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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방서예[2181]李白(이백)-秋浦歌(추포가)제15수(其十五)
秋浦歌(추포가)
李白(이백, 701~762)
白髮三千丈(백발삼천장)
하얀 머리카락 길이가 삼천 장
緣愁似箇長(연수사개장)
얽힌 근심으로 올올이 길었다
不知明鏡裏(부지명경리)
거울 속 저 노인은 알 수가 없다네
何處得秋霜(하처득추상)
가을 서리를 어디서 얻어 왔을까
만년에 귀양에서 풀려난 이백(李白)이
안휘성(安徽省)의 한 포구인 추포(秋浦)에서 읊은 연작시 중의 하나다.
시인은 거침없는 과장법을 사용해 노년의 슬픔을 노래한다.
거울을 보니 이미 늙어버린 자기 모습에 놀란다.
어느새 백발이 된 자신의 모습에서 가을 서리를 떠올리며
삶에 대한 깊은 회한을 보인다.
이 시를 지은 후 몇 해가 지난 후 이백은 세상을 떠난다.
지금 사람들은 남자들도 하루에 몇 번씩 거울을 통하여 자기 얼굴을 보며
살아가지만 李太白이 살던 시절엔 아마도 일 년 내내 몇 번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자주 만나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늙어 가는 것을 잘 모른다.
그러나 오랜만에 만나면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볼 수 있다.
李太白이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보며 놀라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며 호들갑은 당연히 아니다.
세월을 따라 검은 머리가 하얗게 세고 팽팽하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패는 것을 누군들 막을 수 있으랴.
살다 보면 머리카락처럼 서로 얽인 인연 때문에
근심과 슬픔은 피할 수 없고 그로 인해 세월의 흔적이
백발과 주름으로 남는데 우리는 그저 순응하며 살 도리 밖에 없다.
매일 거울을 보면서도 자기가 늙어 가는 줄 모르는 사람은 바보다.
*丈(장) ; 길이의 단위, 열 자, 사람 키만 한 길이
1장=10척=3m 3,000장은 9km가 된다.
머릿카락은 하루에 0.3mm 자란다.
3,000장 9km 자라자면, 30,000,000日, 82,191年이나 걸린다.
*緣(연) ; 인연, 연분, 원뜻은 직물의 가장자리
*箇(개) ; 낱낱의 물건을 세는 단위(=個),
여기서는 머리카락 한 올.
白髮三千丈, 緣愁似個長.
(백발삼천장) (연수사개장)
不知明鏡裡, 何處得秋霜.
(부지명경리) (하처득추상)
흰 머리가 삼천 길이나 되다니
저 근심 걱정에 매달리느라 이렇게 자랐구나.
맑은 거울 속이라 해도 믿지 못하겠으니
도대체 어디에서 가을 서리를 맞았단 말인가.
「추포가(秋浦歌)」는 연작시로서 이 시는 그중 15번째 작품이다.
추포는 오늘날 안휘성 귀지(貴池) 서쪽에 있던 마을 이름으로서
이백은 평생 이곳을 세 번 방문하였는데,
이 작품을 지었을 때는 두 번째 방문으로서 시기는
대략 천보 13년(754)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시인은 장안을 떠나 천하를 주유한 지 이미 10년이 되던 터였다.
그는 북쪽 지방을 여행하다가 #안녹산의 난을 직접 보고는
비분강개하는 마음으로 남쪽의 추포로 다시 내려온 것이다.
이 시기에 「추포가」를 연작으로 지었는데,
여기서 그는 추포의 풍물과 민속 등을 읊으면서 자신의 심경을 이입하였다.
그중에서도 여기 소개하는 이 시는 짧지만 인생을 오래 산 사람들의 심정을
진솔하게 대변하므로 전통적으로 노년층에 널리 애송되었다.
이 시는 제1․2․4구에 ‘장(丈)’, ‘장(長)’, ‘상(霜)’ 등으로 압운 되어 있지만,
#평측법을 맞추지 않았으므로 #오언절구가 아니라 #오언고시다.
