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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고 영의정 부군 가장〔先考領議政府君家狀〕 ~ 서하 이민서 선조
선고 영의정 부군 가장〔先考領議政府君家狀〕
서하집 제15권 / 행장(行狀) 서하 이민서 선조 지음
본관은 완산(完山)이며, 계보는 선원(璿源)에서 나왔다.
증조부는 증(贈) 승헌대부(承憲大夫) 광원군(廣原君) 행 창선대부(行彰善大夫) 광원수(廣原守) 구수(耇壽)이다.
증조모는 증 현부인(縣夫人) 동래 정씨(東萊鄭氏)이다.
할아버지는 증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세자이사(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世子貳師) 행 통훈대부(行通訓大夫) 봉상시 첨정(奉常寺僉正) 극강(克綱)이다.
할머니는 증 정경부인(貞敬夫人) 온양 정씨(溫陽鄭氏)이다.
아버지는 증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세자사(世子師) 행 통정대부(行通政大夫) 여주 목사(驪州牧使) 광주 진관병마(廣州鎭管兵馬)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 유록(綏祿)이다.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진천 송씨(鎭川宋氏)이다.
공은 휘(諱)가 경여(敬輿)이고, 자(字)는 직부(直夫)이며, 호(號)는 백강(白江) 또는 봉암(鳳巖)이고, 세종 장헌대왕(世宗莊憲大王)의 7대손이다. 장헌대왕(莊憲大王)의 열세 번째 아들 밀성군(密城君) 휘 침(琛)은 총명하고 걸출하여 세종(世宗)께서 매우 사랑하였다. 당시 종실의 지손(支孫)에 대해 아직 관직 진출을 금지하는 법이 없었으므로,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를 처음 설치하면서 공이 맨 먼저 도총관(都摠管)이 되어 군사행정을 기획하고 숙위 군사를 총괄하였으며, 좌리 공신(佐理功臣)에 책봉되어 공렬이 성대하게 드러났으니 이 모든 사실이 나라의 역사에 실려 있다. 이분이 운산군(雲山君) 휘 계(誡)를 낳았는데, 종실의 뛰어난 인물로 선대의 아름다움을 계승하여, 중묘(中廟 중종)가 즉위한 뒤 정국 공신(靖國功臣)에 책봉되었다. 이분이 광성정(匡城正) 휘 전(銓)을 낳았다. 광성군이 광원군(廣原君) 휘 구수(耇壽)를 낳았는데, 이분이 공의 증조부이다.
광원군은 타고난 자질이 중후하면서도 재능이 많아 여러 기예에 두루 통달하여 자식들의 관상을 보면 모두 징험되었고 스스로 들어갈 무덤을 미리 잡아 놓았는데 지관(地官)이 칭찬하였다. 광원군은 4남을 두었는데, 찬성공(贊成公)이 그 장남으로, 휘는 극강(克綱)이고, 자는 자장(子張)이다. 집안을 다스릴 때 법도가 있었고 힘써 배우며 몸가짐을 신중히 하였다. 비로소 급제하였으나 관직은 현달하지 못하고, 후손들에게 경사가 돌아갔다.
아버지 의정공(議政公)은 휘가 유록(綏祿)이고, 자는 유지(綏之)로, 지극한 행실과 아름다운 덕이 있었으며, 부모를 섬길 때 온화하고 조심하였고 차마 그 곁을 떠나지 못하여 쉰 살에도 아이처럼 사모하였다. 타고난 자질이 특출하여 문장을 지을 때는 힘들이지 않고 짓는데도, 격조와 기운이 맑고 기이하여 깊고 풍부한 느낌이 크게 발휘되어 당시 동료들이 모두 도저히 미칠 수 없다고 떠받들며 인정하였다.
공은 행실이 준정하고 말씨가 엄격하여 주저하거나 회피하는 적이 없었다. 언관(言官)이나 홍문관에 있을 때는 반드시 극언하여 자신의 뜻을 펼치니 당시 사람들에게 용납되지 않아 여러 번 지방 수령으로 나갔지만, 부임한 고을에서는 백성들이 부모처럼 사랑하였다. 공이 이미 세상과 잘 어울리지 못한데다가 시사(時事)가 크게 잘못되는 것을 보고는, 더욱 세상에 나가 벼슬할 마음이 없어져 마침내 술로 마음을 풀었고, 매번 술을 마신 뒤 심정이 격렬해지면 그때마다 비통하여 눈물을 흘리며 개연히 굴평(屈平)이 〈회사(懷沙)〉에서 표현했던 분한 마음을 가졌다. 일찍이 적신(賊臣)과 마주 앉은 자리에서 준엄한 말로 꾸짖은 적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얼굴에서 목까지 온통 벌개져서 두려워 차마 듣지 못하고 달아난 적이 있었다.
평소 빈한한 선비처럼 담박하게 거처하여, 사는 곳이 더러 비바람도 가릴 수조차 없었으며, 세상을 떴을 때는 집을 팔아 상을 치러야 했다. 공의 덕행에 대한 사실은 청음(淸陰) 상공(相公)의 명(銘)에 있다.
아! 공은 훌륭한 자질을 온전히 지녔고 행실의 절조가 높았는데, 불행하게도 벼슬살이에 좋은 때를 만나지 못하여 세상에 공적을 크게 드러내지 못하고 마침내 근심과 울분으로 건강을 잃었으니, 세상에는 반드시 그의 풍모를 듣고 길게 탄식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의정공은 진천 송씨(鎭川宋氏)를 아내로 맞았는데, 선전관(宣傳官) 송제신(宋濟臣)의 딸로,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만력(萬曆 명나라 신종(神宗)의 연호) 13년 을유년(1585, 선조18) 1월 9일 신시(申時 오후 3시~5시)에 선공(先公 이경여)을 낳았다.
공이 강보에 싸인 아이였을 때 계집종이 안고 길가에 서 있었는데, 승지 강서(姜緖)가 지나가다 보고, 말 위에서 다가오게 하여 살펴보고는, “이 아이는 후일 대단히 귀하게 될 것이니, 공보(公輔)의 그릇이다.”라고 하였다.
임진왜란 때, 가족을 따라 전쟁을 피해 서산(瑞山)으로 갔다. 갑오년(1594, 선조27), 공의 나이 10세가 되어 처음 글을 배웠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이 번거롭게 가르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글자를 익혔고, 연결해서 읽으면서 왕왕 그 의미를 잘 이해하였다. 때로 오언시(五言詩)를 지었는데, 그 어휘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돌아가신 조부가 처음에는 배울 시기를 놓쳤다고 걱정하였다가 이때에 이르러 기특하게 여겼다. 공은 어려서 남다른 자질이 있었는데, 장중하여 아이들과 장난을 치지 않았다. 영특한 모습이 겉으로 드러났고 안으로 정신이 이에 부합하여, 금옥(金玉)처럼 아름다운 도량이 있었다.
기해년(1599), 돌아가신 조부를 따라 곽산(郭山 평안도 곽산군) 부임지에 있었다. 명나라 동 낭중(董郞中)이 길가에서 바라보고 놀라 기이하게 여기고는, 맞이하여 이야기를 나누자고 청하며 말하기를 “상국(上國 중국)에서 태어났어도 세상에 이름을 날릴 인물이 될 것이다.”라고 하고는, 이어 몇 부(部)의 책을 주고 헤어졌다.
신축년(1601, 선조34),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당시 공은 17세였는데, 덕과 국량이 이미 완성되고 문장이 크게 진보하여 아름다운 명성이 자자하니, 명성과 덕행이 있는 선배들이 모두 선후배를 따지지 않고 교유하였다.
기유년(1609, 광해군1), 증광시 을과에 급제하여 괴원(槐院 승문원)에 뽑혀 들어갔다. 경술년 겨울, 천거되어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임명되었다. 신해년(1611), 대교(待敎 예문관 정8품)로 승진하였으며,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를 겸하였다. 공은 시종신 중에서 가장 젊었는데, 사관(史官)으로서 붓을 잡고 출입할 때면 반열에서 빼어났다. 광해군(光海君)이 일찍이 눈여겨보았다가 좌우에게 말하기를 “내가 근신(近臣) 가운데 신선(神仙) 같은 사람 하나를 얻었다.”라고 하였다.
임자년(1612), 봉교(奉敎 예문관 정7품)로 승진하였다. 당시 이이첨(李爾瞻)이 한창 권력을 훔쳐 정치를 농단하였는데, 공에게는 종고모부(從姑母夫)였다. 이이첨이 공에게 자기 아들을 천거하게 하고자 여러 차례 뜻을 보였으나 좌절되자 곧 끊임없이 협박하였다. 하루는 공에게 묻기를 “근일 사관 천거 대상은 누구인가?”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사관 천거는 응당 공의(公議)를 따라야 하고, 당로자(當路者)의 자제는 본디 함부로 천거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나는 공의 친척이 아닙니까.”라고 하였다.
이이첨은 공의 뜻을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화를 내며 욕하기를 “당로자 자식은 모두 백정 집 자식이란 말인가?”라고 하고, 공과 절교하였다. 공은 결국 장공 유(張公維)를 천거하였다. 이이첨은 그 무리를 사주하여 장공을 논계하여 쫓아내고 아울러 공을 파직시켰다.
그해 가을, 다시 봉교가 되었고, 전적(典籍)으로 옮겼다. 겨울, 공조 좌랑으로 옮겼고, 지제교를 맡았다. 얼마 있다가 정언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그 뒤 여러 차례 정언, 사서(司書) 등의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오래 있던 적이 없었다.
을묘년(1615, 광해군7) 4월, 경기 도사(京畿都事)에 임명되었다. 정사년(1617), 공이 극력 지방 관직을 구하여 처음에는 이천(利川)을 맡았다가, 4월에 충원(忠原)으로 바뀌었다. 당시 혼주(昏主)가 임금으로 있으면서 끝없이 부세를 거두어 백성들이 살 수가 없었다. 공이 정성스럽고 간절하게 백성들을 사랑하였고 시행하는 조치에 방도가 있어, 정해진 조항 외의 역(役)은 매번 자신의 봉록(俸祿)으로 채웠고, 불시에 요구하는 것 또한 사전에 준비해 두었다.
하루는 한창 여름에 고을 백성들에게 칡을 채취하여 대령하라고 명하였는데, 백성들이 어디에 쓸 것인지 알지 못하였다. 봄이 되자, 궁궐도감(宮闕都監)에서 과연 칡으로 만든 끈 수천 동(同)을 징수하여 칡 값이 삼대나 모시와 같아졌지만 고을 백성들은 다른 지역과 달리 편안하였다. 그 나머지를 가지고 이웃 고을의 급한 수요에 보태 주고 그 가격을 싸게 받아 다른 부세에 보태니, 온 고을 사람들이 크게 힘입었다.
도감에서 또 장목(長木) 수만 그루를 징발하면서, 백성들에게 부과해야 할 형편이었다. 공은 이에 앞서 경상(京商)들이 북산(北山)에서 벌목하는 행위를 금지하였는데, 이때 공이 강상(江上)으로 달려가 상인들에게 명하기를 “모 산(某山)에 본래 재목이 많다. 너희들 중에 재목을 베어 절반을 도감에 납부하면, 나머지 반을 주겠다.”라고 하였다. 모두 좋아서 펄쩍 뛰면서 공의 명을 따라 목재 수만 개를 다 납부하니, 백성들은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공이 기발한 계책을 내어 백성을 구하는 것이 대부분 이와 같았다.
도둑을 다스리는 일이 바야흐로 급하여 주현(州縣)에서 잡은 도둑의 신문(訊問)이나 국문(鞫問)은 모두 토포사(討捕使)에게 보냈는데, 체포된 자들 대부분이 원통하게 죽었다. 공이 방백(方伯)에게 청하기를 “고을 사람이 도둑질을 했을 경우 향리에는 증거가 모두 갖추어져 있어 쉽게 그 허실을 알 수 있습니다. 토포사가 단지 엄한 형벌로 다스린다면 심한 곤장 아래 분명 남형(濫刑)으로 인한 억울함이 많을 것입니다. 고을에서 먼저 조사하여, 그 범죄가 도둑질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뒤에 토포사에게 보내 다스리도록 하십시오.”라고 하니 방백이 허락하였다. 이 때문에 온전히 살아난 사람이 매우 많았다.
공이 어떤 마을에 나가 본 적이 있었는데 거주하고 있는 백성이 매우 많아서 아전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아전이 말하기를 “윤 숙의(尹淑儀)의 농장입니다.”라고 하였다. 당시 윤 숙의가 한창 귀히 사랑을 받고 있었으므로 많은 백성이 그 농장으로 들어갔고 농장에 있는 호(戶)가 수백이었는데 관청에서 감히 역을 부과하지 못하였다. 공이 묻기를 “여기서 공적인 부역[公役]에 응한 자가 몇이나 되는가?”라고 하니, 아전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즉시 이정(里正 동리 책임자)을 불러 정(丁 역 의무가 있는 성인 남자)의 수를 모두 찾아내게 한 뒤 적어서 돌아가 다음 날 이들을 군대에 충당하니, 고을 백성들이 통쾌하게 여겼다.
새벽에 일어나 일을 처리하였는데, 관아의 바깥문을 활짝 열어 두어, 일이 있어 찾아온 백성들이 모두 관아 뜰로 들어와 직접 호소하게 하였다. 자세히 듣고 판결하였고 시일을 끌지 않았으므로, 아무리 궁벽한 곳에 사는 백성이라도 사정을 다 털어놓지 않는 자가 없었다. 골육(骨肉) 사이에 소송이 벌어진 경우에는 반복하여 타일러 스스로 후회하게 만들었고, 재업(材業 재능과 학업)이 있는 선비는 예우하고 학문을 독려하여 성취시켰으며, 효우(孝友)의 행실이 있으면 더욱 대우하여 장려하였으니, 이런 이유로 백성들이 모두 다투어 노력하였다. 토호들이 침해하고 교활한 관리들이 속이는 경우에는 엄격하게 법으로 다스렸고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정의 정치는 어지럽고 과도한 세금이 난무하였지만 고을 경내는 편안하였다.
기미년(1619, 광해군11), 관직을 버리고 돌아와 흥원(興元 전라도 흥덕(興德)) 강가에서 우거하였다. 산수 사이에서 자유롭게 지내니 더욱 세상일에 뜻이 없었다. 처음에 이이첨은 공의 재주와 학문을 사모하여 꼭 구슬려 자기편으로 삼고자 했고, 한찬남(韓纘男) 또한 공의 친척이었으며, 박정길(朴鼎吉)은 평소 공과 오랜 친분을 가지고 있었기에, 모두 공을 굳이 끌어들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공은 마치 자신을 더럽히는 것처럼 간주했기 때문에 이들 적신(賊臣)들이 공을 끝없이 원망하여 기어이 중상모략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공은 평소 행실이 고상했고 또한 고을로만 관직을 돌면서 기미가 있으면 먼저 피했으므로 결국 공을 해치지 못하였다.
경신년(1620, 광해군12) 8월, 조부(祖父 이경여의 아버지 이유록) 상을 당하였는데 예문(禮文)보다 지나치게 슬퍼하였고 매번 상식을 올릴 때마다 땅을 치며 부르짖어 우니, 곁에 있던 사람들이 차마 보지 못하고 감동을 받았다. 상을 마칠 때까지 하루같이 슬퍼하고 그리워하였다. 판서 정광성(鄭廣成)이 공의 여차(廬次 상주가 머무는 처소)에 들렀다가 물러나와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누군들 모두 사람의 자식이 아니겠는가만, 나는 이공(李公)처럼 상을 치르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라고 하였다. 공은 궤전(饋奠 제수를 올리고 제사 지냄)하고 남은 시간은 오직 책을 읽고 예(禮)를 강론하는 일만 하였다. 임술년(1622, 광해군14) 탈상한 뒤에도 그대로 여강(驪江 경기도 여주(驪州))에 거주하였다.
계해년(1623) 봄, 수찬(修撰)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3월에 인조대왕(仁祖大王)이 혼란한 군주를 몰아내고 즉위한 뒤 명망과 덕행을 지닌 예전의 인물을 모두 불렀는데, 맨 먼저 홍문관 부수찬으로 공을 불렀다. 공은 감격하여 곧 들어가 사은하였고 얼마 있다가 부교리로 옮겼다. 공은 자신이 맨 먼저 부름을 받았고 또 주상이 정치에 정성을 쏟고 백성들이 바야흐로 다시 살아났으므로, 임금의 자문에 보좌한 뒤에도 아는 것을 모두 진달하였는데 인조 또한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였다.
당시 황폐하고 어지러워진 뒤를 이었으므로 여러 사안들에 문제가 많았고 서북(西北) 지방에는 근심거리가 있었다. 조정에서 한창 군사와 식량을 조달하고 변방 대비를 의논하였는데, 권한을 가진 공경(公卿)은 모두 한순간의 조절에만 힘씀으로써 정치를 해치고 백성을 병들게 하였다.
공은 ‘정론(正論)과 속론(俗論)은 항상 서로 엇갈리는데, 임금은 늘 속론을 펴 주고 정론을 굴복시키게 됩니다. 반드시 이런 태도를 물리친 뒤에야 근본을 바로잡고 백성을 사랑하는 말이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반드시 먼저 주상을 위해 의리(義理)의 경중의 단서를 분별하되 경전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본말을 분석함으로써 기어코 임금의 마음에서 일어나 정치에서 발현되는 일들이 한결같이 바른 데서 나오게 하려고 하였다. 자주 공신들과 함께 아뢴 내용을 가지고 주상 앞에서 쟁론하였는데, 조용히 부연 설명하였고 심기가 화평하니 주상 또한 그 말을 경청하였다.
하루는 호조 판서 이서(李曙)가 재화를 징수하는 일에 대해 매우 오래 언급하였다. 공이 물리치며 말하기를 “나라의 존망은 재화가 없는 상태를 일컫는 것이 아닙니다. 민생이 오래 곤궁하다가 거꾸로 매달린 지경에서 겨우 풀려나 장차 자신들을 고통에서 구해 주리라 기대하고 있는데, 일을 맡은 신하가 주상의 덕을 펴고 큰 은혜를 펼치지는 못하고 도리어 재화를 늘리는 것을 우선으로 삼고 있으니, 앞으로 어떻게 백성들의 여망을 위로하겠습니까. 또한 광해 때의 포흠(逋欠 결손 곡식)을 얼마 전에 모두 정지시켰는데 명을 내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또다시 징수한다면 이는 크게 신뢰를 잃는 처사입니다. 무왕(武王)은 주(周)나라를 세우고 거교(鉅橋)의 곡식을 풀었거니와, 상(商)나라의 옛 장부에 따라 세금을 징수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정승 신흠(申欽)이 주상에게 아뢰기를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를 기대할 수는 없고, 관중(管仲)과 상앙(商鞅)의 치세 또한 쉽게 얻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공이 나아가 “주상께서 처음에 청명하게 하시니 신민들이 바야흐로 요순(堯舜) 시대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관중과 상앙의 공리설(功利說)로 어떻게 우리 임금을 계도하겠습니까. 또한 지금 삼대를 본보기로 삼아도 오히려 초심을 잇지 못하고 사사로운 마음이 점차 생겨 날로 저속해질까 걱정인데, 더구나 당초 삼대를 본보기로 삼지도 않는다는 말입니까.”라고 하니, 신 정승이 부끄러워 사죄하였고, 상 또한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하루는 호패(號牌) 사안을 논의하였다. 공이 나아가 “호패는 본디 좋은 제도입니다만,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는 반드시 먼저 계획을 정하고 기강을 확립한 뒤에 치세가 이룩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계획을 정하고 기강을 확립하는 것 또한 임금의 한 마음에 근본을 두고 있습니다. 반드시 궁정의 방 모퉁이 깊은 곳에 홀로 있을 때에도 경계하고 삼가, 엄숙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법도에 맞게 스스로 규율함으로써 인욕(人欲)은 물리치고 천리(天理)는 밝게 드러내어, 마음 하나가 싹트더라도 반드시 정밀하게 살펴 그 공사(公私)와 의리(義利)의 분별을 알아 제거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 뒤에 임금의 덕이 날로 수양되고 인심이 기뻐 복종하여, 계획은 근본을 갖추고 정해질 것이고 기강은 기댈 곳이 생겨 확립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당시 귀신(貴臣)이 공훈을 믿고 국정을 전단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공이 꿋꿋이 바른말을 하였고 조금도 몸을 낮추어 구차하게 영합하지 않았다. 대간(臺諫)이 김공 류(金公瑬)를 논핵하니, 이배원(李培元)이 말하기를 “김공은 공로가 크니, 가볍게 논핵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그 말은 옳지 않다. 김공이 비록 세상에 없는 공을 세웠더라도 죄과가 있으면, 언관이 잘못을 바로잡는 책임을 맡고 있으면서 어떻게 공로가 높다고 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연평 귀(李延平貴)가 공과 임금 앞에서 논쟁을 하다가 화를 냈으나 통하지 않자 속된 말로 공에게 욕을 하였다. 공이 나아가 말하기를 “이귀가 공훈을 믿고 교만 방자하여 주상 앞에서 근신(近臣)을 욕하였으니, 이는 매우 불경한 일입니다. 더욱이 자기가 한 말에 대해 남이 감히 그 잘못을 고치지 못하게 하려 하니, 이런 습성을 키워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니, 상이 그렇다고 여겼다. 이공이 물러난 뒤에 사적으로 공을 보고 “내가 자네 아버지와 좋은 사이였는데, 어찌 유독 나를 주상 앞에서 꺾으려고 하는가?”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조정의 일에는 감히 사사로운 의리를 돌아보아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9월, 헌납(獻納)으로 옮겼다. 당시 양사에서 날마다 대궐 아래 모여 광해군 때 죄지은 자들을 계속 논핵하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적발하여 죽이고 귀양 보냈으며, 조금만 오점이 있어도 서로 연루되는 경우 또한 많았다. 공은 “원악(元惡)이 이미 사형되었으니 당여들을 굳이 연루시켜 다스릴 것은 없고, 또 새롭게 시작하는 초기에 사람들이 의구심을 품고 있으니 의당 관대함을 보여야 한다.”라고 말하였는데, 지론이 합리적이어서 죄를 면한 사람이 매우 많았다.
