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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자유게시판 스크랩 2015 설명절 특별한 여행 ver2
재휘애비 추천 0 조회 257 15.02.22 17:23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2015년 2/18일~2/20일 설명절 연휴 특별한 여행을 했다.

열차표 예매를 늦게 하는 바람에....

애들은 미리 2/16일 표로 부산으로 가고...

나는 무궁화 입석으로 2/18일 오전에 밀양으로 내려갔다.

이번 설명절은 표충사에서 특별히 장모님 제사에 참석하기로 마음을 먹고...

경산 자인 큰어미니에게는 전화로 미리 양해를 구했다.

 

명절전에 어머님이 편찮으셔서, 부산 여동생집에서 보양을 하고 있기에...

밀양고향집에는 아무도 않계시기에...

삼문동 이모집에서 하루밤을 지내기로 했다...

인정이 많으신 이모님께서 집에 가봐야 아무도 없고, 식사도 그렇고, 잠자리도 그렇니...

이모집으로 꼭 와서 같이 식사도 하고, 하루밤을 자고 가라신다...전화로 두번씩이나...

 

2/18일 아버님 요양원을 들러서...

이모집에서 애들과 함께 이종사촌들 조카들과 즐거운 저녁시간을 가졌다.

 

2/19일 표충사에서 특별한 처가댁 조상님들에게 드리는 재례를....

스님들과 함께 처가집식구들과 또다른 신도들과 함께 예불를 드리고, 제사도 지냈다.

예불보다는 잿밥에 정신이 간다는 말이 이해가 된다,

절에서 먹는 공양은 음식이 담백하고. 정성스러워서 맛이 있다.

공양하면서 서로 안부와 최근근황을 주고받고...

저녁에는 김해 처남댁에서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해서 그러하기로 하고...

오후시간은 표충사의 이모저모를 구경하고...

밀양시내로 나와서 애들을 데리고 영남루와 무봉사를 들려서....

저녁시간에 맞추어 처님들과 조카들과 함께 김해로 출발해서...

김수로왕릉과 김해박물과를 관람하고...

저녁식사는 처가댁식구들과 오래만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2/20일 밀양에서 서울오는 열차를 취소하고, 김해에서 서울오는 고속버스로 예매해서...

서울로 올라왔다.

짧은 설명정3일을 아주 알차게 보낸것 같다. 

 

 

 저녁무렵 영남루 전경이다.

밀양8경중 첫번째로 치는 곳인데,

설명절때에는 야경을 위해서 불을 좀 켜서 시민들에게 야경을 제공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삼문동 솔밭길 가는 둑방길옆 자전거 도로, 산책로이다.

 

 

 밀양 전통시장이다. 없는게 없이 있을것 다 있습니다.

 

 

 

 

 

 

 교통경찰들이 교통정리후 잠시 쉬는 시간을 이용해서 전통민속놀이인 투호를 하고 있는 모습.

 

 

 

 

 

 http://tour.miryang.go.kr/sub/01_01.php

 밀양 8경중 영남루야경

 영남루 올라가는 계단, 아이디어를 잘 처리한것 같다.

 

 

 

 

 

 

 

 

 

 

 

 

 

 https://www.youtube.com/watch?v=Dt2G28U6eu4

 민요 밀양아리랑_뱃노래_자진뱃노래

 

 https://www.youtube.com/watch?v=-8cl6Sc3BG0

[ KBS 가요무대 1168회, KBS Gayo Stage E1168 ] '작곡가 박춘석 추모공연'

(남진, 문주란, 안다성, 이미자, 패티김) (2010 0322) 720P

 

 

 

 

사명대사 유정(四溟大師 惟政) (1544∼1610)

사명대사 본문 이미지 1

조선 중기의 고승. 풍천 임씨. 속명은 응규(). 자는 이환(), 호는 사명당(). 또는 송운(), 별호는 종봉(). 경상남도 밀양출신. 수성()의 아들이다.
1558년(명종 13)에 어머니가 죽고, 1559년에 아버지가 죽자 김천 직지사()로 출가하여 신묵()의 제자가 되었다.