엄격한 시율을 지켜야 하는 #율시의 한 형식인 절구는
그의 호방한 성격에 맞지 않았나 보다.
노년을 맞은 시인은 여느 노인과 마찬가지로 흰 머리에서 세월을 인식한다.
“흰 머리가 삼천 길이나 되다니 / 저 근심 걱정에 매달리느라 이렇게 자랐구나.”
(#白髮三千丈, #緣愁似個長) ‘장(丈)’자는 길이의 단위로서
원래 자형이 ‘尺(자 척)’과 ‘十(열 십)’자를 합친 모양이므로,
십 척이 한 장임을 나타낸다. 일반인의 키가 팔 척이었으므로
십 척이면 덩치 큰 남자, 즉 장부(丈夫)가 된다.
그래서 우리말에서는 한 장을 남자 한 사람의 키,
즉 한 길로 부른다. 평생 이발을 안 하더라도 머리칼의 길이가
삼천 길이나 된다는 건 말도 안 되지만,
우리는 이런 표현을 과장법이라 여기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만일 과장법을 인정하지 않고 이를 거짓말이라고 우긴다면
그는 아마 편집증 환자일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늙는다는 사실과 자신의 늙은 모습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가 늙어버린 모습에 놀라면서 자신을 그에게 비춰서
자신의 모습도 짐작할 뿐이다. 요즘은 그나마 사진이라도 있어서
예전에 찍어둔 모습과 비교해서 자신이 늙었음을 인식할 수 있지만,
이러한 비교의 대상이 없이 하루하루 살다 보면 늙어간다는 사실은
잊고 사는 게 보통이다.
옛날에는 #효경(孝經)에서 “몸과 머리칼과 피부에 이르기까지
이것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므로 이를 감히 헐거나 다치지 않게 하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라고 가르쳤으므로,
대개 평생 이발하지 않고 머리를 기르면 살았다.
따라서 이 긴 머리를 자주 감는 게 쉬운 일도 아닌 데다가
당시 이리저리 유랑하며 사는 처지여서 머리를 감는 게
아주 오랜만이었을 수도 있겠다. 오랜만에 풀어진 자신의 머리를 보고서는
아마 “내 머리가 언제 이렇게 길어졌지?” 하며 스스로 놀랐을 터이니,
이런 경우 저런 표현이 충분히 저절로 튀어나올 수 있다.
‘백발이 삼천 장’이라는 탄식 속에는 기실 참으로 오래 살았다는 의미도
함께 담겨 있다. 오래 살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당시로서는
즐거웠던 일보다는 늘 근심에 시달리며 살았던 과거가 회상되었을 것이다.
시인은 추방되어 유랑하는 현재의 처지에서 생각할 것이기에 그렇다.
그래서 시인은 “저 근심 걱정에 매달리느라 이렇게 자랐구나”
(緣愁似個長)라고 읊었다. ‘개(個)’자에는 ‘이것’(此)이란 뜻이 있으므로
‘사개(似個)’은 ‘이같이’라는 의미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시인이
‘연수(緣愁)’라고 표현한 부분에 주목해야 한다.
‘연(緣)’자는 ‘실 사(糸)’와 ‘판단할 단(彖)’으로 이루어졌다.
‘단(彖)’자는 흥분한 멧돼지가 좌우 안 가리고 쏜살같이 앞으로
내달리는 모양이므로 나중에는 사물을 가르는 직선을 가리키게 되었다.
따라서 ‘연(緣)’자가 가리키는 원래 의미는
‘옷의 가장자리를 일직선으로 가선을 박아 꿰매다’가 된다.
다시 말해서 두 개의 천 조각을 하나로 이어 붙인다는 뜻이다.
시인이 ‘연수(緣愁)’라고 쓴 것은 앞의 긴 백발이 근심과 하나로
꿰매져 있음을 말하고자 함이다. 근심이 오랜 기간 지속되다 보면
이것이 쌓여서 나중에는 백발이라는 사물이 된다는 뜻이니
이른바 ‘시간의 공간 되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근심과 걱정은 사람을 오랫동안 괴롭혀 왔다.
