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의 아버지는 아들을 잘못 가르친 것 같다! 북한에서 농업과장했다는 사람이 박정희의 농업정책을 농민 죽이는 정책이라고 했다니! 趙甲濟
*아버지의 박정희 비판 “말이 없으셨던 아버진데, 세상이나 시국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아주 어릴 때 한일회담에 대해 반대하시던 말씀, 그 이후에 자유당독재나 박정희 시절 독재와 민정이양 약속 위반에 대한 비판들, 그런 말씀들이었어요.” <대한민국이 묻는다> -그런데 아버지가 비판해야 할 첫째 대상은 김일성일 것 같은데 그런 비판은 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이웃집에 대학생이 있었는데, 한일회담 때 데모도 하고 그랬던 형이었어요. 그 형이 한 번씩 제 아버지를 찾아와서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 가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그 형한테 왜 우리가 한일회담을 반대해야 하는지, 주욱 설명해주기도 했죠. 박정희 정부의 경제정책이 왜 잘못됐는지를 말해주기도 하고요.” <대한민국이 묻는다> -아버지는 대학생에게 완전히 틀린 이야기를 해준 셈이다. 한일국교 정상화도, 경제개발도 성공했는데 학생에게 이를 반대하라고 선동한 셈이다. 김일성 세상을 경험한 사람은 거의가 박정희 근대화를 지지했는데 그는 참 특이하다. “(아버지가) …드물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면 사회의식이 깊은 분이었다. 한일회담 때 이웃 대학생에게 왜 한일회담에 반대해야 하는지 설명해주는 걸 들은 기억이 있다. 우리나라는 농촌을 살리는 중농(重農)주의적 성장을 추구해야 하는데, 박정희 정권이 거꾸로 저곡가로 농촌을 죽이는 정책을 하고 있다고 말씀하신 게 어린 내게 강하게 와 닿았다. 장준하 선생이 발행하던 ‘사상계’ 잡지를 때대로 읽기도 하셨는데, 그 시절 주변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아버지가 나의 사회의식, 비판의식에 영향을 미쳤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문재인의 운명> 박정희는 농촌의 가난을 없앤 지도자로 역사에 영원이 남을 인물인데, 북한에서 농업과장을 했다는 사람이 그런 위인을 아들에게 농촌 죽이는 정치인으로 가르쳤으니 이때부터 문재인은 세상을 왜곡해서 보게 된 것이 아닐까? 잘 사는 농민들이 문재인 책의 이 대목을 읽으면 失笑할 것이다. 저곡가 정책은 이승만 정부 시절부터 유지되었는데 농촌을 죽이려 한 것이 아니라 물가상승과 노동자의 임금인상 요인을 줄여 수출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농민 소득 향상을 통해 저곡가로 손해 본 것의 몇 배를 보상, 가난의 문제를 영구적으로 해결했다. 이런 사정을 모르고 저곡가 정책에만 집착, 박정희를 매도했으니 아들에게까지 그런 편협성이 전해진 것 아닐까? 통계를 하나 덧붙인다. 세계은행이 1965-89년 사이 세계 40개 주요국 평균 경제 성장률과 소득분배를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경제 성장률에서 세계 1위, 소득분배의 평등성에서도 아주 양호한 국가로 나타났다. 소득 분배의 평등성을 재는 기준은 소득 上位(상위) 20%가 소득 下位 20%의 몇 배를 차지하느냐를 보는 것이다. 한국은 약 7배, 브라질은 약 26배, 말레이시아는 약 16배, 수단은 약 12배, 멕시코는 약 20배, 태국은 약 9배, 필리핀은 약 11배이다. 일본과 대만은 약 5배, 싱가포르는 약 9배, 홍콩은 약 9.5배이다. 이 기간중 1인당 소득성장률이 年 4% 이상이고, 소득 분배 지수가 10(즉, 上位 20%의 소득이 下位 20%의 소득의 10배) 이내인 우량국가는 東아시아의 6개국-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 일본, 태국뿐이었다. 이는 군사정권 때 한국사회의 貧富(빈부) 차이가 더 커졌다는 俗說(속설)을 무효화 시키는 통계이다. 군사정권 때 한국은 전체적인 國富(국부)와 개인소득도 세계에서 가장 크게 늘었을 뿐 아니라 소득분배도 가장 공평하게 되었다. 南美의 군부는 경제성장이나 소득 재분배보다는 기득권층의 蓄財(축재)를 위해 일했지만 한국의 군부 엘리트는 특권층보다는 국민 전체를 위해 경제정책을 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1965-1989년 사이 한국을 이끌었던 朴正熙, 崔圭夏, 全斗煥, 盧泰愚 대통령과 국가 엘리트에게 우리는 고생했다는 말을 해도 되지 않을까. ////////////////////////////// 한국은 朴正熙 소장이 군사혁명을 일으킨 뒤 산업화에 착수하기 전엔 국민들의 과반수가 농업에 종사하는 농업국가였다. 농업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지표는 ha(헥트아르: 100아르. 1아르는 100평방미터)당 쌀 수확량이다. 대한제국 말기에서 日帝시대가 끝나는 시기까지 한국은 ha 당 쌀 수확량이 1.14t에서 1.63t으로 큰 변화가 없었다. 이 시기 일본은 면적당 쌀수확량이 늘 한국의 두 배 가량이었다. 한국의 쌀수확량이 急增(급증)한 것은 박정희 정부가 적극적으로 농촌 진흥 정책을 쓴 1960년대 중반부터이다. 1966~1970년 평균 ha 당 쌀수확량은 3.14t으로 日帝 시대의 두배로 늘었다. 