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스라엘 역사는 팔레스타인 역사라는 거대한 범위 안에 한 순간(시간) 밖에 되지 않으며, 한 지역(공간) 밖에 차지하지 않는 데도 마치 팔레스타인을 대표하는 것처럼 되어 버렸다......" - 랄프 쇤만의『잔인한 이스라엘』(미세기, 2003) -
시오니즘, 지독한 인종주의 또는 타협없는 근본주의
더중대한 이유들은 따로 있지만, 내 뇌리 속에 이스라엘과 시오니즘에 대한 긍정적인 상을 심어 준 것은 아무래도 초·중학교 시절 몇 차례나 텔레비전의 명화극장을 통해 보았던 폴 뉴만 주연의 <영광의 탈출>이다. 이스라엘 건국의 순간을 그리고 있는 이 할리우드산 영화는, 안 그래도 외화의 재방영이 잦았던 그 시절에 펄벅 원작의『대지』와 함께 무슨 국경일만 되면 단골로 전파를 타는 영화 가운데 하나였다.
1947년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유럽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유태 난민들의‘나라 세우기’를 내용으로 하는 그 영화는, 시오니즘과 이스라엘 건국에 대해 무지할 수 밖에 없었던 나에게 두 가지 큰 오해를 심어 주었다. 첫째,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고 있던 영국인들은 팔레스타인 토착민과 이스라엘 난민들 사이의 분쟁을 우려하여 갑자기 식민 지배를 포기하고 중립을 선포했다. 둘째, 때문에 이스라엘 난민들은 사방에서 달려드는 팔레스타인 무장대와 맨 주먹으로 싸워야 했다.
이런 정식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이 글을 쓰면서 다시 한번 <영광의 탈출>을 뜯어 보며 확인한 것이지만, 초·중학교 시절 그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압도적인 감정은 힘없고 작은 나라에 대한 ‘동정’과 자기 땅을 수복하려는 유태인의 정당한 투쟁에 대한 ‘지지’, 바로 그것이었다. 때문에 나는 그 영광스러운 유태인 건국 신화가 실은 2천 년 동안 그 지역에 살아왔던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추방과 박해의 시발이라는 것을 의심해 보지 않았다.
이 글의 후미에 부연하겠지만, 내 유년을 감히 과장해서 말해 본다면, 어느 나라 사람 할 것 없이 인류는 다 조금씩‘역사 왜곡’이라는 세뇌와 무신경 속에 살고 있다. 우리가 역사 왜곡이라는 세뇌와 무신경 속에서 어쩌다 한번씩 각성하는 체 할 때는, 일본의‘우익 교과서 파동’이나 중국의 ‘고구려사 편입’과 같은 사건이 우리 민족감정을 정면으로 들쑤실 때 뿐이다. 나와 아무 이해 상관이 없는 민족이 당하는 역사왜곡에 대해서는‘네 멋대로 해라’인 것이다. 랄프 쇤만의 『잔인한 이스라엘』(미세기,2003)은 이스라엘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인 시오니즘의 추악한 과거와 시오니스트들의 무서운 중동 지배 전략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한다. <영광의 탈출>류의 이스라엘 건국 신화는, 나치 독일의 핍박을 받아 유럽에서 쫓겨나게 된 유태인들에 의해 건국이 평화적으로 진행되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구약 성서에 보증된 시오니즘의 신학적 기원을 차치하고 나면, 참 얄궂게도 근대 시오니즘의 출발은 누명을 뒤집어 쓴 유태계 프랑스 장교의 인권 때문에 벌어졌던 1894년의 드레퓌스 사건에서 비롯한다. 그 사건으로부터 충격을 받은 오스트리아의 유태계 언론인 테오도르 헤르츨이 유태인 국가에 대한 소망을 담은 『유태인 국가』(1896)를 발표하고, 그 이듬해 스위스 바젤에서 시오니스트들이 모여 팔레스타인에 유태인 국가를 건설할 것을 결의함으로써 역사에 등장한 시오니즘은 어떤 인종주의보다 더 지독한 인종주의로 또 어떤 근본주의 보다 더 타협없는 근본주의로 변해갔다.
