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도에 내려 간다.
부모님이 소천 되시고 나서 묘지 관리는 항상 장남이 더 신경을 쓰기 마련이다. 해마다 벌초비를 남동생들(큰집 2남, 작은집 2남)과 마음을 보아 보내드리면서 벌초하게 했었다. 작은 아버님 생전에 아직 기한이 차지 않아서 시제묘(시제를 드리며 종친에서 관리하는 묘)에 들지 못하고 있는 증조할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님 어머님, 작은 아버님, 작은 고모님의 묘지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모셔지고 있었다. 그땐 묘지를 만들 땅도 없이 가난했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아버님과 작은 아버님이 소천 되시고 큰집 자녀들은 모두 예수를 믿고 있다. 작은 집 자녀들은 모두 예수를 믿지 않는다. 다들 먹고살기에 바쁘다는 핑계로 산소를 돌보는 일에는 소홀해지고 있었다. 작은 아버님 생전에 모든 가족 묘지를 한 곳에 모시는 것부터 하자는 의견이 나왔었다. 장소는 내 앞으로 되어 있는 600평 정도의 밭에 모시는 것이었다. 의견도 모이고 좋았다. 그러다 평토장으로 하느니 봉분으로 하느니 의견이 많았다. 난 납골 가족묘로 하자고 했다. 결국 내 의견대로 하기로 했다.
먼저 3월 2일부터 3일까지 터를 닦고 가족 봉안묘를 만들고 바닥에 현무암을 까는 작업을 한다고 한다. 물론 카톡으로 공사하는 집사님과 수없이 많은 의견을 주고받았었다. 이왕 한 김에 바로 묘지를 개장하여 화장하고 유골함에 담아서 가족 봉안묘에 넣자고 했다. 팔순이 넘으신 작은 어머님과 미신을 믿는 작은 집 동생들은 윤달에 묘를 열어야 한다며 극구 반대했다. 작은 어머님의 의견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그래서 4월 3일부터 4일까지 7개의 묘지를 개장하여 화장하고 유골함에 담기로 했다.
문제는 부모님과 작은 아버님 묘지를 건들지 않고 터를 만들면 가족 봉안묘의 뒷공간이 너무 넓다는 것이다. 앞 공간은 좁고…. 그래서 내가 개입해야만 한다. 내려가서 묘지 앞에 놓인 상석을 옮기고도 뒷공간이 너무 넓으면 부모님 묘의 앞부분까지 터로 만들게 해야 한다. 아마 다른 사람이 한다면 말도 못 꺼내게 하겠지만, 장손에 목사인 내가 의견을 내고 작업을 하도록 직접 지시하면 된다는 것이다. 작은집 큰딸이 무당이다. 나와는 한 살 차이로 동생인데 나에게 직접 말하면 안 통하니까 작은 어머님을 통해 이런저런 의견을 제시했는가 보다. 될 수 있으면 다툼이 일어나지 않게 하자며 이견들을 조율해 왔었다. 여동생이 작은집 동생들을 대표해서 내려간단다. 본의 아니게 영적 싸움까지 벌이게 됐다. 복음만 전하면 도망가 버리는 작은 집 여동생이지만 이번에는 반드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이번엔 내려가지 않고 4월 2일에 내려가려고 했는데, 이번에도 내려가고 4월 2일에도 내려가야 한다. 그런데 고향이 섬(청산도)이라 바다 날씨가 중요하다. 아무리 급해도 풍랑이 일면 못 간다. 일기 예보를 보니 1일 오후부터는 바다에 바람이 초속 8~9m로 분단다. 이러면 배가 가지 못한다. 해양경찰에서 잡는다. 내일 아침 첫배가 7시에 뜨는데 그땐 초속 3m의 바람이 분단다. 이러면 배가 출항을 할 수 있다. 2일에도 바람이 9m로 불고 3일 오후에는 다시 3m 정도로 약해진단다.
그래서 내일 0시 30분에 출발하기로 했다. 밤새 차를 운전하고 아침 6시 20분쯤 도착하여 선표를 발권하고 배를 타고 가게 된다. 이번엔 첫날에 일하지 않으니 시간이 많다. 고향 친구들 만나서 식사나 한 끼 해야겠다. 양홍순 집사와 기한종 집사가 동행하니 운전은 기한종 집사와 교대하면 되겠다. 유채꽃은 4월에나 핀단다. 3월 초에는 동백꽃이 있겠다. 이럴 땐 미리 잠을 자두면 좋은데 더 잠은 안 온다는 거…. 소록도 봉사를 배 타고 다닐 때도 이랬었지…. 소록도 이용화 장로님과 그제 통화를 했었는데 올해는 잘하면 소록도 봉사하러 갈 수 있겠다고 했었다. 근데 글이 청산도에서 소록도로 빠졌네. 내 마음이 청산도보다 소록도에 더 가 있는가 보다.
첫댓글 수술후 몸이 회복되기전에 먼길다녀 오시게 되는군요~~ 그럼에도 운전을 교대로 해주실 동생 내외분과 함께 하시니 감사합니다. 잘 다녀오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