가을, 옥당에 있다가 늙은 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지방관을 얻고자 하였으나, 상이 쌀과 콩을 하사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해 겨울에 이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오 상국 윤겸(吳相國允謙)이 이조 판서였는데, 평소 공을 신뢰하여 함께 힘을 합쳐 일하였다. 공이 이조에 들어간 뒤 힘써 공도(公道)를 넓히고 사류(士類)를 보전하기 위하여, 대각(臺閣)과 청선(淸選)에는 반드시 당시의 공론에 따랐고 마음대로 관직을 올리거나 내리지 않았으므로, 천거로 발탁된 사람 중에 누구도 공의 덕을 보았다고 여기는 자가 없었다. 인망에 합당하지 않은 공신은 엄격히 억제하였고, 세력을 가지고 시기를 틈타 함부로 자리를 차지하는 자들은 더욱 힘써 저지하였다. 사사로운 은혜가 있는 친척이라도 하나도 자리를 얻은 일이 없었고, 무인(武人)은 공의 깨끗한 판단을 거스르지 못하고 또 감히 찾아가지도 못하였다. 이런 이유로 집에 청탁하러 찾아오는 손님이 없었고, 벼슬길은 맑아졌다. 겨울, 한학 교수(漢學敎授)를 겸하였다.
갑자년(1624, 인조2), 평안도 병마절도사 부원수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임금이 공주(公州)로 피난을 갔다. 공은 어가(御駕)를 호종하여 갔는데, 완평부원군 이공 원익(李公元翼)이 체찰부 종사관으로 불렀다. 어가가 돌아왔다. 3월에 겸 교서관 교리(兼校書館校理)가 되었다. 겨울에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을축년(1625, 인조3) 봄, 겸 혜민서 교수(兼惠民署敎授)가 되었고, 또 겸 시강원 문학(兼侍講院文學)이 되었다. 암행 어사로 영남(嶺南)에 갔는데, 70여 고을을 드나들며 수령의 현부(賢否)를 살피고 백성의 고통을 물어본 뒤, 그중 특히 불량한 수령 10여 명과 선정을 포상해야 할 사람 여러 명 및 백성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몇 가지 역(役)의 면제에 대해 보고하였다. 인조(仁祖)께서는 일찍이 조정 신하들에게 “근래 어사 가운데 이 모(李某)에 견줄 만한 사람은 없었다.”라고 하였다.
여름,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으로 승진하였다. 또 응교(應敎)로 옮겼고, 얼마 있다가 전한(典翰)으로 승진하였으며, 다시 사간(司諫)으로 옮겼다. 후금의 움직임[西事]이 바야흐로 급박해져 변방에 큰 병력을 주둔시킨 상태였다. 공이 체찰사 종사관으로 명을 받들고 가서 오랑캐 방비를 감독하여, 무기를 점검하고 군사를 먹였으며 방어 상황을 살폈다.
9월, 의주(義州)에 이르렀다. 당시 본래 있던 군사와 지원군으로 진영에 주둔하던 자가 1만 4천 명이었다. 공이 관사에 들어간 뒤, 한밤중에 말 탄 군사 하나를 따르게 하여 통군정(統軍亭)에 이르러 북을 치며 횃불을 들었다. 그러자 군사들이 모두 무기를 들고 성첩에 올라가 횃불을 늘어놓고 응수하였는데, 부윤(府尹) 이완(李莞)은 창졸간에 앞에 이르러 놀라 겁먹고 어찌할 바를 몰라 하니, 공이 그를 끌고 나와 곤장을 치려고 했다. 조정에 돌아와서 말하기를 “이완은 늙어서 상황에 어둡기 때문에 비상시에는 믿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묘당(廟堂)에서 귀담아듣지 않았으나, 후에 과연 공의 말처럼 패배하였다.
죄인 공(珙)이 여러 번 역적에게 추대되었는데, 조정에서 목숨을 살려 둘 계획으로 영동(嶺東) 고을에 위리안치하였다. 목성선(睦性善)이 그 논의에 반대하여 옥사를 다스린 신하들을 위태롭게 만들고 이어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들을 공격하여 제거하고자 하였다. 공이 동료들과 글을 올려 그 간사한 정상을 지목하여 진달하고, 상소를 태워 버릴 것을 청하였는데, 주상이 목성선을 지지하자 공은 이로 인하여 사임하여 체직되었다.
병인년(1626, 인조4), 계운궁(啓運宮)의 상(喪)에 예장도감 도청(禮葬都監都廳)이 되었다. 당시 염빈(斂殯)의 예(禮)에, 주상이 중궁(中宮)의 의례를 쓰고자 하였으나 도감에서 안 된다는 의견을 견지하여 논쟁이 잦았고 이 때문에 파직되었다. 얼마 안 있어 군기시 정으로 서용되었다.
중국 사신이 왔을 때 연접도감 도청(延接都監都廳)이 되었다. 폐군(廢君) 때의 일록(日錄)을 편찬할 때 또 편수낭청(纂修都廳)이 되었다. 문관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선발되어 독서당(讀書堂)에 들어갔다.
호패법을 시행할 때 또 호패 어사(號牌御史)가 되어 호남(湖南)에 가서 시찰하였다. 호패법을 시행하려고 할 때 주상이 어사들에게 조당(朝堂)에 가서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당시 이서(李曙)가 호패 장부대로 군액(軍額)에 충당하려고 하였다. 공은 안 된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호패란 본래 백성의 숫자를 알려고 하는 일입니다. 이미 백성의 숫자를 파악했다면, 병사를 뽑아 부족한 인원을 보충하는 것은 다음에 할 일입니다. 지금 만일 아직 일을 마무리 짓기도 전에 이어서 군사에 보충한다면 민심이 놀라고 두려워 불안해할 뿐 아니라, 조정의 큰 체모 또한 이와 같아서는 안 되리라 생각합니다.”라고 하니, 여론이 그렇게 여겼다.
정묘년(1627, 인조5), 오랑캐 기병이 평산(平山)에 이르자, 어가가 강도(江都)로 피난 갔다. 공은 호남을 시찰하다가 나주(羅州)에 도착했을 때 그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 귀환하여 뒤따라 행재소(行在所)에 이르러 집의(執義)에 제수되었다. 이윽고 어가가 돌아왔다. 5월, 동부승지로 승진하였다.
9월, 충청 감사에 제수되었다. 그때 이인거(李仁居)가 군사를 일으켰다는 고변서가 도착하였고, 조정에서는 공의 출발을 재촉하며 또 경병(京兵)을 지급하여 스스로 방위하게 하고, 공을 조정에 불러 장차 방략(方略)을 지시하려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횡성(橫城)은 백 호(戶)도 되지 않는데, 이인거가 설사 그 지방에서 군사를 불러 모을 수 있다고 해도 어찌 백 리를 넘어 쳐들어오겠습니까? 군현에서 장차 체포할 것입니다.”라고 하고 홀로 말을 타고 한강을 건넜는데, 그 무렵 이인거가 사로잡혔다.
충청 감사의 업무를 볼 적에, 청주 목사(淸州牧使) 심기성(沈器成)이 심기원(沈器遠)의 동생으로서 교만 방자하여 법을 지키지 않자, 공이 즉시 보고하고 쫓아내니 온 도가 숙연해졌다. 영춘(永春 충청도 영춘현)은 토지가 척박하고 메마른 불모지였다. 공이 현재 경작하는 토지에만 세금을 매기도록 조정에 청하여 세금을 반으로 줄일 수 있었다.
해를 이어 흉년이 들자 주현(州縣)에서 체납된 조세가 매우 많아서 백성들이 내야 할 평상시 세금이 다른 날의 배가 되었다. 공은 해마다 체납액의 10분의 1을 거두어 10년이 되면 채우도록 하고, 산읍(山邑)의 경우 곡식 대신 포(布)로 내도록 하며, 값을 대신할 수 있는 다른 세금에 대해서도 예전에는 제값으로 하지 않았던 것을 그 값을 공평하게 하여 나머지를 백성에게 주기를 청하였다. 공이 조정에 요청한 모든 사안에 대해 조정에서 혹 바로 허락하지 않으면 재삼 청하여 재가를 얻고야 말았다. 당시 대부인(大夫人)이 적병을 피하여 서산(瑞山)에 있었는데 공이 봉양하기 위하여 이곳에 부임한 것이었다.
무진년(1628, 인조6), 대사성이 되어 돌아왔다. 기사년(1629) 가을, 부여(扶餘) 백마강(白馬江) 가에 처음으로 거처를 정하였다. 여러 번 소명을 사양하였고, 이어 이조 참의, 부제학 등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오래 관직에 머물지는 않았다. 경오년(1630) 봄, 부제학으로 재직하면서 부모님 봉양을 위해 지방 고을 관직을 청하여 청주 목사(淸州牧使)가 되었다. 충주(忠州)에 있을 때처럼 한결같이 스스로 단속하고 백성을 사랑하였으며, 고을 백성 또한 충주에서 했던 정사를 평소 들었던 터라 명령하지 않아도 절로 신뢰하였다.
청주는 본래 토호(土豪)가 많아 체납 조세를 때맞춰 갚지 않으므로, 정치를 잘했다고 불리는 전임자는 모두 위엄을 부려 가까스로 처리하였다. 사람들은 더러 공에게 큰 고을이기 때문에 공이 평소 하듯이 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백성이란 힘으로 제어해서는 안 되며, 오직 신뢰로 깨우쳐 나의 정성에 감복하게 할 뿐이다.”라고 하고는, 먼저 고을의 대부(大夫)와 장자(長者)를 시켜 대가(大家)와 호족(豪族)에게 타이르기를 “완고하여 따르지 않는 자에게는 또한 자연 법대로 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징수하는 명이 있을 때는 반드시 세 번 기한을 주고 기일을 넉넉하게 하였고, 기일이 이르기 전에는 백성들이 한 사람의 관리도 보지 않았으며, 기한이 이르면 뒤처진 백성이 없이 모두 묵은 체납분을 충당하였으니, 고을 사람들은 위엄으로 다스리던 전후임에서는 없었던 일이라고 칭찬하였다.
고을 백성들이 가흥(可興 충주에 있는 가흥창)에 조세를 수송하였고, 미처 싣지 못한 것은 모두 강변에 노적하였기 때문에 해마다 항상 곡식이 축나고 도둑질을 당하였다. 공이 처음으로 창고를 설치하여 곡식을 넣어 두고 모집한 지역 주민이 지키면서 때맞추어 내다 싣게 함으로써 한 곡(斛 10말)도 잃어버리지 않아 묵은 폐단이 제거되자, 여러 고을이 모두 본받았다. 공은 관리의 직무에 정통하여 정무가 간략하고 번잡하지 않았으며 사안이 도착하면 잘 판단하여 재결에 법도가 있었으므로 아전이나 백성들이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하였다.
신미년(1631, 인조9), 부제학으로 소환되었다. 겨울, 동료들과 차자를 올려 8조를 진달하였다. 첫째는 하늘을 공경하는 일[敬天]이고, 둘째는 백성을 돌보는 일[卹民]이며, 셋째는 의견을 경청하는 일[聽言]이고, 넷째는 인재를 등용하는 일[用人]이며, 다섯째는 검약을 숭상하는 일[崇儉]이고, 여섯째는 종실을 돈독히 하는 일[敦宗]이며, 일곱째는 배움에 나아가는 일[進學]이고, 여덟째는 대궐 안을 바로잡는 일[刑內]이었다.
백성을 돌보는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민심의 향배에 따라 나라가 보존되거나 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담당 관원이 위로 주상의 뜻을 체득하지 못하고 정책 시행을 잘못하여 작은 비용을 아끼다가 큰 신의를 잃는가 하면, 세세한 사무를 먼저하고 원대한 계획은 뒤로 돌리고 있습니다. 조세를 탕감해 준다는 은혜가 도리어 신의를 잃는 결과가 되고, 변통한다는 정책이 끝내 분란의 단서만 만들고 말았습니다.
더구나 훈신(勳臣)들은 각자 자기 생각만 하며 백성들의 농지를 다투어 빼앗고, 내수사(內需司)에 투속(投屬)하는 폐단은 이전 시대의 풍습이 점차 불어나고 있습니다. 각 아문에서 이익을 추구하는 폐단에 대해서는 안팎에서 원성이 자자한데, 여러 궁가(宮家)에서 빚을 징수하는 것은 이보다 더욱 심합니다. 이웃이나 친족에게까지 침탈하여 징수하는 일이 독처럼 팔도에 만연하고, 온갖 역(役)이 무겁고 번거로워 공사(公私) 간에 모두 힘들게 합니다.
더욱이 어떤 의논은 나라의 일과 백성의 일을 갈라서 두 가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상(慈詳)하고 화락한 사람에 대해서는 백성들을 기쁘게 하여 칭찬을 받으려 한다고 하고, 일이나 잘 처리하고 능력을 자랑하는 무리에 대해서는 마음을 다하여 공무를 집행한다고 합니다. 조정에서 숭상하는 기풍은 원근에서 영향을 받게 마련이니, 전하께서 비록 백성을 사랑하고 물건을 아끼는 마음이 있으나 사방의 백성들이 전하의 어짊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일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오늘부터 백성들과 더불어 새로 시작하십시오.
훈신에게 하사한 것은 감사(監司)가 그 실상을 조사하고 호조가 나누어 균등하게 분배하게 하여, 빼앗긴 것은 모두 돌려주고 많이 점유한 것은 나누어 줌으로써 균등하지 않고 잘못 침탈하는 우환이 없게 하십시오. 내수사에 투속한 자는 담당 관원에게 보내 법에 따라 재단하고, 이조에 신칙하여 관유(關由 관문(關文)을 보냄)하는 문이(文移 문서 시행)는 반드시 그 가부를 살펴서 쓸 것은 취하고 못 쓸 것은 버려서 조종의 옛 제도를 회복하십시오. 백성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각 아문의 정책은 담당하는 사람에게 일체 폐지하도록 명하십시오. 여러 궁가에서 법을 어기는 경우 사헌부에서 적발하여 드러나는 대로 통렬히 다스리십시오.
전하께서 또한 스스로 크게 뉘우치고 깨달아서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차마 하지 못하는 정치를 행하여 덕을 우선으로 삼고 이(利)를 뒤로하며 위를 덜어 아래에 더해 주십시오. 일 처리나 잘하는 신하를 지나치게 장려하지 말고 선량한 관리들을 지나치게 깎아내리지 말아서, 가혹한 정치는 억제하고 어질고 보살피는 도를 행하십시오.”
검약을 숭상하는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왕자의 길례(吉禮)에 한껏 사치를 부려 진기한 보화를 중국에서 사사로이 사들였고 노리개로 쓸 도구나 제조 기술에도 상당히 마음을 썼습니다. 또한 대군(大君) 집을 지을 때도 조종조의 옛 규정을 넘었는데, 선조(先朝)의 왕자 중에는 지금도 집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하께서 이들에 대하여 먼저 조처해 주지 않으시고 대군을 위하여 먼저 집을 지으셨으니, 이것이야말로 ‘임금의 아우를 봉하지 않고 임금의 아들을 봉하였다’는 데 가깝지 않겠습니까.”
종실을 돈독히 하는 데 대해서는, 인성군(仁城君)의 자녀들을 시집, 장가보내 배우자를 찾아 줄 것이며, 광해(光海)의 거처를 넓히고 광해 때의 궁인을 보내어 나머지 인생을 즐겁게 살게 해 주기를 청하였다.
대궐 안을 바로잡는 데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임금은 밖에 바르게 위치하고 후비(后妃)는 안에 바르게 위치하여 안의 말은 밖으로 나가지 않으며 밖의 말은 안으로 들어오지 않게 하여, 안과 밖의 한계를 엄하게 하고 올바르지 못한 지름길을 막아야 합니다. 지금 궁중에 문안을 드리는 종들이 금문(禁門)을 출입하고 사사로이 술과 음식을 바치느라 대궐의 뜰에 뒤섞이는가 하면, 산천에 기도한다고 궁녀들이 공공연히 왕래하면서 잡다한 물품을 운반하느라 사복시(司僕寺)의 말이 도로에 지쳐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위로 자전(慈殿)을 받들면서 진실로 거스르지 않는 도리를 아시겠지만, 한결같이 법도대로 따르지 못한다는 것 또한 전하께서 어찌 모두 알고 계시겠습니까. 그리하여 밖에 소문이 전파되어 남모르게 탄식하는 사람이 많아 신들은 마치 부모의 허물을 듣는 것만 같으니 어찌 군부의 앞에 다 진달하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주역(周易)》 〈가인괘(家人卦)〉의 ‘위엄으로 하면 길하다.[威如之吉]’라는 말을 체득하여, 자기 자신에게 돌려 정도를 가지고 궁궐을 맑고 엄숙하게 하십시오. 궁첩은 위엄으로 대하고 궁녀들에게는 장중하게 임하여, 총애를 열어서 모욕을 불러들이지 말며 은혜로 의(義)를 덮어 가리지 말고 사사로움으로 공도(公道)를 해치지 마시고, 좌도(左道 굿, 점 등의 술수)의 종류는 일절 금지하십시오.
왕실의 외척과 인척들도 신하이기는 매한가지인데, 어떻게 감히 사사로이 서로 문안하며 사사로이 물건을 진헌한단 말입니까. 만일 무식하여 이런 일을 저지르는 자가 있거든 담당 관원에게 맡겨 법으로 다스려 공명정대한 도리를 보이십시오.”
학문에 나아가는 일에 대해서는, 더욱 학문에 침잠하여 많이 축적하고 쉬지 않는 공부를 더하며 유신(儒臣)을 자주 접하여 강마한 보탬이 보존되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끝에 다시 희로(喜怒)의 지나침과 공사(公私)의 분별에 대해 간곡하게 경계하였다. 주상이 가상하게 받아들이고 각각 사복시의 말 1필을 하사하며, 말하기를 “옥당이 임금의 어질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기고 장차 나라가 망할까 걱정하여 과인의 잘못과 민생의 병폐를 숨김없이 모두 진술하였으니, 내가 가상하게 여기며 감탄하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사양하자, 상이 말하기를 “옛사람은 소중한 말 한마디를 천금에 비유하였다. 그런데 지금 너희들의 약석(藥石)과 같은 말은 수백금에 비할 정도가 아니다. 옛날 당 태종(唐太宗)이 위징(魏徵)에게 은항아리[銀甕]를 하사하였을 때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라고 하였다.
10월, 어머니 병환으로 휴가를 청해 부여(扶餘)로 내려간 뒤 글을 올려 사직하였다. 상이 답하기를 “지금은 너의 의사를 따르겠지만, 너는 노모를 위로하고 같이 한양으로 데리고 와서 충효(忠孝)가 모두 온전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임신년(1632, 인조10) 가을, 승지로 부르자 한양에 도착했다. 계곡(谿谷) 장공(張公 장유(張維))이 이조 판서가 되어, 공을 옥당으로 옮기기를 청하며 말하기를 “경연의 장관은 책을 읽은 사람이어야 합니다.”라고 하자, 결국 부제학이 되었다. 당시 아직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장례를 치르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침문(寢門)에 조알(朝謁 아침 문안)을 정지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무릇 상례 때 장례를 치르기 전에는 전적으로 살았을 때의 예를 적용합니다. 지금 재궁(梓宮)이 빈전(殯殿)에 있고, 향헌(享獻)과 진선(進膳)의 의례는 평소와 다름없는데 유독 조정의 조알만 폐하였으니 예에 온당치 못합니다.”라고 하며 차자를 올려 논하였고, 결국 조알을 행하게 되었다.
