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644
7월8일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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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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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LuG7VkCpNpE
[서울대교구 조승현 베드로(가톨릭평화방송.평화신문 주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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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눈이 시리도록 맑은 몽골 대초원 하늘 아래서!>
몽골 자연 순례 피정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무한반복되는 일에서 벗어나 끝도 없이 계속되는 대평원과 눈이 시리도록 맑은 하늘을 마주하니, 이렇게 호사를 누려도 되나 하는 생각에 몸과 마음이 어리둥절합니다.
작년부터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에서 몽골 지부 전반에 대한 운영을 책임지게 되었고, 지부장 신부님을 포함해서 총 네 분의 한국 살레시안들을 포함해 여러 다국적 형제들이 몽골 청소년들을 위해 불철주야 헌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지 상황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몽골 복음화를 위해 초석을 놓기 시작한 지 벌써 3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지만, 철저한 통제로 인해 복음화 진척은 미미합니다. 전체 가톨릭 신자 수는 아직도 2천명 미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골 복음화를 위한 우리 형제들의 노력은 눈물겹습니다. 일단 입교, 세례를 염두에 두기보다는, 교육과 친교, 나눔을 통한 인격적 관계를 맺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복음화의 열매가 맺고 있습니다.
당장 눈앞에 가시적인 성과가 보이지 않더라도, 언젠가 주님께서 본격적으로 활동하실 그 날을 기다리며, 묵묵히 머나먼 타국에서 사랑의 현존을 계속하고 있는 형제들의 의연함에서 참 사도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선택하시는데, 그 과정이 흥미롭습니다. 먼저 가까이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당신이 지니고 계신 능력과 힘을 부여하십니다.
그로 인해 제자들은 자신의 손으로 악령을 추방시키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주게 됩니다. 자신의 손을 통해 앓고 있던 사람들이 벌떡 벌떡 일어서니 제자들 스스로 생각해도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사도들을 선발을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이윽고 그들을 양들에게 파견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본질적이고 최종적인 임무를 아래와 같이 부여하십니다.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예수님으로부터 파견된 사도들, 제자들, 사목자들에게 있어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임무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하늘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사도 본인의 삶, 교회 공동체 삶을 통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시대 또 다른 예수님의 제자요 사도, 교회인 우리는 과연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세파에 시달리고 지친 세상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초대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갈팡질팡하는 양들에게 확신갖고 초대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리 오십시오. 여기 오시면 꿈에 그리던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볼 수 있습니다. 여기 이 공동체가 바로 미래 하늘 나라를 가늠할 수 있는 구체적인 예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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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K2ZhJ01tXM (2020 07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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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비교하며 살고 싶지 않아요?>
남과 비교하며 살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느냐고 묻는 분들이 계십니다. 남과 비교하면 힘들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분이 ‘비교’로 이행 시를 지었는데 이렇게 지었습니다. 비: 비참해지거나, 교: 교만해지거나.
내가 남과 비교하는 이유는 우월해지기 위해서입니다. 남과 비교해서 열등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열등감 때문에 우월해지려고 남과 비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선은 사람은 어차피 비교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내가 누군가와 비교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 살아서 어떠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불교나 뉴에이지와 같은 쪽에서는 남과 비교하는 것조차 내려놓아야 한다고 하는데, 어쩌면 이는 달리지 말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서라는 말과 같습니다.
사실 스님들도 자신이 부처처럼 되기 위해 달리는 것이고 누가 더 앞서가는지 뒤처지는지 같은 길을 가는 다른 이들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와 나 자신을 비교하고 있다는 것은 어디를 향해 달리고 있다는 것이니 좋은 징조입니다. 다만 방향은 좀 수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릴 이 두 사람 중 누가 더 부러운지 생각해보십시오. 둘 다 수천억의 자산가입니다.
