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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에 대한 영적 깨달음이 구원의 전부인 것처럼 말하는 가수 박진영의 구원관, 구원파와 정말 다른가?
구원받는 회심의 사건, 즉각적인가 점진적인가?
-<온전한 회심 그 7가지 얼굴>(고든 스미스/CUP)
"황금이 없는 사람도 황금을 사랑할 수는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어거스틴의 말이다. 거듭남의 증거를 확인하는 리트머스 페이퍼에는 사랑이 반짝인다. 자연인은 성령의 역사 없이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한국의 대표적인 연예기획사 JYP의 가수 박진영 씨가 ‘구원 간증문’을 공개해 교계 안팎에 큰 화제를 불러모았다. 간증문에서 그는 즉각적인 한 번의 영적 깨달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처럼 표현하고, 한 번 말씀을 깨달아 믿어지는 경험을 하고 나면 다시는 지옥에 갈 수 없다고 말한다. 그가 실제로 구원파와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가 공개한 간증의 내용이 구원파적 구원관을 그대로 내포하고 있다는 팩트가 중요하다.
영향력 있는 한 대중문화계 인사의 간증문이 우리 교계와 사회에 기독교의 참된 회심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는 때에 온전한 회심의 문제만을 집중적으로 다룬 이 책은 여러 모로 균형 잡힌 신학적, 실천적 나침반이 되어줄 만하다. 기독교의 회심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부터 성경적인 회심의 핵심요소 7가지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어 성경적 회심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체크 리스트를 제공해준다. 이 책의 요지를 얼개로 삼아 여기서는 가수 박진영 씨의 구원 간증문에 나타난 회심에 대한 현대 개신교의 가장 대표적인 오해 하나를 성경적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말씀에 대한 영적 깨달음이 구원의 전부인가?
“2017년 4월 27일 밤 10시. 히브리서 10장 10절을 읽다가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수십 번 읽었던 구절인데 ‘우리’라는 말 속에 내가 들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아니 그 전에도 논리적으로는 알았지만 마음에서 처음으로 사실로 느껴졌다.”
박진영 씨는 자신의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지독한 운이 따라줘서 성공할 수 있었다는 생각에 그러한 운을 주관하는 신이 있을 거라고 가정한다. 그래서 신을 어디서 만날 수 있는지 찾다가 기독교의 성경만이 창조자가 이 세상을 어떻게 왜 만들었는지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는 걸 발견하고 성경이 진실한가에 대해 탐구해나갔다. 성경에 하나라도 틀린 예언이 있다면 가짜일 거라는 전제 아래 예루살렘에서 두 달을 보내면서까지 성경의 허점을 찾았지만 실패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성경을 읽다가 속죄에 대한 영적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 내용은 구원파의 구원 공식과 거의 일치한다.
구원파가 중시하는 속죄의 말씀에 대한 영적 깨달음은 신학적으로 칭의의 단계에 있는 회심의 한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회심의 가장 핵심적인 의미를 어떤 믿음 체계나 진술과의 만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이라고 정의한다(p.309). 또한 구원받는 믿음의 사건, 곧 회심은 즉각적인 경우도 있지만 “대다수 사람들이 장기간에 걸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나아온다”(p.63)고 말한다. 즉각적인 체험이나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경우라도 그것은 구원의 여정의 출발점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회심의 목표는 단순히 죄의 결과인 지옥이나 정죄나 징벌로부터 벗어나는 것에 있지 않다. 회심의 결과로 죄책감과 속박과 소외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회심의 목표는 죄로 말미암아 곤경에 빠진 상황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사람으로 자라게 하는 것이다”(p.44).
그러나 그동안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복음주의 개신교 역시 이 칭의 단계의 회심이 구원의 전부인 양 오해해온 것이 사실이다. 저자는 예수님 안에서 얻는 칭의와 수용과 용서의 기초를 경시한 채 율법주의나 행위에 따른 칭의로만 구원의 공식을 맞춰온 가톨릭의 구원관을 비판하면서 개신교도 실제로는 비슷한 오해를 해왔다고 말한다.
“복음주의 전통에서도 칭의를 인정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멋진 출발점이기보다는 최종적인 목적으로서 칭의를 인정하였다. 복음주의자들은 명시적으로든 암시적으로든 진정한 변화의 필요성을 거부해왔다. 두 전통과는 아주 다르게, 구원에는 칭의와 성화가 둘 다 포함되어 있다”(p.47).