겨울, 궁중에 저주로 인한 옥사가 있었는데, 상이 내옥(內獄)에서 다스리게 했다. 공이 쟁론하기를 “사안이 대역(大逆)에 관계되면 왕옥(王獄)도 오히려 마음대로 할 수 없고, 반드시 대신과 양성(兩省)이 함께 참여하여 다스리게 하였으니, 국제(國制)가 그러한 것입니다. 지금 환관에게 주관하여 죄를 다스리게 한 것은 토역(討逆)을 엄격히 하고 궁부(宮府 궁중과 조정)를 하나로 여기는 방도가 아니며, 더욱이 옥사의 판단을 분명하고 신중히 하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궁궐이 엄숙하지 않은 데서 간얼(奸孼)이 생겨나는데, 변고가 이미 싹텄으니, 전하께서도 의당 스스로 반성하며 뉘우쳐야 합니다. 이제부터 궁궐을 엄숙히 하여 화란의 계기를 막으십시오.”라고 하였다.
옥사(獄事)가 내려진 뒤 진술 내용에 또 대비의 궁인과 연루된 말이 많았고 증거가 나오면서 사건이 점차 확대되었다. 공이 뒤에 난처하게 양궁(兩宮 인목대비와 인조)을 손상하게 할까 걱정되어 또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전하께서 만번 죽더라도 한번 사는 것을 돌아보지 않는 계책을 내어 모후(母后)를 위급한 상황에서 구하셨으며 물품을 갖추어 봉양하시면서 성심과 효성에 흠잡을 데가 없었습니다. 돌아가신 지 오래지 않아 불행하게도 흉악한 역적이 궁액(宮掖)에서 나왔고, 또 불행하게도 자전(慈殿)의 사람과 연루된 것이 많았습니다.
이 무리들이 혹 욕심을 채우지 못하고 청탁이 행하여지지 않자 점차 원망하는 독심을 키워 스스로 악행을 저질렀지만, 양궁의 자애와 효성은 진실로 여전하였습니다. 안옥(按獄)을 표명하였으니 천심(天心)을 알 수 있고, 단지 사사(賜死)를 명하였으니 성상의 뜻이 더욱 드러났습니다. 지금 의당 마음의 미세한 데까지 돌이켜 구하여 지푸라기처럼 작은 것이라도 그 사이에 막히지 말게 하고 마음을 두 가지로 쓰지 않으면 표리(表裏)가 저절로 통찰되고 효성이 신명(神明)에게 통할 것입니다.
지금 어리석은 백성들이 혹 의혹을 품고 유언비어가 전파되고 있으니, 이는 집집마다 다니며 깨우쳐 줄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또 위엄으로 복종시키거나 힘으로 억제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밝게 융화시켜 진정시키는 방법은, 없는 분을 계신 듯이 섬기고 돌아가신 분을 살아 있는 듯이 섬기며, 그가 사랑했던 바를 사랑하고 그가 공경했던 바를 공경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좋아하고 싫어함과 은택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한다면 사람들의 의심이 얼음 녹듯이 풀어질 것이고 주상의 효성은 더욱 드러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상이 마침내 그 옥사를 끝까지 추궁하지 않고 단지 수악(首惡 주동자)만 벌주어 죽였으며 진술에 끌어 댄 사람들 대부분은 불문에 부쳤다.
겨울, 대부인(大夫人)을 뵈러 부여로 갔다가, 그 길에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계유년(1633, 인조11) 봄, 전라 감사(全羅監司)에 임명되었다. 조정에서는 공이 관직에 나올 뜻이 없음을 알고, 호남(湖南)이 어머니 사는 곳과 가까우므로 취임하도록 한 것이다. 공은 경악(經幄)에서 나온 뒤로 더욱 성상의 덕을 펴고 백성들의 고통을 진달하며, 이익을 일으키고 폐해를 제거하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 먼저 선정(善政)의 실상이 없는 수령들을 조사하였고 뒷배경을 믿고 법을 지키지 않는 자가 있으면 쫓아냈다.
호남은 풍속이 사나워 큰 부(府)나 큰 고을은 포악한 관리들이 대부분 간교하여 권력과 부를 위해 하호(下戶)를 침탈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공은 그들의 간악한 실상을 두루 알고 행부(行部 감사가 관할 고을을 순시함)하다가 그 고을에 이르면 조사하여 다스렸는데, 죄의 경중에 따라 더러 사형에 이르기도 하였으므로 교활한 관리들이 모두 자취를 감추고 공을 신명(神明)처럼 두려워하였다. 사안 가운데 유폐(流弊)가 누적되어 고실(故實 관례나 법령처럼 됨)이 된 경우, 큰 사안은 논계하여 조정에 처리를 요청하고, 작은 사안은 그 자리에서 결단하니, 오래지 않아 모두 고쳐졌다. 오랫동안 판결나지 않은 옥사 가운데 간혹 10여 명의 사또를 거친 경우도 있었는데, 도착한 즉시 판결하여 원통한 자들을 모두 풀어 주었다.
역(役)을 낼 때 예전에는 토지의 대소 차이를 고려하지 않아 백성들의 고통이 일정하지 않았는데, 공이 모두 결수(結數)의 많고 적음 및 토지의 생산량으로 다시 결정하였다. 내수사의 차인(差人)이나 궁의 노비, 아문의 예속(隷屬) 중에 공문서를 가지고 고을에 말을 타고 횡행하면서 백성들의 이익을 빼앗는 자는 각 고을에서 잡아 보내 다스리게 했다.
공은 맑고 엄격하게 스스로 규율하여 자신을 엄숙히 하고 다른 사람을 만났으므로 사람들이 공경하지 않음이 없었다. 백성들의 일에 대해서는 마치 자신이 굶주리고 목마른 것처럼 느끼고 형편에 맞게 백성을 구제하였는데 생각지 못한 방략이 많았고, 또 체계적이고 치밀하여 크든 작든 놓치지 않았으며, 법률 외에는 화락함으로 이들을 대하였다. 그래서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에게 대단히 정성 어린 환영을 받았다.
가을, 상이 사방에 구언하였는데, 공이 조목별로 도내(道內)의 이해 수십 조목을 주달하였다. 공안(貢案)이 균등하지 않은 폐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왕자(王者)의 정치는 공부(貢賦)보다 중대한 것이 없는데, 전결(田結)이 많은데도 공물이 적기도 하고 혹은 전결이 적은데 공물이 많기도 하니, 균등히 조정하십시오. 또한 납부하는 관청의 숫자를 합병하여 한 고을이 속한 데가 서너 곳을 넘지 않게 하십시오.”
역을 이웃과 친족에게 부과하는 폐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관할하는 사람에 대해 분명한 법이 없어서 단속이 엄격하지 않으므로 백성들이 쉽게 도망가는데, 한 사람이 역에서 도피하면 피해가 열 집안에 미칩니다. 오직 호패를 시행하여야 이를 구제할 수 있습니다.”
육군(陸軍)을 주사(舟師 수군(水軍))에 나누어 수자리 서게 하는 폐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배 젓는 데 익숙하지 않은 산읍(山邑) 사람은 각각 포 3필을 내어 관청에 속한 고졸(雇卒)로 보내십시오.”
양민(良民)이 줄어드는 폐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사천(私賤)은 고제(古制)가 아닌데, 우리나라는 한 나라의 백성 가운데 반 이상을 나누어 사사로운 집에 귀속시키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천인이 양녀(良女)를 취하여 낳은 자식은 아울러 어미를 따라 양민으로 삼으십시오.”
해마다 세초(歲抄)하는 폐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생취(生聚)는 반드시 10년을 기다려 하는데, 지금은 해마다 군정(軍丁)을 뽑아 포대기에 쌓인 아이까지도 나이를 속여 번직(番直 수자리 방비)을 맡기므로 백성들의 이산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제한하는 제도를 넉넉하게 세워 3년에 한 번 1초(抄)하고 차례로 결원을 보충하십시오.”
각사(各司) 공물주인(貢物主人)이 간사한 꾀를 써서 물건의 시세를 올리는 폐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진성(陳省)을 빼앗고 자문[尺文]을 조작하여 10배의 가격을 부담 지우고 있습니다. 여러 관청에서 어떤 물건이 얼마의 가격인지 상정(詳定)하게 하여, 마음대로 늘리지 못하게 하십시오.”
여러 궁가(宮家)와 여러 관청의 둔장(屯莊)ㆍ염분(鹽盆)ㆍ어살(魚箭)의 폐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어염(魚鹽)의 이익을 호조에서 관할하지 않으면 나라 재정에 온당치 않은데, 하물며 사문(私門)에서 이익을 취하는 경우이겠습니까. 문서[文移]가 오가면서 관리들이 받들어 시행하는 데 정신이 없고, 위임자가 오가면서 백성들이 침탈을 받아 고생합니다. 더욱이 도망칠 은거지가 넓어지고 불법적인 길이 늘어나니 일체 금지하고 폐지하십시오. 궁가들과 각사에서 법 이외로 빚을 거두는 것을 금지하여 주현(州縣)의 백성들이 매월 내는 이자 때문에 파산하지 않도록 하며, 백성이 죄를 얻고 새로운 창고[新庫]에 예속되는 것을 금지하여 간활한 자를 막으며, 주사(舟師)를 통영(統營)에 파견하여 방어하는 제도를 혁파하여 평상시에 백성들을 먼저 피폐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마지막에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나라를 다스릴 때, 백성들의 힘을 덜어 주려면 대동법(大同法)을 두루 실행하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 없고,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려면 호패법(號牌法)을 다시 실행하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대동법은 실제 효과가 이미 기전(畿甸 경기)에서 드러났고, 호패법은 식자들이 모두 쉽게 폐지한 것을 애석해하고 있습니다.
본도(本道)의 일로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원용전(元用田)이 12만 결이니, 경기의 사례처럼 결당 16두(斗)를 거둔다면 얻을 수 있는 쌀이 12만 8천 석(石)입니다. 본도에서 진헌하는 방물(方物)ㆍ진선(進膳)ㆍ약품[藥] 및 여러 영(營)에서 쓰는 녹봉(祿俸), 여러 고을의 수요, 장병들의 식량을 계산하면 나머지가 8만 6천 석입니다. 경사(京司)의 공가(貢價)는 1년 계산으로 5만 석이니, 3만 6천 석을 충분히 얻을 수 있어 급할 때 변통할 수 있는 조(調 공납)로 삼을 수 있습니다. 지금의 부역(賦役)으로 보아, 결당 16두를 취하고 다른 공납을 면제해 준다면 백성들의 마음에 무척 기뻐할 것이고, 수만 석을 얻어 여분으로 삼으면 나라에 무척 이득일 것입니다. 재정은 부유해지고 백성은 편해지니, 일거양득입니다.
호패법의 시행은, 당초 사안의 조문이 너무 번거롭고 조절이 너무 급박하여 백성들이 지레 놀라고 두려워하였으며 다른 의견이 마구 생겨났습니다. 지금 만일 향교 유생의 강(講)을 정지하고 군보(軍保)의 확보를 늦추고, 먼저 대소 관리들과 여러 역(役)의 명칭이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전의 호적에 따라 각각 스스로 차게 하면, 백성들은 자기에게 피해가 없음을 알고 동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뒤에 차츰 정돈하여 일반 백성에게 적용해서 호(戶)를 감안하여 통(統)을 짜고 조처에 순서가 있게 하면, 일의 실마리를 풀기 매우 쉬울 것입니다.”
대개 공이 한 말은 한 도(道)의 일을 통하여 국정에서 급히 해야 할 일에 미쳤던 것으로 규획한 바가 모두 방도가 있었으나, 대체로 담당 관리에게 저지되어 대부분 시행되지 못하였다.
갑술년(1634, 인조12), 부제학으로 조정에 돌아왔다. 당시 정전(正殿)에 벼락이 쳤다. 공이 상에게 경계할 것을 진달하였는데, 그 말은 다음과 같았다. “지금 말하는 사람들은, 성덕(聖德)에 비록 빠진 것이 있고 조정에 비록 병폐가 있지만, 지난날 윤기(倫紀)의 변이나 토목(土木)의 역사(役事), 뇌물의 횡행은 모두 없었으므로 필시 갑자기 어지러워져 망하는 일은 없으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상의 생각 또한 분명 이로써 스스로 용서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라의 존망은 사람의 존망과 같습니다. 지금 악질에 걸려 죽는 사람이 있고, 풍병이 들어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원기(元氣)가 이미 손상되기에 이르렀는데 적당히 조섭하지 못하면, 육기(六氣)의 병이 반드시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저 윤기의 변은 악질과 같은 부류이고, 토목과 뇌물은 풍병과 같은 부류입니다. 지금 원기가 예전과 같지 않아 육기가 그 틈을 타서 들어와 두렵지 않음이 없는데, 어찌 나는 악질이나 풍병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핑계 대면서, 죽음을 모면했다고 생각하고 망녕되이 오래 살기를 바라며 술과 여자에 탐닉하면서 그 위험을 향해 내달릴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지금은 노대(露臺)를 따로 만들고 있어 식자들이 이미 우려하고 있습니다.
궁궐이 엄숙하지 않고 언로가 열리지 않은 데다, 강포한 외적이 국경을 압박하면서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고, 백성들의 고혈을 짜서 그들의 요구대로 바치고는 고개를 숙이고 가련히 살펴 주기를 구걸하고 있습니다. 목전의 편안함을 구차히 바랄 뿐 상하가 반색하며 서로 경하하는 가운데 터럭만큼도 통분을 참고 수치를 머금고 분발하여 자강(自強)할 의사가 없으니, 이를 만년 갈 종묘사직의 계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어 주상에게 언로를 넓히고, 사사로운 청탁을 막으며, 기강을 세우고, 부역을 너그럽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이런 종류로 미루어 말한 것이 지극히 통절하였다. 얼마 안 있어 부여로 돌아왔고, 여러 번 불렀으나 가지 않았다.
을해년(1635, 인조13), 인열왕후(仁烈王后)가 세상을 떴으므로 공은 국상(國喪)에 달려왔다. 당시 세자(世子)가 상례를 주관하기로 의논을 정하였다. 상은 기년복을 입지 않았고, 세자는 주상 앞에서 반길복(半吉服 평복에 가까운 옷)을 입었다. 공이 승지가 되어, 민응형(閔應亨)과 함께 상소하여 논박하였는데, 말하기를 “예(禮)에 ‘집안에 두 존자(尊者)는 없다.’라고 했고, 또 ‘존자가 상을 주관한다.’라고 했으며, 또 ‘모든 상례에는 아버지가 살아 있으면 아버지가 상주(喪主)가 된다.’라고 했습니다. 상례를 주관하는 예가 이토록 엄격한데, 세자가 어떻게 상례를 주관할 수 있겠습니까. 옛사람이 말하기를 ‘삼년상에 이미 성복(成服)하고 나서는 그 상복을 벗고 길복을 입는 것은 가한 때가 없다.’라고 했습니다. 왕세자가 초립(草笠)과 흑대(黑帶) 차림으로 진현의(進見儀)를 하도록 하였는데, 임금이 신하의 상에 임해도 상주가 오히려 최복(衰服)을 벗지 않고 다만 질(絰)과 장(杖)만을 제거하는 것은 참으로 흉복(凶服)을 변경할 수 없고 지극한 정을 빼앗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독 인군(人君)의 부자가 궁궐 사이에서만 억지로 정을 빼앗고 변복(變服)하게 하여 이미 강복(降服)된 기년의 상복마저 다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과연 무슨 의리입니까.
성인(聖人)이 염소 가죽으로 만든 갖옷과 검은 관 차림으로 조문하지 않은 것은 다른 사람이 상을 당했을 때도 오히려 길복으로 임하지 않은 것입니다. 더구나 배필(配匹)의 초상(初喪)이고 함께 살던 사람의 빈소가 차려진 상황에서 전하께서 곧바로 가복(嘉服)을 입어서 스스로 평소와 같게 하고, 신하들이 입시할 때 또한 길복을 입게 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병자년(1636, 인조14), 오랑캐가 일으킬 변란의 조짐이 날로 심각해졌으나, 조정에서는 전쟁에 대한 대비가 매우 소략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모두 장차 화가 다가올 것을 걱정하는데도 감히 주상에게 분명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후일 상이 공경(公卿)을 불러 사안을 의논하였다. 공이 나아가서 “지금 오랑캐는 분명 준동할 형세입니다. 전하께서는 반드시 분발하시고 두려워하시되, 구천(句踐)이 회계산(會稽山)에 대해서 하듯, 문공(文公)이 조읍(漕邑)에서 하듯 그 뜻을 견고히 하시고 일관된 의지로 세금을 거두고 병기를 수선하여 일이 이르기를 기다려 대응하면 큰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던 대로 하면서 구습이나 따르는 것은 생존을 도모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오늘 재상들을 불러 보시기에 신은 반드시 대단한 조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위에서 묻고 아래에서 대답하는 바가 모두 재이를 그치고 전란을 막으며 나라를 보전하고 적을 제압하기에 충분한 의견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아무리 하루에 세 번 접견하더라도 일에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성상께서 혼란을 평정하여 반정(反正)을 하셨으니 영명하기가 고금에 으뜸인데, 사업은 도리어 평범한 군주보다 못하니, 이것이 신민(臣民)들이 통탄하는 이유입니다. 전하께서는 위로 하늘의 노여운 견책을 두렵게 여기시고 아래로 나라가 장차 망하려는 상황을 통탄하시어 두려운 마음으로 생각을 바꾸시어 먼저 큰 뜻을 세우시고, 정사(政事)를 정비하고, 현명한 인재를 등용하며, 군졸과 전차를 조련하고, 무기를 정비하여 대업을 영원히 공고히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오랑캐 사신이 와서 화약(和約 평화협정)을 주장하며 우리나라가 명나라와 절교할 것을 요청하였다. 조정에서 배척하고 허락하지 않았더니, 이윽고 화를 내며 곧바로 떠났다. 조정에서는 두려운 나머지 논의하여 사람을 보내 돌아오도록 요청하고자 하였다. 공이 계(啓)하기를 “오랑캐 사신이 와서 신하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하였으니, 대의(大義)가 달린 일에 위망(危亡)을 어찌 계산하겠습니까. 성상의 뜻을 먼저 결단하시어 후환을 돌아보지 않고 의리에 따라 거절하였으므로 의로운 명성이 이미 드러나 인심이 조금은 복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사람을 보내 억지로 돌아오도록 요청한다면 이는 필부필부(匹夫匹婦)가 사정하고 동정을 바라는 것과 같으니, 천승의 나라로서 차라리 나라가 무너질지언정 어찌 차마 이런 거조를 하겠습니까.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두고 우리 또한 우리가 해야 할 바를 스스로 다하는 것만 못합니다. 임금과 신하, 위아래가 아침저녁으로 노력하여 안일에 빠져 경박하고 사치스러운 습관을 한꺼번에 씻어 버리고 단지 수치를 씻고 침략을 막겠다고 마음먹어 수천 리 나라가 좌임(左衽)하게 되는 결과를 면하게 하십시오. 오늘날의 계책은 이 이상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12월, 오랑캐가 과연 대규모 군사를 이끌고 침략해 왔다. 공은 주상을 호종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산성이 함락된 뒤, 정축년(1637, 인조15) 4월, 경상 감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나라가 새로 큰 변란을 당하여 사방의 인심이 안정되지 않았는데, 영남(嶺南)이 더욱 심하였기 때문에 묘당(廟堂)에서 특별히 공을 파견했던 것이다. 공은 나라의 어려움 때문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마침내 의종(儀從 의전 시종)을 덜고 주전(廚傳 숙식과 거마)을 간략히 하였으며, 가마도 타지 않고 양산도 펴지 않았다. 음악과 기생, 술자리를 일체 물리치고 오로지 죽은 사람과 고아들을 위문하고 백성들을 보듬고 위로하는 일을 급무로 삼았는데, 군읍(郡邑)을 다니며 살핌에 더위와 비바람을 마다하지 않았다.
영남은 평소 소송 문서가 많았는데, 공이 사안을 처리할 때 항상 서리 오륙 명이 앞에서 읽고 판결을 청하면 그 자리에서 불러 주는 내용을 서리가 미처 다 적지 못하였다. 당시 피난 간 사람들이 영남에 가장 많았는데, 돌아갈 힘이 없어서 굶주림으로 죽어 갔다. 공이 주현(州縣)에서 살게 해 주고, 먼저 감영의 곡식 수천 석을 내어 진휼하였으나 부족하자, 수령들에게 녹봉을 덜도록 설득하고 지역 사람들에게 나누어 쌓아 놓도록 권하였으며 또 조정에 청하면서 1개월 동안 지속적으로 진휼하였다.