이탈리아의 ‘잔루카 바키’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입에 물고 있었습니다. 수천억의 재산과 초호화 보트, 개인 제트 비행기, 수영장 딸린 저택은 기본입니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거의 할아버지인데도 미스 유니버스와 같은 젊은 최고의 미녀들을 바꾸어가며 삽니다. 그의 저택에는 잡지에나 나올 법한 미녀들이 몇 명씩 함께 삽니다.
그는 SNS를 통하여 자신의 삶을 세계 많은 이들과 공유합니다. 부러움을 사기 위해 올리는 것입니다. 행복하다면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구하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자신을 홍보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자랑은 부족한 행복을 채우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리고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그의 추종자가 되어 그의 하루하루를 부러워하며 그의 부족한 행복을 채워주고 있습니다.
그 다음은 우리가 잘 아는 홍콩의 ‘주윤발’ 씨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자신의 재산 ‘8천억 원’을 전액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아내도 이에 동의하였습니다. 주로 지하철을 이용하고 저렴한 식사를 하고 싸구려 시계와 옷을 입습니다. 건전하고 겸손한 생활의 대명사입니다.
하느님께서 만약 두 사람의 인생 중 누구를 택하겠느냐고 물으시면 어떤 삶을 택하시겠습니까? 바키를 선택하시는 분들은 돈과 쾌락과 명예를 추구하시는 분이고, 주윤발 씨를 택하는 분은 그것보다는 하느님 뜻에 맞는 삶을 원하시는 분들입니다.
결국, 내가 부러워하는 것은 단순한 그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도달하고 싶은 방향으로 나보다 앞서가는 사람입니다. 나의 달리는 방향을 바꾼다면 이전에 부러워하던 사람들은 마치 만화영화에나 나오는 사람처럼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두 사도를 뽑으십니다. 열두 사도를 뽑아 파견하신다는 말은 ‘소명’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소명은 삶의 방향이고 인생의 목적지입니다. 주님께서 목적지를 지정해주시는 것입니다.
그 목적지가 삶의 이유이고 행복임을 믿는다면 이제 그들은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과 함께 달리는 동료들이 있을 뿐입니다. 소명은 그 사람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기에 소명대로 사는 사람의 경쟁자는 결국, 자기 자신입니다. 소명을 받은 이들은 주님께서 정하신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할 것만을 걱정하여 남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나의 비교 대상은 나 자신이고 나의 주위에서 달리고 있는 이들은 또한 내 협조자들이고 나의 위로자들이고 나를 발전시킬 수 있는 대상들입니다.
정리하자면, 우선 비교 대상이 없는 사람이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입니다.따라서 비교하지 않고 사는 것은 무기력에 빠지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제자리 뛰기를 하는 사람보다 목적지를 향해 눈이라도 돌리는 사람이 더 활기차고 행복합니다.
그러나 세속적인 것들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 비교하며 비참해지거나 교만해지거나 합니다. 비참해져도, 교만해져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소명을 깨달은 사람은 누구도 부러워함 없이 함께 뛰는 사람들을 발전의 기회로 삼습니다. 그래서 나에 대한 주님의 소명을 찾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나의 진정한 비교 대상은 ‘어제의 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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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전주교구 백재욱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함께 짊어지고 갈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구마와 치유의 권한을 주십니다. 이들은 ‘사도’라고도 불리는데, 제자의 정체성이 ‘따름’에 있다면 사도의 정체성은 ‘파견’에 있습니다. 이 열두 사람은 여느 제자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지위를 지닌 이들이었습니다.
