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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반민특위계승국민위원회 원문보기 글쓴이: 반민특위계승
제2절 인·면(印緬) 지구 공작대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와 주(駐)중경영국대사관 부관측과의 여러 차례에 걸친 군사 합작 교섭이 주효하여 1943년 6월 하순, 광복군의 이청천(李靑天) 총사령관과 주(駐)인도 영국군 동남아 전구 총사령부 대표 매켄지 정보 참모 사이에 다음과 같은 한·영 군사 상호 협정(韓英軍事相互協定)이 정식 체결을 보게 되니, 이로써 광복군은 연합군의 당당한 일원으로 인·면 지구에 용약 출정하게 되었다.
한·영 군사협정서(韓英軍事協定書)
①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영국과 합작하고 대일 전투를 역행(力行)하기 위하여 광복군 공작대를 주 인도 영국군에 파견한다.
② 전항 파견된 공작대는 대장을 포함하여 10명 내지 25명으로 정하고 영국군과 동일한 군복을 착용하며 한국광복군 뺏지를 구별하여 패용한다.
※ 한국광복군 공작대 뺏지의 약호(略號)는 케이(K)·엔(N)·에이(A)·엘(L)·유우(U) (Korean National Army Liaison Unit)이었다.
③ 이 공작전(工作戰)은 영국군의 대일 작전에 호응하여 대적 선전 및 노획한 적 문서의 번역을 포함한다.
④ 이 공작대의 복무 기간은 제1 차로 6개월로 정하고, 계속 복무는 쌍방 합의로 연장한다. - 476 -
⑤ 전항의 임무 수행에 있어서 한국광복군의 필요에 의하거나, 혹은 영국군의 요구가 있을 때는 일부 혹은 전체 인원을 원대 복귀한다.
⑥ 이 공작대의 대장은 주 인도 영국군 대위와 등등한 대우를 받으며, 대원 중 특별한 공을 세운 자는 심사 표창하여 특별한 대우를 한다.
⑦ 한국광복군공작대의 유효하고 강력한 공작과 영국군과의 긴밀한 합동 작전을 위하여 한국광복군은 인도에 상주(常駐) 대표를 파견할 수 있다.
⑧ 한국광복군공작대는 영국군이 나포한 한국인 포로를 필요에 따라 훈련한다.
⑨ 한국광복군공작대와 상주 대표의 파견 이전 및 소환에 관한 일체 경비는 영국군이 부담한다.
⑩ 한국광복군 공작대원의 이동 및 장비는 영국군 장교와 동등하게 한다.
⑪ 인도 뉴우델리(New Delhi)에서 공작하는 대원에게는 무료로 숙소를 제공한다.
단, 호텔에 거주가 가능하여 제공된다면 월(月) 숙식비 100루비 (RS) 이내를 월급에서 공제한다.
⑫ 한국광복군공작대 대표와 그 수행 장교는 뉴우델리에 상주하며 일체의 경비는 영국군이 제공한다.
서기 1943년 6월 일
한국광복군 총사령 이청천
주 인도 영국군 대표 콜린·맥퀸(Colin·Mackenzie)1)
이상과 같은 군사 상호 협정에 의거하여 한국광복군 공작대를 주 인도 영국군 동남아 전구 총사령부에 파견하기로 정식 결정을 보자,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서는 영어와 일어에 능통하고 신체 조건에 적합한 인원을 각 부대에서 심사 선발하여 다음과 같이 공작대를 편성하였다.