죽어서 고향으로 돌아가 묻을 수 없는 경우에는 고을에 명하여 차례대로 일꾼을 주거나 혹 우마차로 보냈고, 가난하여 염습을 할 수 없는 경우에는 관과 수의를 마련해 주었다. ‘영남의 짐꾼을 고생시킨다[嶺傍苦擔夫]’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공이 말하기를 “효자가 부모를 잃고 머나먼 타향에서 곡을 하고 있는데 태연히 보고 구하지 않는 짓을 나는 차마 하지 못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수송하는 길목에 있는 고을의 다른 공물도 크게 견감해 줌으로써 이들을 보상하였다. 이렇게 해서 이에 힘입어 살아나거나, 이에 힘입어 돌아가 묻힌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공은 해안을 방어하다가 전사(戰死)하거나 도고(逃故 도망치거나 사망함)로 인해 그저 빈 장부만 안고 있다고 판단하고, 도내에 있는 수군(水軍)의 군적(軍籍)을 합쳐 열람하여 도망치고 빠진 인원을 모으고 보충하고는 개정하여 나누어 방어를 맡겼다. 이전처럼 포를 거두고 있는 폐질(廢疾), 노인, 시정(侍丁), 출신(出身)을 제외시켜 나라의 큰 신뢰를 보존하고, 수자리 서는 군졸에게 필포(匹布)와 여정(餘丁)을 더 지급하도록 청하였다. 또 좌도(左道)의 양전(量田)한 것이 치우치게 무거웠으므로, 1만 결을 줄여 여러 고을에 고르게 나누어 주도록 청하였다.
중국 백성으로 도망친 자들이 각 도에 흩어져 살고 있었는데, 오랑캐가 사람을 보내 수색하게 하였다. 조정에서는 어길 수가 없어서 각 도로 하여금 잡아 보내도록 했다. 공이 비밀리에 보고하기를 “오늘날 국가는 참으로 면목이 없이 천지(天地)에 서 있는데, 하물며 그 유민(遺民)을 잡아 보낼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영남에 있던 자들만 모면하였다.
공은 ‘나라가 뒤집어져 수치를 갚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마침내 밤낮으로 노력하면서 도망병을 베고 빠진 인원을 보충하였으며, 약한 군사는 도태시키고 정예병을 뽑았으며, 무기를 수리하여 정선(征繕)에 대비하였다. 사람을 만나면 늘 말하기를 “망한 나라의 대부(大夫)는 살아서 숨 쉬는 것 또한 구차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올린 하정(賀正) 전(箋)에 “거(莒) 땅에 있던 마음을 잊지 마십시오. 지난해 오늘입니다. 존주(尊周)의 의리를 더욱 돈독히 하소서. 하(夏)나라 역법으로 새로운 봄입니다. 주상께서 치욕을 당하셨는데 저희는 구차하게 살고 있으니, 신의 죄는 죽어도 마땅합니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세상이 온통 어지러우니 공연히 계절이 여러 번 변하는 데 놀라고, 쓸개를 매다는 일에 여전히 성상의 뜻이 더욱 견고하기를 축원하나이다.”라고 하였으니, 마음속에 보존한 바를 알 수 있다.
공이 전후로 호남과 영남을 다스린 것이 몇 해 동안이었는데, 이 무렵 나라에 일이 많았으므로 영남과 호남의 정치에 공은 최선을 다하였다. 공은 총명하여 서리들이 감히 속이지 못하였고, 복잡한 정무를 처리할 때면 사람들은 홍성민(洪聖民) 뒤로 공에 비할 사람이 없다고 칭찬하였다. 공의 지휘를 거쳐 형편에 맞게 도모한 일은 오래도록 시행해도 폐단이 없었으며 대부분 영남의 고사(故事)가 되었다.
무인년(1638, 인조16) 봄, 모친의 병환으로 면직되어 돌아왔다. 공이 일찍이 전란을 우려하여 영남에 있을 때 어류산성(御留山城)의 형세가 장대하고 견고하여 방어소를 설치할 만하다고 눈여겨보았다가, 이때 이르러 상소하여 다음과 같이 수축하자고 청하였는데, 말하기를 “서북쪽에 사변이 발생하면 어가(御駕)가 머무는 곳으로 삼고, 남쪽 지방에 경보가 있을 경우 관방(關防)하는 곳으로 삼으십시오. 지금은 시세에 따르는 계책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지만, 멀리 내다보는 계획 또한 조금도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이해(利害)의 절박함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지만, 공적인 의리 또한 완전히 업신여겨서는 안 됩니다. 신이 지난번 남한산성에서 성상을 모시던 날에, 주상께서는 간곡하게 후일 치욕을 씻고 부흥하는 일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이 귀에 남아 신이 감히 잊을 수 없어 지금까지도 생각이 미치면 저도 모르게 통곡이 나옵니다. 다시 바라옵건대, 성명께서는 당시의 하교를 저버리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4월, 부제학으로 옥당에 있었는데, 당시 더욱 일시적인 편안함만 추구하고 중심 사업이 없음을 보고 공이 걱정스러워 동료들과 응지(應旨)하여 차자를 올렸다. 말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전하께서는 혼조(昏朝 광해군 대) 때 여항(閭巷)에 계셨을 때는 그저 한 사람의 왕손일 뿐이었지만, 종묘사직과 윤기(倫紀)를 염두에 두고 혼란을 바로잡아 반정(反正)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 만번 죽더라도 한 목숨을 돌아보지 않겠다는 계책을 내어 동지들을 규합하고 대의를 밝게 치켜들어 윤리가 다시 밝아지고 종묘사직이 다시 안정되도록 하셨으니, 중흥의 아름다움은 지금까지 어떤 일보다 훌륭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다름아니라 의리(義理)로 마음이 가는 바를 중심 잡아 두려움이나 막힘이 없었고, 이해를 따지는 사사로운 마음이 그 사이에 끼어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뜻과 기운이 강건하고 과단성이 있어 끝내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으니, 수백 명에 불과한 오합지졸로 하루아침에 온 나라가 청명한 업적을 가져왔습니다.
계해년(1623, 인조 원년) 이후로 전하께서 만일 당일과 같은 마음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천승(千乘)의 존귀함을 즐거움으로 여기지 않으면서, 오직 마음을 바로잡고 덕을 쌓으며,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데 전력하여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조금이라도 태만한 일이 없고, 충성스럽고 어진 신하들을 신임하여 그들의 직언을 즐겨 듣고 사의(私意)를 버리고 공도(公道)를 넓히며, 궁금(宮禁)을 엄하게 다스려 간사한 청탁의 길을 막고 절약을 숭상하여 부역을 줄이시며, 공리(功利)의 설에 현혹되지 않고 세금을 잘 거두는 신하를 높이 치지 않으시며, 기강을 바로잡아 형식적인 것들은 통렬히 개혁하고 군율을 엄히 밝혀 군정(軍政)을 정돈하셨다면, 10년도 안 되어 나랏일이 다스려지고 나라의 근본이 점차 튼튼해져서 형세가 저절로 공고해졌을 것이며, 성상의 어진 마음과 어진 소문이 널리 백성들에게 흡족히 전해졌을 것입니다.
외교 담판을 정밀하고 신묘하게 하여 이웃의 적을 두렵게 할 수 있다면, 비록 오랑캐를 쳐부수어 소굴을 소탕하지 못하더라도, 또한 나라를 보전하고 스스로 굳히기에 충분하였을 것입니다. 사람의 일을 이미 지극히 했다면 하늘의 마음도 돌이킬 수 있는데, 어찌 오늘날과 같은 변고가 있겠습니까. 이미 지나간 일은 탓하지 말라 하였으니 굳이 자세히 따질 것은 없지만, 지난 일을 잊지 않는 것은 뒷일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죄를 얻으면 어찌 변고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앞의 수레가 이미 뒤집혔는데, 어찌 오늘 그대로 다시 전철을 밟아서야 되겠습니까.
전하께서 변란을 당하신 뒤에 또한 필시 기왕의 일을 돌아보고 장래에 보탬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지금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마음에 품고 계신 바를 신들이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나랏일에 시행되는 것은 터럭만큼도 이전과 다른 점이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끝내 여기에 그치고 마실 생각이십니까? 아니면 장차 기대하는 것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까? 방향이 없는 신령한 조화는 헤아리기 어렵지만 형체가 있는 거친 행적은 쉽게 드러나는 법이니, 원근의 의혹이 괴이할 것이 없으며, 천심(天心)이 기뻐하지 않는 것도 어찌 이상하겠습니까.
남한산성을 나온 거조는 말하자면 기가 막히지만, 그런데도 핑계를 댈 수 있었던 것은 수모를 안고 치욕을 참으며 훗날을 도모하자는 것이었으니, 또한 하나의 부득이한 권도(權道)였습니다. 임금과 신하, 위아래가 사직과 함께 죽는 것 외에, 출성(出城)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지신명이나 조종조의 신령도 반드시 전하를 용서하셨을 것이며, 당시 전하께서도 또한 이로써 스스로 용서하고 이로써 스스로 기약하셨을 것입니다.
신들의 생각으로는, 전하께서 분명 강건한 뜻을 분발하여 이전의 행위를 한번에 뒤집어 성지(聖志)를 견고히 정하고 실행할 때마다 연(燕)나라 소왕(昭王)과 월(越)나라 구천(句踐)을 본보기로 삼았어야 하거늘, 세월은 쉽게 흘러 1주년이 지났습니다만, 전하께서는 뜻이 기운에 빼앗겼고 기운은 형세로 느슨해져서 목전의 안일을 추구하는 풍습이 아래로 흘러가고 쇠퇴하는 형세가 날로 심해졌습니다. 궁실과 먹고 입는 것이 전과 같으며, 곧은 선비들을 물리치고 아첨하는 무리들을 높이고 신임하는 것도 전과 같으며, 간언을 물리치고 자기 의견만 내세워 언로를 막는 것도 전과 같습니다.
심지어 공적인 의리는 전혀 없고 사사로운 이해에만 현혹되어, 천지의 법도를 하찮고 자잘한 것으로 여기고 사람과 사물의 떳떳한 법칙을 민멸되어 사라지게 내버려두기 때문에 천하의 큰 법도를 유지하고 온 나라의 인심을 위로할 수 없게 되었으니 어찌 대단히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 위로는 하늘이 노하고 아래에서는 백성들의 원망하니, 원근의 인정이 이 때문에 애통하고 답답하여 모두 뿔뿔이 흩어질 마음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한가한 시간에 이 마음을 점검하신다면, 과연 건순오상(健順五常)의 본체를 잃지 않으실 것입니다. 인(仁)은 백성을 사랑하는 것보다 절실한 것이 없고, 의(義)는 임금과 신하의 관계보다 중대한 것이 없으며, 수오지심(羞惡之心)은 또한 그 하나의 단서입니다. 이 세 가지는 하늘의 이치가 발현되어 작용하는 것으로 민멸될 수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이 세 가지에 대해, 만일 하늘이 부여한 본성(本性)을 보전하여 터럭만큼도 허위가 섞이지 않고 자강불식(自強不息)하면서 훗날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면, 삼전도(三田渡) 단 아래에서 절했던 일은 굴욕이 되지 않을 것이고, 표전(表箋)을 올리고 신하라고 칭하는 것도 치욕이 되지 않을 것이고, 말을 낮추고 예물을 후하게 바친 것도 수치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황천(皇天)과 조종(祖宗)께서도 더욱 돈독히 돌보아 주실 것이고, 이 나라 신민(臣民)들도 더욱 간절히 사랑하고 모실 것이며, 천자께서도 밝은 식견으로 또한 반드시 우리를 용서해 주실 것이며, 한때 굽혔다가 만세도록 폄으로써 결국 영웅호걸의 사업이 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일시의 안일만을 훔치고 편안히 고식에 빠져 이적(夷狄)도 결국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대의(大義)도 결국 민멸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마음가짐과 일 처리, 호령을 내고 시행하는 일이 모두 전철을 밟으며 한결같이 구습을 따른다면, 천명이나 인심이 전하에 대해 더 이상 기대하지 않고 끝내 전하를 등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전하께서 아무리 치욕을 무릅쓰고 의리를 민멸하면서 구차하게 나라를 보존하려고 해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하늘이 차마 멀리 버리지 못하고 얼굴을 맞대고 명하는 것보다도 더 곡진하게 경계시켜 주니, 이는 성심(聖心)이 성(聖)이 될지 광(狂)이 될지 갈리는 분수령이자, 나라가 존속하느냐 망하느냐가 달린 계기인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마땅히 분발하여 일어나 나에게 있는 천성(天性)을 닦음으로써 저기에 있는 하늘을 되돌려야 합니다. 성심이 한번 바르게 되면 밝은 지혜가 비추는 바에 만 가지 이치가 밝게 드러나, 이치상 해야 할 것은 반드시 용맹스럽게 가서 힘써 행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반드시 간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칠 것입니다.
신 등이 여론을 듣건대, 성절천추(聖節千秋 황제 황후 생일)와 지원(至元 동지 정월) 두 명절에 전하께서 궁궐 뜰에 신위를 설치하고 예를 행하며 서쪽을 향하여 통곡하셨다고 하니, 신 등은 흠모하고 감탄하고 나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왕자(王者)가 될 수 있는 것이니, 진실로 이러한 마음으로 일을 행하면 무슨 성과인들 이루지 못하겠으며,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습니까. 치욕을 씻고 혼란을 안정시키는 데 어찌 옛사람만 못하겠습니까.
신 등은 또한 전하께서 칼을 어루만지고 손뼉을 치며 먼저 사람들에게 뭔가 하려는 모습을 보이셨으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전하께서 얼음을 안고 불을 쥐고 있는 마음을 풀지 말기를 바랄 뿐입니다. 언제나 이를 생각하여 성상의 뜻이 정해진 뒤에는 날마다 보필하는 신하들과 내정을 정비하고 외적을 물리칠 방책을 강론하여, 어떻게 하면 인재를 얻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백성을 편하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부세를 줄일 것인가, 어떻게 하면 병사를 훈련시킬 것인가, 하면서 오늘 한 가지 일을 실천하고 내일 또 한 가지 일을 실천하여 오래 축적하면서 바꾸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정직하고 성실하며 식견이 많은 선비를 얻어 경악(經幄 경연)에 두고, 강직하여 거침없이 직언하는 사람에게 대간(臺諫)을 맡겨, 늘 복심(腹心)과 이목(耳目)에 해당하는 벼슬을 사사로운 사람이 아니라 현명한 사대부에게 맡기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하면 나라의 형세는 저절로 높아질 것이고 조정의 기강은 저절로 정비되어, 조정의 모든 일이 저절로 조치되어 정치의 도가 이룩될 것이니, 이것이 중흥(中興)의 대강이고 자강(自強)의 핵심입니다.”
또 말하였다. “절의(節義)는 천하의 큰 법도입니다. 사람이 이것이 없으면 관을 쓰고 옷을 입었어도 짐승과 다름없고, 중국에 살아도 오랑캐와 같습니다. 옛날의 밝은 임금은 반드시 절의를 부양하고 장려했습니다. 절의에 목숨을 바친 진신(搢紳)과 변란을 당해 절의를 보전한 부인(婦人)에 대해서는 의당 정려(旌閭)하고 포상하는 전례(典禮)가 있어야 합니다. 또한 산성에서 의리를 떨친 신하들이 윤기(倫紀)를 부지한 것은 무너지는 세태를 격려하기에 충분하니, 의당 높이 장려하는 의리를 보여야지 너무 심하게 싫어하거나 야박하게 대하여 중외의 의혹을 불어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지난번에 일을 논한 신하를 포박한 것은 비록 형편이 부득이해서 그러했지만, 또한 성스러운 조정의 아름다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도리어 이를 능사로 여겨, 다른 의논을 하는 사람의 입을 위협하여 억제하고자 하셨습니다. 화란이 이미 지나갔는데, 지금 척화(斥和)를 주장한 신하를 뒤미처 죄주고 당시의 논의를 심하게 다스리게 되면, 전날의 의로웠던 명성까지도 아울러 자연 손상될 것이니, 지혜롭다고 하겠습니까.”
공이 전후로 여러 번 중대한 계책을 진달하여, 매번 주상에게 연나라 소왕과 월나라 구천이 했던 일을 스스로 노력하고, 일을 할 때면 관중(管仲)이 내정(內政)을 일으킨 뒤 군령에 맡긴 것처럼 겉으로는 그 모습을 보이지 말고 먼저 스스로 다스리기를 권하였다. 그 말은 항상 인주(人主)의 마음에 근본을 두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주상의 과실과 나라의 득실을 말할 때는 준엄하고 격렬하여 금기하고 피하는 일도 건드렸으니, 남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말들이 많았다. 상은 평소 공의 지극한 정성을 알았기에, 매번 너그럽게 용납하면서 받아들였다. 당시 김공 상헌(金公尙憲)이 국론(國論)을 거슬렀는데, 공격하는 자들이 날로 급격했으므로, 공이 그를 위하여 변론한 것이다.
얼마 있다가 대사헌 겸 예문관 제학으로 옮겼다. 당시 정승이 총재(冢宰 이조 판서)와 문형(文衡 대제학)을 공에게 맡기고자 하였다. 논의가 이미 정해진 뒤 그 의사를 넌지시 보였는데, 공은 평소 나아가려고 하지 않았고 또 시사(時事)가 크게 떠나는 것을 보고 마침내 시론의 잘못을 극력 배척하고 휴가를 청하고 곧바로 귀향하니, 대신이 그 뜻을 굴복시킬 수 없음을 알고 일을 결국 그만두었다. 김 판서 시양(金判書時讓)이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를 “사람들이 무슨 수를 쓰든 얻으려고 하는 것을 이공은 기미만 보여도 피하니, 공은 요즘 세상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가을, 이조 참판에 임명되었는데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또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남한산성에 있을 때, 전 판서 김상헌과 전 참판 정온(鄭蘊)이 중대한 의리를 보존하고자 죽으려 하다가 이루지 못한 실상을 목격하고는 마음으로 항상 탄복하면서 스스로 돌아보고 부끄러웠습니다. 일전에 차자 중에서 김상헌에 대한 일을 언급한 것은 실로 성스러운 조정이 절의를 부지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김상헌을 공격하기를 마치 색성 소인(索性小人)을 공격하듯 하고, 김상헌을 구원하는 자는 잇따라 죄를 받고 있습니다. 김상헌의 일은 과불급(過不及)을 논할 것도 없이, 수천 리 예의(禮義)의 나라에서 천조(天朝)를 위하여 의리를 지킨 자는 오직 이 두 신하뿐인데, 또 이어 심하게 죄를 준다면 어떻게 천하 후세에 변명하겠습니까. 만약 김상헌을 구원하는 죄를 논한다면 신이 실로 첫 번째이니, 홀로 모면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기묘년(1639, 인조17) 봄, 부제학에 임명되었고 대사성을 겸직하였다. 근래 일 가운데 부제학이 성균관을 겸직한 사람은 공과 정공 엽(鄭公曄)뿐이었다. 얼마 있다가 이조 참판으로 옮겼다. 공은 어머니가 늙었다는 이유로 누차 사직하며 돌아가 봉양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경이 모친을 서울에서 모시면 충과 효가 둘 다 온전할 것이다. 나랏일이 한창 시급하니, 경이 가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공이 또 사정을 진달하며 굳게 청하자, 상이 이윽고 말하기를 “경은 가서 병환을 돌보라. 모친을 서울에서 봉양할 수 없다면 경이 먼저 올라와서 내 기대에 부응하라.”라고 하였다. 공은 감격하여 몇 달 있다가 돌아왔다.
어전에서 선비를 기르는 방도에 대해 조목조목 진달하면서 옛날 삼과(三科)를 세웠던 것을 모방하여 80명까지 인원을 늘린 뒤, 대략 송나라 유학자처럼 학문을 권면하여 성취시키고, 옛 제도를 상세히 살펴 주현에서 가르칠 만한 수재(秀才)를 미리 선발하여 해마다 보내어 빠진 사람을 보충하도록 청하였다. 상이 그 조목을 국학(國學)에 내리고 이어 공에게 그 직책에 오래 있으면서 가르치라고 하였다.
겨울, 형조 판서에 발탁, 임명되었다. 공은 속리(俗吏)들이 일을 피하고 옥사를 농단하며, 문사(文士)라는 자들 또한 경박하여 직무를 살피지 않는 것을 미워했으므로 사무를 보기 시작하면서부터 새벽에 출근하여 저녁에야 일을 마쳤고, 하루 종일 판결하면서도 수고를 꺼리지 않았다. 사정과 법령을 참작하고 고려하여 조금도 실수하지 않으니, 정밀한 능력이 있다고 일컬어지는 문리(文吏)들도 모두 미치지 못하였다.
전례[故事]에 임금의 명을 받들어 진행되는 옥사는 하나같이 모두 주상이 직접 결정에 관여하였고, 명이 있지 않으면 담당 관리가 마음대로 논의할 수 없었다. 공이 앞장서서 그 규례를 깨고 여러 번 죄인에게 적용할 법조문을 논의하여 청하였으며, 반드시 법이 어떠한지 물어보았고 사정이 의심스러운 경우는 의복(議覆 의논하여 다시 주달함)을 두세 번 하였다.