제자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입니다. 이는 단순히 그분께서 가시는 곳을 함께 다닌다는 의미를 넘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 곧 십자가 죽음의 길을 함께 간다는 뜻입니다. 물론 열두 제자도 그분의 공생활 여정에 따라나설 때에는 그 사실을 온전히 알아차리지 못하였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에 대하여 말씀하셨을 때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한 많은 제자가 그분의 곁을 떠나갔습니다(요한 6,66 참조). 그때 곁을 지키던 열두 제자라고 해서 특별히 더 강인하였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잡혀가시자 그들도 모두 뿔뿔이 흩어졌으며, 베드로 사도조차 스승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를 길러 내시는 데 실패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는 또한 ‘배우는’ 이들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인간적으로 나약하고 부족하였지만 예수님과 함께하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이는 단순히 지식이나 기술을 익히는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스승의 말씀뿐만 아니라 그분의 눈빛과 손길에서 다른 이들을 향한 사랑과 자비, 연민과 공감을 배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힘으로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하나씩 떠올리며, 마침내 목숨을 바쳐 그분을 증언하는 사도로 거듭납니다. 이처럼 나약하였던 제자들이 결국 세상에 복음의 승리를 알리는 중심인물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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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0,1-7: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선택하시고 파견하시는 장면을 보여 준다. 예수님께서 부르신 제자들의 면면을 보면, 한눈에 지도자급이라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어부, 세리, 심지어 사회적 지위나 학식에서 특별하지 않은 이들이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의아한 선택이지만, 하느님의 지혜는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예수님은 현재의 모습이 아닌, 그들이 하느님 안에서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가를 보셨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무지와 연약함을 보시지 않고, 믿음과 순종으로 인해 그들이 하느님을 위해 크게 쓰일 것을 아셨다.” 즉, 하느님의 선택은 능력이나 지위가 아니라, 겸손과 순종, 은총에 대한 열린 마음을 기준으로 이루어진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5-6절) 여기서 우리는 복음 전파의 우선순위를 보게 된다. 먼저 이스라엘, 즉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신 뒤, 복음이 준비된 민족에게 확장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주님은 제자들을 보내실 때, 그들이 갈 길과 대상자를 정확히 알게 하셨다. 이는 단순한 지도력이 아니라, 사목적 분별력이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구원과 세상의 혼란을 구별하게 하기 위함이다.”(Homiliae in Matthaeum, 76 요약)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한다.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사람과 상황을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며, 하느님의 뜻과 계획안에서 선포해야 한다.
제자들에게 주신 명령은 명확하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7절) 복음의 핵심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것이다. 성 이레네오는 이렇게 말한다. “복음은 단순한 가르침이 아니라, 생명과 구원의 능력이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함으로써, 제자들은 세상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도구가 된다.”(Adversus Haereses, III,24,1 요약) 즉, 우리가 복음을 선포하는 삶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삶이다. 우리가 전하는 사랑과 자비, 정의와 진리의 증거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이나 부족함 때문에 주저하지 말고, 겸손과 순종으로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과 상황을 잘 살피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법과 때에 따라 사랑과 자비를 실천해야 한다. 그리고 단순히 신앙생활을 개인 차원에 머물게 하지 않고,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는 삶, 즉 주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사회에 선한 영향을 끼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 모두 하느님께 선택받은 제자로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명을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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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부르시고 닮게 하시어 보내시니>
마태오 10,1-7 (열두 사도를 뽑으시다,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부르시고 닮게 하시어 보내시니>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마태 10,1)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마태 10,5)
당신께서
나를
가까이
부르시니
나
당신
가까이
다가갑니다
당신께서
나를
당신
닮게 하시니
나
당신
오롯이
닮아갑니다
당신께서
나를
벗에게
보내시니
나
당신
가시듯