저자는 또한 ‘회심한다’는 말이 ‘구원받는다’는 말로 동일시되면서 복음주의 전통 안에 있는 사람들을 넘어지게 만들었다고 진단하면서 구원의 궁극적 완성은 불가피하게 미래에 일어난다고 말한다. “회심을 언급하기 위하여 ‘구원하다’라는 말을 오로지 과거 시제로만 사용하는 것은 구원에 대한 성경의 개념을 교묘하게 약화시킬 뿐만 아니라 회심의 전체적인 의미를 적절히 받아들이지 않는 행위다”(p.49).
죄 사함을 깨닫고 나면 지옥 가고 싶어도 못 가나?
가수 박진영 씨는 자신의 간증문에서 “난 이제 백보좌 심판(계 20:12)에 가지 않기에 지옥에 가지 않는다. 아니 갈 수가 없다”고 말한다. 속죄의 객관적 사실을 깨닫고 단번에 죄를 다 용서받았기 때문에 자신은 이제 지옥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다는 뉘앙스다.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한 예수님의 역사적 죽으심과 부활이 단번에 이뤄졌다는 진리를 지극히 개인적으로 적용해서 ‘단번의 회심’을 구원의 유일무이한 효력으로 삼으려는 구원파적 구원관이 이 대목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저자는 이러한 오해에 대해서도 답이 될 만한 말을 전한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회심은 우리의 죄를 깨끗이 용서받는 경험이라고 말한다. 회심을 통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가 용서받는다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우리 죄가 모두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경축해야 하지만, 우리 과거의 죄가 용서받았으며, 이제 우리의 전 존재가 죄에 맞설 수 있도록 온전히 변화되었다고 말하는 게 아마 가장 정확할 것이다. 우리는 미래에 죄를 지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 죄를 깨달았을 때, 이미 우리 죄가 모두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고백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보다는 우리 존재가 죄와 맞서도록 변화되었기 때문에 고백을 통해서라야 이와 같은 기본적인 정신 자세와 마음 자세로 돌아가게 된다는 인식이 훨씬 더 중요하다”(p.314).
저자가 이 책에서 인용한 존 웨슬리의 말은 구원파의 즉각적인 회심에 대한 강조를 무색케 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어느 장소에서든 단 한 번의 동일한 순간에 죄악의 용서와 성령의 지속적인 증거와 새롭게 깨끗한 마음을 받았다는 사례를 알지 못한다”(p.169).
예수님과의 올바르고도 지속적인 관계를 중시하는 성경적인 회심관은 자연스럽게 지정의의 요소를 골고루 중시하게 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온전한 회심의 7가지 얼굴로 믿음(지적 요소), 회개(참회의 요소), 신뢰와 용서에 대한 확신(정서적 또는 감정적 요소), 결단과 충성과 헌신(의지적 요소)을 내적 요소로 분류하고, 물세례(성례적 요소), 성령을 선물로 받음(은사적 요소),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공동체적 요소)을 외적 요소로 구분하여 제시한다.
저자는 이러한 회심의 7가지 요소들은 서로 뚜렷하게 구분되지만 따로 떼어놓을 수 없고 서로 강화시켜주며, 어떤 경우에는 한 가지 요소가 한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요소의 필요성에 직면하여 그 가능성을 열어놓을 수 있도록 돕는다고 말한다(p.271). 특히 성경에서는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차원의 회심 요소가 전체를 요약하기 위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p.273). 따라서 한 특정 구절만을 들어 성경적인 회심의 전체 그림을 축소해서 이해하거나 제시하려는 태도는 지양하는 게 좋다.
“진실한 감정을 곁들이지 못한 회심은 결과적으로 지적인 부분과 윤리적인 부분도 방해할 것이다. 순종을 배우고 실행하지 못한다면, 결과적으로 우리의 이해 영역에도 피해를 줄 것이다. 공동체와 연결되는 부분이 부족하다면, 결과적으로 공동체에서 맛보는, 생명력 넘치도록 우리를 지키시는 은혜를 마음껏 누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감정이 새로워지지 않은 도덕적인 변화는 일반적으로 엄격한 율법주의와 편협함 또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인내심의 부족을 초래한다. 오로지 지적이기만 한, 그래서 일차원적인 회심은 사색적인 사람들을 만들어낼 뿐이다”(p. 276).
회심을 일회성의 과거사로만 여길 수 없는 이유
목회 현장에서 목회자들은 새로운 신자와 관계를 맺기 시작할 때 그의 내면에 건전한 회심의 기초가 세워졌는지, 무엇이 결여되고 무엇을 충당해야 하는지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온전한 회심의 7가지 요소 가운데 하나라도 보충되지 않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영적인 불구자로 자랄 것이기 때문이다(p.277). 따라서 모든 회심의 과정들이 교회 공동체를 통해 점진적이고도 상호보완적으로 이뤄지게 하는 총체적인 관점의 목회 전략이 요구된다.