대장 한지성(韓志誠)[제1 지대 출신]
부대장 문응국(文應國)[제2지대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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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승학 지은 ≪한국독립사≫ 제2 편 제3 장 제6 절‘한국광복군’ p.303 - 477 -
대 원
최봉진(崔俸鎭)·송철(宋哲)·박영진(朴永晋)·김상준(金尙俊)·나동규(羅東奎)·김성호(金成浩)[이상 제2지대 출신]
이영수(李英秀)[제1 지대 출신] 안원생(安原生)[총사령부 출신]
그리고, 중국정부의 협조를 얻어, 8월초부터 중국 중앙 군사위원회에서 버어마 주둔 중국군에 파견될 최덕신(崔德新) 등과 함께 3주간에 걸친 군사 교육 및 인도·버어마 지구에 대한 실정 파악 등을 포함한 예비 지식에 대한 교육을 받았으며 1943년 9월 하순, 영국군의 요청에 따라 군사 기밀의 비닉(秘匿)을 위하여 전원 사복으로 민간 항공기편을 이용 중경을 출발하였다. 공작대 일행은 당일로 인도 캘커타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영국군 군복으로 갈아입고 광복군의 표식을 부착하는 등 기초 준비를 위하여 며칠 동안을 머무르다가 인도의 수도인 뉴우델리로 옮겨 갔다. 그리하여, 앞으로 공작대가 실지로 수행해야 할 영국군과의 합동 작전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 전개의 내용을 협의하였고, 따라서 영국군에 배속 이후부터의 제반 활동에 필요한 기술의 훈련 교육을 1개월여에 걸쳐 받게 되었다.
교육의 주요 과목은 ① 일본어 방송 ② 문서 번역 ③ 전단 작성 등이었다. 이러한 교육의 종합 테스트가 끝난 후에는 다시 캘커타로 이동하여 공작대가 직접 행동을 같이 할 부대인 영국군 GSIK의 제201 부대(부대장 스틸[Stile]중령)와 합동 훈련에 들어갔다.
이 제201 부대의 규모는 대대(大隊)급이었으나, 장교를 제외하고는 사병 전원이 인도의 콜카족(族)으로서 전투에 노련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합동 훈련은 주로 적진(敵陣) 가까이에서 방송을 통하여 적의 전의를 상실 내지 저하하게 하여 투항하게 하며, 일어로 된 전단을 작성 살포하는 등 지금의 심리 작전 부대와 비등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 부대는 독립적인 전투 능력을 갖추고 있을 뿐더러 진중 신문을 발간할 수 있는 장비도 갖추고 있었으며, 때로는 적진 깊숙히 침투하여 적후방 교란 작전과 단기적인 첩자의 적진 투입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장교의 출신 성분이 영국 연방 16개국에서 모인 각종 민족으로 - 478 - 조직되었기에 광범위하고도 다각적인 적정 수집과 정보의 정확한 분석·평가 등의 고차적 임무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광복군 인·면 공작대는 이 부대에 소속되어, 대적 방송·적 문서 번역·전단 작성, 그리고 포로 신문 등의 본래 임무를 담당하게 되었으며, 1943년 12월에는 전방 지구인 임팔(Imphal)에 도착하게 되었다.
임팔에는 영국군 제15 군단 사령부가 있는 곳이었다. 여기에서 공작대는 세 곳으로 분산 배치하게 되었는데, 한지성(韓志誠 소령)·김성호(金成浩)·박영진(朴英振)은 제201 부대 본부와 행동을 같이 하게 되었으며, 송철(宋哲)·최봉진(崔俸鎭)은 GSIK 부대로 배속되어 캘커타에서 일어 방송을 담당하게 되었고, 문응국(文應國)·김상준(金尙俊)·나동규(羅東奎)는 임팔에서 동북방 166마일 지점인 티딤(Tidim)으로 각각 임지를 향하여 이동하게 되었다. 그 중, 티딤이란 곳은 버어마의 영토로서 영국군 제17사단(영·인 혼성 사단) 사령부가 위치한 최전선 지구였다.