송나라 #육유(陸游)가 그의 「추흥(秋興)」에서
“일어나 백 바퀴를 걸으며 탄식 몇 번 하니까 /
하룻저녁에 푸르던 머리카락이 가을 서리가 되었네”
(起行百匝幾嘆息, 一夕綠髮成秋霜)라고 읊었듯이,
사람들은 백발의 원인을 근심 탓으로 돌린다.
그렇다면 원하는 대로 근심에서 해방되면 인간은 만족할까?
굳이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들먹이지 않아도
우리에게도 “걱정도 팔자다”라는 익숙한 속담이 있다.
근심 걱정은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는 말이다.
정 걱정할 게 없으면 #기인우천(杞人憂天)처럼
하늘이 무너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라도 한다.
인간에게 불안이 있는 이상 걱정은 계속될 수밖에 없는데,
없는 불안을 일부러 만들어서 걱정한다면 그것은 역설적으로
일종의 쾌락이 아닐까? 이러한 자신의 어리석은 모순을 피하려고
시인은 근심 때문에 백발이 삼천 장이나 되었다고 너스레를 떤 것이 아닌가 싶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시인은 더 나아가 이런 모습을 보여준 거울까지 탓한다.
“맑은 거울 속이라 해도 믿지 못하겠으니 /
도대체 어디에서 가을 서리를 맞았단 말인가.”
(#不知明鏡裡, #何處得秋霜) 거울은 있는 모습을
그대로 비춰줄 뿐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길게 늘어진 백발을 보고
놀라서 거울을 들여다보니 그때서야 머리끝만이 아니라
윗머리도 백발이 되었음을 발견하였으니 도대체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것을 시인은 “도대체 어디에서 가을 서리를 맞았단 말인가?”라고 탄식하였다.
‘추상’은 글자 그대로 늦가을에 내리는 서리다.
이미 황량해진 겨울에 내리는 눈과는 달리 아직 가을 기운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갑자기 들이닥친 흰 서리는 놀라움과 추위를 동시에 충격적으로 안겨준다.
이런 된서리를 맞으면 그나마 한기를 버티던 식물들마저 다 시들어버리므로,
사람들은 이제 갈무리의 계절인 겨울이 코앞에 와있음을 깨닫게 된다.
마찬가지로 개인도 자신의 머리가 가을 서리를 맞았음을 깨닫는 순간
곧 자신의 인생도 막바지에서 멀지 않았음을 인식한다.
사기 「이사(李斯)열전」의 “그러므로 서리가 내리면 풀과 꽃이 지고,
물이 흔들려 움직이면 만물이 일어나는데, 이것은 필연적인 현상이다”
(故秋霜降者草花落, 水摇動者萬物作, 此必然之效也)라는 구절은 이를 가리킨다.
그래서 ‘추상’이란 단어에 ‘준엄하고 무섭다’라는 의미가 파생되었다.
그런데 시인은 여기서 가을 서리를 ‘득(得)’하였다고 표현하였다.
‘득’이란 길을 가다가 우연히 주웠다는 뜻인 텐데,
머리의 서리는 시인 자신의 말대로 자기가 평생 근심으로 쌓아온 게 아니던가?
이는 자신의 늙음을 인정하기 싫다는 의지를 에둘러 나타낸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울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한다.
이것이 “맑은 거울 속이라 해도 믿지 못하겠다”(不知明鏡裡)라는 말이다.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저 거울 속을 모르겠다”라는 뜻이지만,
이때의 ‘부지(不知)’는 ‘저 거울은 모를 놈이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므로
‘믿을 수 없는 놈이다’라는 의미로 바꿀 수 있다.
사람의 관념은 근본적으로 형이상학적이어서 외부 사물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늘 뒤에 처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관념과 현실이라는
물(物) 사이에는 언제나 차이가 벌어져 있다. 이때 사람은 따라가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기보다는 앞서가는 변화를 탓한다.