이 과정에서 지성적으로는 생각을 변화시켜 세계관의 철저한 기독교화가 이뤄져야 하고, 죄를 자각하고 거기서 돌이켜 전적으로 예수님께로 향하는 회개, 자신이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다는 용서의 확신 가운데 감정적으로 기쁨의 경험을 촉진하며 내면의 가장 깊은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삶의 근본적인 방향 전환, 충성의 대상을 바꾸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일상의 삶에서도 하나님만 전적으로 신뢰하는 참된 제자도로서의 믿음이 강조되어야 한다(pp.297-336).
이러한 온전한 회심의 7가지 요소들은 어거스틴이나 이그나시우스 로욜라, 존 웨슬리, 도로시 데이와 같은 영적 거장들의 장기간에 걸친 회심의 여정이 담긴 이 책의 전반부에도 암시되고, 저자가 신약의 요한복음과 사도행전, 바울 서신에 나타나는 회심의 요소들을 찾아내는 데서도 예시된다. 교회사적으로는 행함을 강조한 베네딕트 수도회의 전통과 즉각적 구원을 강조한 개혁주의 전통, 그리고 성령 세례에 의한 변화를 강조한 성결–오순절 전통을 소개하면서 성경적인 회심의 요소들을 추적했다. 저자는 이 모든 요소들은 회심의 목표를 점진적인 영적 변화와 성숙에 둘 때 성경적으로 온전하게 통합될 수 있다고 보았다(p.155).
이 책에서 “‘개혁주의’ 전통은 회심을 과거 시제인 단번의 경험으로 본다”(p.152)고 지적하는 저자는 이 전통이 하나님의 사랑과 수용에 대한 명백한 인정이라는 장점을 가진 반면 영적인 생명력과 성숙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긴 단점이 있다고 말한다. “로마 가톨릭 기독교가 항상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의 위협과 싸워왔다면, 개혁주의 개신교는 언제나 값싼 은혜의 문제와 씨름해왔다.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아닐지라도, 수많은 사람들의 경우 하나님의 사랑과 수용이 자동적으로 인격적인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다”(p.153).
단순하고 결정적인 회심만 강조하다보면 반복적이고 일상적인 것들과 성숙의 과정을 무시하기 쉽다는 사실은 미국의 신앙부흥운동에서 얻어야 할 역사적 교훈이기도 하다(p.176). 이 책에서 저자는 미국의 부흥사 찰스 피니가 회심의 첫 단계를 각 사람이 의지적 결단에 따라 제단 초청(Altar Call)에 응하는 정도만으로도 인정해주는 대신 그 이후의 성화 과정에서 철저히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강조한 사례도 소개하는데, 복음주의 개신교는 찰스 피니의 ‘회심 패키지’를 절반만 받아들여 회심의 첫 단계를 제단 초청이나 영접기도 정도로 손쉽게 채택한 반면 그 이후 철저한 성화의 삶은 찰스 피니가 중시한 만큼 강조하지 않은 부분을 맹점으로 꼽았다(p.182).
한국의 개혁주의 개신교는 칭의와 더불어 말씀에 대한 순종과 성화의 삶을 철저하게 강조한 칼빈의 가르침보다는 성화를 단순히 칭의의 자연스런 결과라고 본 루터의 종교개혁적 전통을 더 따라왔던 듯싶다. 루터에게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의 결과였기 때문에 성화는 구원에 포함된 두 번째 요소가 아니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성장을 꼭 이뤄가야 한다는 생각, 즉 칭의에다 무언가를 ‘덧붙여야’ 한다는 생각에 루터교인들이 불편한 반응을 보였던 이유인데(p.167), 구원파의 즉각적인 회심관의 영향에 노출되었던 한국교회 역시 이와 비슷한 반응을 보여 왔다.
물론 말씀에 대한 단번의 영적 깨달음도 회심의 한 단계에 속할 수 있다. 그러나 개별적인 자기 체험에 기반을 두고 그것만이 구원의 전부라고 절대시하면서 각자의 기질과 경험에 따라 다양한 경로로 찾아와주시는 하나님과의 만남, 회개와 인격적인 결단을 통해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분과의 올바른 관계를 중심에 두는 점진적인 과정으로서의 전인적인 회심을 무시한다면 전반적으로 왜곡된 구원관을 낳을 수 있다.
복음전도는 “다른 사람들을 권면하여 자신들의 삶 가운데 일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반응하도록 돕는 것”(p.433)이기도 하다. 그래서 전도의 단계에서도 시간을 두고 인내하며 기다려주는 가운데 교회 공동체에 참여하는 멤버들에게 때마다 그들이 가진 오해를 풀어주면서 지속적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과정 중심의 변증전도가 회심전도에 필수적이다.