당시의 전황은 10월 하순부터 연합군의 국부적인 제1차 반격 작전은 큰 성과를 보지 못하였으며, 1944년 1월초부터 버어마에 대한 제2차 반격 작전(反擊作戰)을 전개하게 되었다. 먼저 버어마 북부 지역에서는 미국 스틸웩 중장이 지휘하는 미·중(美中) 연합군이 리이도우에서 분수령을 넘어 산맥 밑에 펼쳐진 밀림으로 남진(南進) 공격을 개시함과 동시에, 영국군 윙게이트(Wingaite) 사단이 공수 작전을 감행하여 버어마의 중부 지역 적 후방에 투하되어 진지를 구축하였으며, 티딤에 위치한 영국군 제15 군단(크리스튼 장군 지휘) 산하의 제17 사단도 1월 하순부터 이들 부대와 호응하여 반격 작전을 개시, 버어마 중부 지역 교통의 중심지인 만달레이(Mandalay)로 진출하려고 남하를 시 작하였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버어마에 침입한 왜적은 축차적으로 병력이 증강되어 버어마 방면군 총사령관 휘하에 3개군(15A, 28A, 33A) 10개 사단의 총병력 30만 명이 배치 되었으며, 특히 왜적 제15군(미국군 편제 군단과 동격) 휘하의 제15 사단·제31사단·제33사단과 인도 국민군(친일 괴뢰군) 1개 사단 등 총 10만 병력이 이미 계획된 임팔 진공 작전(필월[鵯越] 작전)에 따라 한발 먼저 임괄 공략 작전을 전개하려고 만반의 태세를 - 479 -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남하 공격을 준비하던 영국군 제17 사단은 반대로 적의 예비군인 왜군 제33군에 의한 불의의 선제 공격을 받아 디이 데이(D day) 예정일 3일을 앞두고 도리어 후퇴를 강요당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니, 영국군 제17 사단에 파견된 문응국(文應國) 등 일행은 소속된 제201 부대의 1개 중대와 행동을 같이 하면서 적의 포위망을 뚫고 험준한 아라칸 산지를 넘어 임팔까지 일면 전투, 일면 적을 돌파해 나오는데 약 40일이 걸리는 장도에서 악전 고투를 겪어야 했다.
그런데, 이 돌파 작전에서 우리 공작대가 큰 성과를 올린 것은 적 문서의 적확한 판단이었다. 이 때 왜군 1개 연대로 그릇 판단하고 있었는데, 그 원인은 왜적이 공격을 개시하기 이전에 대대장급을 교체한 데서 비롯되었다.
왜군의 대대급 이상의 부대는 부대의 통상 명칭을 대대장의 성(姓)을 부쳐서 사용되고 있었는데, 전투 서열에 없는 부대 명칭이 많이 나타남으로 해서 그릇되게 인식했던 것이다.
문응국(文應國) 등이 노획한 적 문서의 올바른 판단과 포로 심문에서 얻어진 정보가 정확하고도 신속함을 깨달은 제17 사단장 고우원(Gown) 소장은 광복군 공작대에 대한 인식을 새로히 하여 사단 사령부 직속으로 되었으며, 문응국(文應國)·김상준(金尙俊)·나동규(羅東奎) 등은 임팔로 후퇴할 때까지 사단 사령부와 행동을 같이 하면서 공작을 계속하였다.
1944년 4월초, 임팔에는 영국군 제15 군단 휘하의 제7 사단·제17 사단·제23 사단이 집결되었으며, 우리 광복군 공작대 전원이 이곳에 집결되어 야전 부대인 제15군 파견으로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한편, 임팔 공략 작전을 전개했던 왜군 제15 군(군사령관 모전구[牟田口] 중장) 휘하 3개 사단과 샤보스·챤드라·보스가 지휘하는 인도 괴뢰군은 임팔 및 고히마·비센풀 부근까지 침입해 왔으나, 연합군의 강경한 저지 작전으로 인하여 더 이상 전진을 못한 채, 작전 개시 3개월만인 6월 중순경에는 병력의 과도한 소모와 보급품 [탄약·식량·의약품]의 수송 차단으로 작전 수행이 불가능하게 된 데다가 영국군의 제공권과 - 480 - 우세한 기계화 부대의 완강한 저항으로 전황이 역전되어 왜군은 궤멸 상태에 빠졌다. 1개 중대의 병력이 평균 20명 미만의 숫자로 줄어들었으며 전투 능력은 완전히 상실되고 말았다.
따라서, 작전 기간 중 왜군의 3개 사단장이 모두 교체되는 형편이었으며, 더욱이 제31사단장 좌등행덕(佐藤幸德)은 상부의 명령 없이 임의로 부대를 철수시켜, 일본군 창군 이래 소위 그들이 말하는 2·26사건과 같은 일대 항명 사건(抗命事件)까지 빚어 내게 되었다.