박정희 대통령 말기에 해당하는 1975~1979년 평균 ha 당 쌀수확량은 4.46t으로 같은 시기 일본의 4.25t을 능가하였다. 이는 한국 농업사상 최초의 개가였다. 좌익들은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공업화 정책에 집중, 농촌을 피폐하게 만들었다고 거짓말한다. 왜곡된 記述(기술)이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1960년대 말의 농촌은 절대적으로 낙후되어 있었고, 상대적 박탈감이 점점 커져가는 상황이었다>(천재교육 발간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379페이지). 1960년대의 농촌은 낙후된 고장이 아니라 발전하는 고장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가뭄 없는 농토'를 만든다는 구호 아래서 地下水를 개발, 비에 의존하는 天水畓(천수답)을 획기적으로 줄였다. 군사혁명이 일어난 1961년엔 가뭄을 타지 않는 水利安全畓(수리안전답)이 54,6%였으나 1969년엔 75.1%로 늘었다. 전국적으로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管井(관정)을 많이 판 덕분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과 거의 겹치는 1960~1980년 사이 전국에 약15만 개의 관정을 팠다. 이는 또 지하수를 뚫는 기계의 성능이 좋아진 덕분이다. 농기구 공장이 잘 돌아간 덕분이다. 수출공장을 짓고 외화를 많이 벌고 이로써 外資를 갚아가면서 농기구 공장을 많이 지은 덕분이다. 수출의 이익은 농민들에게도 돌아갔다. 수출을 믿고 외자를 빌어와 비료공장을 지어 화학비료를 많이 대주어 쌀수확량을 늘린 것이다. 농약, 비료, 농기구 등 근대화된 농업자재를 쓸 수 있게 됨으로써 농업 생산성이 올라갔다. 박정희 정부는 농촌 기술 지도 人力도 크게 늘렸다. 농촌진흥청의 연구직 및 지도직 인원은 1960년에 1502명이었는데, 5년 뒤엔 7143명으로 네 배 이상 증가하였다. 1960년대의 이런 농촌혁명은 1970년대에 가면 새마을운동으로 더욱 확산된다. 박정희 정권 때, 공업화, 도시화만 이뤄진 게 아니다. 농촌도 다 같이 잘 살게 된 것이다. 좌익식 계급史觀으로 쓰여진 한국사 교과서는 농민, 노동자들의 희생을 강조하기 위하여 1960년대의 농촌을 애써 어둡게 그리고 있다. 박정희 시절 국민들의 소득분포에서 下位 40%에 해당하는 이들의 소득증가율은 국민 평균과 거의 같았다. 못 살던 사람도 고도성장의 혜택을 함께 누렸다는 이야기이다. 공업이 잘 된 만큼 농업이 내려 앉았다든지, 도시가 발전한 때문에 농촌이 피폐했다고 쓰는 것은, 내 이웃 집 아이가 서울대학교에 합격하였기에 내 아들이 3류 대학에 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 12년 전 경남 密陽에서 농협 조합장을 만났는데 이 분이 농촌 자랑을 한참 하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 농촌은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 되었습니다. 젊은 부부가 2만, 3만 평 되는 農土를 1년간 열심히 경작하면 연간 순수익이 8000만~1억 원입니다. 그동안 국가가 농민들을 위하여 해준 게 너무 많습니다. 농촌 사람들이 관광을 얼마나 자주 갑니까? 都農(도농)이 逆轉(역전)될 날도 멀지 않았습니다." 지방에 강연을 가보면 모이는 이들의 모습이나 수준이 서울과 똑같다. 이런 나라를 '양극화'란 구호로써 분열시키는 자들일수록 자녀들은 해외로, 특히 미국으로 많이 보낸다. 한국이 망한다면 이런 僞善者(위선자)들 때문일 것이다. //////////////////////////////////////////////////////////////////// 문재인은 아버지가 공산당을 싫어했다고 주장한다. “제 아버지 이야기가 안보와 연결될지 모르나 하나만 덧붙이자면, 아버지는 공산주의 체제가 싫어서 피난을 내려왔습니다. 공무원을 하면서 노동당에 입당하라는 강요 때문에 굉장히 시달렸다고 합니다. 끝내 입당하지 않고 피난을 왔는데, 내려오고 난 이후 이북에서 공직생활하던 사람들을 공무원으로 특채하는 식의 기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그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북에 있을 때 공산당에 입당하라고 강요당했던 피해의식이 있어서 절대로 공직생활은 안하겠다고 마음먹으신 거죠. …어쨌든 제 아버지가 공산주의가 싫어서 피난 온 분이고, 또 저 자신이 대한민국에서 특전사로 군복무를 당당히 하고 병장으로 제대했던 사람입니다. 저 보고 사상을 얘기하며 시비를 걸면 안 되죠.” <대한민국이 묻는다> -그런데 대통령이 된 후 문재인은 김일성주의자 신영복을 사상가로 존경한다고 만천하에 공포했다. 그래서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는 단정적으로 그를 김일성주의자라고 했고, 고영주 변호사도 대통령이 되기 전의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했다. 문재인의 사상은 문제가 심각하고 대통령의 사상은 한 점 의심도 남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공개검증해야 하는데 자신의 사상에 시비를 걸지 말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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