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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속의 한국사] 한글과 한글날
원래 10월 9일이 아니었다? 해례본 공개로 날짜 변경됐죠
한글과 한글날
1911년 주시경 '말모이'로 시작, 46년 뒤 16만 단어 담아 완간
유석재 역사문화전문기자 기획·구성=김민기 기자 입력 2026.10.08. 00:40 조선일보
1926년 첫 한글날 11월 4일
해례본 발견으로 10월 9일 확정
2013년 공휴일 재지정
오는 9일 한글날은 ‘한글날 100돌’이 되는 날이에요. 580년 전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날을 기념해 ‘한글날’을 만든 지 100주년이 된다는 뜻이죠. 그런데 1926년 처음 정해진 한글날은 10월 9일이 아니었다고 해요. 어떻게 된 걸까요? 오늘은 한글날 100돌을 앞두고 ‘한글과 한글날의 역사’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한글 주간 행사에서 외국인들이 한글이 적힌 기념품을 만드는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위대한 글자를 무시하다니…”
훈민정음은 1446년(세종 28년)에 반포됐습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유는 ‘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에 잘 나타나 있어요. 우리말이 중국 말과 다르기 때문에 문자 생활이 불편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또 한글 창제 5년 뒤에 나온 ‘동국정운’에서 볼 수 있듯이 한자 발음의 정확한 표기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요. 한글 창제의 목적이 한자나 한문의 폐지가 결코 아니었음을 여기서 볼 수 있답니다.
반포 이후 오랫동안 한글은 주류 양반 선비들에게 ‘언문(諺文·상스러운 글)’으로 불리며 무시를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16세기 초 연산군 때는 임금을 비판하는 한글 투서가 발견되자 탄압을 당하는 일도 있었어요. 그런 가운데서도 한글의 생명력은 꾸준히 이어졌습니다. 일부 양반과 궁중, 백성, 부녀자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됐고, 이미 15세기부터 ‘나신걸 편지’ 등 한글 편지를 여러 사람이 주고받았다는 사실이 확인됩니다. 조선 중기 이후엔 가사 문학, 한글 소설 등 한글로 쓴 문학 작품이 출현했습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궁중에서 발전한 단아한 한글 서체가 바로 ‘궁체’입니다.
세종실록 중 훈민정음에 관한 부분입니다.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잘 표현하지 못하는 백성이 많다’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19세기 후반 개항과 함께 조선 땅을 밟은 외국인들은 한글을 보고 경악하기 일쑤였습니다. 이렇게 과학적이고 쓰기 쉬운 문자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채 존재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던 것이죠. 선교사이자 교육자였던 호머 헐버트는 “조선인들은 위대한 글자인 한글을 무시하고 있다”며 놀라워했어요. 그는 한글에 띄어쓰기 사용을 권장했고, 그 영향을 받아 1896년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에 띄어쓰기가 도입됐다고 해요.
첫 한글날 행사는 1926년 11월 4일
1894년 갑오개혁 때 마침내 한글은 ‘국문(나랏글)’의 지위에 올라서게 됐습니다. 모든 법령을 국문(한글)을 바탕으로 삼고 한자를 섞어 쓰는 ‘국한문’으로 하게 됐던 것이죠. 이어 종두법 보급에 공헌한 의사이자 한글학자였던 지석영이 1905년 맞춤법 통일안인 ‘신정국문’을 고종 황제에게 올렸고, 1907년에는 대한제국의 교육 행정을 담당하던 ‘학부’에 한글과 한국어 연구 국가 기관인 ‘국문연구소’가 설치됐답니다.
민간의 연구 활동도 활발했습니다. 한글학자 주시경은 ‘대한국어문법’과 ‘국어문법’을 출간했을 뿐 아니라 ‘언문’이라 불리던 한글에 ‘한글’이란 이름을 붙이자고 제안했습니다. 주시경은 1908년 ‘국어연구학회’를 창립했습니다. 이 단체는 1921년 이름을 ‘조선어연구회’로 바꿨고, 1926년 한글날을 제정했습니다.
한글 연구의 기초를 마련한 주시경(1876~1914)입니다.
이 해는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이었어요. ‘세종실록’의 훈민정음 반포 기사가 1446년 음력 9월 29일에 실렸기 때문에 1926년의 음력 9월 29일에 해당하는 11월 4일에 기념식을 거행한 겁니다. 이 당시만 해도 아직 ‘한글’이란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아 ‘가갸날’이라 했습니다. 1928년이 돼서야 비로소 ‘한글날’이 됐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설날이나 추석처럼 해마다 양력으로는 다른 날이 한글날이 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1446년 9월 29일을 아예 양력인 율리우스력으로 환산해 1931년 10월 29일에 행사를 열었습니다. 1934년부터는 그레고리력으로 다시 환산해 10월 28일이 한글날이 됐지요.
