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창
형제의 꿈
서울대총동창신문 제540호(2023.03.15)
김억중
건축74-78
전 한남대 건축학과 교수
김인중 큰형님이 권한 건축가
화가이자 신부인 당신의 꿈 이루려 동생인 내가 빛섬의 완성 꿈꾼다
꿈의 원년 1975년! 교양과정을 마치고 전공학과를 선택해야 할 무렵 건축과에 가라고 단박에 정리해주신 분이 큰형님이셨다. 미술대학 회화과 17회 동문으로 2022년 관악대상을 받으셨던 바로 그분 ‘빛섬 김인중’. 장형부모라 하지 않던가. 큰형님께서 정해주신 대로 건축가의 길을 운명처럼 들어서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그 때 당신은 화가로서 나는 건축가로서 훗날 빛나는 작품을 함께 해보자는 꿈을 야무지게 꾸고 계셨던 듯하다.
하지만 길거리 곳곳에 화염병이 날아들던 하수상한 시절, 수업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한 채 건축 공부는 언감생심, 아무런 가르침을 기대할 수 없었던 환경 속에서도 어떻게든 건축가가 되어야겠다는 다짐만 했을 뿐 엉겁결에 학사모를 쓰고 말았다. 그러던 1980년, 텅 빈 머리로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그것도 큰형님의 장학금 주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겠지만 말이다. 큰형님께서는 파리공항에 내리자마자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향하시며 나보다 더 흥분하셨다. 싹수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셨을 터지만 아우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크셨을까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날 이후 오전에는 프랑스어 공부를 하고 오후 내내 세느강변 구석구석을 스케치하며 돌아다녔다. 늦은 오후면 그날 그린 그림을 큰형님께 보여드리고 한 수 가르침을 청하곤 했다. 하지만 내가 좋다고 생각한 그림을 때론 혹평하시기도 했고 대충 그린 그림은 되레 잘 그렸다고 하실 적엔 심히 헷갈리곤 했다. 일부러라도 혼란에 빠트려 스스로 빠져나오도록 하셨던 것이 큰형님의 아우단련법이었다고나 할까.
덕분에 누군가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길을 찾아야 한다는 각오로 스위스에 건너가 본격적인 건축 공부를 시작했다. 기교와 재주를 경계하며 두문불출 6년 동안의 독락당 시절. 하늘과 땅과 사람 사이, 끈질긴 인연을 맺어주는 일이 건축의 본령임을 알고 공부의 길을 터득했다.
1986년, 교수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학생들을 가르치기보다는 스스로 깨우치도록 도우려 했다. 한편으로 건축설계를 제대로 하고자 서권향 가득한 작업실에 파묻혀 집다운 집의 진면목을 찾느라 여념 없이 지내왔다.
나름 세태에 휘둘리지 않고 건축가의 길을 올곧게 가고 있던 2020년, 큰형님께서 화가로서 말년의 골든타임을 고국에서 보내시겠다는 뜻을 내비치셨다. 때마침 정년을 맞아 큰형님께 어떻게 보은해야 할지 고민하던 차였다. 게다가 형제의 꿈을 드디어 실현할 수 있겠다 싶어 마음 설레었다.
충남 청양군에 건립된 ‘빛섬 아트갤러리’에 선 김인중 신부
내 딴에는 빈센트 반고호의 테오처럼, 혹은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디에고처럼 동생으로서 소임을 다하고 싶었다. 작년 11월 드디어 그 꿈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충남 청양군 정산면 소재 100년된 연초창고를 리모델링하여 큰형님 작품을 상설 전시하는 ‘빛섬아트 갤러리’를 오픈했다. 카페테아 기업과 함께 ‘빛을 나누는 섬’, 그 빛섬 1호점을 선보인 계기였다. 화가이자 신부이신 큰형님께서는 늘 당신의 예술 콘텐츠로 인해 소외된 지역이 활기를 되찾았으면 좋겠다 하셨다.
기실 형제의 꿈은 예서 끝이 아니다. 청양에 이어 고향 백제 땅에 4-5호점의 작은 미술관을 연이어 오픈하여 ‘빛섬 순례루트’를 완성하는 꿈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50년을 품어온 형제의 꿈도 이제부터 골든타임을 맞이한 셈 아닌가.
*김 동문은 건축가이자 건축공학자로 대전 아주미술관, 대화동천주교회, 엑스포남문광장 등을 설계했다. 저서로 ‘건축가 김억중의 읽고 싶은 집 살고 싶은 집’, ‘나는 문학에서 건축을 배웠다’ 등이 있으며 ‘브런치’ 블로그(@kuj725)에 건축 에세이를 쓴다.
최근 충남 청양에 스테인드글라스 화가 김인중 신부를 위한 빛섬아트갤러리를 직접 설계해 개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