혹 주상과 사사로운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은밀히 부탁한 경우라도 반드시 법에 따라 재판하였다. 궁노(宮奴) 중 법을 범한 자가 있었는데 대군(大君)이 사람을 시켜 청탁하자 공이 그 사람을 잡아 형벌을 주었다. 이 때문에 청탁이 문 앞에 이르지 못하였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대리(大理 의금부)에 적체된 죄수가 없어졌다.
경진년(1640, 인조18) 2월, 대부인(大夫人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다. 당시 어머니 봉양을 위해 고을을 청하여 여주(驪州) 목사가 되었는데 미처 부임하지 못한 상태였다. 공은 6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예법을 더욱 굳게 실천하여 병을 얻어 위태롭게 된 적이 여러 번이었다. 상례가 끝나고는 다리가 말라서 걸을 수 없게 되자 보는 사람이 안타까워하였다.
임오년(1642) 여름, 상례가 끝나고 바로 예조 판서, 대사헌에 임명되었는데, 모두 병으로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처음에 공이 매번 물러나 쉬려고 하였는데, 비록 상의 예우가 매우 융숭하여 감히 오래 떠나지 못하고 대개 두세 번 부르면 혹 한 번은 관직에 나왔지만, 그 마음은 즐겁지 않았다.
그리고 전후로 올린 상소문에 연호를 쓰지 않았는데, 이계(李烓)라는 자가 노중(虜中 청나라)에 있다가 죄를 얻게 되자, 노인(虜人)들이 잡아다 죽이고자 하였다. 그는 우리나라의 은밀한 일을 고해 바치고 요행히 죽지 않기를 바란 나머지, 공이 즐거이 벼슬에 나오려고 하지 않고 숭덕(崇德) 연호를 쓰지 않으며 마음이 항상 남조(南朝)에 있다고 말하였다. 청나라는 사신을 보내 공을 불러 진술을 받고, 결국 공을 잡아갔다.
12월, 공은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 판서 이명한(李明漢) 등과 함께 심양(瀋陽)에 이르렀다. 몇 달이 지난 뒤, 금(金)으로 면제받고 돌아가도록 허락하니, 계미년(1643, 인조21) 3월에 귀환하였다. 당시 청나라의 사정은 예측할 수가 없어서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는데, 공은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명이다.”라고 하였다. 상이 여러 번 백금(白金)을 하사하였고, 심양으로 떠날 때에는 또 겨울 추위를 막을 장비를 주었는데, 귀환하자 바로 부여로 내려갔다.
가을, 상이 편찮으시다는 말을 듣고 서울에 갔다가, 그대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공은 여러 고을의 수포(收布)에 이미 승척(升尺)을 정해 나누어 주었으나 중외의 담당 관리들이 마음대로 더 받고 있어 백성들이 명을 감당할 수 없으니 관리를 죄주고 제도를 다시 엄격히 하라고 청하였다.
또한 상례의 기강이 무너진 데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상기는 자식의 큰 윤리이고, 혼례는 교화의 기반입니다. 옛날의 성왕(聖王)이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이룰 때 반드시 이 두 가지를 먼저 하였습니다. 난리를 겪은 이래로 백성들의 풍속이 크게 무너지고 예속(禮俗)은 모두 사라져서, 최복(衰服)을 입고 흙덩이를 베개로 삼는 와중에도 혼례를 하여 아내를 들이면서도 태연하게 괴이한 줄 모르고, 비단과 주옥으로 최질(衰絰)과 대지팡이를 장식하고 술과 고기나 비린 음식, 구운 고기와 채식을 차마 한다면 마음에 편하겠습니까. 청컨대 지금부터 3년 안에 딸을 시집보내거나 아내를 얻는 경우 및 처자(處子)가 상중임에도 성혼(成婚)하는 경우는 제도를 정하여 엄금하십시오.”
또한 여러 궁가와 각 아문에서 둔전(屯田)을 광범위하게 점유하는 폐단을 논하며 일체 혁파하라고 청하였다. 상이 모두 따랐으나, 유독 둔전에 대한 사안은 윤허하지 않았다.
공이 또 아뢰기를 “무릇 천하의 일은 시행에 잘못이 있으면 고치기 어렵지 않고 행해져도 큰 폐해가 없습니다마는, 천심(天心 임금의 마음)이 발동할 때 만약 터럭만큼이라도 치우친 사사로움이 있게 되면 미세한 먼지가 눈에 들어가면 산악도 형체가 보이지 않듯이 그 폐해가 이루 말할 수 없게 됩니다. 공사(公私)의 구분은 기미가 매우 미미하지만 치란(治亂)의 판가름이 실로 여기에서 나누어집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신 등의 말을 소홀히 여기지 마시고 극기(克己)의 용기를 힘써 발휘하시어 그렇게 하겠다는 답변을 쾌히 내려 주십시오.”
얼마 안 있어 승진하여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당시 인조(仁祖)께서 오래 편찮았는데, 의원(醫員) 이형익(李馨益)이 요사스러운 술법을 진달하였고, 상이 그 말을 채용하여 연달아 불침[火鍼]을 시술하였고 또 여러 달 신하들을 접하지 않았다. 위아래가 걱정하고 허둥대었으나 감히 분명히 말하는 이가 없었다. 공이 나아가 아뢰기를 “병을 다스리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것과 같으니,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는 생민(生民)을 잘살게 하고 방본(邦本)을 공고히 하는 데 있는데, 그 근본은 정심(正心)과 극기(克己)에 달려 있습니다. 만일 혹 밤중에 군대가 쳐들어오면 부득이 간과(干戈 군대)를 사용하듯이, 병을 다스리는 방도 또한 그렇습니다. 진원(眞元)을 보호하고 조섭하며 기혈(氣血)을 소중히 배양하며, 기호나 욕심을 절제하고 음식을 신중히 함으로써, 수기(水氣)와 화기(火氣)가 서로 조화케 하고 영위(榮衛)를 소통시켜 모든 혈맥(血脈)이 순조롭고 오기(五氣)가 치우침이 없게 하되, 그 근본은 마음을 맑게 하고 욕심을 적게 하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성상께서 편치 않으신 이래, 근본을 다스리는 지론(至論)을 믿지 않으시고, 잘못된 얕은 술수로 만전의 효험을 거두려고 기대하여 뜨거운 불침을 여러 차례 옥체에 시술하셨습니다. 병환을 앓으신 지 10년, 병은 날로 더욱 심해졌으니, 그자의 실정이 탄로나고 기술이 궁색해져서 더 이상 덮을 수가 없는데도 여전히 그치지 않고 요행을 기대한 나머지 겨울을 지나 봄이 될 때까지 한기를 무릅쓰고 피하지 않았으니 이 또한 어찌 성명(聖明)께서 즐거워한 일이겠습니까. 분명 체울(滯鬱)이 극도에 이르러 사화(邪火)가 상승하고, 의혹이 생긴 나머지 온갖 괴이한 생각이 마음을 잡아매어 정신은 번거롭고 기운은 혼란스러워지자 일시의 괴로움을 감당하지 못하여 이 같은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원컨대 성명께서 명석함을 견지하여 사리를 밝히시며 정도(正道)에 거하고 사악함을 물리치시어 어서 불침을 정지하고 신이 말한 대로 마음을 맑게 하고 욕심을 적게 하는 것으로 병을 다스리는 근본을 삼으십시오. 그런 뒤에 널리 명의(名醫)를 모아 치료 방법을 상의하여 장기적인 효과를 거두십시오.
또한 기운이 울결하면 화(火)가 치솟고, 마음이 번잡하면 혈(血)이 타들어 가는 법입니다. 깊은 궁궐 겹겹이 쌓인 방에서 거의 사람을 접하지 않으시고, 좌우에서 모시는 사람들은 오직 시중드는 자들이기 때문에 강건한 양기가 왕성하지 못하고 나쁜 기운이 쉽게 타게 됩니다. 게다가 경기(驚氣)와 근심이 기운을 꺾고 번뇌가 마음을 녹이는데, 기혈(氣血)이 어떻게 손상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진원(眞元)이 어떻게 병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봄기운이 바야흐로 형통하고 날씨가 점차 화창해지고 있으니, 편전(便殿)에서 한가로이 계시면서 유신(儒臣)을 불러와서 번잡한 글을 제거하고 마음 가시는 대로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혹 경사(經史)를 토론하기도 하고 혹 치도(治道)를 묻기도 하신다면, 반드시 지기(志氣)가 개발되고 성정(性情)이 활짝 펴져 몸의 울체가 소통되고 쇠약했던 의욕이 진작되어, 질병을 제거할 수 있고 치도에도 또한 힘이 될 것입니다. 이 때문에 ‘안일하지 않음을 처소로 삼는다’, ‘한가히 여겨 향락에 빠지지 말라’는 말이 나라를 오래 누리게 하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상이 가상하게 받아들이고 그날로 불침을 정지하였다.
갑신년(1644, 인조22) 2월, 사신(使臣)이 되어 심양에 이르렀는데, 청나라가 공이 전에 죄를 지은 사람이고 비록 사면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정승으로 승진할 수는 없다고 하고, 마침내 다시 공을 동관(東館)에 가두었다. 물과 불을 며칠 동안 공급하지 않더니, 이윽고 부사(副使) 홍무적(洪茂績) 등에게 본국으로 돌아가 사신의 일을 보고하게 하고, 이어 뒤에 인질이 있는 관사로 옮기고서야 조금 너그럽게 대했다. 당시 김공 상헌(金公尙憲), 최공 명길(崔公鳴吉)이 모두 먼저 잡혀왔었는데, 공이 그들과 같은 관사에 머물렀다.
을유년(1645, 인조23), 청나라가 중국을 평정한 뒤에 연경(燕京)으로 천도하고, 대사면을 내린 뒤 인질을 돌려보내니, 세자(世子) 및 공경(公卿)의 인질과, 구류되었던 두세 명의 재신(宰臣)이 모두 귀환하였다. 3월, 공이 세자를 수행하여 서울에 도착하였다. 상이 인견하고 위로한 뒤 영중추부사에 임명하였다.
공은 두 차례나 이역(異域)에 구금되어 온갖 위험과 모욕을 겪었으나 얼굴빛과 말씨가 흔들리지 않았고 행동거지가 평일과 같았으므로 사람들이 어려운 경지라고 여겼다.
그해 7월에, 상이 갑자기 대신과 여러 재신을 내전(內殿)으로 불렀다. 당시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이미 세상을 떴고, 원손(元孫)이 아직 성장하지 않았는데, 강 서인(姜庶人)은 과실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고, 상도 편찮아서 오래 조회를 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하루는 재상을 불러 보았는데, 공이 부름을 받고 여러 공경과 함께 들어갔다.
상이 하교하기를 “원손은 어리고 나라는 이처럼 위태로우니, 내가 장성한 사람을 택하여 후사로 세우려고 한다.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하였다. 대신들이 차례로 대답하고, 공의 차례가 되었다. 공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기를 “세자인 적자가 정통을 잇는 것은 고금의 떳떳한 법도입니다. 법도를 지키면 아무리 어려운 위험에 처하더라도 유지할 수 있겠지만, 가벼이 임시방편을 쓰면 일이 크게 차서를 잃어 대부분 이 때문에 환난을 초래합니다. 이 때문에 신하의 의리는 상도[經]를 지키는 것을 정도로 삼고, 군주 또한 가볍게 권도(權道)를 논해서는 안 됩니다.
원손은 사람들이 기대한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하루아침에 바꾸어 버린다면 인심이 요동칠까 두렵습니다. 성상의 의도가 아무리 나랏일이 위급하다고 해서 장성한 후사(後嗣)를 택하고자 하시지만, 옛날부터 어린 나이에 후사를 이어 덕을 이루고 나라를 보전한 경우가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원손이 비록 어리지만 이미 취부(就傅)할 나이가 지났으니, 그 자질이 밝은지 어두운지에 대해서 밝으신 성상께서 어찌 모르시겠습니까. 원손이 만약 정말 불초(不肖)하다면 전하께서 의당 그 안 되는 실상을 말씀하시어 중외의 신료로 하여금 다 같이 성상의 종묘사직을 위한 계책을 알게 하신 뒤에 장성하고 현명한 사람을 골라 후사로 삼으면 될 것입니다.
지금 성상의 하교는 그 현부(賢否)는 언급하지 않으시고 단지 ‘어리다[幼小]’고만 말씀하시니, 어리다고 어찌 다 불가하겠습니까. 오늘 신하들은 오직 세자인 적자가 승계할 것이라는 것만 알고 바삐 등대하였거니와 떳떳한 법도 외에는 다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당시 이공 식(李公植)이 보양관(輔養官)이었다. 상이 이식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원손의 현부는 보양관이 알 것이다.”라고 하였다. 논의가 거의 정해져 갈 때, 공이 말하기를 “전하의 이번 거조가 만약 사사로운 총애 때문이거나 혹 참소로 폐치(廢置)하는 것이라면, 신이 아무리 병들고 보잘것없는 몸이지만 대신의 뒤를 따르고 있으니 어찌 죽음으로 쟁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전하께서 종묘사직을 위해 후사를 택하고자 하시니, 이는 신이 감히 애써 쟁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병술년(1646, 인조24) 봄, 강 서인(姜庶人)의 옥사가 일어났다. 처음에 임금이 드실 반찬에 독이 들어 있어서 상이 내옥(內獄)에서 다스리게 했다가, 나중에 그 옥사를 의금부에 내렸다. 공이 대신으로서 국옥(鞫獄)에 참여했는데, 진술이 조 서인(趙庶人)과 연루된 것은 추국청(推鞫廳)에서 모두 삭제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추국청의 고사(故事)에 죄인의 진술은 보태거나 삭제할 수 없다.”라고 하였으나, 중론(衆論)이 듣지 않았다.
옥사가 갖추어진 뒤, 상이 대신과 공경을 빈청으로 다 불러 엄한 유지(諭旨)를 내리고 이어 강씨의 죄를 바로잡으라고 재촉하였다. 공이 대신들과 은혜를 온전히 하라는 말로 계를 올리며, 당 태종(唐太宗)이 승건(承乾)을 처리한 일을 인용하여 세 번 계를 올렸으나, 상의 비답은 더욱 준엄하였다. 영의정 김공 류(金公瑬)가 먼저 엄한 유지로 배척받고 떠났고 공은 다른 대신과 궐문 밖에서 대죄하였다. 상이 더욱 진노하여, 비답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대궐문으로 물러난 대신 등에게 죄를 묻고 그때 반수(班首)가 누구인지 물었다. 당시 공은 위차(位次)가 제일 높았으므로, 결국 공의 관작을 삭탈하고 문외출송(門外黜送)하라고 명하였다.
공이 한강 밖으로 나가 명을 기다렸는데 10여 일 있다가 이전 일을 가지고 절도(絶島)에 유배시키라고 명하여, 결국 진도(珍島)에 귀양 갔다. 3월, 바다를 건넜는데 또 위리안치를 명하였다. 당시 상의 분노를 예측할 수 없어 신하들 가운데 감히 공을 위해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공은 귀양 간 뒤에도 환란을 걱정하지 않고 매번 말하기를 “임금을 섬길 때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으면 되지, 화복(禍福)은 운명이다.”라고 하면서, 서적을 보거나 자제들을 가르치는 일로 낙을 삼았다.
무자년(1648, 인조26) 3월, 북쪽 땅으로 옮기라고 명하니, 처음에 경성(鏡城)에 유배시키려고 했다가 특명으로 삼수(三水)로 옮겼다. 공이 3년간 귀양살이를 했고, 또 남쪽에서 북쪽으로 옮겼지만, 비록 집안사람들도 공이 감정을 내색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 뒤, 매번 상이 구언(求言)할 때면 공이 충성을 다하다가 죄를 얻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김 상공 상헌(金相公尙憲) 또한 차자를 올렸는데, 말하기를 “이모(李某)는 지성으로 임금을 사랑합니다.”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대신은 전하의 고굉(股肱)인데, 전하께서 의심하십니다.”라고 하였는데, 상이 모두 살피지 않았다.
기축년(1649, 인조27) 5월, 인조대왕이 승하하였다. 공이 귀양지에서 소식을 접하고 놀라 통곡하기를 아침저녁으로 여러 날 하다가 병을 얻어 위독해지니, 감사가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공은 매번 진덕수(眞德秀)의 〈사상표(謝上表)〉 가운데 “아직도 선실(宣室)의 자리에서 앞으로 나가기를 바랐건마는, 홀연 정호(鼎湖)의 활이 떨어짐을 애통해합니다.”라는 글을 외우면서, 문득 오열하며 눈물을 흘렸다.
효종(孝宗)이 처음 즉위하여 비로소 위리안치에서 풀렸는데, 이는 선왕(先王)의 유언이었다고 한다. 7월, 김공 상헌(金公尙憲)이 말하기를 “공은 죄도 없이 오래 귀양 가 있었으니, 급히 소환하여 인심을 수습하고 선비들의 기대를 위로하고 또 하늘의 노여움을 풀어야 합니다.”라고 하니, 상이 아산(牙山)으로 양이(量移 벌을 낮추어 이배(移配)함)하였다.
경인년(1650, 효종1) 1월, 대신의 계로 풀려 돌아왔다. 당시 김 상공(金相公 김상헌)이 주상 앞에서 있다가, 일어나 절하고 하례하기를 “주상께서 장차 사직을 부지할 사람을 기용하여 오게 하였으니, 신이 감히 경하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공이 서울에 와서 곡하고, 장차 백강(白江) 옛집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당초 조정에서 성지(城池)가 정비되지 않아 비상시에 믿을 데가 없는 것을 우려하다가, 동래 부사(東萊府使)가 보고한 왜(倭)의 소식을 이유로 성지를 정비하고 무기를 수선하게 해 줄 것을 청(淸)나라에 요청하였다. 당시 후계 임금이 새로 즉위하여 사태가 전날과 달라지자, 청나라 사람들이 원래부터 의심하고 있다가 이런 보고를 받자 마침내 우리나라에 다른 뜻이 있다고 의심하였으므로 사신을 몇 명 보내와 그 단서를 문책하였다. 조정에서는 놀랍고 두려워 장차 대군이 쳐들어오리라고 생각했다.
상이 영의정 이공 경석(李公景奭)을 파견하여 의주(義州)에서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여 사죄하게 하였다. 영의정이 나간 뒤 도성 사람들은 더욱 술렁거렸다. 우의정 조공 익(趙公翼)이 계(啓)하기를 “시사가 한창 위급하니 이모(李某)를 기용하십시오.”라고 하니, 상이 허락하고 그날로 영중추부사에 임명하고 서둘러 오라고 전지(傳旨)를 내렸다.
공이 양근(楊根 경기도 양평(楊平))에 도착했을 때 부름을 받고 들어와 사은하였다. 상이 바로 인견하여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오늘 경을 기용한 것은 선왕의 뜻이다. 나랏일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공은 날마다 조정에 나와 함께 시국의 어려움을 구제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울면서 사은하였고, 입시한 신하들 모두 감동하였다.
3월, 이공 경석을 대신하여 영의정이 되었다. 처음에 상이 즉위하자 권력을 장악했던 옛 정승이 죄를 입고 쫓겨났다. 김공 상헌이 정승이 되어 맨 먼저 남다른 예우를 받았고, 김공 집(金公集)은 이조 판서가 되었으며, 그 나머지 두세 명의 초야에 있던 현자들이 대각(臺閣)에서 벼슬하게 되자 사림(士林)들이 서로 경축하며 훌륭한 정치가 이루어지기를 모두 기대하였다. 공은 당시 귀양 중에 있었으므로 시의(時議)가 공을 기용하는 것이 급하다고 말했기 때문에 진언하는 대소 신하들이 모두 공을 언급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사태가 중도에 변하여 비상한 기미가 은근히 발동하자 사류(士類)가 서로 잇달아 물러가고, 공이 들어가 정승이 되었다.
공이 정승이 된 뒤 청나라 사신이 관사에 머물면서 성지(城池)에 대해 힐문하며 한창 다그쳤고 또 왕녀(王女)나 왕의 누이와 혼인을 맺으려고 하였다. 전후로 찾아온 사신 10여 무리가 또 유언비어를 퍼트렸고 간혹 사류를 얽었으므로 온 나라가 소란스러웠는데, 응접하고 처리하는 것이 하나같이 공의 손에 달린 상황이었다. 공이 조용히 처리하면서 성색(聲色)이 동요하지 않았고 행동거지가 안정되었으므로, 상하가 믿고 편안하였다. 한창 극성인 적의 노여움을 미봉하고 안으로는 한창 야기되는 국론(國論)을 진정시키니, 이로써 인심이 크게 안정되었다.
