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예종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최규진
엔학고레의 은혜를 체험하라(삿15:14-19)
인간은 누구에게나 목마름이 있습니다. 마셔도 마셔도 시원함이 없는 목마름,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배고픔, 가져도 가져도 다함이 없는 공허감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말입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만족함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잠언서 30장15절에 보면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고 다고 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거머리에게는 우리가 알다시피 앞뒤에 흡반이 붙어있습니다. 그래서 양쪽으로 피를 빨아 마십니다. 인간에게도 이런 거머리같은 본성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족한 줄을 알지 못하고 목말라하는 거지근성 말입니다.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의 욕심은 결국 탐욕으로 발전됩니다. 한 마을에 남자들 넷이 모여서 자신들의 희망사항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답니다. 한 사람이 먼저 말하기를 “나는 큰 욕심없이 그냥 내 수중에 금 만냥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네 그려” 하더랍니다. 그 옆에 있던 다른 사람이 “돈만 아는 사람 같으니라구, 나는 그저 신선이 되어 학과같이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살았으면 소원이 없겠네”. 또 한 사람이 “나는 돈이고 뭐고 다 싫다네. 그냥 나는 열 고을을 다스리는 원님이 되었으면 소원이 없겠네”. 그러자 가장 마지막 사람이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나는 금 만냥을 가지고, 학처럼 하늘을 날아다니며, 열 고을을 다스리는 원님이 되었으면 좋겠네 그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의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은 누구에게나 육신적인 목마름도 있고 영적인 목마름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전보다 물질적인 것도 풍부하고 소유도 풍성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전보다 더 목말라 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풍요속에 또 다른 빈곤함이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가면 갈수록 우리를 더 목마르게 하는 것들이 많아 질 것입니다. 한마디로 시대가 훨씬 더 첨단화되고 좋은 시대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목마름은 더할 것입니다.
이유는 인간의 목마름이란 절대 이 세상 어떤 것으로도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구조적으로 하나가 채워지면 또 다른 하나가 궁핍함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육신적인 목마름이 해결되면 영혼의 목마름이 더 심해집니다. 예를 들어 돈에 목이 마르던 사람이 열심히 일해서 돈을 얻었지만 결국은 다른 것에 궁핍함을 느끼고 목말라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얻은 돈을 가지고 목마름을 채워보기 위해 여행을 다니기도 하고 취미생활을 해보기도 하며 심지어 바람까지 피워가며 못된 일을 서슴치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로 하여 그들의 목마름이 해갈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살면서 쉽게 이해가 안되는 것 중에 하나가 있습니다. 많이 가진 자들의 목마름이 그러지 못한 자들의 목마름보다 훨씬 더 심하다는 것입니다. 많이 배운 자가 배움에 대한 갈증이 더 심합니다. 그들은 한 가지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원하는 것을 성취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비록 그들이 원하는 것을 성취했을지라도 이미 다른 곳이 망가지고 부서지고 구멍이 뚫어져서 인생이 허전하고 공허하고 목마름을 더하게 했던 것입니다. 결국은 가져 본 자들의 고백입니다. 누려본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부러워할 정도로 부귀영화와 명예와 권세를 누려 본 솔로몬왕의 고백입니다. 전도서 12장 8절은 솔로몬 인생의 유언적인 고백과도 같은 것입니다. 만족함이 있던가요?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만족함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모든 인생이 여기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은 누구도 완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이것을 인생의 폐단이라고 말합니다. 가졌다고 다 누리는 것도 아니고 다 만족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가장 평등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만약 인간이 이 땅의 것으로만 만족을 누릴 수 있다면 인간은 매우 불공평한 존재였을 겁니다. 그러나 인간은 어느 누구에게든지나 만족을 누릴 수 있는 도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육신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보고 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누구나 가지고 있는 영적인 것 말입니다.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만족함의 도구가 있다는 말입니다. 단지 사람에 따라서 그것을 활용하지 못할 뿐입니다. 갖지 못해서 누릴 수 없다면 불공평하다고 말할 줄 모르지만 있는 것을 활용하지 못한 것은 불공평이 될 수 없습니다.