떠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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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네 가지 과정이 있다고 합니다. “이해, 해석, 비판, 전망‘이라고 합니다. 대부분은 이해와 해석에 머물게 된다고 합니다. 이해와 해석은 기득권을 유지하고, 지키는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예전에 ‘보도지침’이 있었습니다. 권력을 가진 정부가 언론을 길들이고, 통제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보도지침을 어기고 비판과 전망을 제시하는 언론에 대해서 광고를 중단하기도 했습니다. 비판 기사를 낸 기자들을 해직하기도 했습니다. 비판은 자칫 다툼의 여지가 있습니다. 전망은 자칫 책임의 문제가 있습니다. 경제 지표를 전망하거나, 선거 결과를 예측하는 경우 맞으면 좋지만, 틀리면 책임이 따르기도 합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는 대부분 이해와 해석을 통해서 판단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언자는 비판과 전망을 함께 이야기하였습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눈으로 시대를 바라보며, 백성의 죄와 권력의 불의를 비판하였고, 동시에 회개하면 다시 살 수 있다는 희망의 전망을 제시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성전과 예루살렘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거짓 안보를 비판하며 회개를 촉구했지만, 그 때문에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으며 구덩이에 던져지는 고난을 겪었습니다. 아모스는 가난한 이를 짓밟고 정의를 외면하는 북이스라엘의 부패를 꾸짖으며 “공정을 물처럼,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고 외쳤지만, 권력자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엘리야는 바알 숭배와 아합왕의 불의를 비판하며 참 하느님께 돌아오라고 선포했지만, 이제벨의 위협을 피해 광야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이처럼 예언자는 단순히 사건을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비추어 시대를 비판하고, 회개의 길과 구원의 희망을 함께 보여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의 길은 언제나 고난의 길이었지만, 동시에 하느님께서 열어 주시는 미래를 증언하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건과 율법과 전통을 단순히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비추어 당시의 종교적 형식주의와 배타성을 비판하셨고, 동시에 하느님 나라라는 새로운 전망을 보여 주셨습니다. 안식일 논쟁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며, 율법이 사람을 억압하는 도구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은총의 길이여야 함을 가르치셨습니다. 새 술과 새 부대의 비유에서는 낡은 생각과 굳어진 제도 안에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은총과 복음을 담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맞는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삶의 방식을 요구하는 말씀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하시며, 세상의 권력과 성공이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라 가난한 이가 위로받고, 죄인이 용서받고, 병든 이가 치유되며, 잃어버린 이가 다시 하느님 품으로 돌아오는 나라를 전망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는 율법의 완성이 사랑이며, 참된 신앙은 판단과 정죄가 아니라 섬김과 희생으로 드러난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러한 비판과 전망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권력자들에게 위협으로 받아들여졌고, 결국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는 실패가 아니라 부활로 이어지는 하느님 나라의 문이 되었고, 예수님의 비판과 전망은 인류에게 새로운 구원의 길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새로운 전망을 이야기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예수님의 전망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곳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전망을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너희는 정의를 뿌리고 신의를 거두어들여라. 묵혀 둔 너희 땅을 갈아엎어라. 지금이 주님을 찾을 때다, 그가 와서 너희 위에 정의를 비처럼 내릴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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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능력을 주시는 주님>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심으로 당신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안배하셨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요한15,16). 하신 말씀대로다.
열두 사도의 명단을 보면 죄인으로 낙인찍힌 마태오라는 사람도 있고, 급진적인 열성 당원인 시몬도 있으며 요한 세례자의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있다. 다양한 사람이 뒤섞여 있다. 이렇게 보면 선택이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이 회개하고 성령의 불을 받게 됨으로써 죽음을 불사하는 증언자들이 되었고, 교회의 초석이 되었다.
능력 있는 사람을 뽑은 것이 아니라 뽑아서 능력을 주시는 주님이시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을 제자로 삼았듯이 오늘 우리도 우리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불러주셨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내 삶의 자리는 주님께서 마련하신 꽃자리다. 그러므로 상황에 구애됨이 없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로 서 있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자 하신다. 우리는 주님의 선택받은 자녀다. 주님께서는 내가 느끼든 그렇지 않든,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지켜주신다. 그러므로 마음을 열어 주님을 만나야 한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성공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최선으로 부르셨다."(성녀 마더 데레사).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활동을 하고 성과를 내느냐? 또는 얼마나 널리 영향력을 미치느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하신 범위 안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해야 한다.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을 우선 하기보다는 해야 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한다.’ 주님께서 나를 통하여 무슨 일을 하고자 하시는지를 알아챘으면 좋겠다. 무엇을 하든 나를 뽑아주신 분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할 수 있길 바란다.