헤르츨과 같은 초기의 시오니스트들이 팔레스타인에 유태인 국가를 세우자고 주장하기 훨씬 이전인 1820년대부터 유태인의 팔레스타인 이주는 소규모로 있어왔다. 하지만 그것은 근대적인 시오니즘과는 상관이 없었고,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2만 명이나 되는 당시의 유태인들은 팔레스타인 사회에 완전히 통합돼 있었다. 하지만 『유태인 국가』에 의해 시동이 걸린 시오니즘은 팔레스타인에 유태 국가를 세우기 위해 길고 치밀한 외교전(外交戰)에 돌입한다. 초기 시오니즘의 특징은‘나라를 잃은 힘없는 민족’이 대개 그렇듯이 강한 나라에 협력하는 것으로 자신의 독립을 구걸하는 것이었다.
시오니스트들의 추파와 벨포어 선언
시오니즘이 막 태동되던 당시 팔레스타인 전역은 오스만(터키) 제국의 식민지였다. 그때 헤르츨은 오스만 제국의 힘을 빌어 팔레스타인의 팔레스타인인을 몰아내고 그곳에 유태인 국가를 세울 계획을 세웠다: “술탄 폐하께서 팔레스타인을 우리에게 주신다면, 우리는 그곳에 투르크의 재정 정리를 떠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곳에 야만에 대항하는 문명의 전초기지를 세워야 합니다.”
시오니스트들에게 오스만 제국의 세력이 약해지지거나 팔레스타인 민중들의 독립 요구가 거세어 지는 것 모두 달갑지 않았다. 그것은 곧 유태 국가 건설이 불가능해 지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시오니스트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재력과 인력을 오스만 제국의 경찰력으로 제공하고 그 대가로 팔레스타인 땅의 일부를 얻으려고 했다(1905년). 시오니스트들의 이런 노력은 팔레스타인의 지배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눈치 빠르게 변했다.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이 차츰 상실되어가면서 독일?영국?프랑스가 중동의 패권을 놓고 경쟁하자 시오니스트들은 독일 황제 카이저에게 오스만 황제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제안을 한다. 하지만 1914년에 이르러 오스만 제국 대신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자 시오니스트들은 영국의 보호 아래 유태인을 이주 시킬 계획을 짠다. 그때도 시오니스트들은 대영제국을 향해 “우리는 팔레스타인 문명을 회복시키고 수에즈 운하를 지키는 효과적인 보호막”이 되겠노라고 예전에 오스만 황제에게 했던 추파를 되풀이 한다.
영국은 시오니스트들의 추파가 요긴해서 보다, 또 다른 더 ‘깊은’ 이유에서 “대영제국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태민족의 고향을 건설하는 것을 우호적으로 생각하며 이 목적의 성취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는 벨포어 선언을 발표한다. 그 선언이 나오기 전까지 유태인 정착민들에 대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반응은 어리석을 만큼 관대했고, “자결”을 보장해 주겠다는 영국인의 말만 믿고 팔레스타인인들은 오스만 군대와 싸웠다. 하지만 대영제국이 자신들에게 자결을 약속한 땅을 시오니스트들에게 양도하겠다고 선언하자 충격을 받고 반발했다. 그때 영국 식민주의자들이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비유태인 공동체의 시민적?종교적 권리를 손상시키는 어떤 일도 행해지지 않을 것”이라고 달랬음은 물론이다.
당시의 영국 수상이었던 아더 벨포어가 유태인 국가에 대한 지원을 발표했던 1917년, 팔레스타인에는 5만명의 유태인과 64만의 팔레스타인 사람이 있었다(1922년에는 8만대 66만, 1931년에는 17만 대 75만). 영국이 대독 전쟁을 수행할 때 미국과 영국 내의 유태인 자본가들은 전쟁 비용을 각출해 주었고, 팔레스타인의 유태인들은 영국 식민정부의 경찰력이 되어 주었다.