예를 들어 군대에서 행군할 때 맨 앞에서 행군을 선도하는
첨병 부대가 언제나 후방 부대로부터 비난을 듣는 것과 같은 이치다.
기실 첨병 부대는 일정한 보조로 걸어갈 뿐인데, 뒤에 따라오는 부대 중간에서
예기치 않은 자잘한 변수로 인해서 약간의 지체가 발생하게 되면 그 여파가
뒤로 갈수록 축적이 되어 맨 뒤에 있는 부대는 내내 뛰어야만 하는 현상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시인도 어느 날 문득 이 간극을 발견하고는 그 충격을 이렇게 표현하였지만,
기실 그 이면을 살펴보면 현실을 인정하고 그에 복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장(丈)’, ‘장(長)’, ‘상(霜)’의 압운에서 이를 느낄 수 있다.
‘장(丈)’자는 젊은 장부의 혈기를, ‘장(長)’자는 다 자란 성인의 완숙함을, ‘상(霜)’자는 서리를 맞아 시들어가는 노년의 복종을 각각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 혈기와 중년의 교만함은 노년의 서리를 맞아 봐야 겸손해진다는 말이다. 삶이 갈무리되는 죽음 앞에서 가을 서리 맞은 초목처럼 숙연하고 복종하지 않을 수 있을까?
참고로 첨부하면, 제3․4구절은 보통 하나의 문장이나, 또는 율시의 #유수대(流水對)처럼 보아서 “거울 속 백발이 어디서 얻어진 건지 알 수 없다”라고도 해석한다. 잘못된 해석은 아니다. 필자는 그보다는 위에서처럼 해석하는 게 더 동적이고 극적 효과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늙어보니까 거울을 탓하는 게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출처] #추포가(#秋浦歌) 제15수(其十五)|작성자 grass old
秋浦歌(추포가)全文
추포가 (1)
秋浦長似秋 추포(秋浦)의 가람 가을인양 길어서
蕭條使人愁 쓸쓸하게 수심을 자아내누나.
客愁不可度 나그네 시름을 헤아릴 길 없어
行上東大樓 동쪽 대루산(大樓山)에 올라 보노라.
正西望長安 바로 서편으로 장안(長安)을 바라보고
下見江水流 아래론 장강 물을 굽어보노라.
寄言向江水 강물아, 말 한번 물어 보자
汝意憶儂不 널랑은 나를 알고 있느냐.
遙傳一掬淚 저 멀리 한 웅큼 눈물일랑
爲我達揚州 날 위해 양주(揚州)에 전해주려마.
추포가 (2)
秋浦猿夜愁 추포의 잔나비 소리 밤에 시름겨운 데
黃山堪白頭 황산(黃山)은 흰 머리를 이고 앉았네.
淸溪非隴水 청계(淸溪)는 변방의 농두수(隴頭水)가 아니언만
翻作斷腸流 어느덧 애끊는 강물이 되었네.
欲去不得去 가려 해도 가지 못하고
薄游成久游 잠깐 들른 사람이 오랜 손이 되었네.
何年是歸日 어느 해나 돌아가려나
雨淚下孤舟 눈물이 비 오듯 외딴 배에 떨어지네.
추포가 (3)
秋浦錦駝鳥 추포의 금타조(錦駝鳥)는
人間天上稀 하늘과 땅에 드물레라.
山雞羞淥水 산닭도 맑은 물이 부끄러워
不敢照毛衣 감히 깃털을 비춰보지 못하노라.
추포가 (4)
兩鬢入秋浦 귀밑머리 드리우고, 추포에 들었더니
一朝颯已衰 하루아침에 허옇게 쇠었도다.
猿聲催白髮 잔나비 소리가 백발을 재촉하여
長短盡成絲 길고 짧은 살쩍이 온통 흰 실 되었다.
추포가 (5)
秋浦多白猿 추포에는 흰 원숭이가 많아
超騰若飛雪 훨훨 뛰며 다니니 눈 날리는 것 같구나.