사명대사 본문 이미지 2

 

그뒤 직지사의 주지를 지냈으며, 1575년(선조 8) 선종의 중망()에 의하여 선종수사찰()인 봉은사()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의 휴정()을 찾아가서 선리()를 참구하였다. 1578년부터 팔공산·금강산·청량산·태백산 등을 다니면서 선을 닦았으며, 1586년 옥천산 상동암()에서 오도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근왕문()과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의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하였다.
[사진자료 : 밀양시 무안면 표충비각]

사명대사 본문 이미지 3

 

그곳에서 의승도대장()이 되어 의승병 2, 000명을 이끌고 평양성과 중화() 사이의 길을 차단하여 평양성 탈환의 전초 역할을 담당하였다.
1593년 1월 명나라 구원군이 주축이 되었던 평양성 탈환의 혈전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그해 3월 서울 근교의 삼각산 노원평()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크게 전공을 세웠다.
선조는 그의 전공을 포장하여 선교양종판사()를 제수하였다.
[사진자료 : 밀양시 무안면 사명대사 생가 기념관벽화]

그뒤 네 차례에 걸쳐 적진에 들어가서 가토()와 회담을 갖고, 특히 2차의 적진 담판을 마치고 돌아와 선조에게 그 전말과 적정을 알리는 <토적보민사소()>를 올렸는데, 이 상소문은 문장이 웅려하고 그 논조가 정연하여 보민토적()의 이론을 전개함은 물론, 그 실천방도를 제시하였다.

그는 국방에 있어서도 깊은 관심을 표현하여 산성수축에 착안하였으며, 항상 산성개축에 힘을 다하였다. 그가 수축한 산성은 팔공산성() · 금오산성()·용기산성 () · 악견산성() · 이숭산성() · 부산성() 및 남한산성 등이다. 그리고 군기제조에도 힘을 기울여 해인사부근의 야로()에서 활촉 등의 무기를 만들었고, 투항한 왜군 조총병을 비변사에 인도하여 화약제조법과 조총사용법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1604년 2월 오대산에서 스승 휴정의 부음을 받고 묘향산으로 가던 중 선조의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가서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받았다. 1604년 8월 일본으로 가서 8개월 동안 노력하여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거두었고, 전란 때 잡혀간 3,000여명의 동포를 데리고 1605년 4월에 귀국하였다.

그해 6월 국왕에게 복명하고 10월에 묘향산에 들어가 비로소 휴정의 영전에 절하였다. 그뒤 병을 얻어 해인사에서 요양하다가 1610년 8월 26일 설법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제자들이 다비하여 홍제암() 옆에 부도와 비를 세웠다.

저서로는 문집인 <사명당대사집>7권과 <분충서난록()>1권 등이 있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누군가가 사명대사 동상앞에 북어와 막걸리 한병과 소주한병을 두고 제사를 지냈나보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81118&cid=49354&categoryId=49354

밀양십경

 

 

 저기 산 중턱에 있는 학교는 밀양여고...아침저녁으로 오르내는 3년간은 훈련으로

다리가 날씬해젼다는 여학생과 장단지가 굻어져 각선미가 너무 크다는 2종류의 여학생이 있음. 

 

 

 

 

 

 

 

 

 

 

 

 

 

 

 

 

 

 

 

 무봉사의 종소리, 새벽과 저녁시간의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렸는 기억이 새롭다.

 

 

 

 

 

 

 

 

 

 

 

 

 아랑이의 영혼이 숨쉬는 곳, 계속 공사중이다.

 

 

 

 

 밀양의 강태공, "낙시는 해서 고기는 잡았지만, 사진만 찍고 바로 방생합니다."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강태공들!!!

 

 아버님을 뵈로 요양원 가는 길에 석양을 보며 한장 짤끽!!!

 이모님 댁에서 하루밤 잘 자고 새벽에 산책길, 삼문동 둑방길,

잘 정리해놓아서 시만들의 운동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삼문동에서 예림까지 걸어서 산보삼아 우리 고향집으로 가는 중에, 밀양경찰서뒤가 고향집이다.

 예림다리...

 

 

 

밀양강...야경이 멋진데....휴대폰 카메라라....

 

 

가곡동 강변로 산책을 잘 만들어 놓았다.

 

 

용두교....용두목이 있다.

 

용두목에 관한 설화
가곡동에 위치해 있으며, 팔경의 용벽춘화()라 하여 밀양10경으로 꼽히는 명승지이다. 용머리 모양의 절벽아래 짙푸른 심연을 이룬 곳인데, 그 깊이는 알 수 없고 둘레는 5리쯤 된다. 본래 기우소로서 신령스러운 곳으로 여겼으나 근래에는 유원지를 만들었다.

용두목에 관련된 설화는 '이무기가 하늘의 복숭아가 담긴 반티를 몰래 훔쳐 나오다 용두목의 용에 들켜 싸움이 붙었다. 그때 엎어진 반티가 반티산이 되고, 용이 이무기를 치면서 쏟아 부은 많은 물이 남천강이 되었다. 용두목 용의 이야기는 밀양 고을의 농민들이 왜놈의 침략에 대해 조직적으로 저항하여 물리친 사실을 나타낸다.