이런 암묵적인 협력관계를 통해 시오니스트들은 팔레스타인의 토지와 경제를 강탈했다. 1930년대 초·중반이 됐을 즈음, 유태인은 팔레스타인내의 도로 건설·광산·전기·항만은 물론 산업 시설 전체를 수탈했다. 그리고 유태인의 정착을 돕고 팔레스타인인을 쫓아내기 위해서 아랍 노동자들에 불리한 차별적인 노동법을 만들었다. 몇 년 후에, 나치는 유태인의 취업과 노동을 금지하는 노동법을 만들게 되었으니 시오니스트는‘프레 나치’였던가?
‘작고, 수세적이며, 방어적인 이스라엘’이라는 허상
유태인에 의한 팔레스타인 토지의 약탈과 노동자 억압은 곧 팔레스타인 민중 봉기(1936년 5월)를 불러왔으니, 팔레스타인인들의 텃세로 국가 건설이 위태로왔다는 <영광의 탈출>의 이스라엘 건국 신화는 완전 날조다. 봉기가 시작되자 영국 정부는 2만명의 병력을 급파 했으나, 1937년 말과 1938년 초에 이르러서는 팔레스타인 민중들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만다. 이때부터 대영제국은 노골적으로 시오니스트 민병대에 의존하게 된다. 오늘날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인들의 대규모 군사작전과 암살·고문은 모두 그 당시의‘연습기간’에 갈고 닦여진 것들이다.
예상 밖의 저항에 부딪쳤던 영국은 반란의 원인을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를 설립했고, 1여년에 거친 조사 끝에 반란의 원인과 해결책을 분석한 보고서를 내놓았다. 무척 흥미롭게도 1937년에 내놓았던 그 대책은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도,오늘날의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을 만큼 정곡을 찌르고 있다. 1)시오니스트들의 이민을 즉각 중단할 것. 2)아랍인 소유 토지를 시오니스트들에게 양도하는 것을 중단하고 금지할 것. 3)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주도적 역할을 하는 민주 정부를 수립할 것.
하지만 이스라엘은 위에 제시된 그 어느 사항도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 2년 전인 2002년, 샤론 이스라엘 총리는 100만명의 유대인 추가 유입계획을 발표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밀어내고 거기에 새로운 이민들을 위한 정착촌을 세워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작고, 수세적이며, 방어적인 이스라엘’이라는 선입견을 씻어내야 한다.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 측의 승리로 돌아간 다음, 팔레스타인은 국제연합의 표결에 의해 분할됐다. 그때 팔레스타인 땅 가운데서 가장 비옥한 54%의 땅이 시오니스트들에게 불하되었고, <영광의 탈출>이 보여준 것과 달리 시오니스트 민병대들은 이스라엘 건국 이전에 “팔레스타인 땅의 4분의 3을 장악하고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실질적으로 추방한 상태”였다: “국제연합이 팔레스타인을 분할했던 1947년 11월 29일부터 이스라엘 건국이 선포된 1948년 5월 15일 사이에 시오니즘 군대와 민병대는 팔레스타인 영토의 75%를 점령했고 78만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영토 밖으로 내쫓았다.”
팽창주의라는 시오니즘 그리고 이들의 동맹 반유태주의자
『잔인한 이스라엘』의 저자에 의하면, 세계인들 특히 미국인들은 시오니즘에 대한 네 가지 주요한 신화에 세뇌되어 있다고 한다. 첫 번째는“땅 없는 국민들을 위한, 사람 없는 땅”이라는 신화. 시오니스트들은 팔레스타인 땅이 아무도 살지 않는 황폐하고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땅이라는 허구를 만들어 퍼뜨렸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국민으로서의 지위는 부정되었고 그들이 팔레스타인 땅에서 살 권리 또한 박탈됐다. 팔레스타인 분할과 이스라엘 건국 초기, 이스라엘이 점령한 영토에 살고 있던 95만명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 가운데 13만명만이 남아 있을 수 있었다. 단 6개월만에 이루어진 이 일은 이스라엘 정부에 의한 체계적 파괴 공작이 아니고서는 성공할 수 없는 일이었다.