결국 인생의 목마름은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해결 받을 수 없습니다. 세상 것으로 해결 받으려고 노력하면 오히려 갈증만 더해 갈 뿐입니다. 오히려 목이 더 마르고 고통을 당하고 맙니다. 우리들 주변에 인기와 명예와 돈을 얻었던 사람들이 오히려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같은 이유입니다. 왜 그럴까요? 모두들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엔학고레의 은혜가 반드시 필요한 것 입니다.
(1) 엔학고레가 필요한 인생들
요즘 우리 시대의 현대인들은 정말 목마른 사람들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물어보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떤이는 소유에 대한 목마름, 경제적인 목마름, 경쟁에 대한 목마름, 배움에 대한 목마름, 건강에 대한 목마름, 미모에 대한 목마름, 사랑에 대한 목마름으로부터 시작해서 갖가지의 목마름들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때로는 자기가 속한 공동체적인 목마름도 있습니다. 정치에 대한 목마름, 국가에 대한 목마름, 지도자에 대한 목마름도 있으며 자기가 속한 공동체적인 목마름이 다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나름대로의 방법들을 강구해왔습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인간의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대상도 없고 방법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은혜의 현장으로 나와야 해결을 받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은혜받을수 있는 현장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은혜를 맛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직접 그 은혜를 체험한 인물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엔학고레입니다. 본문의 주인공 삼손은 엔학고레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목마른 삼손은 라맛레히에서 엔학고레의 은혜를 받고 잃었던 정신을 회복하고 소생케 하는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엔학고레는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마시는 은혜입니다. 추수때에 추수꾼이 시원한 얼음냉수를 마시는 은혜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영혼의 목마름을 해갈 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은혜가 엔학고레입니다. 우리 인생의 진정한 엔학고레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영원하신 엔학고레이십니다. 엔학고레는 지친 인간을 회복시켜주는 샘물입니다. 상한 심령을 치유해 주시는 샘물입니다. 엔학고레는 죽을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는 샘물입니다. 그런데 엔학고레는 부르짖는 자의 샘물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성격상으로 부르짖는 자의 샘물이기 때문에 부르짖지 아니한 자는 맛볼 수 없는 샘물이기도 합니다. 반드시 부르짖는 자가 맛볼 수 있는 샘물입니다. 한마디로 부르짖는 자의 샘터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엔학고레의 은혜를 받으시려면 부르짖어야 합니다. 부르짖음이 없이 엔학고레로 나오면 마실 수 없습니다. 부르짖는 영혼은 목마른 사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급하면 부르짖게 되어 있습니다. 소경 바디매오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긍휼히 여겨주소서 라고 외쳤던 것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부르짖으며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정신이 회복되는 엔학고레의 생수를 마실 수 있습니다.
목마름과 간절함이 없으면 은혜를 맛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께로 나올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갈급한 심정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영적인 목마름이 채워지면 육신적인 목마름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육신적인 목마름이 채워졌다고 해서 영적인 목마름이 채워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영적인 질서가 있습니다.
영혼이 잘되야 범사가 잘됩니다. 절대 이 순서가 바뀌면 안됩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의해 영혼이 잘되야 범사가 잘되고 평안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어떤 인간도 만족함이 없습니다. 영적으로 목마른 인생들에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수많은 은혜 가운데서도 목마른 인간들에게 필요한 것은 생수의 은혜입니다. 생수의 은혜는 삼손이 받은 엔학고레의 은혜입니다. 특별히 오늘날 현대인들은 엔학고레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목말라하는 현대인들에게 엔학고레의 은혜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필요할 때입니다.