훈민정음 해례본 발견과 ‘양력 10월 9일’
그런데 1940년에 실로 엄청난 문서가 발견됩니다. 그것은 ‘훈민정음 해례본’이었어요.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뒤 집현전 학자들에게 명해 집필한 한글의 해설서였습니다. 그러나 기록에만 나올 뿐 전해지지 않았는데, 1940년 경북 안동에서 한 부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문화재 수집가인 간송 전형필이 당시 큰 기와집 10채 값인 1만원을 주고 입수해 보관 중이었죠.
훈민정음 해례본입니다. 문화재 수집가인 간송 전형필이 광복 이후 공개했어요. //뉴스1·조선왕조실록·조선일보 DB
조선일보·동아일보가 벌이던 한글 보급 운동을 강제로 금지시킨 일제는 1930년대 말부터 민족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한글·한국어 교육을 폐지했습니다. 1942년엔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켜 한글 연구 단체도 탄압했습니다. 일제 말기, 한글은 암흑 속에 들어간 듯했습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전형필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학계에 알렸습니다. 한글이 발음 기관의 모습을 따서 만들어졌다는 독창적인 제자(制字) 원리가 비로소 확실해졌습니다. 또 한 가지 확실해진 것이 있었죠. 책이 발간된 시점이 1446년 음력 9월 상순(1~10일)이라고 해례본에 기록돼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글날도 날짜 변경이 필요해졌습니다. ‘상순’의 마지막 날인 ‘9월 10일’로 상정하고 훈민정음이 반포된 1446년의 음력 9월 10일을 양력(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하니 ‘10월 9일’이 됐던 것이죠. 이렇게 해서 1945년 해방 이후부턴 10월 9일을 한글날로 기념하게 됐습니다. 정부 수립 다음 해인 1949년 한글날은 공휴일로 지정됐죠.
그런데 1991년 ‘10월에 공휴일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공휴일에서 빠지게 됐습니다. 2006년에는 국경일이 됐으나 쉬는 날은 아니었고, 2013년이 돼서야 다시 공휴일의 지위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현행 국어기본법 제20조엔 “정부는 한글의 독창성과 과학성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고 범국민적 한글 사랑 의식을 높이기 위하여 매년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하고, 기념행사를 한다”고 돼 있답니다.
고려대 동양사학과와 동 대학원(석사) 졸업. 조선일보 사회부와 탐사보도팀, 사회정책부 등을 거치며 교육부와 문체부 등 출입. 2003년부터 조선일보 문화부에서 학술 분야를 담당. '뉴스 속의 한국사' '유석재의 돌발史전'과 프리미엄 기사 '유석재의 악인전'을 연재 중.
조선일보 김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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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속의 한국사]
일제강점기였던 1926년, '가갸날' 만들어 한글 지켰죠
입력 : 2019.10.08 03:09 조선일보
[조선어연구회]
1908년 주시경이 만든 국어연구학회
조선어연구회·조선어학회 이름 거쳐 광복 후 지금의 한글학회로 이어져
잡지 '한글' 펴내고 맞춤법 연구하며 일제강점기 우리말 보급에 힘썼죠
9일은 '한글날'입니다. 한글날이 처음 생겨난 때는 일제의 지배를 받던 1926년이었습니다. 민간단체 '조선어연구회'가 중심적인 역할을 했죠. '조선왕조실록'에 1446년 음력 9월 훈민정음이 반포됐다고 기록돼 있어 음력 9월의 마지막 날인 29일(양력 11월 4일)을 '가갸날'로 정했던 것이 한글날의 효시가 됐습니다. 조선어연구회는 어떤 단체였을까요.
◇주시경이 만든 국어연구학회
일제가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는 등 침략 야욕을 본격화했던 1907년, 서울 남대문 상동교회 안에 있던 청년학원에서 '국어강습소'가 열렸어요. 조선의 청년들에게 우리말과 우리글을 가르치며 민족의식을 심어주겠다는 취지였죠.
주시경(1876~1914)은 우리말과 우리글을 연구해온 학자였어요. 그는 청년학원뿐 아니라 이화, 숙명, 진명, 보성, 배재, 경신 등 20여 개의 학교에서 국어는 물론 우리 역사와 지리 등을 강의하며 젊은이들에게 우리말과 글의 소중함을 일깨웠고, 국어 문법에 대한 책을 펴냈어요.