두 번째는 이스라엘의 민주주의와 경제 부흥에 관한 것으로, 중동지역에서 이스라엘만이 유일한 민주주의 국가며 자신들의 근면과 헌신·기술이 황무지를 정원으로 변모시켜 사막에 꽃을 피워 놓았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실제의 이스라엘에서는 인종과 종교라는 기준에 부합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재판을 받을 권리는 물론 기본적인 인권조차 법적으로 부정된다. 이스라엘 본토와 이스라엘군이 점령한 영토 안에는 약 250만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살고 있는데 그들은‘팔레스타인 인구 줄이기’라는 극심한 위협 속에 살고 있다. 추방과 불법구금·테러·고문은 물론이고‘인종청소’에 가까운 군사작전이 공공연히 벌어진다.
특기할 것은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는 소수의‘아쉬케나지(독일·폴란드계 유태인)’가 인구의 70%나 되는‘동방 유태인(이라크·모로코·예멘)’과 ‘세파르딕(스페인·포루투갈 계통)’을 경제적·정치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방 유태인들의 경우 관습과 풍속은 물론 외모까지 회교도나 기독교인들과 비슷해서“이스라엘 법에 따라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는 있으나 그 권리는“형식적”일 뿐이다. 이스라엘의 경제부흥은 팔레스타인인들의 토지와 산업을 강탈하는 것으로‘원초적 축적’의 기회를 마련했고, 분할 이후 팔레스타인인들이 버리고 떠날 밖에 없었던 부재자 재산을 무상으로 접수한 결과다.
세 번째는“증오를 먹고 사는 원시적인 아랍 사람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스라엘이 세계 4대 군사 강국의 지위를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아랍 사람들의 증오는 최근에 들어 형성된 것으로 시오니스트들의 대거 이주와 탄압에 대한 반동이 그 원인이다.
그리고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오니스트들의 팽창주의다. 유엔이 팔레스타인 분할을 준비하던 때 이스라엘의 공식 대표였던 랍비 피쉬만이“‘약속의 땅’은 나일강에서 유프라테스강에 이르는 지역으로 시리아와 레바논의 일부를 포함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시오니즘의 궁극적인 목표는“레바논과 요르단의 모든 영토, 시리아 영토의 3분의 2, 이라크 영토의 절반, 투르크의 일부, 쿠웨이트 영토의 절반, 사우디 아라비아의 3분의 1, 포트 사이드와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카이로를 포함한 시나이 반도와 이집트의 3분의 1”이다. 이스라엘의 막강한 무장과 군사적 도발은‘골리앗과 싸우는 다윗’의 힘겨운 방어가 아니라 팽창을 목적으로 한다.
1956년 10월에 벌어진 2차 중동전쟁은 이집트 정부의 수에즈 국유화를 핑계로 시나이 반도를 집어 삼키려는 이스라엘의 장기적 계획이 드러난 것에 불과하며, 1982년의 레바논 침공은 벨포어 선언 직후부터 시오니스트들이 영국 정부에 지속적으로 요구했던 영토 정책의 일환이다. 미국이 두 차례나 이라크 침공을 하면서 이스라엘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이스라엘의 팽창주의에 불을 지르는 게 두려워서였다는 분석은 더 이상 허구가 아니다.