-더 깊은 탐구를 위한 연관 질문
1. 회심의 목표가 단순히 죄의 결과인 지옥이나 정죄나 징벌로부터 벗어나는 데 있기보다 변화된 사람으로 자라게 하는 데 있다면, 단회적이고도 특별한 회심에 집착할 이유가 있을까? 점진적인 회심은 단회적인 회심과 어떻게 다른가?
2. 회심과 관련해서 즉각적인 체험이나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경우라도 그것은 구원의 여정의 출발점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은 성경적이라고 보는가?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회심의 핵심적인 의미라면 회심 이후 성숙의 과정에서 어떤 요소가 가장 중시되어야 할까?
-더 깊은 탐구를 위한 관련 도서
<회심의 변질>(알렌 크라이더, 대장간)
초기 기독교가 성경적 전통을 이어받아 진정한 회심을 심리적 변화나 개인적 경험만이 아닌 신자의 삶의 총체적 변화, 곧 신념과 행동과 소속의 변화로 여겼다는 사실에서 출발해 4세기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 이래 이러한 회심관이 어떻게 변질되었는지를 논증한 책. 공동체적인 삶이 녹아든 회심이 어떻게 ‘구원의 확신’과 같은 내면세계나 개인의 윤리로만 축소되어왔는지를 보여준다.
“신념, 소속, 행동의 변화를 중시했던 초대교회의 회심은 4세기와 5세기에 들어 신념을 강조하는 대신 행동에 대한 가르침은 위축시키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4세기 말엽 어거스틴의 회심으로 심리적 경험이 중시되는 변질이 일어났다. 어거스틴 이전의 초대교회 성도는 올바른 신념을 강조했고, 경험이나 내면세계에 대한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 그들에게 진리로의 통찰은 실천적 참여에서 나오고 배움은 행위의 산물이었다”(p.193).
<신약에서 말하는 회심>(리처드 V. 피스, 좋은 씨앗)
바울의 다메섹 경험은 회심이 아니라 천상의 예수님으로부터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특별한 사건이어서 신자들이 보편적으로 겪는 회심의 유형으로 볼 수 없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가면서 경험한 점진적인 회심이 성경적인 회심이라 보고 과정 중심의 회심과 전도 패러다임의 필요성을 강조한 책.
“신비 경험과 회심 경험은 서로 다르다. 회심은 깨달음에서 시작된다. 회심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점검하고 어떤 식으로든 교정할 필요를 느낄 때 일어난다. 옛길에서 돌아서고 싶은 욕구,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새로운 길을 가야 한다는 자각이 움튼다. 반면 신비 경험은 그저 경험일 뿐이다.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에서 어떤 사실도 안 드러난다. 회심은 깨달음과 돌아섬으로 바른 방향으로 인도된다. 그러나 새로운 길을 적극적으로 따를 때까지는 돌아섬이 완결되었다고 보지 않는다”(p.118).
-안환균, <기독교 팩트체크>(두란노)에서
첫댓글 박진영씨가 회심하고 사역자가 됐다하여 호기심반 반가운맘반으로 집회에 가봤어요....
되게 맞는말을 설교하셨는데 2% 찜찜한 마음을 숨길수가 없네요.
저의 지인집사님은 박진영씨가 하는 교회에 가볼까 고민하셨는데 전 만류했습니다... 먼지 모르게 정말 2% 찝찝합니다 ㅠㅠ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구원파적 구원관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회심 이후 실제 삶이 변화된 증거로 꾸려가는 연예 사업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가치관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가 하는 데 대한 의구심도 그 2%에 들어 있지 않을까 싶네요~
믿음의 형제에 대하여 섣부른 판단은 금해야 하겠습니다. 신학적인 반론인지, 아니면 성령님의 감동과 생각인지 잘 분별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우리가 예정을 입어 선택되었고, 영생을 가졌고, 죄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또다른 말씀에는 한 번 비췸을 받고 타락한 자는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과 구원을 이루어 가라는 경고의 말씀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전자는 하나님의 관점이요, 후자는 인간의 관점이겠지요. 난해하지만 피조물인 인간의 이해의 한계, 모순된 것 같지만 동전의 양면과 같은 진리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구원파는 지속적인 회개의 필요성을 무시하니 거짓이며, 언제나 회개하며 예수님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는 죄와 저주로 죽었던 자였고, 박진영씨처럼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복음을 깨닫고 은혜로 구원받은 자요, 주님 편에서 예정되고 택정함을 입었으며, 또한 현재 구원을 이루어 가는 중임을 믿습니다!
첫열매 라는 박진영씨 유투브에 가면 방언에 대한걸 이야기하는 짧은 동영상이 있는데, 방언을 부정합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