주시경 선생은 1908년 8월 31일 돈의문 밖 봉원사에서 30여 명의 국어강습소 졸업생과 국어 연구에 뜻이 있는 사람을 모아 국어연구학회라는 모임을 만듭니다. 우리말 연구를 위한 것이었지요.
◇'한글'이란 말은 1913년부터 쓰이기 시작
1910년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면서 국어 연구는 어려워집니다. 국어강습소는 '조선어강습원'을 거쳐 '한글배곧(한글을 배우는 곳이라는 뜻)'으로 이름을 바꿨고 국어연구학회는 '한글모(한글을 연구하는 모임)'로 이름을 바꾸며 활동을 이어나가야 했지요. '국어'라는 말이 더 이상 우리말이 아닌 일본어를 뜻하는 상황이 됐으니까요.
▲ /그래픽=안병현
이즈음 우리말을 뜻하는 표현으로 '한글'이 나타났다는 걸 아시겠나요? 바뀐 단체 이름에 '한글'이 들어가기 시작하죠. 우리말을 뜻하는 단어로 '한글'을 처음 쓰기 시작한 것도 주시경 선생입니다. 국어연구학회가 '배달말글몯음'으로 이름을 바꿨다가 1913년 '한글모'로 이름을 바꾸면서 '한글'이라는 표현이 퍼지기 시작했죠. 주시경 선생의 제자이자 국어학자인 이규영(1890~1920)이 1907년부터 1917년까지 한글 연구 모임의 역사를 담은 '한글모죽보기'라는 책에 적혀 있는 내용입니다. 1920년대 들어서 '한글'은 기존에 쓰이던 '언문'이란 말을 대체하게 됩니다.
◇조선어연구회→조선어학회→한글학회
한글 연구와 교육 분야에서 큰 기둥이었던 주시경 선생은 안타깝게도 1914년 38세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납니다. '한글모' 활동도 1917년 이후 사실상 중단됩니다.
그렇지만 한글을 연구하고 보급해야 한다는 의지는 꺾이지 않았어요. 1921년 주시경 선생의 제자인 임경재, 최두선, 장지영 등이 중심이 돼 '한글모'를 계승하는 '조선어연구회'를 만듭니다.
'조선어연구회'는 1926년 오늘날의 한글날이 된 가갸날을 제정하는 데 앞장섰고, 1927년부터는 잡지 '한글'을 간행하여 한글의 보급에 힘썼어요. '조선어사전편찬회'를 만들어 국어사전 편찬에 착수하기도 했지요.
'조선어연구회'는 1931년에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바꿉니다. 조선어학회는 1933년에는 현대 한글맞춤법의 뿌리가 되는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했어요. 이후 표준말 제정, 외래어 표기법 통일 등의 연구도 계속했죠. '조선어학회'는 1949년 이름을 '한글학회'로 바꿔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올해로 창립 111주년이죠.
[33명 체포된 조선어학회 사건]
일제가 한글을 연구하는 학자들을 가만히 내버려두고 있지는 않았어요. 일제는 1942년 '한글 교육 및 사용을 금지하는 정책을 위반했다'며 조선어학회 학자 33명을 체포 및 투옥했습니다. 이를 조선어학회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다행히 1945년 광복이 찾아오면서 많은 학자가 무사히 풀려났어요. 이들은 일제가 압수했던 '조선말큰사전' 원고를 찾아내 보완해서 1947년 한글날 '조선말큰사전' 1권을 출간합니다. 우리말 사전을 펴내려 했던 이들의 노력은 1957년 '큰사전'(전 6권)으로 결실을 봅니다.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저술가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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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속의 한국사]
1911년 주시경 '말모이'로 시작, 46년 뒤 16만 단어 담아 완간
입력 : 2020.04.14 03:00 조선일보
[우리말 큰사전]
주시경이 시작한 사전 편찬 작업… 그의 급사 이후 미완성 원고로 남아
일제의 탄압 속에서 행방불명된 원고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서울역서 찾아
1947년 첫 권 간행하고 1957년 완간
우리나라 국민 중 평소에 국어사전을 사용하는 비율이 32.9%라는 국립국어원의 조사 결과가 최근 나왔어요. 그런데 국어사전은 언제 어떻게 처음 만들어졌을까요?