 

학교다닐때에는 여기가 밀양경찰서 자리였는데...

 

 

 

 

 

 

 

 

 

 

밀양강 천둥오리때

 

조각공원

용두목

밀양삼문동 솔밭길

 

 

밀양공설운동장

학교다닐때에는 무척 커보였는데...

각종 행사를 여기에서, 고등학교가기위해서 체력장을 했던곳!!!

이모님 집에서 간단히 아침요기를 하고 표충사로

처남 봉고차를 이용해서 함께 출발!!

 

밀양 표충사 소개는 여러번 해기에 이번에는 간단히 소개한다.

 

* 청허, 사명, 기허대사의 위패를 모신 절, 표충사() *
재약산(천황산)의 남서쪽 기슭에 위치한 표충사는 1천년의 역사를 가진 사찰이다. 신라 무열왕 원년(654)에 원효대사가 가람을 창건하고 이름을 죽림사()라 한 것을 흥덕왕 4년(829)에 황면선사가 부처님 진신사리 3과를 모시고 와서 삼층석탑을 세워 봉안하고 가람을 크게 중건하여 절 이름을 영정사라고 개칭하였다. 그 후 889년(진성여왕 3)보우국사가 승려 500명을 모아 선풍을 크게 일으켜 동방 제2선찰이 되었고, 고려 충렬왕 12년(1286)년에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국사가 1,000여명의 대중을 맞아 불법을 중흥하여 동방 제1선찰이 되었으며, 1290년(충렬왕 16) 천희국사가 선풍을 관장하여 일국의 명찰이라 일컫게 되었다. 1839년에는 월파선사가 그의 팔세조사인 사명당 송운대사의 임진란 구국충의를 받들기 위하여 지금의 밀양시 무안면 삼강동 있던 표충사당을 이곳으로 이건 한 후 사명을 표충사라 개칭하였다.

이 절은 1958년 9월 17일 국가지정 국보 제75호인 표충사 청동함은향완, 보물 제467호인 3층 석탑 그리고 사명대사 유물 200여점의 문화재를 보관하고 있다. 또한 절 주변에는 층층폭포, 금강폭포, 얼음골이 있고 산마루에는 사자평 초원이 있으며, 남한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고산습지인 산들늪이 있다.

* 표충사의 주요 문화재 *
청동함은향완(국보 제75호), 표충사 삼층석탑(보물 제467호), 사명대사의 금란가사와 장삼(중요민속자료 제29호), 표충사 석등(경남도 유형문화재 제14호), 표충서원(경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을 비롯한 대광전, 만일루, 팔상전, 명부전 등 법당건물

경남유형문화재 제268호 칠여래탱화, 경남유형문화재 제269호 교지, 경남유형문화재 제271호 송운대사분청서 난록판, 경남유형문화재 제272호 표충사제영록판, 경남유형문화재 제273호 사명집목판, 경남유형문화재 제274호 사명대사 일본상륙행렬도 팔곡병, 경남유형문화재 제268호 영정 25점, 탱화 1점

표충사에서 공양후 경내를 잠시 산책후 밀양 영남루로, 식구들데리고 관광.

지나가면서는많이 보았겠지만, 자세히 관람한것은, 애들 어릴때 한두번 그냥 소풍겸...

 

영남루 누각에 올라가서 사진도 한장 찍고...

 

단군왕검, 우리의 조상을 모셔놓은 곳도 자세히 살펴보고...

 

 

 

사명대사도 다시 뵙고....

부처님 석불도 다시 뵙고, 삼배도 하고...

 

 

 

매화꽃도 감상하고...

 

 

 

 

 

 

 

처남 봉고차를 다시 타고, 김해 김수로왕능으로 출발!!!

김해하면 딱 떠오는 것은 김수로왕과 김해평야가 생각난다.

우선 김수로왕에 대해서 알아보자.

정의 : 금관가야의 시조이자 김해 김씨의 시조인 김수로왕에 관한 신화.

역사 : 건국신화인 점에서 <단군신화>, <동명왕신화>, <박혁거세신화> 등과 같지만, 탄생과 죽음에 이르는 일대기의 순차적 구조로 보면 그 계통에 차이가 난다. <동명왕신화>와 <석탈해신화>는 부계의 부정()으로 말미암은 탄생의 시련 그리고 건국주로 등극하기 위한 시련과 투쟁이 구조화되어 있다.