“주님, 저희가 영원한 생명에 날마다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하시며 구원의 은총을 풍부히 내리시어 저희가 끝없이 주님을 찬미하게 하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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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독일제국 프로이센의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가 독일을 통일하고 보니, 세계 식민지는 이미 열강들의 차지였습니다. 단독 진출은 무리라고 판단한 그는 동양에서 협력자를 찾았습니다. 당시 중국의 실력자인 이홍장(청나라 말기 개혁과 외교의 핵심 인물)이 적합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독일산 순종 셰퍼드 두 마리를 고르고 골라 선물로 보냈습니다.
몇 달 뒤 이홍장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이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지요.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문화의 차이를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독일에 입장에서는 잘 먹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고, 실제로 중국을 함께하지 못할 야만인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중국의 입장에서는 잘 먹으라고 보냈다고 믿었던 것이지니다. 만약 중국도 독일도 상대를 알고 제대로 이해했다면 어떠했을까요?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런 문화적 차이를 맞다, 틀렸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 각자는 서로 다른 환경 속에서 성장합니다. 그래서 다를 수밖에 없지만, 이 다름을 잘 인정하지 못합니다. 나와 다른 것을 틀렸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안에서 함께할 수 있는 부분 자체가 사라지고 맙니다.
나의 뜻과 하느님의 뜻은 다를 때가 많습니다. 특히 나의 뜻이 욕심과 이기심에 맞춰져 있을 때 더 크게 달라집니다. 하느님의 뜻은 모두를 향한 사랑에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이 때로는 미련해 보이고, 바보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 맞춰야 커다란 은총과 사랑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기 전에 먼저 가까이 부르십니다. 모든 신앙 활동의 출발점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 곁에 머무는 친밀함이 먼저입니다. 이 친밀함을 통해 더러운 영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서 열두 명의 사도 이름이 등장합니다. 주목할 점은 이 열두 명의 면면이 너무나 불완전하고 이질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세리와 열혈당원, 아마 서로의 생각과 행동이 달라서 원수지간이었을 것입니다. 또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베드로, 툭하면 누가 더 높으냐고 다투던 제베대오의 아들들, 심지어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자격이 완벽한 사람을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보다 부르신 다음에 자격을 만들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서로 반대되는 사람이 있어도, 또 불완전한 사람이어도 당신 가까이 부르십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뜻과 우리의 뜻은 다릅니다. 어떤 뜻을 따라야 할까요? 사랑이신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 역시 세상을 향해 사랑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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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열 두 사도를 뽑으시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마태 10,1-7)
1) 복음서 저자들이 복음서에 열두 사도의 명단을 기록한 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사도들의 이름으로 압축해서 기록해 놓은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열두 사도의 명단을 볼 때마다 자연스럽게 그들이 한 말들과 일들을 생각하고, 그 말들과 일들에 연결되어 있는 예수님의 말씀들과 일들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시고, 그들을 주춧돌로 삼아서 교회를 세우신 것은, 당신이 승천하신 뒤에, 또 재림하실 때까지, 신앙인들이 스스로 일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구원 사업’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일이면서 동시에 사람들 자신들의 일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들과 해야 하는 일들은 우리가 스스로 해야 합니다.
2) 사도들은 예수님으로부터 권한과 능력을 위임받아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계속하는 임무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의 명단에 배반자 유다의 이름도 들어 있는 것은, 복음서 저자들이 복음서를 기록할 때 어떤 왜곡이나 조작을 하지 않고, 실제 있었던 일들을 그대로 정직하게 기록했음을 나타냅니다.