공은 ‘주상이 새로 즉위하였고 춘추(春秋)가 한창이신데 나라는 다사다난하고 조정의 의논은 화합되지 않으니, 먼저 상의 마음을 바로잡되 지극한 말과 핵심적인 도를 말씀드려 그 근본을 바로잡고 사류(士類)와 협력하여 함께 나라를 구제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매번 진대할 때마다 강학하여 이치를 밝히고, 현자를 가까이하고 간언을 받아들이며, 성심을 다해 아랫사람을 거느리고 백성들을 다친 사람처럼 보며, 절약을 숭상하고 사사로운 청탁을 막으며, 좋아하고 싫어함을 공정히 하고 시비를 밝히라는 등의 말을 지성으로 알려 드렸다. 나와서 신료들과 말할 때는 함께 힘쓰고 공손함을 합하는 것이 임금을 섬기는 첫 번째 의리라고 하였으니, 위아래가 모두 공의 미더운 성의를 신뢰하였다.
공은 백성을 구제하는 정치를 더욱 급선무로 여겼다. 당시 기근이 든 데다 청나라 사신이 자주 왔기 때문에 주현(州縣)의 능력이 고갈되었고 백성들은 살아갈 희망이 없었다. 공이 상께 청하여 재곡(財穀)을 상평청(常平廳)에 모으고 고관에게 주관하게 하여, 청나라 사신이 올 때마다 기일에 앞서 고을에서 맡아 제공할 비용이 얼마인지 계산하여 그에 해당하는 값을 지급하고, 닭 한 마리, 물고기 한 마리도 관에서 스스로 마련하고 백성에게서 걷지 않는 것을 상례로 삼고자 하였다.
또한 강도(江都)와 남한산성(南漢山城)의 곡식 수천 곡(斛)을 풀어 경기 백성의 종자(種資)로 지급하고, 지부(地部 호조)의 상평금(常平金) 수천 냥을 내어 시민(市民)에게 혜택을 주며, 관서(關西)의 군포(軍布) 수만 필을 내어 양서(兩西 평안도와 황해도)의 참역(站役 역참에서 하는 부역)에 나누어 보조하고, 경기 역참의 사례처럼 해서(海西)에서 관향미(管餉米) 수만 곡을 내어 5년 한도로 계산하여 역참에 비용을 지불하기를 청하였다.
가을이 되어 양서 지방에 흉년이 들자 그 세금을 견감하였다. 도망쳐 떠도는 백성이나 노약자의 가족과 이웃에게 징수하는 행위를 제거하고, 군보(軍保)가 해야 하는 역포(役布) 중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을 줄였으며, 내구마(內廐馬)와 공장(工匠)의 숫자를 줄였다. 호남(湖南)의 전선(戰舡)을 통영(統營)에 보태어 방어하게 하는 것이 온 도에 큰 폐단이 되었으므로 또한 강력히 청하여 혁파하였다. 이로 인해 이해에 극심한 기근이 들었으나 각 도의 백성들이 모두 소생할 수 있었다.
당시 중외에 적체된 옥사가 많았다. 공이 차자를 올려 “바야흐로 봄이라 생명이 피어나고 양덕(陽德)이 한창 형통합니다. 천의(天意)와 인심은 본디 하나의 이치이니 하늘을 몸 받고 계절에 순응하는 것이 왕정(王政)에서 우선 할 일입니다. 근래 듣건대, 의금부에 잡혀온 죄수가 감옥에 넘쳐나고, 지방의 옥송(獄訟) 또한 많이 적체되었다고 합니다. 중외의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속히 재결하십시오. 이어 생각건대 덕을 밝게 하고 형벌을 신중히 하여, 서옥(庶獄)과 서신(庶愼)에 대해 감히 알려고 하지 않은 것은 문왕(文王)이었습니다. 만일 삼척(三尺 형벌)이 나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고 천하의 평온을 사사로운 희로(喜怒 감정)로 한번에 기울어지게 한다면, 백성들은 손발을 둘 곳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은 또한 나라에서 재물을 모을 때 경로가 다양한데도 산림과 천택에까지 모두 취하는 것을 우려하여, 아뢰기를 “지금 나랏일이 매우 위급하고 평소 비축한 것은 거의 고갈되었는데, 담당 관리는 단지 경비만 걱정할 뿐 선왕의 차마 하지 못하는 정치에는 생각이 미칠 겨를이 없습니다. 임시로 설치한 아문(衙門)까지 제각각 의견을 내어 재곡(財穀)을 모으는 데 힘써 산림과 천택에서 작은 이익까지 모조리 취하니 사방의 백성들이 생업을 잃어 원성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나라의 존망이 기계나 재화의 부족에 달려있다고 보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주현(州縣)의 조적(糶穀 환곡 운영)에서 모곡(耗穀)을 아울러 수취하는 것을 우려하여 대계(臺啓)를 계기로 파할 것을 강력히 청하며 말하기를 “나라에서 정치를 하는 요체는 주현에 반드시 여력을 갖추게 한 뒤에야 마비되는 근심을 면할 수 있고, 시의에 맞는 방도를 시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옛날에는 부세의 정공(正供)도 오히려 100% 다 채우도록 독촉하지 않고 100%에서 10%를 줄이는 법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대(五代)의 어지러운 시대에 전적으로 부국강병을 숭상하였으면서도 이를 시행한 일이 있었고, 송(宋)나라에 와서 모두 이 법을 준수하였으나, 나라에 일이 많아진 남송(南宋) 이래 법도가 모두 무너졌고 이 법 또한 폐지되자 주자(朱子)는 회복하자고 청하였습니다. 사간원에서 모곡을 포기하자는 논계는 손익(損益)의 의리에 맞습니다. 다만 조정에서 견감한다고 해도 수령이 제멋대로 낭비한다면, 나라에는 창고에 손실이 나는 폐단이 있을 것이고 백성들은 혜택을 입는 실질이 없을 것입니다. 모곡은 별역(別役)을 보완하고 포흠을 채우며 흉년을 구제하게 하고, 연말에 감사로 하여금 그 문서를 비교하게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공은 또 관사(官司)가 크고 작은 일로 서로 구애되어 체통이 크게 문란해지는 것을 우려하였다. 이에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반드시 먼저 체통을 세운 뒤에 강목(綱目)에 질서가 잡혀 이윽고 업적들이 이루어집니다. 삼공(三公)이 육경(六卿)을 통솔하듯이, 육경은 백사(百司)를 통솔하며, 백집사(百執事)는 분주히 직무를 수행하고, 승정원은 봉박(封駁)의 직임을 맡고 대간은 규정(糾正)의 책임을 주관합니다. 임금은 대공지정(大公至正)한 도로 위에서 비추어보면서 대소 신하들이 각각 그 직무를 다하고 서로 침탈하지 않게 해야 치화(治化)가 흥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임금은 건극(建極)의 자리에 있으므로 반드시 거조가 마땅함을 얻어야 하며 형벌과 상이 지나침이 없어야 하고, 궁궐을 엄격하게 다스리고 사사로운 청탁을 막으며, 언로를 활짝 열고 인심을 감복시켜, 터럭만큼도 그 사이에 사사로운 의도가 끼어들게 해서는 안 됩니다. 또 통상적인 규례는 걷어치우고 번거로운 형식은 쓸어버리며, 성실을 힘써 쌓아 이를 견지하여 용맹히 나아가는 것이 새로운 정치의 급선무입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조정의 의논이 안정되지 못한데 상이 적절한 방도로 대처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여, 상에게 공명정대함으로 붕당(朋黨)을 타파하는 방도로 삼을 것을 권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붕당이 나라를 병들게 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오늘날 사대부 중 누가 붕당이 나쁘다는 것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그런데도 모두 색목(色目)으로 귀결됨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은 반드시 그들이 모두 당론(黨論)을 숭상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혹은 부형(父兄)의 영향에 따라, 혹은 친구와의 교유로 인해 한번 구별되고 나면 그 틀에서 몸을 뺄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드물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는 모두 70년간 대대로 전해 온 여론(餘論)을 계승한 것이기 때문에 옛날 군자는 붕(朋)이 되고 소인은 당(黨)이 되었던 것과 차이가 있습니다. 부형과 자손의 현불초가 반드시 다 같지는 않은데, 논의만은 대대로 똑같으니, 이 어찌 그 사이에 묵은 원한이나 깊은 분노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신은 늘 요즘의 붕당은 바로 투기하는 부인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가장(家長)이 수신(修身)ㆍ제가(齊家)의 근본을 다할 수 있다면, 집안의 도리가 바르게 되고 서로 다투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신하를 부리는 도리에도 솔선수범의 방도를 다하게 할 수 있다면, 백관들이 서로 본받아 공경하며 양보하는 풍조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옳은 것을 옳게 여기고 그른 것은 그르게 여기며 어진 이를 어질게 여기고 악한 이를 미워하며, 훌륭한 사람을 올리고 악한 사람을 쫓아내기를 한결같이 하늘의 법칙에 따르며, 좋아하고 싫어하며 주고 빼앗음에 있어 자기의 사심을 참여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당이나 붕을 둘 다 잊는 것이 최선이니, 양쪽을 다 잊으면 마음에 매이는 바가 없게 되고, 기뻐하고 노여워할 때 사물의 특성에 맞게 대하는 것이 제일이니, 사물의 특성에 맞게 대하면 나의 선입관이 개입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어진 이를 천거하면 당(黨)이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 아닌가 의심을 가지게 되고, 악한 이를 탄핵하면 자기와 당을 달리하기 때문에 공격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을 가지게 되어, 속이고 있지나 않나 하는 생각이 미리부터 성상의 마음을 얽매게 됩니다. 마음속의 본체(本體)가 일단 가리게 되면 어떻게 느슨하고 급한 것을 재결하고 처리하여 과(過)와 불급(不及)의 차이가 없을 수 있겠으며 거조마다 마땅함을 얻어 사방 백성의 마음을 열복시킬 수 있겠습니까.
틈을 엿보는 자들이 교묘한 수를 부리고 임금의 뜻에 영합하는 자들이 자기의 편리를 도모하여, 조용히 하려고 하면 더욱 시끄럽고 제거하려 하면 더욱 치성하게 되는 것이 요즘에 이미 나타난 현상입니다. 머리를 돌려 궤도를 바꾸지 않으면 그치게 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천도(天道)는 지극히 참되기 때문에 만물이 모두 형통하고, 임금이 지극히 공평하게 하기 때문에 만민이 법으로 삼는 것입니다. 《서경》에 ‘백성들이 사사로운 무리를 짓지 않고 관원들은 아첨하고 빌붙는 악덕이 있지 않은 것은 오직 임금이 표준을 세우기 때문이다.[民無有淫朋, 人無有比德, 惟皇作極.]’라고 하였는데,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당시 관학(館學) 선비들이 문성공(文成公)과 문간공(文簡公)의 문묘종사를 청하였다. 상이 엄한 전지를 내려 배척하였고, 그 사이에 의견을 달리하며 공격하는 자도 있어서 선비들이 모두 성균관을 비우고[空館] 떠났다. 공은 선비들의 원기를 꺾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옛날 성제(聖帝)와 명왕(明王) 및 우리 조종조의 열성(列聖)께서 선비를 대하는 도리는 늘 너그럽게 용납하였고 자신을 굽히는 것을 욕이라고 여기지 않았으니, 어찌 장보관(章甫冠)을 쓰고 공씨(孔氏 공자)를 외우는 자들이라고 해서 자연스럽게 도에 맞는 사람들이었겠습니까. 그 사이에도 분명 뜻만 크고 지나친 무리들이 있었지만, 오늘날 하듯이 엄한 말로 배척하고 문을 닫아 거절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전하의 넓은 도량으로 이 무리들을 용납하는 것이 어찌 백 명, 천 명에 그치겠습니까. 원컨대 전하께서는 조종조의 고사에 따라 특별히 근신(近臣)을 보내 그들이 생각을 고치도록 타이르십시오.”라고 하니, 상이 공의 말에 감명을 받아,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유생들을 타이르니, 유생들이 모두 성균관으로 나왔다.
공이 전후로 건의한 일이 매우 많았는데, 기강(紀綱)과 본원(本原)의 영역을 더욱 시급하게 여기고 아래로 세도(世道)를 우려한 것이 모두 이런 종류였다. 또 인재는 나라를 세우는 근본이므로 더욱 사랑하고 아껴 불러 모아야 한다고 여겨, 상에게 반드시 재야에 있는 현사(賢士)를 초치하여 좌우에 둘 것을 권하였다.
유계(兪棨) 등이 시호를 논하다가 죄를 얻었을 때 공은 글을 올려 구원하였다. 그 뒤 상이 또 국문하려고 했을 때, 공은 면대하여 죄상이 없음을 아뢰었으나, 상이 오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공이 아뢰기를 “신이 재상(宰相)으로 있으면서 무고한 사람 하나 구할 수 없으니, 또한 무슨 면목으로 다시 조정에 들어오겠습니까.”라고 하니, 상이 비로소 허락하였다.
대사헌 조석윤(趙錫胤)이 상의 뜻을 거슬러 파직되었을 때, 공은 ‘조석윤은 충직하고 강직하며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이 있으니, 한마디 말이 전하의 뜻을 거슬렀다는 이유로 꺾어 파직시켜 물러나게 하고 간쟁하는 길을 막아서는 안 된다’라고 생각하고, 계를 올리니, 그의 관직을 돌려주었다.
당시 김 상공 상헌(金相公尙憲)이 지방에 있었다. 공이 상에게 청하여 노공(潞公)의 고사에 따라 중대한 논의가 있을 때는 반드시 자문을 구하라고 하였다.
일찍이 입대(入對)하였을 때, 대사간 민공 응형(閔公應亨), 대사헌 이공 후원(李公厚源)과 함께 입시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이 두 신하는 모두 조정에서 기대하는 인물로 양사(兩司)의 장관으로 있으니, 성명께서 가까이 믿으시고 의견을 들으십시오.”라고 하였다.
원공 두표(元公斗杓)와 이공 시방(李公時昉)은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이때 같이 주상 앞에 있게 되었다. 공이 또 상에게 말하기를 “두 사람은 모두 공신(功臣)이니 나랏일을 함께 구제해야 하는 사람입니다만, 작은 틈 때문에 공적인 의리에 지장을 주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원컨대 상께서 염인(廉藺)의 의리로 책망하시어 유감을 풀고 한마음이 되게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홍공 무적(洪公茂績)은 평소 공과 친한 친구였는데, 사헌부에 재직하면서 어떤 일 때문에 공을 비판하게 되었다. 공이 상소하여 대죄하면서 아뢰기를 “풍상을 겪어 꺾인 뒤에도 지조를 변치 않고 일을 만나면 거침없이 처리하는 것은 당개(唐介)도 어려운 일인데, 이 사람은 하고 있으니, 어찌 가상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니, 상이 공의 의견을 훌륭하게 여기고, 홍공을 잘 예우하였다.
조 상국 익(趙相國翼)은 당초 공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함께 상부(相府 의정부)에 있으면서 공이 하는 일을 보고 기뻐하더니 뒤에는 성심으로 심복하여 결국 서로 흔연히 나랏일에 협력하였고 왕실을 함께 도왔으므로, 세상에서는 이 때문에 두 공을 함께 칭찬하였다.
또 이응시(李應蓍)와 장응일(張應一)은 직언을 한다는 이유로 맨 먼저 극선(極選)에 선발하였다. 하나의 재주와 선행이라도 있는 인물이면 또한 반드시 서둘러 천거하여 관직에 진출시켰다. 공이 천거하여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 전후로 수십 명이었다.
공은 매번 ‘보상(輔相 정승)의 직임은 의당 행해야 할 일을 진헌(進獻)하고 행해서는 안 되는 일을 폐지하도록 임금에게 건의함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사안이 아무리 적어도 시정(時政)과 군덕(君德)에 관련된 것은 반드시 의견을 다 아뢰었는데, 은밀히 쟁론하여 간언하기도 하고 내놓고 글을 올려 공개적으로 논의하기도 하였다.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얼굴에 근심이 서리고, 수십 번이라도 청하여 마지않았다.
상이 평소 공을 중시하여 매우 의지하고 신뢰하였기에 진달하는 말은 모두 굽히고 따르며 말하기를 “성심과 충애의 말을 신중히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남을 구원할 때에, 상이 대단히 분노하여 다른 사람이 간곡하게 간해도 들어주지 않던 일이라도 공이 한 번 말하면 풀어졌다.
이해 겨울, 일이 있어서 해직을 청하였는데, 10여 차례를 아뢰었다. 상이 공을 매우 지극히 위로하면서 처음에는 “나의 기대는 시구(蓍龜)나 주석(柱石) 정도일 뿐만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그 뒤에 또 말하기를 “설사 나라가 편안하여 상서로운 조짐이 매일 나타날 때라도 경의 숙덕과 중망으로 재주와 학문을 겸비하였으니 반드시 정승이라는 중요한 자리에 두어 성취를 기다려야 할 터인데, 하물며 오늘날 천재(天災)와 나랏일이 어떠하며, 크게 위임하는 정성이 또한 어떠한가. 이는 진실로 이른바 나라가 혼란할 때 훌륭한 재상을 생각하는 상황인 것이다.”라고 하고,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병이 나자 의원과 약물을 계속 보내 주었고 때로 사람을 보내 기거를 물었다. 일은 모두 집으로 와서 자문을 받아 결정하였으니, 은혜와 예우가 다른 정승에게 했던 바와 달랐다.
당시 청나라가 사신을 보내 이공 경석(李公景奭) 및 조공 경(趙公絅)에게 죄를 더하고자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대신으로 나랏일을 도모하면서 적국 사람들이 생사여탈을 마음대로 하는데도 내가 힐난하지 못한다면 어찌 나라를 다스리겠는가.”라고 하고, 마침내 사신을 보내 변론을 진달했다. 변론한 글이 도착하자 청나라의 섭정하는 자가 과연 화가 나서 말하기를 “이 주문(奏文)을 주도해서 만든 자가 누구냐?”라고 하였다.
당시 항복한 포로로 용사(用事)하는 자가 우리나라 설인(舌人 역관)과 서로 표리가 되어 청나라 사신이 올 때마다 함께 일을 하였다. 대소 신하들은 그가 마음대로 전단하면서 많은 뇌물을 요구하는 것을 보았고 묘당에서도 모두 은밀히 후대하여 서로 결탁하였는데, 공이 의정부에 있고부터 사사로이 안부를 묻지 않자 그 사람이 깊은 한을 품었다. 이로 인해 공이 전에 심양에 구속되었던 사실을 들어 정승 직임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고 사신을 보내 공을 금고(禁錮)시켰다.
신묘년(1651, 효종2) 봄, 공이 결국 자리를 떠났다. 상이 공을 소견(召見)하고 눈물을 흘리니, 좌우에서 감읍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뒤 상이 조석윤(趙錫胤) 등에게 말하기를 “시사(時事)가 이 지경인데 영의정도 떠났으니, 이른바 좌우의 손을 잃은 듯하다는 것이다. 예부터 나라의 치란은 인재에게 달렸지만, 그 인재를 쓰고 버릴 때는 운명이 아닌 것이 없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장씨(臧氏)라는 사람이 어찌 나를 만나지 못하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내가 지금 정승 한 사람을 등용하지 못한 것이, 또한 어찌 그들이 그렇게 만든 일이겠는가. 하늘이 나로 하여금 우리나라를 잘 다스리게 하지 않으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차자를 올려 서추(西樞 중추부) 및 총재(摠裁), 여러 제조(提調)를 해직해 달라고 청하였다. 또 말하기를 “재해를 만나 돌아보며 삼가는 데는 덕을 닦는 것만 한 일이 없고, 인심은 복종시키는 데는 성의를 다하는 것만 한 일이 없으며, 우환을 막고 어려움을 구하는 데는 시책이 시의에 맞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 아니하여 하찮은 공리(功利)에 마음이 빠지고 거칠고 험한 환경에 뜻이 매여 오로지 방어적이고 신중함만 가지고 수없이 억측하고 의심하면서 총명을 과시하려는 생각으로 남의 은밀한 부분을 꼬집어 내어 아랫사람을 부리고 혼란을 그치게 하는 방도로 삼는다면, 마음만 수고롭게 날로 졸렬해져 일의 공적은 이루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실과 거짓이 난무하고 병폐가 수없이 발생할 것입니다. 임금의 마음이 제자리를 옮김에 따라 부정한 길이 잇달아 열려 마침내 어지러워 망하기에 이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당시 주상이 자못 총명함을 과신하여 많은 신하들이 사실이 아닌데도 죄를 얻은 경우가 있었다. 공이 이를 매우 우려하여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오히려 이렇게 언급한 것이다. 상이 답하기를 “경의 상소 내용을 살펴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도다. 상소 가운데 권면하고 경계한 말은 모두가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니 내 어찌 차마 경의 말을 저버리겠는가.”라고 하였다. 상이 이미 강포한 적에게 구애를 받는 상태여서 공을 끝까지 등용하지는 못했지만 권우(眷遇)가 시들지 않아 기회가 되면 불러 보아 득실에 대해 자문을 받았다.