네 번째는 시오니즘이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의 도덕적 계승자라는 주장이다. 여러 가지 시오니즘 신화 가운데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이 신화는 그러나 시오니즘 운동이 나치와 적극적으로 결탁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 최초의 시오니스트들이‘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벌일 때, 시오니즘은 미래는 그리 밝지 않았다. 유럽의 유태인들은“팔레스타인을 식민지화하는 데 아무런 관심도 나타내지 않았고, 시오니즘은 유럽의 유태인들 속에서 주변적인 운동”으로 머물렀다. 유럽의 유태인들은“그들이 태어난 나라에서 차별받지 않고 살기를 원하거나 박해를 피해, 보다 관대한 민주주의 국가로 이주하는 것”을 원했다. 한 마디로“시오니즘은 유태인들의 필요와 열망에 부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그들은“반유태주의자들을 자신들의 동맹자로 여기게” 됐다. 시오니스트들과 반유태주의자들은 자기 나라에서 유태인을 추방하려는 욕구를 공유했기 때문에 유럽 여러 나라에서 연대할 수 있었다.
시오니즘은 나치즘이다
헤르츨은 러시아 정부의 재정적 지원을 받고 팔레스타인 이민을 채촉하기 위해 유태인 학살자로 유명한 짜르 정부의 고관을 만나 동유럽과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유태인들을 제거”해 주겠다고 제의했고, 수정주의 시오니즘(팔레스타인인들과의 어떠한 타협도 거부하는 오늘날의 시오니즘)의 창시자인 야보틴스키 역시 우크라이나의 파시스트와 동맹을 맺고 적군(赤軍)과 맞섰다. 더욱 놀랄만한 사실은 히틀러가 집권했을 때 ‘세계 시오니즘 기구’는 극도로 취약한 나치 경제를 도우기 위해 유태인의 ‘금융 공격(저항)’을 저지했을 뿐더러, 나치의 물자 보급원 역할을 자청했다.
나치의 인종정책은 시오니트들의 이해와 일치했을 뿐 아니라 “제 3제국이 시오니즘 식민지를 건설하기에 충분한 힘을 가진” 것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시오니즘 지도자들은 아이히만과 같은 나치 친위대의 고위 인사들을 팔레스타인으로 초대하여 나치의 지지를 끌어냈다.
유태인 절멸 정책에 직면하여 시오니스트들이 동족을 구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명확한 사례는 허다하다. 박해받고 있던 유럽의 유태인들을 도우기 위해 영국과 미국이 이민법을 개정하려고 했을 때 시오니스트들은 조직적으로 그 법안을 저지했다. 까닭은 “구조 법안이 팔레스타인의 식민화에 대한 관심을 분산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유럽 유태인들을 구해봤자 그들은 다른 곳으로 가기를 원할 것이며, 그렇다면 구출활동은 팔레스타인을 정복하려는 자신들의 계획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시오니스트란 “대중투쟁과 사회혁명을 통해 반유태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거부했던 사람들”이며, “유태인들을 식민주의자로 만들기 위해 유태인에 대한 박해를 요구했”던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시오니즘이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의 도덕적 계승자라는 주장을 이렇게 반박한다: “그들은 홀로코스트의 수의로 자신들을 감싼 채 생존한 유태인들에게 팔레스타인 민중에 대한 새로운 대량살상이라는 임무를 부여했다. 이 얼마나 잔인한 역설인가.” 시오니즘 운동과 나치즘은 단순히 공통 이해관계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극단적인 국수주의와 인종주의에 뿌리를 둔 이데올로기적 친화성을 가지고 있다. 시오니즘은 나치즘이다.
서구 역사가들 발명품‘이스라엘 왕국’
시오니즘의 진짜 나쁜 특징은 항상 제국주의의 하수인으로, 제국주의와 결탁하여 자신의 안전과 독립을 보장받으려는 점이다. 오스만 제국·대영제국·나치에게 차례대로 손을 벌였던 시오니즘의 역사는 제국주의의 도움이 없이는 팔레스타인 식민지를 건설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시오니즘의 주창자들은 신의 의지나 민족국가에 대한 헌신이 자신들의 계획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또 오늘의 성공을 끌어냈다고 말하지만 현실에서의 시오니즘은 중동지역을 지배했던 제국주의 국가, 즉 처음에는 영국 그 다음에는 미국의 이익에 기반한 것이다. 이 책에 추천사를 쓴 게리 폴리는 이것이야 말로“시오니즘의 원죄”라고 말하며, 저자 역시 여러 차례 시오니즘과 미국의 야합에 대해 말한다: “시오니즘의 팽창은 미국 세계지배 전략의 핵심적 요소다”, “시오니즘 국가는 이 지역에서 미국의 세력이 확장된 것이라는 것이다.”