반면 <박혁거세신화>와 <김수로왕신화>는 부계와 모계를 동시에 부정하지만, 탄생의 시련을 겪지 않고 건국주로 등극하는 데 투쟁이 없는 구조이다. 전자를 ‘사생아 유형의 신화’라 하고 후자를 ‘업둥이형 신화’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 보면 <김수로왕신화>는 건국신화이자 시조신화이면서 업둥이형의 집단 무의식이 투영된 신화라 할 수 있다.

줄거리 : 천지개벽 후에 이 땅에는 아직 나라로 부르는 칭호가 없고 역시 임금이나 신하라고 부르는 칭호도 없었다. 다만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류수간, 류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의 아홉 간이 있었고 이들이 추장이 되어 백성을 통솔하였다. 호수는 무릇 1백 호에 7만 5천 명이었다. 저마다 산과 들에 모여 살면서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먹었다.

후한 광무제 건무 18년 임인 3월 계욕날 이곳 북구지에서 무엇이 수상한 소리로 부르는 기척이 있었으므로 2~3백 명 되는 무리가 모였다. 사람 목소리 같은 소리가 나는데 형체는 감추고 소리만 내어 말하기를 “거기 누가 있느냐?” 하였다. 아홉 간이 대답하기를 “우리가 있습니다.” 하니 그 목소리가 또 말하기를 “내가 있는 곳이 어데인고?” 하여 “구지외다.”라고 대답하였다.

또 말하기를 “하느님이 나를 명령한 까닭은 이곳에 와서 나라를 새롭게 하고 임금이 되라고 하셨다. 그러기 위하여 여기 내려온 것이다. 너희는 모름지기 봉우리 꼭대기의 흙 한 줌씩을 쥐고 노래를 불러 ‘거북아 거북아/머리를 내밀어라/만약 아니 내놓으면/불에 구워 먹겠다.’ 하면서 춤을 추면 이것이 대왕을 마중하여 즐겨 뛰노는 것으로 될 것이다.” 하였다.

아홉 간이 그 말대로 모두 즐겨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얼마 안 되어 쳐다보니 보랏빛 노끈이 하늘로부터 드리워 땅에 닿아 있었고 노끈 끝을 찾아보니 붉은 보자기로 싼 금합이 있었다. 합을 열어 보니, 둥글기가 해 같은 황금알 여섯 개가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놀랍고도 기뻐서 함께 수없이 절을 하다가 조금 뒤에 다시 알을 싸 가지고 아도간의 집으로 돌아와 탁자 위에 두고는 각각 흩어졌다.

그 후 열두 시간이 지난 다음 날, 날이 샐 무렵에 무리가 다시 모여 합을 열었더니 알 여섯 개가 사내아이로 화하였는데 얼굴들이 매우 틀스러웠다. 이들이 이내 평상 위에 앉으니 무리가 축하하며 절을 하고 정성을 다하여 공경하였다. 그들은 나날이 장성하여 10여 일의 밤낮을 지났다. 키가 9척이매 은나라 천을이라 할 수 있었고, 얼굴이 용 같으매 한나라 고조라 할 수 있었고, 눈썹이 여덟 가지 빛깔이매 당나라 요임금과 같았고, 눈동자가 겹으로 되었으매 우나라 순임금과 같았다.

여섯 개의 알 중에 가장 먼저 사람으로 변한 이가 그달 보름에 왕위에 오르니, 처음으로 나타났다고 하여 이름을 ‘수로’ 혹은 ‘수릉’이라 하고 나라를 ‘대가락’ 또는 ‘가야국’이라고 일컬었으니, 즉 여섯 가야의 하나이다. 남은 다섯 사람은 각각 돌아가 다섯 가야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변이 : 수로의 탄생과 등극 이야기는 수로의 신성성과 왕위의 당위성을 제공한다. 이주집단인 수로집단이 초기에 이 이야기를 정치적으로 활용하였고, 이어 수로집단이 선주집단과 동화되었다는 점을 상정하면 전승집단은 변이를 허용하지 않았으리라 추정한다. 다만 현재 구비전승 중에는 김수로왕의 후손이냐 아니냐를 가리는 징표에 관한 <김수로왕설화>가 있다. 이는 후손들이 그들의 시조인 김수로와 동일시하고자 하는 집단 의식이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분석 : 가락국의 역사를 재구성하려고 했던 역사적 연구와 <구지가()>의 해석을 중심으로 한 문학적 연구 그리고 고대 제의와 관련지어 설명하려고 했던 민속학적 연구가 이루어졌다. 문학적으로는 무엇보다 신화의 전체 맥락, 텍스트의 표층과 심층, 건국신화 유형 전체를 살펴 <김수로왕신화>의 문학적 가치를 밝히고자 하는 연구가 이루어졌다.