계사년(1653, 효종4) 여름, 강릉(江陵)에서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는 이변이 일어나자, 상이 신하들을 불러 재이를 막을 대책을 물었다. 공이 부름을 받고 입대하여 다스림의 요체를 힘써 진달하고, 또 공사를 일으켜 백성들을 동요시키는 폐단을 언급하였다. 물러난 뒤에 급하게 들어와 뵙느라 미처 다 아뢰지 못한 것을 마침내 수천 글자의 차자를 올려 조목조목 진달하였다. 내용은 성심(聖心)ㆍ성학(聖學)ㆍ제가(齊家)ㆍ효우(孝友), 종친을 도탑게 하는 일[惇宗], 정승의 임명[任相], 간언을 받아들이는 일[納諫], 성심을 확장하는 일[推誠], 아랫사람을 예로 대하는 일[禮下], 애민(愛民), 정무에 근면할 것[勤政]과 기강을 세우고[立紀網] 명기를 중히 여기고[重名器] 붕당을 없애고[去朋黨] 아첨을 멀리하고[遠讒佞] 형옥을 삼가고[恤刑獄] 교화를 밝히고[明敎化] 인재를 양성하고[養人才] 병정을 닦고[修兵政] 절검을 숭상하고[崇節儉] 신의를 중히 여기는 것[重信義]이었다.
그 내용은 천리와 인욕의 구분을 밝히는 것으로 정심(正心)을 삼고, 몸을 반성하여 의리의 당연함을 구하고 사안을 참고하여 득실의 계기를 징험하는 것을 강학(講學)의 요체로 삼았다. 제가(齊家)는 절검을 숭상하고 궁궐 안팎을 엄히 다스리려는 것이며, 종친을 도탑게 하는 일은 은혜와 의리를 돈독히 하되 사치하고 횡포를 부리는 습관을 방지하려는 것이었으며, 간언을 받아들이고 성심을 다해야 한다고 말한 부분에서 더욱 정성을 쏟아 피력하였다.
애민(愛民)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은혜를 베푸는 정사는 위에서 하는 것이기는 하나 봉행하는 책임은 실로 백성을 기르는 수령에게 달려 있습니다. 한 선제(漢宣帝)는 2천 석(二千石)이 나와 함께 다스린다 하였고 당 태종(唐太宗)은 영장(令長)의 이름을 병풍에 써 두고 늘 보았으니, 백성을 사랑하는 요체를 알았다 하겠습니다. 더구나 대읍(大邑)과 대도(大都)는 나라를 보호하는 곳입니다. 이를테면 호남(湖南)의 전주(全州)ㆍ나주(羅州)ㆍ영암(靈巖)ㆍ남원(南原)과, 호서(湖西)의 충주(忠州)ㆍ청주(淸州)ㆍ공주(公州)ㆍ홍주(洪州)와, 영남(嶺南)의 경주(慶州)ㆍ상주(尙州)ㆍ진주(晉州)ㆍ안동(安東)과, 기타 여러 도에는 각각 사무가 많은 요충지가 있으니, 적임자가 아니면 백성이 피해를 받을 뿐더러 불행히 변란이 있을 경우 어디를 의지하고 믿겠습니까. 이는 더욱 신중히 선임해야 할 것입니다.”
정무를 근면히 할 것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늘의 운행은 씩씩하여 쉬지 않는데 이를 체득해야 하는 임금이 조금이라도 끊어짐이 있으면 모든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 문왕(周文王)은 해가 기울 때까지 밥 먹을 겨를이 없었고, 상 탕왕(商湯王)은 어둑한 새벽에서부터 덕을 크게 밝힌 것이 어찌 의미 없는 일이겠습니까. 조무(趙武)가 진(晉)나라의 경(卿)인데도 해 그림자를 보며 안일을 탐하니, 군자(君子)는 그가 잘 마무리하지 못할 것을 알았습니다. 더구나 존귀한 임금이겠습니까. 《예기(禮記)》에 ‘장엄하고 공경하면 날로 강해지고, 안일하고 방자하면 날로 경박해진다.[莊敬日強, 安肆日偸]’라고 하였습니다.
임금은 궁궐 깊고 엄숙한 곳에 거처하며 부귀의 봉양을 극진히 받으니, 스스로 힘쓰지 않으면 안일함에 중독되지 않는 이가 드물 것입니다. 조종(祖宗)의 번성한 시대에는 임금이 종일 납시어 승지들이 번갈아 들어가 일을 아뢰고 공경(公卿)ㆍ근시(近侍)가 수시로 뵈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기(志氣)가 점점 강해지고 총명이 날로 나아질 뿐 아니라, 또한 인재를 익히 알고 이해(利害)에 더욱 밝아질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견문이 넓은 학자에게 힘입어 지혜를 더하고, 정직한 사람을 가까이하여 덕성(德性)을 도왔으니, 그 효과가 어찌 얕고 적었겠습니까.”
기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기강이 서는 것은 다른 데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군주의 마음이 공평하고 정대하여 조금이라도 사사로운 뜻이 나의 바른 법을 해치게 하지 않고 충현(忠賢)을 널리 선발하고 진심으로 맡겨서 크고 작은 일에 직무를 다하게 하여 이 법을 유지하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한 무제(漢武帝)는 형벌을 엄하게 하였으나 해내(海內)가 소란하였고, 수 문제(隋文帝)는 엄하게 다스리는 것을 숭상하였으나 천하가 더욱 어지러워졌습니다.
세상에서는 더러 법을 엄하게 하는 것을 가지고 기강을 논하기도 하지만, 고식적인 것을 가지고 인(仁)을 논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배도(裴度)가 당 헌종(唐憲宗)에게 말하기를 ‘한홍(韓弘)이 병든 몸을 수레에 싣고 나가 적을 토벌하고 왕승종(王承宗)이 손을 거두어 땅을 바친 것은, 어찌 조정의 힘이 그들의 생사를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겠습니까. 단지 조처가 마땅하여 그들의 마음을 감복시켰을 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다만 조치가 마땅하다면 어찌 기강이 서지 않을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제갈 무후(諸葛武侯)가 말하기를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은 모두 일체이니 선악을 상벌하는 것이 다르지 않아야 합니다.’라고 하였는데, 주자(朱子)가 여기에 이어 말하기를 ‘작은 촉(蜀)나라로도 그 가운데에서 스스로 공사(公私)를 분별하였으니, 이 때문에 양주(梁州)ㆍ익주(益州)의 반을 차지한 나라로서 오(吳)나라와 위(魏)나라 전역을 도모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요즈음에는 궁중과 부중의 구분이 판연히 둘로 갈라져, 사안이 궁액(宮掖)에 관계되고 옥사가 내간(內間 왕비나 후궁)에 관련된 것은 하나도 담당 관원에게 맡기지 못하니, 이것은 사사로운 뜻이 멋대로 행해질 조짐이고 인심이 복종하지 않는 큰 까닭입니다. 전하께서 성지(聖志)를 견고히 정하고 강단을 발휘하여 사사로운 은혜와 작은 어짊에 흔들리지 말고 구습과 잘못된 관례에 구애되지 않으시어, 먼저 내옥(內獄)을 파하시어 옥송(獄訟)을 한결같이 사구(司寇 옥송을 다루는 관원)에게 돌아가게 하고 궁척(宮戚)을 일제히 방헌(邦憲 나라의 법령)에 맡긴다면 기강이 엄숙해질 것입니다.”
인재를 양성하는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기재예장(杞梓豫章) 같은 아름드리 재목들은 하루아침에 자라는 것이 아닌데 높은 산봉우리에는 소나무, 잣나무가 많은데 근교에는 아름다운 나무가 없으니, 일찍 기르지 않으면 어떻게 성취하겠습니까. 동량이 될 재목은 갑자기 가져올 수 있는 것이 아닌데 큰 집이 무너지려 할 때에 버틸 만한 나무가 없고 썩은 그루와 약한 기둥이 번번이 나랏일을 망치니, 사직을 위하여 멀리 염려하는 사람이라면 어찌 미리 인재를 길러서 이 일을 담당하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옛날 송 태종(宋太宗)은 장제현(張齊賢)을 얻을 때 같은 방(榜)에 속한 사람 모두를 급제시켰으며, 한기(韓琦)는 소식(蘇軾)이 병이 났다는 이유로 시험 날짜를 미루었습니다. 옛날 현명한 군주와 위대한 신하가 인재를 아끼는 것이 으레 이와 같았습니다.
또 선조(宣祖) 시대에 이항복(李恒福)ㆍ이덕형(李德馨)ㆍ신흠(申欽)ㆍ이정귀(李廷龜) 등은 모두 성상께서 간택하여 낭서(郞署)에서 발탁하였습니다. 김우옹(金宇顒)ㆍ유성룡(柳成龍)은 다 영남의 선비이고, 박순(朴淳)ㆍ정철(鄭澈)은 다 호중(湖中)에서 나왔습니다. 그 나머지는 이루 다 적을 수 없으나, 모두 초야의 소원한 선비로서 모두 한 시대의 으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호남과 영남의 선비가 조정에서 현달한 자리에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어찌 장구령(張九齡)이 소석(韶石) 출신이라 하여 도리어 중원에서 태어난 우선객(牛仙客)보다 못하겠습니까. 명문(名門)이나 우족(右族)이라고 하여 반드시 다 현명하다고 할 수 없으며, 초야의 소원하고 미천한 자라고 하여 어찌 다 재능이 없겠습니까. 현명한 자를 등용할 때는 부류를 따지지 않는데, 어찌 원근을 가리겠습니까. 예전과 지금을 견주어 볼 때 매우 한숨이 나옵니다.”
병정(兵政)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주 세종(周世宗)이 일찍이 ‘농부 백 사람이 전사(戰士) 한 사람을 기르지 못한다. 내가 이 쓸데없는 것을 어디에 쓰겠는가.’라고 하고 드디어 쓸데없는 인원을 도태하고 정병(正兵)을 가리니 군대의 위세가 드디어 떨쳐졌습니다. 그러니 군대가 강하고 약한 것은 군사의 많고 적은 데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각 도 속오군(束伍軍)을 대규모로 모아 훈국(訓局 훈련도감(訓鍊都監))과 어영청(御營廳)의 군사를 합치면 통틀어 10만의 숫자가 되니, 그 나머지 쓸데없는 군졸을 모두 없애어 어린아이까지 함께 군적(軍籍)에 포함되는 걱정이 없게 하십시오. 무재(武才)가 뛰어나거나 활을 명중시킬 수 있는 자가 아니면 다 화수(火手)로 삼고, 또 출신(出身)ㆍ무학(武學)에서도 정예하고 용맹한 자를 가려 한 대(隊)를 만들어야 합니다.
훈련도감의 병사 또한 노약자를 제거하고 정예병을 뽑아 거기에 들어갈 곡식을 어영청(御營廳)에 주둔하고 있는 군졸에게 옮기고 보인(保人)에게서 쌀을 거두는 것은 면제해 줌으로써 병장(兵仗 병기나 군장)의 자급에만 전념하게 하십시오. 이렇게 하면 병사는 정예화하고 식량은 충분할 것입니다.
또한 양민이 점차 줄어드는 것은 사천(私賤)이 날로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임금의 보배는 백성인데, 나라의 반이 사천이고 집에서 기르는 수가 천 명을 헤아리고 있습니다. 종모법(從母法)을 시행하여 백성을 잃는 단서를 막아야 합니다.
기조(騎曹 병조)의 정병(正兵)은 모두 적을 막는 데 쓸 수 있는 자들입니다. 조종조의 제도에 각 관청에 복역시켰을 뿐 아니었으니, 또한 시의에 맞게 강구하여 옛 제도를 회복하십시오.”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번에 암탉이 수탉으로 변한 것은 더욱 음(陰)이 자라날 조짐입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별빛이 낮에 빛나고 간사한 무지개가 해를 가렸으니, 음이 성하고 양이 쇠퇴하는 형상 또한 매우 밝게 드러났습니다. 예전에 소옹(邵雍)이 말하기를 ‘나라가 흥할 때에는 반드시 임금의 도(道)가 성하고 아버지의 도가 성하고 남편의 도가 성하고 군자의 도가 성하나, 망할 때에는 반드시 신하의 도가 성하고 자식의 도가 성하고 아내의 도가 성하고 소인의 도가 성한다. 이 때문에 〈구괘(姤卦)〉의 초육(初六)에서 여장(女壯)을 미리 경계하였으니, 성인(聖人)이 양을 돕고 음을 누른 그 뜻이 깊다.’ 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선을 들어 쓰고 악을 막으며, 옳은 것을 옳게 여기고 그른 것을 그르게 여겨 군자의 도가 자라나고 소인의 도가 소멸되게 하며, 부시(婦寺 부녀자와 내시)를 물리치고 충직한 자가 무리 지어 나오게 하며, 덕의(德義)를 먼저 힘쓰고 공리(功利)를 뒤로하며, 명분(名分)을 삼가고 백성의 마음을 안정시켜 양강(陽剛)의 정치를 밝히십시오.”
상이 공의 말을 가납하고 공과 대신들을 불러들여 주상 앞에서 회의한 뒤 대부분 시행하였다.
당시 의논하는 사람이 호서(湖西)의 어공(御供) 규례를 변통하고자 하였는데, 상은 중국의 제도처럼 따로 태관(太官)을 설치하여 가미(價米 값으로 치르는 쌀)를 모두 걷어 물건을 사서 진공(進供)하고 내관(內官)으로 하여금 그 일을 주관하게 하려고 했다. 논의가 정해진 뒤 장차 명령을 반포하려는데, 공이 차자를 올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나라의 정공법(正供法)은 토산에 맞게 한다[任土]는 의의에 가장 적합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법이 오래되어 폐단이 생겼으니 개혁해야 합니다. 지금 따로 태관(太官)을 설치하는 것은 대체로 중국의 구제(舊制)를 모방하여 공물로 농간을 부리는 방납(防納) 등의 폐단을 구제하고자 하는 것이니,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신의 어리석은 의견으로는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기강을 정돈하고 중외를 엄숙하게 할 적에, 일월(日月) 같은 전하의 살핌은 무엇보다도 먼저 지극히 가까운 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안으로 액정(掖庭)에서부터 밖으로 이서(吏胥)에 이르기까지 은밀한 소굴을 완전히 두드려 부수고 표리를 이루는 세력을 엄히 단절시키는 것이 근본입니다. 만일 일마다 땜질하면서 법을 바꾸어 간사한 짓을 막으려 한다면, 하나는 구제할 수 있겠지만 어떻게 둘을 보전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조처가 혹시 잘못되면 틀림없이 시장에 피해를 입힐 것이고, 이것이 점차 만연하여 혹 궁시(宮市)까지 생긴다면,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중관(中官 내관)이 주관하도록 명하셨는데, 신은 결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을 계획할 때는 반드시 그 시초를 삼가야 하는 것이고, 우환을 염려한다면 조짐을 막아야 합니다. 원(原) 땅의 수령을 선발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당초 사람을 잃은 것은 아니었으나 결국은 후세에 기롱을 남기게 되었고, 3품의 제배(除拜)가 일을 맡긴 것은 아니었으나 끝내는 화(禍)의 계단을 이루었습니다. 전하께서 뒷날을 생각하신다면 이런 거조를 경시해서는 안 됩니다.” 상이 즉시 파하라고 명하였다.
당시 나라에서 강도(江都)를 보장(保障)으로 삼았고, 수신(守臣)이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세를 거두었으므로 백성들이 고통을 감당할 수 없었다. 저축한 곡식이 수만 석에 이르렀는데도 해마다 이자를 늘려 섬 백성이 파산하고도 갚을 수가 없었다. 이에 구언(求言)을 통해 이해득실을 극력 진달하고, 이어 제치(制置)의 방도를 논하였다. 그 내용에, “이른바 보장(保障)은 세금을 관대하게 하고 부역을 줄여서 먼저 그곳 민심을 얻어 근본을 깊고 두텁게 하여 변란이 있을 때 믿을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일을 맡은 신하가 공을 세우는 데 힘써 부세를 거두는 정책이라면 안 하는 것이 없어, 강도 전체가 공사(工事)에 동원되느라 민력이 피폐하고, 환곡을 내고 들이는 사이에 백성의 경제는 탕갈되었습니다. 편호(編戶)는 생업을 잃고 원망이 도로에 가득하니, 진양(晉陽)의 보장은 아마 이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미 모은 곡식은 비록 흩어 버릴 수 없지만, 오늘부터는 증가시켜 쌓아 놓지 말고, 실어 올 곡식이 있어도 연해(沿海)의 형편이 되는 지역에 나란히 배치하고 급할 때 배로 운반하도록 대비하십시오. 따로 수신에게 칙유하여 호별 부세를 줄여 주는 정책을 실시하여 민력이 두터워지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갑오년(1654, 효종5) 겨울, 청나라 사신이 도착하여 질책하는 소리가 자자하니, 공이 충주(忠州) 시골집으로 피해 가게 되었다. 공이 입궐하여 사직하니, 상이 내려가는 길에 진선(珍膳)과 내온(內醞)을 노자(路資)로 주었고, 충주에 도착한 뒤 또 쌀과 콩을 내렸다.
을미년(1655) 봄, 사단이 풀린 뒤 상이 전지(傳旨)를 내려 서둘러 불렀다. 공이 사양하며 “신은 나이가 이미 70이니, 의리상 물러나 쉬어야 하는데, 어찌 나갔다가 다시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며, 극력 치사(致仕)를 청하였다. 상이 누차 전지를 내려 허락하지 않고 이르기를 “지금이 어찌 원로대신이 시골에 물러가 있을 때인가.”라고 하였다. 공은 당초 거기서 생애를 마칠 계획이었는데, 엄한 부름에 어쩔 수 없어 억지로 도성에 들어왔다. 상이 즉시 인견하여 선온(宣醞 술자리를 베품)하고 조용히 위로하면서 이어 시골 상황을 물었다. 당시 추쇄(推刷)가 한창 급박하여 지방에 소요가 심했는데, 공이 힘써 그 폐단을 진달하였다.
정유년(1657, 효종8) 여름, 큰 가뭄이 들었다. 상이 중외에 구언(求言)하였다. 공은 봄부터 병에 걸려 여러 번 위독하였는데, 이때 다소 차도가 있자 마침내 병을 무릅쓰고 다음과 같이 차자를 올렸다.
“전하께서 즉위한 이래, 예사롭지 않아 두려워할 만한 재해가 적지 않은데, 그 가운데 매년 근심거리가 되어 매번 곡식이 자랄 계절에 백성들의 명맥을 끊어 주상의 마음을 괴롭힌 것은 가뭄이 가장 심했습니다. 생각건대, 음양의 기운은 교섭하지 않으면 막히고 고르지 않으면 답답하니, 이것이 가뭄이 일어나는 이유입니다. 전하의 총명과 예지를 가지고 만일 맑고 한가로운 틈에 돌이켜 반성하며 스스로 관찰하면 마음에서 일어나 정치에 해가 되는 것들은 그 득실을 징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일을 한번 보겠습니다. 안으로는 군도(君道)가 날로 경직되고 세도(世道)는 날로 떨어져, 예의(禮義)가 펼쳐지지 않고 형벌은 질서가 없으며, 언로는 막혀 사람들의 마음은 통하지 않고, 준걸 또한 등용되지 않아 군자의 도가 소멸하고 있습니다. 밖으로는 민생이 물에 빠진 듯하여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 갑니다. 정령은 번거롭고 가혹하여 세금은 갖가지 방법으로 거두며, 벌인 공사는 날로 번잡하여 국력은 날로 위축되고 있습니다. 피폐한 백성들은 곤궁해져 눈을 치켜뜨고 원망하고 있는데, 홍수와 가뭄에 기근까지 겹쳐 유망(流亡)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으니 안으로는 교섭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고, 밖으로는 고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동생(董生)이 말하기를 ‘금슬(琴瑟)이 심히 조화롭지 않을 때, 반드시 풀어서 다시 고쳐 매야 연주할 수 있고, 정치를 하는데 심히 시행되지 않으면 반드시 변혁하여 다시 교화해야 다스릴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전하께서 정신을 가다듬고 치세를 도모한 지가 지금 9년이 되었는데, 전하께서 가지고 계신 방도가 무엇이고, 시행하신 일이 무엇이기에 정치의 효과가 이와 같은지 모르겠습니다.
천하의 일은 선악의 득실이 완전히 상반됩니다. 선하다고 생각했으면 실천하고, 불선(不善)한 것을 알면 한 일을 반성할 뿐입니다. 관대한 것과 가혹한 것, 간언을 채용하는 것과 간언을 막는 것, 아첨하는 신하를 좋아하는 것과 곧은 신하를 좋아하는 것, 백성을 사랑하는 것과 백성을 동요시키는 것, 검약과 사치, 이치를 살피는 것과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 덕을 숭상하는 것과 형벌을 숭상하는 것, 근본을 다스리는 것과 말단을 다스리는 것은 완전히 상대되고 상반된 것입니다.