◇안타깝게 중단된 '말모이' 작업
"오늘날 나라의 바탕을 보존하기에 가장 중요한 자기 나라의 말과 글을 이 지경을 만들고 도외시한다면 나라의 바탕은 날로 쇠퇴할 것이요…." 국어학자 주시경이 저서 '국어문전음학'에서 한 말이에요. 그는 우리말을 집대성하고 그 정확한 뜻을 담는 국어사전의 필요성을 역설했어요.
나라가 망한 다음 해인 1911년, 주시경은 한국고전 간행 단체인 '조선광문회'에서 제자인 김두봉·권덕규·이규영 등과 함께 우리말 사전 편찬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말모이'였죠. 하지만 자료를 수집하고 초고를 만들던 중 1914년 주시경이 38세 나이로 별세했고, 그 뒤 작업이 중단됐습니다. 비록 미완성이긴 하지만 이것을 최초의 국어사전으로 보기도 합니다.
▲ /그림=김영석
1920년 조선총독부는 '조선어사전'을 출간했습니다. 5만8639단어가 수록된 사전인데, 표제어는 한자, 발음은 한글, 뜻풀이는 일본어로 기록했어요. 국어사전이라기보다는 '한일사전'이었던 셈이죠. 이후 경성사범학교 훈도(교원) 심의진이 1925년 '보통학교 조선어사전'을 출간했는데 표제어는 6106개였습니다. 1938년에는 배재고등보통학교의 교사였던 문세영의 '조선어사전'이, 1947년엔 국어학자 이윤재의 원고를 사위 김병제가 수정·증보한 '표준조선말사전'이 나왔는데, 이후 남한에선 앞의 책, 북한에선 뒤의 책을 많이 이용했다고 합니다.
◇서울역 운송부 창고의 기적
"원고가 다 어디로 갔단 말이오?"
1945년 8월, 광복과 함께 감옥에서 풀려난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차마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이 회원 33명은 1942년 일어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제에 끌려가 혹독한 고초를 겪었습니다. 이때 압수당했던 그들의 원고는 행방을 알 수 없었던 것이죠. "모두 불탄 것 아닐까요?" "아니, 그게 어떤 원고인데!"
'그 원고'란 일찍이 주시경 등이 편찬했던 '말모이' 원고를 밑바탕 삼았으며 숱한 사람의 땀방울로 얼룩진 우리말 사전 편찬 원고였어요. 1929년 108명의 발기로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가 조직됐고, 이들은 발족 취지문에서 "언어의 정리와 통일을 급속히 꾀해야 문화가 촉성(재촉해 빨리 이뤄지게 함)하는 것이며, 그를 실현할 최선의 방책은 사전의 편성"이라고 선언했습니다. 1936년 조선어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가 이 사업을 계승했지만, 일제 탄압으로 사전 편찬이 또다시 중단된 데 이어 원고마저 행방불명이 됐던 것이죠.
여기서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났어요. 1945년 9월, 뜻밖에도 서울역 운송부 창고에서 그 원고가 고스란히 발견됐습니다. 일제가 재판 증빙 자료로 법원에 이송하려던 것이 그곳에 방치돼 있었던 것이죠. 원고를 다시 손에 든 회원들은 눈물을 펑펑 쏟았다고 해요. 이때의 이야기를 상상력을 가미해 풀어낸 영화가 지난해 개봉된 유해진 주연의 '말모이'입니다.
조선어학회는 1947년 10월 사전 첫 권을 간행하고 1949년 이름을 한글학회로 바꿨습니다. 미국 록펠러재단에서 종이와 잉크를 지원받아 남은 책을 발간하던 중 6·25 전쟁이 발발해 원고를 땅에 묻어두기도 했습니다. 1957년 10월 9일 한글날, 마침내 '우리말 큰사전' 6권이 완간됐습니다. 16만4125단어에 사투리·고어·전문용어를 포함한 방대한 분량의 사전이었어요. 훈민정음 반포 511년 만에 마침내 우리말 대사전이 처음으로 세상에 나왔던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 대표 국어사전은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
현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어사전은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과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의 '고려대 한국어대사전'이에요. 이 중에서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과 공무원 시험, 간행물 표기의 기준이 되는 것은 '표준국어대사전'이지요. 예산 112억원을 투입하고 국어학자 500여 명이 참여해 1999년 48만단어를 수록한 초판이 간행됐습니다. 2008년 단어 수가 51만개로 늘어난 개정판을 내놓았을 때는 종이사전을 출간하지 않았고, 현재 인터넷 사이트(https://stdict.korean.go.kr) 등을 통한 전자사전 서비스만 하고 있습니다.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양승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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