(2) 삼손의 엔학고레
삼손은 사사시대의 마지막 사사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삼손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불신자도 알수 있는 삼손의 트레이드 마크는 힘입니다.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40년동안 붙여 버렸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삼손이라는 인물을 준비하시어 그들의 손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해 주시는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삼손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을 부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삼손의 힘은 당시 블레셋 사람들에게는 공포자체였습니다. 하나님은 블레셋 사람들의 심장부로 삼손을 집어넣으시고 그들을 공격하는 도구로 활용하셨습니다. 삼손은 블레셋 여자를 사랑하여 자기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그것이 블레셋 사람들을 공격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였던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삼손의 활약이 두드러질 때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눈에 가시같은 존재로 여기며 잡아 죽이려 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기 동족들마저 삼손을 체포하려는 못된 계획을 세웠습니다. 왜냐면 블레셋 사람들과의 갈등이나 분쟁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삼손은 자기 동족 이스라엘 사람들의 손에 붙잡혀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겨주기 위해결박 당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이를 본 블레셋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열광합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습니다.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삼손에게 임했습니다. 삼손을 결박하고 있던 줄이 마치 불에 탄 삼과 같이 끊어졌습니다. 때마침 삼손은 자기곁에 있던 나귀의 새 턱뼈를 취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천명의 블레셋 사람들을 쳐 죽였습니다. 정말 소설 같은 이야기지만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였습니다. 죽음의 직전에서 삼손을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삼손은 영락없이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마저도 예측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구원의 은혜로부터 시작됩니다. 그것은 개인이나 선택받은 민족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영혼구원이 가장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삼손은 기분 좋게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가 없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삼손은 아주 짧은 문장을 통해 승리를 자축했습니다(16절). 그런데 잘 읽어보시면 하나님 보시기에 참 섭섭한 내용들입니다. 아무리 분위기를 보아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거나 감사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솔직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보다는 자기 영광을 드러내는 말뿐입니다. 승리의 주체가 분명히 삼손 자신이었습니다. “.....내가 일천명을 죽였도다” 했습니다. 그리고 승리의 도구 역시 하나님께 있지 않고 나귀의 턱뼈라고 당당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삼손은 지금 무언가를 크게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위험한 순간에서 자기를 구원해 주신 능력의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나의 나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셨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를 잊어버리는 인간들의 실상입니다. 인간들의 한계입니다. 가장 못된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것이요,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하는 것입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엄청난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승리의 영광을 자신이 가로챘습니다. 그런 삼손을 하나님이 그냥 놔두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심히 목이 말랐습니다. 그냥 물 한잔 마시고 싶은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성경대로 표현하면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갈증이었습니다. 정신이 혼미해졌습니다. 그는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불행중 다행히도 그는 자신의 한계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삼손은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내용이 조금 전에 승리를 자축하던 내용하고는 전혀 달랐습니다. 18절을 우리 한번 크게 읽어보십시다.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니 내가 이제 목말라서 죽어서 할례받지 못한 자의 손에 빠지겠나이다”. 이전에 승리를 자축하던 내용과는 사뭇 다릅니다. 이번에는 승리의 주체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똑같은 사건을 가지고 같은 사람이 이렇게 다른 고백을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이중성입니다. 인간은 다급하면 하나님을 찾다가 문제가 해결되면 하나님을 금방 잊어버립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사는 인간들이 받은 은혜를 잘 관리하지 못해서 은혜속에서 살지를 못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참으로 속도 넓으십니다. 그냥 그 한마디의 말씀을 들으시고 단번에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즉각적으로 반응해 주십니다. 19절 보십시오. 레히에 한 우묵한 곳을 터치시니 거기서 물이 나옵니다. 삼손이 그 물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했습니다. 삼손은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고 붙였습니다. 엔학고레라는 이름의 뜻은 부르짖는자의 샘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나귀뼈로 일천명의 블레셋 사람들을 쳐 죽였다고 큰 소리치던 삼손이었지만 한 치 혀끝의 갈증하나 해결할 수 없는 연약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큰 소리 치지 마세요.
비록 힘있는 삼손이었지만 삼손에게도 아킬레스건과 같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일종의 삼손의 목마름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삼손은 유난히 여자에게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들릴라라는 여인에게 빠져서 사랑 놀음을 하다가 일생을 비참하게 망친 인물입니다. 어찌보면 삼손이 가장 목말라했던 것이 사랑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목마름을 얻기 위해 여자를 탐닉하다가 결국 그 여인에 의해서 일생을 망친 인물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삼손은 자신의 목마름을 하나님에게서 찾지 않고 세상 여자에게서 찾다가 결국은 망신을 당한 것입니다.