인간적인 심정으로는, 유다의 이름을 지우고 마티아 사도의 이름만 기록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는 어떤 흠도, 티도 없었다고 말하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에 그런 조작이 들어갔다면, 복음서 전체가 신뢰를 잃게 되고, 성경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되어버립니다.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그대는 그대가 배워서 확실히 믿는 것을 지키십시오. 그대는 누구에게서 배웠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어려서부터 성경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사람이 온갖 선행을 할 능력을 갖춘 유능한 사람이 되게 해 줍니다."(2티모 3,14-17) <이 말은, 실제로는 모든 신앙인에게 하는 말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바오로 사도의 편지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을 구원의 기회로 생각하십시오. 이는 우리가 사랑하는 바오로 형제가 하느님에게서 받은 지혜에 따라 여러분에게 써 보낸 바와 같습니다. 사실 그는 모든 편지에서 이러한 것들을 이야기합니다. 그 가운데에는 더러 알아듣기 어려운 것들이 있는데, 무식하고 믿음이 확고하지 못한 자들은 다른 성경 구절들을 곡해하듯이 그것들도 곡해하여 스스로 멸망을 불러옵니다."(2베드 3,15-16)
<이 말은, 당시에 바오로 사도의 편지들이 성경으로 인정받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말이고, 아무나 함부로 성경을 곡해하면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3) “성경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이라는 말에 근거해서, 복음서의 열두 사도 명단에 배반자 유다의 이름이 들어 있는 것도, 더욱이 ‘예수님을 팔아넘긴’이라는 말까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도 ‘하느님의 뜻’에 의한 것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유다를 사도로 뽑으셨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이 문제는 세상 끝 날까지 수수께끼로(신비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어떻든 사도들의 명단은, 묵시록에 언급되어 있는 ‘생명의 책’에 연결됩니다. “죽은 이들이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어좌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책들이 펼쳐졌습니다. 또 다른 책 하나가 펼쳐졌는데, 그것은 생명의 책이었습니다. 죽은 이들은 책에 기록된 대로 자기들의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불 못에 던져졌습니다."(묵시 20,12.15)
열두 사도의 명단은 하나의 명단이지만, 배반자 유다를 제외한 열한 사도의 명단은 ‘생명의 책’이고, 유다의 이름이 기록된 부분만 ‘행실의 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성사 대장의 보존 기간은 ‘영원히’입니다. 한 번 세례를 받으면, 그 이름은 영원히 세례대장에 남아 있습니다.
냉담을 하든, 다른 종교로 개종을 하든 상관없이... 한 번 서품을 받으면 그 이름은 영원히 서품대장에 남아 있는데, 끝까지 가지 못하고 중간에 환속하는 경우에도, 그 사실도 그대로 기록해서 영구 보존됩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생명의 책’에 이름을 기록하거나 지우는 것은 각 개인이 스스로 하는 일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우리는 각자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지금 내 이름은 어떤 책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을까? 나중에 하느님 앞에서 어떤 이름으로 기억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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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찬홍 야고보 신부님]
<기죽지 맙시다.>
여러분의 자녀가 누군가에게 매를 맞고 다닌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십니까? 자녀를 때리는 사람에 대한 분노보다, 맞고 다니는 자녀에게 더 화가 날 것이라 생각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은 세상에서 제일 잘 생기고, 똑똑하게 태어났습니다. 실제, 자녀들 역시 똑똑하게 자랐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녀가 매사에 자신감이 없어 의기소침하고 어깨가 축 쳐진 모습으로 생활한다면 어떠하겠습니까? ‘왜, 그렇게 자신감이 없냐?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생활해라.’고 말씀하실 겁니다.
오늘 12사도를 부르시는 복음 말씀을 묵상하다 보니, 우리가 자녀들에게 격려하고 용기를 주듯이, 하느님 역시 우리에게 그러하시지 않을까 묵상해 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분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더러운 영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쫒아 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는” 사도로 불림을 받은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요, 예수님의 형제자매로 불린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어쩌면 사도로 불림 받은 것보다 더 큰 특권을 부여 받은 존재로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고,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예수님과 공동 상속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분의 자녀가 되었느니, 더 이상 의기소침하거나 기죽은채 살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정신적, 심리적인 요인으로 근심, 걱정, 불안을 느끼며 살아가지 말고, 그러한 것들을 당당히 물리치며 힘차게 살아야 합니다.
