인 1996’ 캠페인에 깔린 상황 인식은 너무 자의적이다.
당내 일각에서 윤석열-이준석 조합을 ‘DJP(김대중·김종필)연합’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그래서 이준석에게 장관 추천권과 공천권까지 보장해서 포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준석의 2030 ‘이대남’ 전략이 대선 승리에 일정 부분 역할을 했을 수는 있다. 하지만 문재인 정권 심판 선거라는 대전제가 바뀔 순 없다. 한 표가 아쉬운 총선을 앞두고 이준석 세력을 끌어안아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을 인정하더라도 이준석을 DJ 손을 잡은 JP와 견줄 정도라는 주장엔 동의하기 어렵다.
거대 양당 체제에 염증을 느끼는 무당층 바람은 여전하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꾸준히 20%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지금 이준석 신당의 든든한 우군은 이런 바람일 것이다. 그러나 여론조사상 수치와 실질적인 정치 세력화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화려한 레토릭은 신당 창당의 마중물일 뿐이다. 정치적 감각이 있는 이준석도 모르진 않을 것이다.
정연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