『잔인한 이스라엘』을 읽고나서 이스라엘 지역의 고고학과 성서연구가 어떻게 오리엔탈리즘 권력을 수행하는지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서를 읽었다. 키스 W. 휘틀럼의 『고대 이스라엘의 발명』(이산,2003)은 고대 이스라엘 역사는 팔레스타인 역사라는 거대한 범위 안에 한 순간(시간) 밖에 되지 않으며, 한 지역(공간) 밖에 차지하지 않는 데도 마치 팔레스타인을 대표하는 것처럼 되어 버렸다고 말한다. 서구의 성서학자들에게 역사 연구의 주도권을 송두리째 빼앗긴 팔레스타인은 ‘성서적 시간’과‘성서 내러티브’에 고유 역사가 농단됨으로써“땅 없는 국민들을 위한, 사람 없는 땅”이라는 근대 시오니스트들의 이스라엘 건국 신화를 ‘침묵으로 승인’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서구와 이스라엘의 역사학자들은 고대 이스라엘은 물론 다윗과 솔로몬의 이스라엘 왕국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가 너무나 빈약함에도 불구하고, 혹은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민족들과의 연관성을 통째 부인하고 오로지 구약성서의 시대구분에 따라 ‘족장시대-출애급시대-가나안 정복시대-정착시대-다윗과 솔로몬의 통일 왕국시대-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의 분열시대-포로시대-재건시대’등으로 팔레스타인 전체 역사를 전유해 버린다. 이때 그것은 “팔레스타인의 역사와 지리학이 아니라‘성서적 이스라엘’의 역사와 지리학이다.”그것도 허구의 연대기에 의존한! : “성서 연대기에 대한 최근의 연구에서, 판관기와 사무엘의 연대기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천년 동안 살았다고 하는 것을 가장하기 위해 만들어낸 완전한 허구로서 바빌론 유수기의 창작물이라고 결론짓는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의 산악지대에 이스라엘이라는 민족국가를 세우기 이전에 팔레스타인 전역에는 느슨하게 결합된 도시국가들 밖에 없었다는 또 다른 가정들은, 2천년 뒤에 팔레스타인에 돌아와 이스라엘 국가를 세운 시오니스트들에게 땅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게 해준다. 이런 사고에는 오직‘국가’만이 영토를 주장할 수 있고, ‘국가’만이 역사의 주체라는 제국주의 시기의 서양 역사관이 전제되어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인들만이 팔레스타인에 왕국을 건설했다는 상상의 역사는, “현재를 합법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해서 과거” 속에 오늘의 모습을 투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성서고고학을 처음 시작한 서구 역사가들은 왜 갑자기 발명을 해서까지 ‘이스라엘 왕국’의 존재를 맹신하게 된 것일까? 사정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하나의 국민국가로서, 또는 국민국가의 초기 형태로서 고대 이스라엘은 문명의 정수인 유럽과 직결된다. 그 지역이 의미가 있는 것은 (유럽) 문명의 기원을 이해하는 데, 그리고 서양 안에서 유대-그리스도교 문화의 발전을 뒷받침해 온 성서적 전승들을 이해하는데 중요하기 때문이다.”아더 벨포어의 선언은 바로 그런 ‘깊은’ 이유를 배면에 깔고 있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역사는 곧 이스라엘의 역사이며, 나아가 서양의 역사”가 되는 것이므로, 유대-그리스도교 전승의 상속자인 서구인들은 자신들의 문명이 탄생된 모태를 보존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시말해 시오니즘은 유럽 문명이 자기 뿌리를 찾기 위해 서구 세계가 탄생시킨 것이다.