실제, 주위에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권고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가 병자를 고쳐주고 더러운 영인 악마를 쫒아낼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 앞에 너무 죽을죄를 지은 죄인처럼 그렇게 숨을 죽인채로 고개 숙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죄인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죽을 죄인이 아니라, 사랑받는 죄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너 죄인이야, 나에게 잘 보여, 그래야 구원받아!’라고 말하기 위해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자녀요, 사도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아무것에도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기쁘게 살아가거라. 너 스스로 너를 힘들게 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너를 힘들게 하지 않는단다. 너 스스로 아프게 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너를 아프게 할 수 있는 것은 없단다.’
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우리를 부르시어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고 힘차고 당당하게 살아갑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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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송동림 레오 신부님]
<부르심>
제가 사제성소에 마음을 두게 된 것은 지금은 고인이 되신 성골롬반 외방선교회 설 요한 신부님의 영향이 컸습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평소 여행을 좋아하던 저는 어느 해 배낭을 메고 혼자 부산으로 여행을 갔습니다. 하루는 시내를 지나게 되었는데, 식물을 좋아하는 제게 어떤 분이 나무 한 그루를 소개해 주셨습니다. 사진 속 나무를 보여주면서 아주 귀한 나무며 우리나라에는 흔하지 않다는 설명을 덧붙었습니다. 그 나무에 호기심이 생긴 저는 나무를 구하고 싶은 마음에 그분한테서 받은 주소만 갖고 무작정 그곳을 찾아갔습니다.
농장 주인에게 인사를 건네며 나무 한 그루만 구하고 싶다고 했는데, 주인은 저의 청을 거절했습니다. 실망하고 돌아서는데 많이 아쉬웠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고향 선배님 댁에 갔다가 그 나무를 보았습니다. 놀라운 표정으로 그 나무를 어디에서 구했는지 여쭤보았더니, 신부님한테서 선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후 혼자 성당에 갔고, 그때 제 생애 처음으로 만난 신부님이 바로 설 요한 신부님이셨습니다. 신부님은 처음 보는 제게 친절하셨습니다. 그리고 신부님께서는 현재 그 나무를 갖고 있지 않지만 아일랜드에 연락하면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제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여러모로 배려해 주시는 신부님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고향 선배님의 권유로 교리를 받게 되었고 예비자로 성당을 다니면서 신부님의 모습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특히 머나먼 타국에서 신자들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 신자들에 대한 섬김의 자세, 미사 전에 성당 마당을 거닐며 기도하시는 모습 등은 당시 제 삶의 진로에 동요를 일으키게 했습니다. 신부님처럼 살고 싶었습니다. 이후 세례를 받고 신학교에 입학해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가끔 당시를 떠올리며 주님의 이끄심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사제의 길을 걷는 지금 고귀하게 다가온 제 성소의 시작이 훗날 주님 보시기에 좋게 마무리될 수 있기를 간구하는 마음이 큽니다. 여러 길 중에서 사제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파견하십니다. 사제 생활 12년째를 보내는 지금, 부르심을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부르심 받은 사람답게 사는 것이고, 사제가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제답게 사는 것이고, 은총을 받는 것 못지않게 받은 은총을 잘 간직하며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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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을 첫자리에 두셨을까요? 그들이 하느님에게서 가장 멀리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하느님을 잘 알고 있고, 하느님께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신 구원의 역사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언자들을 통하여 선포된 하느님 말씀에도 익숙하였고, 회개하는 삶이 무엇인지도, 어떻게 하여야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살 수 있는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1,11)라는 요한 복음서의 말씀처럼, 이들은 누구보다도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예수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움직이나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키나요? 아니면 이미 하느님에 대해서, 또한 그분과 함께하는 삶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만, 그분과 상관없이 사는 삶에 더 익숙하지는 않나요? 익숙하거나 매우 잘 안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람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비록 함께 있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아주 먼 관계일 수 있음을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습니다.
