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왕릉원(옛 송산리고분군) 윗부분은 공주 천도를 단행한 문주왕과 그 아들인 삼근왕계가, 밑에는 무령왕을 중심으로 무령왕보다 먼저 죽은 순타태자, 그리고 무령왕계 왕족이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백제 웅진시대 하면 63년(475~538)을 가리킨다. 그때의 백제왕은 문주왕(재위 475~477)-삼근왕(477~479)-동성왕(479~501)-무령왕(501~523)-성왕(523~554, 538년 사비 천도) 등 5명이다.
이중 부여천도를 감행한 성왕은 부여 왕릉원(옛 능산리고분군)에서 가장 먼저 조성된 ‘중하총’에 안장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공주 왕릉원에 묻힌 임금은 문주왕-삼근왕-동성왕-무령왕 등과 그 가계 왕족으로 좁혀진다. 공주 천도와 함께 왕위에 오른 문주왕과 삼근왕은 같은 가계(부자)이고, 동성왕은 문주왕의 동생인 곤지(?~477)의 아들이어서 다른 가게를 이루고 있다. 동성왕의 뒤를 이은 무령왕은 동성왕의 아들(삼국사기)이거나 이복형제(일본서기)이다.
어떻든 간에 공주 왕릉원의 가계는 문주왕-삼근왕계, 동성왕-무령왕계로 나눌 수 있다. 현재 왕릉원의 입지상 얼추 맞아 떨어진다. 구릉 윗부분, 즉 1~4호분은 한성 백제의 전통을 잇는 돌방무덤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 막 한성에서 천도한 문주왕-삼근왕계가 1~4호분을 차지한 거다. 그렇다면 그 아래 5·6호분은 동성왕-무령왕계가 자리 잡고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래서 무령왕릉과 바로 붙어있는 6호분의 주인공을 동성왕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동성왕-무령왕 조합은 굉장히 어색하다. <삼국사기>는 “501년 백가가 자객을 보내 동성왕을 시해한 뒤 무령왕이 즉위했다”고 하면서 “인자하고 너그러워 민심이 그를 따랐다”고 적고 있다. <백제신찬>을 인용한 <일본서기>(무열·502)는 훨씬 구체적이다. “백성들이 무도하고 포악한 동성왕을 제거하고 무령왕을 세웠다”고 했다. 아무리 같은 가계, 즉 부자간(삼국사기) 혹은 이복형제(일본서기)라 해도 두 분이 그렇게 사이좋게 누워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견해가 나오고 있다. <삼국사기>는 “493년, 백제 동성왕과 신라 소지왕이 결혼동맹을 맺었다”고 했다. 4호분에서 나온 은제 허리띠가 동성왕이 받은 혼인예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4호분은 동성왕의 무덤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왕릉원 서쪽에 있는 교촌리 3호분 역시 무령왕릉 및 6호분과 같은 전돌무덤이다. 그래서 교촌리 3호분이 동성왕릉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정변으로 죽임을 당한 동성왕을 무령왕릉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 따로 모셨다는 것이다.
6호분의 주인공이 무령왕의 전처라는 주장도 나왔다. 무령왕릉에서 젊은 여성의 치아가 확인됐는데 이 여성의 나이로 미뤄봤을 때 성왕의 생모일 수 없다는 것이다. 무령왕에게 첫째 부인이 있었고, 그 부인이 무령왕보다 먼저 사망하자 6호분을 축조해서 안치했고. 정작 무령왕은 별도의 무덤(무령왕릉)을 조성해서 훗날 죽은 젊은 후처(계비)와 묻혔다는 주장이다.
여러 주장 가운데는 순타 태자설도 흥미롭다. <일본서기> ‘게테이(繼體)’조는 “513년(무령왕 13) 8월26일 백제 태자 순타가 서거(薨)했다”고 전했다. 그리고 276년 뒤인 789년 <속일본기> ‘간무(桓武)’조에 흥미로운 기사가 보인다. “12월 간무(桓武) 천황의 생모인 황태후(야마토노니가사·和新笠)가 죽었다. 황태후의 선조는 백제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태자에서 나왔다.” 그러니까 간무 천왕(재위 781~806)이 백제계 황태후의 아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6호분의 주인공은 아버지 무령왕보다 먼저 죽은 순타 태자의 무덤일 수도 있다. 물론 그보다 뒤에 조성된 5호분과 29호분 역시 무령왕의 혈족일 가능성이 짙다. 특히 29호분에서도 나중에 묻힌 남성은 백제가 사비로 천도한 직후에 부인이 묻힌 공주 땅에 사후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물론 이 모든 이야기는 추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