성서고고학과 오리엔탈리즘은 폭력이다
성서고고학과 오리엔탈리즘은 똑같이 유럽 식민주의 시대에 생겨난 인식적 왜곡과 폭력이라고 말하는 저자는“역사를 구성해 내는 일은 하나의 정치적인 행위”이며“내셔널리즘적인 역사서술과 역사학의 초점은 항상 국민”이라고 강조해 준다.
이 말은 왜 모든 국정(또는 검정) 교과서가‘역사 왜곡’일 수 밖에 없는가를 웅변하는 한편, “사회적·정치적 맥락, 곧 근대의 역사서술과 그것에 대한 비평방법을 온존시켜 왔던 근대 국민국가가 파열되고 변화”될 때에야 비로소 온전한 역사학이 가능하다는 암시마저 해준다. 이 점, ‘민족국가’를 중심에 놓고 작업을 할 수 밖에 없는 우리 역사학자의 다음과 같은 고민과 상통한다 : “내가 영위하고 있는 학문[역사학]의 인식 대상에서 인류, 인간이 부재한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은, 학문행위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윤해동, 『식민지의 회색지대』,역사비평사,2003)
『잔인한 이스라엘』과『고대 이스라엘의 발명』을 읽고나니,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 대상으로 하는‘오리엔트’가 철저하게 중동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닿게 됐다. 그러면서 덤으로 한국인의 마음 속에 심각한 오리엔탈리즘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유시민이 쓴 『거꾸로 읽는 세계사』(푸른나무, 2002 재판)는 한국인들에게‘친이스라엘, 반아랍’ 정서가 생긴 사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나라에서 석유파동이 일어난 74년 이전까지 만 해도, 이스라엘을 편드는 주장만 판을 쳤고 아랍의 처지를 옹호하는 의견은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았다. 이 같은 사태는 한국이‘서방세계’의 일원으로서 특히 외교면에서 미국의 입김을 결코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국민의 압도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라크 파병을 감행하는 노무현 정권을 보면 일면 유시민의 말이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미국의 입김을 강하게 받기 훨씬 이전에 한국인들은‘수난의 민족주의’를 통해 알게 모르게 오리엔탈리즘을 내화하고 있었다. 박노자의『나를 배반한 역사』(인물과 사상사,2003)를 보면 일제시대를 겪은 함석헌과 같은 민중 사상가들이“가시 면류관을 쓴 조선을 못에 박힌 예수에 비유”했다는 말이 나온다(함석헌의 영향인지 개신교 목사들 가운데는 이런 유비와 수사가 흔하다). 몇 천 년 동안 나라 없이 유랑을 했던 유태인의 역사는 오랫동안 중국과 일본의 지배를 경험했던 우리 역사와 동일시되고, 온통 적국에 포위된 이스라엘의 처지는 지정학적으로 하등 더 유리할게 없는 듯한 우리나라 형세와 비교됐다.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1974년 4차 중동전이 일어났을 때 담임 선생님이 이스라엘 역사를 이야기 해주며, 지난 세 차례 동안 중과부적인 아랍과 싸워서 얼마나 통쾌하게 승리했는지 열정적으로 설명해 주던 것을! 검은 안대를 한 애꾸눈 장군 모세 다얀이며, 6일 만에 끝났던 3차 중동전, 이스라엘 비행기들이 아랍 국가들의 전투기를 뜨지 못하게 하기 위해 활주로부터 기습 공격했다는 전술과 조국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전 세계의 유태인들이 공항으로 다투어 귀국한다는 이야기들은 어린 학동들의 가슴을 얼마나 뛰게 했는가? 아아, 그때 우리는 모두 시오니스트였다
첫댓글애고 골 아픕니다. 그 당시에도 유대인들이 경제를 장악했나 봅니다. 그래서 다른 민족들이 유대인들을 고리대금업자 정도로 생각을 하고 싫어 했던게 아마 시오니즘이 아닌가 추측을 해 봅니다. 그리고 나치는 이 싫어 하는 감정을 이용하여 유대인 공격의 선봉에 서서 자기들의 입지를 공고히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저의
완독! 에구 눈아파라! 약육강식의 세계의 격랑 속에서 적자생존을 위한 이율배반적인 동족에 대한 배신과 이웃국민의 생존권을 박탈한 호가호위 시오니즘 정체의 결정판이라고 해야 되나?!동서고금 언제나 상생에 꼭 필요한 보약십전대보탕은 사랑에 기초한 대화를 통한 이해와 양보와 타협!!!