牽引條上兒 가지 위에 어린 것을 안아다가
飮弄水中月 물을 마시며 잠긴 달을 헤적이노라.
추포가 (6)
愁作秋浦客 쓸쓸히 추포의 길손이 되어
强看秋浦花 하염없이 추포의 꽃을 바라보노라.
山川如剡縣 산과 내는 섬현(剡縣) 비슷하고
風日似長沙 바람과 볕은 장사(長沙)와 같구나.
추포가 (7)
醉上山公馬 취하여 산공(山公)의 말에 오르고
寒歌甯戚牛 영척(甯戚)의 소 붙들고 쓸쓸히 노래한다.
空吟白石爛 부질없이 흰 돌 눈부시다 노래하자니
淚滿黑貂裘 눈물이 초피 갖옷 가득하고나.
추포가 (8)
秋浦千重嶺 추포의 첩첩 산봉우리 중
水車嶺最奇 수거령(水車嶺)이 기이할 손 으뜸이로다.
天傾欲墮石 바위가 떨어질 듯 하늘에서 기울고
水拂寄生枝 겨우살이 가지들은 강물을 스친다.
추포가 (9)
江祖一片石 강조(江祖) 큰 바위 하나
靑天掃畫屛 푸른 하늘이 그림 병풍을 쓸어주누나.
題詩留萬古 시 지어 만고에 남겼건만
綠字錦苔生 푸른 글자에 고운 이끼 돋았어라.
추포가 (10)
千千石楠樹 천천 그루의 석남(石楠) 나무요
萬萬女貞林 만만 그루의 여정(女貞) 숲이라.
山山白鷺滿 산마다 백로가 가득하고
澗澗白猿吟 계곡마다 흰 잔나비 우노라.
君莫向秋浦 그대 부디 추포로 오지 마오
猿聲碎客心 잔나비 울음소리에 나그네 마음 부서진다오.
추포가 (11)
邏人橫鳥道 순라꾼은 가파른 산길에 비꼈고
江祖出魚梁 강의 신(神)은 통발로 솟았다.
水急客舟疾 물살 급해 나그네 탄 배, 나는 듯 하고
山花拂面香 산꽃은 얼굴에 스쳐 향기로워라.
추포가 (12)
水如一匹練19) 강물이 한 필 비단 같으니
此地卽平天 여기가 바로 질펀한 하늘.
耐可乘明月20) 에라, 밝은 달을 타고서
看花上酒船 꽃구경하러 술 배에 올라나 볼까.
추포가 (13)
淥水淨素月 맑은 물에 흰 달이 깨끗하고
月明白鷺飛 달이 밝아 백로가 나는구나.
郎聽採菱女 총각은 마름 뜯는 처자가
一道夜歌歸 돌아오며 부르는 밤 노래 소리 듣는구나.
추포가 (14)
爐火照天地 용광로 불이 천지를 비추고
紅星亂紫烟 붉은 별똥이 자색 연기 속에 튄다.
赧郎明月夜 검붉은 얼굴의 사내가 달 밝은 밤에
歌曲動寒川 부르는 노랫가락 찬 가람에 울리도다.
추포가 (15)
白髮三千丈 백발이 삼천 장
緣愁似箇長 시름에 겨워 이토록 자랐구나.
不知明鏡裏 모를레라, 밝은 거울 속으로
何處得秋霜 어디서 가을 서리를 맞았는지.
추포가 (16)
秋浦田舍翁 추포의 시골 노인장
採魚水中宿 고기를 잡느라 강 속에서 자네.
妻子張白鷴 아내가 백한(白鷴)을 잡으려고
結罝映深竹 쳐 놓은 그물이 깊은 대숲에 어른대네.
추포가 (17)
桃波一步地 도피(桃陂)는 한 걸음 남짓
了了語聲聞 또렷하게 말소리 들리는데
闇與山僧別 말없이 산승(山僧)과 작별하고
低頭禮白雲 고개 숙여 흰 구름에 절하노라.
[출처] 秋浦歌 가을 물가를 노래하다|작성자 물의 노래를 부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