누군가 이런 농담을 하더라구요. 여자는 여우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조심하라는 말이겠지요. 여우는 여우주연상을 받은 여자의 약칭이니까 너무 속상해 하지 마세요. 여인들에게 미안해서 한 말씀 드릴게요. 남자는 늑대라고. 이제 됐지요? 어떤 사람이 여자들을 공에다 비유했는데 일리가 있는 말이더라구요. 10대 여자는 축구공과 같대요. 그 이유를 물어보니 최소한 어디로 가든지 22명의 남자들이 쫒아다니기 때문이랍니다. 20대 여자는 농구공인데 그래도 최소한 10명 정도의 남자들이 따라다니고 30대는 골프공인데 결혼해서 한 남자만 쫓아다니다가 그것도 눈에 안보이면 찾지도 않는 골프공과 같기 때문이랍니다. 40대는 서로 안가진다고 너 가져라고 떠 넘기는 탁구공과 같답니다. 그런데 50대는 피구공과 같답니다. 공만 오면 죽기 아니면 살기로 피해 다닌답니다. 60대는 오자미공이라네요. 공도 아니면서 공인 척 한답니다. 웃자고 드린 농담이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누차 말씀드리지만 인간이 강한 것 같아도 이렇게 연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아주 미세한 바이러스 하나를 막아내지 못하고 죽습니다. 인간의 몸속에 있는 약 50억 가닥의 모세혈관 하나만 작동을 안해도 치명적인 손상을 입기도 합니다. 절대 큰 소리 치지 마세요.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이 원칙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십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인간은 교만한 인간입니다. 교만한 사람과는 상종도 아니 하십니다. 교만은 죄의 시작이요, 죄의 과정이며 죄의 마침입니다. 교만은 죄악의 덩어리입니다. 절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반드시 우리 안에 있는 어떠한 교만, 자만, 오만함이 있다면 물리쳐야 합니다. 삼손은 엔학고레의 은혜가 없으면 살수 없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때문에 우리 모두 엔학고레의 은혜를 맛보고 살아야 합니다.
(3) 내 인생의 엔학고레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에게 엔학고레의 은혜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아니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한결같이 피곤해하고 힘들다 합니다. 목이 마르다고 탄식하며 갈증을 호소합니다. 때로는 힘들다고 호소하고 때로는 바쁘다고 난리입니다. 심지어 어떤이는 세상까지 살기 싫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상당수가 자살을 생각해 본적이 있다는 무서운 통계도 있습니다. 모두들 목이 말라서 그렇습니다.
목마른 인간에게는 엔학고레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더욱 선명하게 말씀드리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생수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생의 진정한 엔학고레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목마른 나의 영혼을 축일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목마른 내 영혼을 축여줄 수 대상이 없습니다.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께 나와야 합니다. 어떤 목마름이라도 그분께로 나오시면 반드시 해갈됩니다.
지금 여러분 안에 어떤 목마름을 갖고 계십니까? 정말 속이 터질 정도로 안타까운 목마름을 갖고 있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정말 지금 당장이라도 목이 말라서 타죽을 것만 같은 인생의 목마름을 갖고 있는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삼손에게 그리하셨던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목마름을 시원하게 해결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절대 이상한 곳에 다니면서 목마르다고 시간낭비 하지 마십시오. 물질낭비 하지 마십시오. 이상한 사람들 찾아다니면서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오십시오.
이 땅에는 엔학고레의 은혜가 필요하지 않는 인간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엔학고레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특별히 우리 시대에 사는 모든 인간은 더욱이 엔학고레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본문의 엔학고레는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모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나오셔서 엔학고레의 은혜를 체험하면 정신이 회복되고 소생하는 은총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가장 먼저 엔학고레의 은혜를 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내 자신입니다. 내가 먼저 엔학고레의 은혜를 체험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모든 이들에게 엔학고레를 소개해 주어야 합니다.
혹시라도 내 주변에 누군가 지쳐있을 때 엔학고레의 은혜를 체험하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혹시라도 내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가 힘들어 할 때 엔학고레의 은혜를 체험하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자녀들이 공부나 이성문제, 진로문제, 친구관계로 목말라할 때 그들을 엔학고레의 현장으로 초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누구라도 목말라하거든 반드시 엔학고레의 현장으로 초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엔학고레의 현장이 반드시 우리 예종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의 가정이 엔학고레의 현장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누구든지 엔학고레의 현장으로 오기만 하면 시원함을 얻으시고 새 힘을 공급받으며 소생하는 역사가 일어 날 줄로 믿습니다. 반드시 모든 이들에게 엔학고레의 은혜를 체험하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목마름은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짐은 쉽고 내 멍에는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 비록 우리앞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목마름이 있을지라도 결코 낙심치 말고 주님앞으로 가지고 나오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공급하시는 새 힘을 얻으시고 회복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시간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7:37-38). 할렐루야!!! (2010.8.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