첫댓글 애고 골 아픕니다. 그 당시에도 유대인들이 경제를 장악했나 봅니다. 그래서 다른 민족들이 유대인들을 고리대금업자 정도로 생각을 하고 싫어 했던게 아마 시오니즘이 아닌가 추측을 해 봅니다. 그리고 나치는 이 싫어 하는 감정을 이용하여 유대인 공격의 선봉에 서서 자기들의 입지를 공고히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저의
의견입니다, 그러니 나치즘은 시오니즘을 이용했던 것이지 시오니즘과 동일하다는 이론은 뭔가 미심쩍은 구석이 많습니다
저도 이 글을 읽다보니 혼자 읽기가 아깝다는 생각에서 퍼온글이랍니다..걍..읽어보시면 되는겁니다..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란게 강대국의 철저한 자기논리속에서 마구잡이식 주입으로 한쪽 만 편드는 그런 풍토가 없어져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냥..참고로 읽어보라는거 아닐까요~근데 홀라당님 글은 무지 짧은데 옮겨온 글은 무지 길~~~다....@@ 참, 세수대야님은 정리를 참 좋아하나 봅니다...ㅎㅎ
그리고 제가 대야님께 자랑할라고 옮긴건 아니오니 양해하시고 읽고 난뒤 각자의 생각만 마음속에 간직하든지.짧은글로 표현하면 되는겁니다..진짜대야님께서 문학가이시면 세번재 꼬리글에 대하여 유감을 표합니다...
여기서 학력 운운은 옳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분명 대학을 나왔습니다. 그러나 과학도입니다. 이과 공부였습니다. 지금 위에글은 문과 영역에 속하며 관심이 있어야 따로 공부를 할 수 있는 분야입니다. 고졸 대졸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기분 나쁜 부분은 지우겠습니다
박학 다식한...윗분님 들 전 정말읽기힘들어,,그냥커셔 내렸어요 ..좋은글같은데 나중에다시들어와 차분히 읽을께요.이건 학력이 문제가아니라 .개인의 독서 능력인것같다고 감히 생각합니다 ..(에고무시우ㅓ라)..박식하신 분들앞에서.. 좋은하루돼세요,
완독! 에구 눈아파라! 약육강식의 세계의 격랑 속에서 적자생존을 위한 이율배반적인 동족에 대한 배신과 이웃국민의 생존권을 박탈한 호가호위 시오니즘 정체의 결정판이라고 해야 되나?!동서고금 언제나 상생에 꼭 필요한 보약십전대보탕은 사랑에 기초한 대화를 통한 이해와 양보와 타협!!!
맞습니다. 그게 인간의 기도가 되야합니다. 이기는게 아니고 같이 사는것
알랙산드로 알랙산드로비치 블록의 다시 잠에서 깨어나다라는 글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고만하지요
애구, 실수. 달이 잠에서 깨어나다 입니다
전 이거 다 몬 읽어! 넘 길....어, 읽은 사람들끼리 논쟁들 하시와요,,,,,,
으으~내 머리 폭발 직전이당~홀라당 옵빠 미워!
전 그냥 꼬리글만 읽을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