왜군은, 영국군의 원통진지(圓筒陣地) 작전, 또는 환상진지(環狀陣地) 작전이라 불리는 사주 방어(四周防禦) 작전, 즉 견고한 진지 안에 탱크와 포(砲), 그리고 기계화 장비로 둥글게 거점을 연결하여 적의 돌격대가 어느 쪽으로든지 침투할 수 없도록 하는 주도 면밀하게 계획된 방어 작전에 휘말려, 날이 갈수록 전황이 불리하여 결국은 진퇴양난에 빠지고 말았다. 승산이 없음을 깨달은 왜적 버어마 방면군 총사령관 하변(河邊)은 소위 대본영(大本營)의 인가를 얻어 7월 10일, 인도 침입 왜군의 총퇴각 명령을 하달했으며, 7월 15일부터 후퇴하기 시작한 왜군은, 공중과 지상 도처에서 공습과 추격을 받아가면서 죽음의 행렬을 거쳐 8월 31일에야 간신히 살아남은 패잔병이 버어마 국경을 넘어 친도윙 강(江) 서쪽으로 철수를 완료했다.
이때 왜군은, 10만명의 병력이 2만명 미만으로 감소될 정도로 대패전의 고배를 마셨다. 이로하여 하변(河邊)을 비롯한 제15 군 사령관 및 각 사단장 등 많은 장성급과 참모들이 패전의 책임을 지고 파면, 예편 또는 교체되었다.
광복군 공작대가 인·면 지구에 파견된 이래 처음으로 참전했던 것이 임팔 작전이었으며, 이 작전에서 우리 공작대는 실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연합군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는 데, 영국 본토에서 간행하는 많은 신문들은 우리 공작대의 성과를 대서 특필로 격찬해 주었다. 여기 특기해 둘 것은, 왜군 제15 사단 사령부에 통역관으로 근무하던 김구락(金龜洛)이, 우리 공작대가 임팔에서 활약하고 있는 것을 탐지하고 일본 군영을 탈출해 온 사실이었다.
김구락(金龜洛)은 일찌기 인도 캘커타에서 8년간이나 거주한 사실이 있고, 영·중·일어(英·中·日語) 등에 - 481 - 능통한 사람으로 인도에 거주할 때 왜인이 경영하는 고무 공장장으로 종사하다가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철거하여 중국 상해(上海)에 기류하고 있었는데, 외국어에 능통하다는 이유로 왜군에 강제 징용되어 제15 사단 통역관으로 끌려 나왔던 것이다. 투항해 온 김구락의 제공으로 귀중한 정보가 영국군에 보고된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당시 우리 공작대에서는 김구락은 대열에 가담시키려고 애썼지만, 일찌기 인도에 거주할 때 일본 거류민 철수 업무에 몇 개월 도와 준 사실이 영국군 정보 기관에 확인되어 대열에 참가하지 못했다. 그리고, 연합군측에 귀순한 일본군 장병들은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한국광복군이 인도·버어마 전선까지 참전하고 있는 사실에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하기도 하였다. 임팔 대회전의 결과는 왜적의 포로만도 3천 명을 넘었으며, 노획한 무기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도처에 버리고 간 적 시체의 썩은 냄새는 연합군이 행군을 꺼릴 정도의 참혹상이었다.
무모한 임팔 작전을 전개했다가 참패를 당한 왜적 제15군 사령관 모전구(牟田口) 염야(廉也)는 본시 임팔 작전 계획 수립의 원흉으로서 이 계획을 소위 왜군 대본영의 인가를 받게 되기까지는 약 6개월의 시일을 소요했다는 것이다. 이 계획은 첫째, 인도 레드에서 중국 운남(雲南)으로 원조 물자를 수송하고 있는 레드 공로(公路)를 차단하는 것, 둘째, 인도를 영국의 식민지 통치 하에서 이탈하게 하여 샤보스·챤드라·보스를 수령으로 하는 인도의 괴뢰 정권을 수립하는 것, 셋째, 과달카날 등 태평양 지구 여러 곳에서 패전을 거듭하고 있는 전황을 전환시켜 침체된 왜군의 사기를 진작하는 것 등에 목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적 사령관 모전구는 이 작전을 위해 수송용 코끼리 수백 마리와 식량에 보탤 양(羊) 수천 마리를 끌고 갈 정도로 만반의 작전 준비를 다 하였지만 결국은 연합군의 우세한 항공기 및 기계화 장비 앞에 굴복하게 된 것이었다.