전하께서 여러 해 시행하셨는데 거기서 이미 얻은 것이 없었다면, 오늘날 인심을 위로하고 하늘의 노여움을 돌리고 국맥을 오래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다른 방법이 아니라 그동안 한 일을 잘 반성하면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신은 감히 바라건대 전하께서 이번 두려움의 단서를 통해 결연히 뉘우치는 뜻을 보이고, 성상의 뜻을 견고히 정하여 전에 한 일을 단숨에 반성하십시오. 번거롭고 가혹한 정책을 혁파하고 관대한 정령을 시행하며, 공리에 대한 논의는 물리치고 덕의의 다스림을 앞세우며, 치우치고 사사로운 것을 끊고 공도(公道)를 열며, 참소하고 아첨하는 자들을 멀리하고 충직한 사람을 가까이하십시오. 널리 언로를 열고 준걸을 등용하여 높이며, 모든 옥사를 신중히 하고 백성들의 힘을 아끼십시오. 번거롭고 소요를 일으키며 편안하지 못하여 백성들에게 폐해가 되고 재정을 손상시키는 모든 전후의 정사(政事)는 전부 파하십시오. 안으로 궁금(宮禁)에서부터 밖으로 군국(軍國)의 온갖 수요 중에서 쓰임에 절실하지 않고 정법(正法)에 해가 있는 경우는 일체 견감하여 백성들의 화목을 유도하고 하늘이 내리는 아름다움을 맞으십시오.”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조정의 거조가 옳은데 백성들도 옳다고 하는 경우가 치세(治世)이며, 조정의 거조가 그른데 백성들이 그르다고 하는 것 또한 치세입니다. 조정의 거조에 대해 스스로 옳다고 하지만 보통 백성들은 감히 의논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점이 자사(子思)가 위(衛)나라 임금을 위해 걱정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남달리 총명하시며, 기쁘거나 노한 감정을 절제하지 않습니다. 남달리 총명하면 아랫사람을 대할 때 경시하는 병통이 있으며, 기쁘거나 노한 감정을 절제하지 않으면 상벌에 당연히 시행해야 할 원칙을 잃게 됩니다. 이 때문에 신하들이 기가 죽어 물러나 나약하게 되어 잘못된 것을 과감하게 바로잡지 못하니, 설사 중대한 안위와 이해가 걸려 있더라도 또한 장차 입을 다물 것이니, 어찌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조정에서는 매양 인재가 없다고 탄식하는데 이 또한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신의 생각에 인재의 출현은 임금이 좋아하고 싫어함, 등용하고 버림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을 보면 민첩하고 예리한 인사가 노성한 사람보다 많고, 재간 있는 신하가 경학(經學)을 공부한 신하보다 많습니다. 강개하게 감히 말하는 자는 적고, 시세에 부침하며 용납되는 자는 많습니다. 이는 성상께서 일 처리를 잘하는 신하는 좋아하고 장려하면서 강직한 선비는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바람이 불면 풀이 쓸리는 습성이 길들여져서 점점 이처럼 된 것입니다. 전하께서 만일 경학을 진심으로 좋아하신다면 경학을 하는 무리들이 진출할 것이고, 강직함을 진실로 좋아하신다면 강직한 사람들이 또 이를 것입니다.”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육지(陸贄)의 말에 ‘지금 급한 일은 사람들의 마음을 자세히 살피는 데에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매우 갈망하는 것을 먼저 시행하시고, 사람들의 마음이 심히 싫어하는 것은 먼저 제거하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생각하기에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이 심히 싫어하는 것은 추쇄(推刷)만 한 것이 없습니다. 백년간 폐지되었던 법을 갑자기 거행하여, 감춰지고 누락되었던 수만 명을 모두 수색하느라 팔도가 소란스러워진 지 지금까지 3년이 되었습니다.
이미 입법이 엄한 데다 위아래가 서로 받들면서 그 뜻을 얻어내는 데 있으므로 원통한 일이 있어도 펼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길거리에 나돌고 관가에 호소하고, 가슴을 치며 눈물을 흘리면서 살아 있는 것을 괴로워하는 것을 눈과 귀로 보고 들을 때마다 마음이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제왕의 정치는 천심을 얻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 없고 또한 인심을 얻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하늘과 사람은 둘이 아니니, 사람을 얻는 것이 하늘을 얻는 것입니다. 지금 제자리를 잃고 원통함을 호소하는 자가 이렇게 많은데, 어찌 위로 하늘의 조화를 범하기에 부족하겠습니까. 지금은 일이 거의 실마리를 찾았는데 곡직(曲直)이 서로 반반이니, 이장(弛張)하고 변통하는 것은 바로 이때에 달려 있습니다.”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이 듣건대, 선왕(先王)이 군대를 다스리는 법은 모두 세 계절에는 농사에 힘쓰고 한 계절에만 무예를 강습하게 했고, 한(漢)나라와 당(唐)나라에 와서도 고친 적이 없습니다. 이포진(李抱眞)이 택로(澤潞)에 있을 때에도 여전히 이런 뜻을 준수하였으니, 이는 군대가 농사를 짓고 있었기 때문에 형세가 본디 그러했던 것입니다.
성상께서 군대 일에 유의하여 영(營)을 설치하고 단속하는 것은 이미 정해진 법규가 있으니 뜻이 매우 훌륭합니다. 다만 지금 창을 잡은 군졸들은 모두 보습을 잡는 백성인데, 한창 농사를 지을 계절에 양식을 준비하고 기계를 갖추어 날마다 공문(公門)에 모이게 하여 백성들의 농사철을 빼앗으면 피해가 심각하니, 겨울철에 조련하고 나머지 계절에는 농사를 짓게 해야 할 것입니다.”
당시 상이 나라의 형편이 떨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여 엄격하게 국정을 이끄는 것을 높이 쳤다. 일을 맡은 자 또한 다투어 어지러이 바꾸었지만, 한 일에 효과는 없었다. 공이 매번 ‘왕자(王者)의 정치는 반드시 먼저 백성을 얻어야 하고, 부강을 위한 사업 또한 근본에 힘쓰는 데 달려 있으며, 온 세상이 지금 내닫고 있는 것은 다만 나라를 병들게 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였기에, 재이를 계기로 극언하였다.
끝에 다시 말하기를 “빈 문서만 조금 갖추는 것이 하늘을 섬기는 방도는 아닙니다. 어리석은 신은 피전(避殿)이 궁궐을 엄하게 하고 사사로운 길을 막는 것보다 못하고, 감찬(減饌)이 검소한 덕을 숭상하고 부비(浮費)를 절약하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해마다 구언 하교를 내려보내는 것이 한 가지 일을 실제로 행하는 것만 못하고, 조정에서 애통해하는 것이 밤낮으로 공경하고 두려워하면서 실질에 힘쓰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니, 상이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차자에서 논의한 것은 흉금에서 우러나온 지극한 정성이 아닌 것이 없도다. 만약 임금을 사랑하는 경의 충심이 아니라면 여러 달 앓으며 병석에 있던 상황에서 어찌 이렇게까지 말하겠는가. 성실하고 간곡한 뜻이 저절로 마음을 감동시키니, 어찌 변폭(邊幅)을 꾸며 빈말을 하였겠는가.
아, 과인이 욕심을 끊고 밤낮으로 몸 달아 하면서 조그마한 효과라도 보고자 하는 것은 공리(功利)가 말단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지만, 진실로 지극한 비통함이 가슴에 서려 있는데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과인이 어리석어 어긋난 일이 많으니, 대인 선생(大人先生)이 우려하여 잊지 못할 만도 하도다. 스스로 반성하여 가슴에 새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차자 중에 재간 있는 신하가 경학을 익힌 신하보다 많다고 한 말이 있지만, 언제 재간 있는 신하가 있었는가. 진실로 아직 보지 못했도다. 근래 대각의 신하가 대부분 스스로 안정되지 못하고 매양 당론을 가지고 서로 이기고자 하므로 과인이 이들을 미워하고 있는데, 점점 격해져서 혹 지나친 거조를 면치 못하기도 하니 매우 한탄스럽도다. 선생이나 어른들이 이끌고 권면하여 이런 악습을 없앨 수는 없겠는가.”
7월, 학질을 앓다가 설사까지 얻어 10여 일을 고생하다가, 8월 8일에 정침(正寢)에서 돌아가니, 춘추 73세였다. 하루 전날 밤, 자제들에게 부축하게 하여 앉아 유소(遺疏)를 불러 주었다. 임종하던 자식들이 울면서 유언을 청하였다. 공이 눈을 뜨고 바라보면서 “백강(白江)으로 돌아가지 못한 것이 나의 한이다.”라고 하고 절명하였으니, 아, 애통하도다!
유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은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으나 조금도 보답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병이 이미 위독하여 미약한 숨마저 끊어지려고 하니, 주상을 다시 뵙지 못하고 밝은 세상과 영결하게 된 것이 제가 땅속에 들어가면서 갖는 구구한 한입니다. 오직 밝으신 성상께서 기뻐하거나 성내는 것을 경계하고 편벽됨을 끊으며, 선한 사람과 친하시고 백성의 힘을 길러 원대한 사업을 공고히 하여 죽음에 임하는 저의 소원에 부응하여 주십시오.”
상소가 들어가자 상이 깊이 애도하시며 승정원에 하유하기를 “이제 막 원로를 잃어 내가 애통하였는데, 이어 유소가 들어오니 경계하는 말이 지극히 절실하고 말뜻이 깊고 멀다. 간곡한 충성과 그리워하는 정성이 말 밖에 넘치니 더욱 비통하여 마음을 가눌 수가 없다. 허리띠에 쓰고 가슴에 담아 두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떠난 사람은 따르기 어려우니, 내 마음을 어떻게 형언하겠는가만, 심정을 보여 좌우에게 알게 하노라.”라고 하였다.
그 뒤 경연에 임하여 또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영중추부사가 비록 질병이 많았다고는 하지만, 내가 항상 그의 강건함을 믿었는데 어찌 갑자기 이렇게 될 줄 생각했겠는가.”라고 하고, 공의 집안이 평소 가난하니 상을 준비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여, 이어 장례 전에 과록(科祿 관직에 해당하는 녹봉)을 지급하게 했으니, 여기서 공의 군신(君臣) 관계를 볼 수 있다. 아, 애통하도다!
그해 10월에 교하(交河)에 장례 지냈다가 그 뒤 무오년(1678, 숙종4)에 포천(抱川)으로 이장(移葬)하였다.
공은 자질이 순수하고 아름다워서 안으로 강건하고 밖으로는 따뜻하였는데, 정순(精純)한 기(氣)가 커서 안팎으로 맑게 빛났으며 화락하고 순조로운 기운이 용모에까지 이르렀다. 어렸을 때부터 다투거나 화를 내는 기색이 없었다. 남들과 말을 할 때는 마음이 평안하고 정신이 안정되어 말을 하면 사람들이 신뢰하였다. 평소에는 즐거웠고 시원하여 자연스러웠지만 일을 당해서는 오로지 떳떳한 도리로 처리하였고 의리상 마땅히 해야 할 일에는 과감히 힘썼으니, 늠름하여 뜻을 빼앗을 수 없었다.
일찍이 옛사람의 마음을 잡아 보존하고 성찰하는 방도에 마음을 다하고 경사(經史)를 참고하여 의리의 깊은 근원을 훤히 알았다. 일상생활에서는 차근차근 법도가 있었으며, 규문(閨門) 안에서는 엄숙하면서 화목하였고 조리가 지성스러워 엄격하지 않았는데도 집안이 다스려졌다.
책 읽기를 좋아하여 날마다 정해 놓고 공부를 했으며 앉으나 누우나 반드시 책을 손에 들고 있었고 드나들 때도 가지고 다녔으며 질병에 걸렸을 때에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특히 밤이나 아침에 책 읽기를 즐겨 나이가 고령이 되고 관직이 높아졌을 때에도 여전히 그만두지 않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밤기운은 고요하고 아침 기운은 맑아서, 공효는 배나 되고 쉽게 스스로 습득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송 정언 몽석(宋正言夢錫)과 밤에 앉아 책을 읽는데, 송공(宋公)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이러한 때에 마음의 본체를 묵묵히 살피는가. 옛사람이 말한 광풍제월(光風霽月)이란 것을 더욱 징험할 수 있네. 사람이 이때의 광경을 늘 보전할 수 있으면 성현(聖賢)의 마음일세.”라고 하였다.
상을 당했을 때 책을 읽고 있었는데 흔연히 마음에 깨달은 데가 있자,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것이 슬픔을 잊는 경지에 가깝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이어 책 읽기를 그만두려다가, 이윽고 다시 생각하고 말하기를 “상중에 책 읽기는 성인(聖人)께서 금한 적이 없으니, 이는 분명 마음을 바로 하는 데 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효우(孝友)에 돈독하였다. 부모를 모실 때 좌우로 어김이 없었고 힘을 다하여 터럭만큼도 유감이 없도록 하였다. 내 증조모 정 부인(鄭夫人)은 연세가 근 백 세였는데, 삭망(朔望)이면 공은 반드시 집안사람들을 모아 술자리를 마련하였고 매번 형제들이 즐겁게 모였고 어린 자손들은 재롱을 피웠다. 공은 윗사람을 받들고 아랫사람을 돌보는 가운데, 정 부인을 즐겁게 하려는 의도로 우스갯소리를 지어냈으니 모두 지극한 사랑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공 때문에 집안사람들이 더욱 친해졌고 술자리가 파한 뒤 정 부인은 기쁜 마음으로 공을 칭찬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선왕부(先王父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만년에 세상에 분노하다 술병이 들어 행동을 마음대로 하였고, 혹 어두운 밤에 홀로 외출하여 집안사람들이 간 곳을 알지 못했다. 공이 매번 울면서 달려 나가 걸어서 그 뒤를 따라가다가 여러 날 돌아오지 못하고 다리에 피를 흘린 적도 있었다. 병환을 앓은 지 10년 동안 공은 옷에 허리띠를 풀지 않았고 약물은 공이 직접 짓고 맛보지 않으면 함부로 올리지 않았으며, 돌아눕거나 부축할 때는 다른 사람에게 대신 시키지 않았다.
정묘년(1627, 인조5) 이후, 선왕모(先王母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연세가 더욱 높아져 공이 마침내 백마강 가로 모시고 돌아갔다. 이에 사방으로 다니며 벼슬하려는 뜻을 접고 봉양에 전심하니, 아무리 자주 상께서 불러도 피할 수 없을 때만 한번 취임하고는 오래 밖에 있던 적은 없었다.
공의 동생 생원공(生員公)이 일찍 세상을 뜨자 공은 가까운 곳에 집을 짓고 홀로된 제수씨를 거처하게 하고 옷과 음식을 함께 나누었다. 가난하게 사는 누이 한 명이 있었는데, 공은 그 집안일을 보살피고 조카들을 자기 자식처럼 돌보아 모두 가르치고 키워서 시집, 장가보냈다.
형제가 적은 것을 스스로 상심하여 제종(諸從 사촌 형제)에게 우애를 더하였으니, 내제(內弟) 송공 몽석(宋公夢錫)과 집은 따로 살면서도 재산을 함께 나누었고 은혜가 동기간 같았으며, 송공이 세상을 떠나자 과부가 된 제수씨와 남은 자식을 매우 독실하게 보살폈다. 원근의 집안사람들 중에 의탁할 데가 없는 사람은 모두 공에게 귀의하였고, 음식과 의복을 구제해 주어 그 뜻과 생업을 이루어 주었다.
다른 사람과 교유할 때는 내내 변치 않았으며, 오랜 벗의 생사, 가난과 질병, 곤궁에 대해서는 곡진하게 은혜로운 마음을 가졌다. 사람을 만날 때는 현우(賢愚)나 귀천(貴賤)이 없었고, 한결같이 성의로 대하였으므로 다른 사람들도 다 마음을 씻고 성의를 바쳤으며, 아무리 불초한 사람도 오직 그의 허물을 드러낼까 근심하였으니, 공이 사람을 사랑함에 인자하기가 끝이 없었다.
성품이 진기한 완구를 좋아하지 않았고, 사치스러운 그릇과 용구를 더욱 싫어했다. 공은 물건에 대해 담백하여 남달리 좋아하는 기호가 없었으며, 자신의 생활은 매우 검약하여 떨어진 옷과 거친 밥을 평소 습관처럼 편안해했다. 평생 살림에 관한 일은 언급하지 않았으며, 정승의 귀한 자리에 이르러서도 처자식이 집에서 고생하였고 간혹 죽도 넉넉하지 못하였다.
괴이하고 특별한 행위를 하지 않았지만 취하고 버리는 일이나 사양하고 받는 데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반드시 변별하였고, 자신을 바르게 견지하였으므로 남들이 감히 사사롭게 청탁하지 못하였다.
평소 아름다운 산수를 좋아하여 한적하게 속세를 떠날 마음이 있었다. 소년 시절에 여강(驪江)을 오간 것이 또한 10년이었고, 늘그막에 백강을 알게 되어 호산(湖山)의 절경을 감상하면서 백강 가에 살 터를 잡았다. 좌우에 도서를 쌓아 두고 한가로이 거닐면서 즐겁게 지냈다. 또 산마루에 서실을 지었는데 깎아지른 절벽에 둘러싸여 큰 강을 내려다보고 있어 간혹 손님이나 교유하는 인사들이 오지 못하였다. 매번 한겨울에 눈이 쌓이거나 봄가을로 달이 차면 더욱 즐겨 거처하였다. 공이 그 사이에 이를 때마다 문을 닫아걸고 꼿꼿이 앉아 정신을 모으고 조용히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이렇게 한 것이 여러 해였는데, 그 가운데 깨달은 바는 엿볼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조정에 벼슬한 지 50년 동안 물러난 적이 많고 나아간 적은 적었다. 모든 권세와 이록(利祿)에 대해서는 마치 겁 많은 필부처럼 피하였다. 늘 명절(名節)을 스스로 조심하였으며 비록 위험하거나 욕을 당하는 상황이라도 지조를 변한 적이 없었다. 두 번이나 심양(瀋陽)에 갇혔을 때는 호랑이 입에 들어간 듯 위태로웠고, 남쪽 지방으로 귀양 갔을 때는 상이 진노하여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경우를 당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낯빛이 변하고 슬퍼하게 마련인데, 공은 홀로 걱정하는 기미가 없이 만번 죽을 처지에서도 온화하였으니, 또한 공의 큰 절개는 깊이 길러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공은 시무를 처리하는 능력도 넉넉하여 청단(聽斷 송사를 판단함)은 몇 사람 몫을 하였으므로, 관직에 있을 때 사안의 대소에 상관없이 모두 직접 처리하였다. 또 인정을 살펴 호오와 고통이 있는 데를 파악하여 지성으로 보호하였다. 봉직할 때는 근면하였고 일 처리는 민첩하였으므로, 서울과 지방의 관직을 역임하는 동안 모두 위대한 업적이 있었다.
조용히 재단하여 처리하는 일마다 상황에 맞았으므로 법이 바로 서고 백성이 편안해했으며 공효는 이루어지고 자취는 요란하지 않았다. 지휘하는 동안에 풍속이 바로 변하였고, 보고 듣는 것 외에도 정신이 두루 미쳤으니, 이것은 오직 공만이 그러할 수 있었다.
정축년(1637, 인조15) 이후, 집에 거처할 때는 사죽(絲竹 음악)을 듣지 않았다. 관직에 나가 상에게 권할 때는 늘 대의는 멸실해서는 안 되며, 나라의 치욕은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간곡히 말하면서 혹 눈물을 흘리기도 했는데, 그 말이 참으로 귀신을 감동시키는 점이 있었다. 그밖에 조정에서 벼슬할 때의 언론은 모두 온전한 충성의 절조로 정대한 말을 하였고, 고금(古今)을 참작하고 의리(義利)를 판별한 것은 언제나 근본적이고 장구한 계책에 대한 것이었다.
귀양에서 등용되어 다시 정승으로 들어왔을 때, 시세는 갈수록 어려워지는데 더욱 전적으로 위임하였다. 대개 임금의 덕을 바로 하여 교화의 근원을 맑게 하고 폐정을 혁신하여 민력을 두텁게 하며, 언로를 열고 아랫사람들의 심정을 통하게 하며, 인재를 거두고 경제(經制 떳떳한 제도)를 정하여, 일시의 비루한 속된 논의를 씻고 백년 된 무너진 기강을 떨치며, 나라가 거듭 쇠퇴한 시기에 사기(士氣)를 북돋우고 내정(內政)의 편에서 나라의 정책을 구하여, 나라 형세가 장중해지고 왕조의 위엄을 떨치게 함으로써 중흥하여 크게 일어설 뜻을 돕기를 바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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