‘들음’이 사라진 관계를 하느님과 맺지 마십시오. 들음이 끊긴 삶은 아무리 가까운 관계라 할지라도 서로 멀어지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지금 자신이 그분에게서 멀리 있다고 느껴진다면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삶부터 다시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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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가야 할 이유>
오늘 주님께서 하시는 행위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제자들 중에 열둘을 부르시는 것이고, 또 하나는 뽑으신 그들을 파견하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셨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제일 중요한 말이 ‘가서’라는 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부르셨다는 말도 중요하지만 부르신 것도 실은 파견하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왜 가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찾아가지 않으면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지 않는 사람 가운데 싫어서 오지 않는 사람 곧 배부른 사람도 있지만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하는 사람 곧 어제 복음에서 얘기하는 그 기가 꺾인 사람들, 그래서 주님께서 가엾이 여긴 사람도 있는데 찾아갈 사람은 바로 그들인 겁니다.
저는 서울역을 자주 가지 않지만, 가끔 갈 때면 마음이 불편합니다. 서울역에서 복음을 선포한다며 확성기를 크게 틀어놓는 이들 때문에도 그렇지만 노숙자들을 모아놓고 먹을 것을 주며 복음을 선포하는 것을 볼 때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다른 이유 때문입니다. 그것이 제 마음을 찌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을 그들이 하기 때문이고, 그들이 하는 걸 우리가 하지 않기 때문이며, 더 정확히 얘기하면 제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희 한사랑 공동체 형제들이 서울역 근처에서 아주 훌륭하게, 개신교 방식과는 다르게 그들을 찾아가는 복음 선포를 하고 있지요.
어쨌거나 그들의 가난 때문에 그리고 우리의 외면 때문에 스스로 찾아오지 못하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 있다는 것은 불편한 진실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불편한 진실에 눈감지 말아야 하고, 이러저러한 이유로 우리가 배척하는 그들, 이러저러한 이유로 스스로 찾아오지 못하는 그들을 우리는 찾아가야 하고, 그 밖에도 교회 안에 설 자리가 없어 찾아오지 못하는 이들도 찾아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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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마태 10,6)
<복음화의 시작은 나로부터!>
오늘 복음(마태 10,1-7)은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시고, 파견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권한을 주시어 세상 안으로 파견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가 되게 하십니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마태 10,2-4)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마태 10,5ㄴ-7)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하느님을 모르는 이민족들이나 이방인들에게 가지 말고, 왜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고 하셨을까? 그리고 그 의미는 무엇일까?
이스라엘 집안은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민족입니다. 그래서 선민의식(選民意識)이 강했고, 그러한 모습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파견되신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런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가서 그들을 먼저 하느님의 참자녀가 되게 하라.'는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 나에게 다가온 의미는 '내가 먼저 복음을 믿어야 하고, 내가 먼저 복음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복음화의 시작은 나로부터' 라는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너희는 맛보고 눈여겨 보아라,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행복하여라, 그분께 피신하는 사람!"(시편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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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마태 10,6)
언제나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가장 먼저
돌보아야 할 이들은
언제나 가장 가까이에 있습니다.
길 일은 양을
찾아 나서는 한 걸음이
복음의 시작입니다.
복음은 언제나
가까운 곳에서
시작됩니다.
구원의 은총은
이렇듯이 가까운 곳에서
시작되어 모든 민족에게로
확장되는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입니다.
길 잃은 양은
단지 종교적 상태를 넘어,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이들을 말합니다.
우리의 약함과 갈망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만납니다.
소중한 마음을
잃어버린
우리들 삶입니다.
중요한 것은
길을 잃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시 길을 찾을 수 있는
관계와 사랑을 만나는 것입니다.
교회는 길 잃은 사람을
기다리는 공동체가 아니라
먼저 찾아가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는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먼저 찾아가는
사랑입니다.
길 잃은 양들에게
가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먼저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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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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