임팔 작전 승리 후 이곳을 철수한 우리 공작대는 캘커타에서 약 1개월의 휴식을 즐긴 다음 재정비 훈련을 마치고 아샘주(州) 치타공(Chittagong)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만전의 태세를 갖추었다. - 482 -
그리고, 전열을 가다듬은 연합군은 1945년에 접어들면서 버어마 지구 왜적에 대한 총 반격을 개시하였으며, 이에 따라 광복군 공작대도 3개 반으로 나누어 각 부대에 배치되었다. 한지성(韓志誠)·박영진(朴永晋)·김성호(金成浩)는 버어마 중북부로, 최봉진(崔俸鎭)·김상준(金尙俊)·이영수(李英秀)는 버어마 중부로, 문응국(文應國)·송철(宋哲)은 해상(海上)으로부터 버어마 수도 랭구운(Rangoon)을 목표로 진격하는 상륙 작전에 각각 참전하게 되었으며, 안원생(安原生)은 동남아 전구 사령부에 배속되고, 나동규(羅東奎)는 신병으로 인하여 중경 총사령부로 복귀하였다.
이 때부터 버어마 지구의 왜군은 제공권을 완전히 잃어버린 데다가 북부로부터는, 미·중(美中) 연합군[중국군 제36 사단에는 최덕신(崔德新)이 정보 참모로 활약]이 중부와 남부 해상으로부터는 영인(英印)군의 포위 작전에 부딪쳐 패전에 패전을 거듭했으며, 연합군은 승승 장구로 계속적인 진격과 포위 섬멸 작전을 전개하여 많은 전과를 올리면서, 1945년 7월초까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버어마 북부 국경을 넘어 중국 운남성 일각인 납맹(拉孟)·등월(騰月)·평하(平夏) 등 군사 요충을 점거했던 왜적도 위입황(衛立煌)이 지휘하는 중국군의 집중적인 공격으로 완전히 섬멸되고 말았다.
이 해 7월 중순경, 우리 공작대는 새로운 작전에 참가하기 위하여 다시 캘커타로 집결하였는데, 영국군에서 왜구의 무조건 항복 제의 정보를 입수한 것이 8월 7일이었으며, 이것은 미국공군이 왜구 본토 광도(廣島)에 원자 폭탄을 투하한 날 밤이었다.
이러한 정세 하에서도 영국군 동남아 전구 사령부에서는 우리 공작대가 그대로 인도에 남아서 전후 포로 처리 문제 등에 협력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그러나 광복군의 입장에서 볼 때, 하루 속히 광복군 총사령부로 복귀하여 새로운 임무를 받아야 할 실정이었기 때문에 영국군의 양해와 광복군 총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1945년 9월 10일, 공작 대원들은 만 2년만에 전원 중경 총사령부로 개선하였다.
이 인·면 지구 전쟁에서는 연합군측도 적지 않은 희생자를 냈다. 그 중 특히 우리 공작대의 연락 장교로 파견되어 시종 광복군 공작대와 고락(苦樂)을 같이 하다가 버어마 중부 전선에서 애석하게도 전사한 베이콘(Baecon)의 최후는 광복군 공작대 전원에게 - 483 - 큰 슬픔을 안겨 주었다. 그는 캐나다 사람으로 전전(戰前)까지 한국에서 10여 년간 감리교회 선교사로서 포교 사업에 종사하여 한국 국민에 대한 이해와 우정이 깊었으며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면서 한국 독립 운동에 음으로 양으로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버어마 작전 기간 중 영국군 당국의 요청에 의거, 인도 파견 공작대의 증강을 위하여 광복군 총사령부에서는 다시 조지영(趙志英)·이병훈(李秉勳)·진가명(陳嘉明)·황민(黃民)[김승곤(金勝坤)]·왕영재(王英哉)·진춘호(陳春浩)·여정순(呂正淳)·호건(胡建)·김빈(金斌) 등을 추가 파견하려고 여권(旅券) 수속까지 완료하고 대기 중 버어마 작전의 종결로 중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