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해 쯤 지난 늦가을.
남녘으로 차를 몰아 내려갔지
땅끝(토말土末)에 닿으니 길이 끊기더군.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 라며 위로의 얘기를 한 이도 있고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된다. - 고 희망을 노래한 시인도 있지만,
길은 땅길만 있는 게 아니지, 물길도 있는 게야, 세상에 ‘길 없는 길’은 없는 것이야.
절벽이 있고 폭포가 있고 원시림이 있고 강과 바다가 있다고 자꾸 우기지 마.
우회를 하거나 배를 타거나 없는 길을 그대가 처음 가면 길이 시작되는 거야.
뱃길 따라 내려가 작은 섬에 도착했지.
보길도, 동백과 윤선도로 널리 알려진 섬이야.
섬을 반 바퀴 돌아 예송리의 몽돌해변에 도착했어.
천리를 달려온 목적은 하나, 바다가 몽돌로 연주하는 음악을 듣기 위함이었어.
준비물이 뭐 있겠어, 소주 둬 병, 마른안주, 바람막이 점퍼,
그리고 소중히 간직하고 내려온 귀 두 쪽.
물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어.
달은 차갑고 별은 희미한데
사나운 먹구름이 바람의 말을 타고
머리카락의 채찍으로 얼굴을 내려치는 날의
“해변 가요제”가 아닌 ‘몽돌 협주제(協奏祭)’.
바람이 박을 치자
파도가 활을 들어 길게 긁어
몽돌들을 당기고 밀고, 보듬다 풀면
몽돌의 죽통(竹筒)에서 울리는 합주의 음향 :
대여음; 새벽 어머니가 사각 싸각 쌀각 조리로 쌀을 일고
초장; 생솔가지가 아궁이에서 따닥 타닥거리며 오르다가
중여음;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로 서걱거리더니
종장; 싸라기눈이 자그락거리며 장독대를 때린다.
무언가, 무엇인가... 소리를 탐독(耽讀)하지만...끝내 읽혀지지 않는 소리의 문자.
홀연히 팔을 잘라 달마의 첫 제자가 된 혜가의 작심이 아니라면 어림도 없지.
소주를 마셔도 차가와지는 몸, 한기(寒氣)의 죽비(竹篦)가 몸속을 파고들어
깊은 소리의 구도(求道)를 버리고 세속으로 돌아와 숙소에 눕는다.
따끈한 방바닥의 이불에 드니, 아, 속세가 이리도 좋은 게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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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란 무엇인가, 장자가 일찍이 대답을 하였으니
대에 구멍을 뚫어 가슴의 바람을 넣으니 인뢰(人籟), 사람의 악기이고
숲이나 나무의 파인 구멍마다에서 바람이 연주하니 지뢰(地籟), 땅의 악기이며
사물마다 자신의 본성으로 얽매이지 않는 소리를 내나니 천뢰(天籟), 하늘의 악기라.
내면에서 솟아 타오르는 바다와 사막과 별과 달은 천뢰(天籟)로 ‘으뜸’이고
자연의 바람이 타는 우주의 소리는 지뢰(地籟)이니 ‘딸림’이며
내가 부는 대금은 인뢰(人籟)이니 ‘버금딸림’이라네.
다섯 해를 해금을 타는 ‘버금딸림’의 그대여,
성질(聲質)의 청탁과 음질(音質)의 고저를 따져 무엇 하랴.
바람의 날, 숲의 춤사위와 나무동굴의 노랫소리를 듣다가... 이도 시들해지면
별의 눈물 한 종지, 달의 미소 한 바가지, 바다의 바람 두 모금쯤 마시다가
‘하늘’에 ‘푸른 옷소매’를 흠뻑 적시거나 ‘가을’에 풍덩 빠져 보시게나.
몽돌의 협주를 듣고 지뢰(地籟)의 심지에 불을 붙이다 말았던 그 옛날.
지금은 천뢰(天籟)를 듣고자 예(藝)의 바다와 종교의 숲을 들락거리지만
내 가슴 속 어딘가에 존재함을 깨닫는 요즈음, 내가 자연이고 하늘일 게야.
내가 악기이고 연주자이고 음악자체이리니, 자아(自我)에게 합장(合掌)하며
‘가을’의 ‘하늘’을 보니 무명색 구름이 문득 스님의 옷빛으로 물드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