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중생(一切衆生)·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는 이외(以外)의 유락(遊樂)은 없느니라.
경(經)에 가로되「중생소유락(衆生所遊樂)」운운(云云).
이글월·어찌 자수법락(自受法樂)이 아니겠느뇨.
중생(衆生) 중에 귀하(貴下)가 빠지시겠느뇨,
소(所)란 일염부제(一閻浮提)이며 일본국(日本國)은 염부제(閻浮提) 내(內)이니라,
유락(遊樂)이란 우리들의 색심(色心) 의정(依正) 함께 일념삼천(一念三千)·자수용신(自受用身)의 부처가 아니겠느뇨,
법화경(法華經)을 수지(受持)해 받드는 이외(以外)에 유락(遊樂)은 없으며
현세안온(現世安穩)·후생선처(後生善處)란 이것이니라.
다만 세간(世間)의 유난(留難)이 닥치더라도 문제(問題)삼지 말지어다.
현인(賢人)·성인(聖人)도 이 일은 피(避)할 수가 없다,
다만 아내와 더불어 술을 마시고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시라.
고(苦)는 고(苦)라고 깨닫고 낙(樂)은 낙(樂)이라고 열어서
고락(苦樂) 함께 아울러 생각하여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고 계시라,
이 어찌 자수법락(自受法樂)이 아니겠느뇨,
더욱 더 강성(强盛)한 신력(信力)을 다하실지어다,
공공근언(恐恐謹言).
시조깅고전답서(四條金吾殿答書)
어서 1143쪽
젊은날의 일기
1951년 5월 3일 (목) 맑음 –23세-
제2대 회장, 도다 조세이 선생님의 회장 추대식.
― 장소, 무코지마(向島) 조센 사.
맑고 푸르른 하늘, 오후 2시 시작. 축하회를 마치고 오후 9시 해산.
드디어 도다 선생님께서 회장이 되셨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우리들 문하생의 소원이었다. 생애 역사가 되리라, 이날.
모인 동지 약 1천수백 명인가. ―
전진하자, 법기(法旗)도 드높이. 광선유포를 향해.
20억 민중이여 기다려라, 우리 학회의 진군을. ―
새로운 조직에 대한 발표에 상쾌한 간부들의 얼굴.
강연에, 결의에, 확신 발표에 모두 씩씩하게 해내자며 의기왕성 했다.
나는 홀로 모임의 중앙에서 조용히 선생님의 선배 분들이 하시는 이야기를 깊이 듣고 있었다.
10년 후, 학회의 앞날을 확정짓는 청년이 있다는 것을 선생님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
마지막에 선생님을 헹가래쳤던 일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학회를 생각하는 H형의 눈동자가 잊혀 지지 않는다. ―
나오는 길에 창가학회 상주어본존을 호지(護持)하는 공양을 현관에서 모았다. 귀가 11시 조금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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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5월 3일 (월) 흐린 뒤 비 –26세-
제 10회 창가학회 정기 총회.
9시 30분, 니혼대학교(日本大學校) 강당에 도착하였다.
놀랄 만큼 혼잡스러웠다. 참석 인원 ― 2만여 명.
위대한 학회의 발자취에 나 또한 감개무량하다.
12시 25분, 역사적인 총회의 막이 올랐다.
입장식에서 퇴장식까지 4시간 동안, 강인한 생명력이 결집된 대총회였다.
너무나도 작은 나의 존재를 생각했다.
단결이라는 힘의 위대함을 통감했다.
오후 8시, 청소를 모두 끝마쳤다. 묵묵히 청소하는 이름 모를 남녀 청년의 모습에 고개 숙인다.
그에 비해, 이들을 지휘하는 내 자신이 죄송하게 느껴진다.
평생, 그늘에서 노고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절대로 잊지 않으리라 마음속 깊이 맹세한다.
8시 40분, 본보 참모실로 돌아왔다.
청년부 회의, 음지에서의 분투에 감사드린다.
2층, 화장실에서 닛쇼(日昇) 예하를 뵙고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H씨 댁에서, T, U, H, M, R군 등과 함께 1시간 반 정도 간담···.
이 3년간은 특히 교학에 주력하자.
나에게는 폭포 같은 격한 기질이 있다. 이 기질을 선(善)으로 만드느냐 아니면 악(惡)으로 만드느냐는 신심에 달렸다.
유의해서 다음 전진을 해 가자.
12시 다 되어서 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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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5월 3일 (화) 흐린 뒤 비 –27세-
오후부터 가랑비가 내렸다.
12시 30분, 고이와(小岩) 지부가 주최하는 제12회 본부 총회 개최.
참석 인원이 1만5000명을 돌파했다고 한다.
위대한 전진. 끝없는 전진의 축도(縮圖)였다.
입장을 못하고 쓸쓸히 돌아간 사람도 많다고 한다. 가엾게도.
아무런 사고도 없이, 순조롭게 회합을 마쳐 안심하였다.
그늘에서 노고한 청년부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대간부 한 사람 한사람도, 항상 회합 운영을 위해 그늘에서 노고하는 사람들의 힘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하게 생각했다. ― 장래를 위해서도.
5시 30분부터 2차 모임.
N원, ― 대간부 전원 참석. 승려 다수.
사회, 우리들.
건강이 좋지 않다. 금생에서 가장 괴로운 하루였다.
12시, 죽은 듯이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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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5월 3일 (금) 맑음 –29세-
장인어른과 아내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도쿄국제스타디움으로.
구름처럼 용출(湧出)한 지용의 전사, 그들의 이 힘.
선생님, 건강하시다. 안심이다. 10년, 20년 끝까지 생존하셨으면 한다.
진심으로 기원한다. 광포를 위해, 우리를 위해, 인류를 위해서라고.
12시 정각 ― 입장식. 3시 종료.
대단히 충실한 총회였다. 만점이었다.
끝나고 메구로의 G에서 2차 모임. 200명에 이르는 성대한 연회.
청년부 최고 간부들과 늦게까지 협의회 ···.
가마타 역 근처에서 물건을 사기 위해 아내와 역에서 만났다.
약속 시간보다 2시간 이상 늦어, ··· 내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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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5월 3일 (화) 맑음 –32세-
창가학회 3대 회장에 취임.
니혼대학교 강당에서 12시 ― 회장 추대의 총회 시작.
간밤의 피로가 다소 남아 있다.
기뻐하는 은사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숙연해 졌다.
생사(生死)를 초월하여, 금세 일생의 법전을 시작한다.
나의 벗, 나의 학회원들이 진심으로 기뻐해 주셨다.
장수답게, 인간답게, 그리고 청년답게 단연코 광포를 지휘해 가리라.
첫댓글 감사합니다 노고많으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