<김수로왕신화>가 왕들의 즉위 의례에 관한 구전 상관물이라는 사실과 <구지가>가 불제(?) 의식의 축귀요()라는 점을 밝힌 연구, 신화의 서술 원리의 특수성에 대한 연구, 건국신화의 제의적 서사구조의 맥락에서 <김수로왕신화>의 제의적 구조에 대한 연구 등이 있다. <김수로왕신화>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은 의미의 층위를 더욱 다양화하고 있고, 특히 최근에는 문화콘텐츠 스토리텔링 방안에 관한 연구들이 이루어져 신화의 현재적 의의가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특징 :『가락국기()』에 전하는 건국 및 시조신화로서 <김수로왕신화>는 수로왕의 탄생과 혼사 그리고 즉위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내력을 줄거리로 삼고 있다.

이들 신화적 내용은 첫째, <박혁거세신화>에서도 발견되듯이 여러 씨족이 연합하여 이룩된 통합 왕국의 창건에 관한 신화라는 점에서 특이성을 띤다.

둘째는 신화의 내용이 직접 신에게서 주어졌다는 점은 다른 건국신화와 구별되는 또 하나의 특징이다.

셋째는 수로가 등극하기까지는 시련과 시험이 없고 등극 후에 시련이 주어진다는 점에서 다른 건국신화와 구별된다.

넷째는 결연담을 통한 집단 내부로의 동화가 등극 후에 나타난다는 점은 <주몽신화>, <석탈해신화>와 구별된다. 다섯째는 수로의 트릭이 선주집단과의 이질성과 차별성을 강조하여 탁월성을 드러내 왕위 등극의 정당성을 확보한다는 점에서 동질성과 융합을 위해 트릭을 쓰는 <석탈해신화>와 구별된다. <김수로왕신화>의 이러한 특징은 지속적인 제의화, 민속화, 전설화를 가능케 하는 원천이 된다.

의의 : 문화의 원천이 되는 신화의 대중화 혹은 실용화라는 시대 요청에 응할 때 이 신화는 그 의의가 적지 않다. 무엇보다 집단 구성원 전체가 새로운 문명과 체제를 맞아 커다란 가치관의 혼란을 겪던 시점의 이야기로, 새롭고 더욱 강력한 의식성을 갖추어 나가는 정신적 변환 과정에 대한 기술이기 때문에 교육과 치유에서 이야기 만들기의 보편 공식으로 활용할 수 있다.

또한 이 신화가 왕의 즉위 의례 혹은 신맞이굿의 구술상관물이라는 성격을 띤다는 점을 고려할 때, 자발성과 창의성을 향상시키기 위한 심리극으로 활용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김수로왕신화>가 춤과 노래로 표현되는 샤머니즘, 영웅 탄생의 구조를 보이는 영웅서사, 김수로왕과 허황옥이라는 영특한 두 남녀의 로맨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콘텐츠화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아들과 딸 그리고 조카들....함께 김수왕능과 박물관을 관람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826907&cid=41868&categoryId=41868

가야국 허왕후의 상륙지, 진해 망산도

김해 앞바다, 정확히 말하여 진해시 용원동에 망산도()라 일컫는 섬이 있다. 간척공사로 인해 옛 모습을 잃어버린 이 섬이 가야국의 신비, 그중에서도 수로왕 부부의 전설을 뒷받침하는 역사의 현장이다. 옛날에는 제법 큰 섬이었을 망산도에는 거북 등을 닮은 바위 일부가 애처로운 모습으로 남아 있다. 이곳이 바로 시조 수로왕의 왕비 허황옥()이 최초로 이 땅에 발을 디딘 곳이다.

허황옥은 머나먼 인도 땅 아요디아〔〕국의 공주라고 했다. 지금부터 무려 2천여 년 전의 일이지만 《삼국유사》는 이 여인의 행적을 비교적 소상하게 전하고 있다. 허황옥은 서기 32년에 인도에서 태어나 열여섯 나이에 가라국의 수로왕에게 시집오기 위해 머나먼 항해길에 오른다. 20여 명의 공주 일행을 태운 배는 붉은 돛에 붉은 깃발을 펄럭이고 있었으며, 배 안에는 인도에서만 난다는 파사석()이 실려 있었다. 항해 일수가 얼마였는지는 잘 모른다.

 

 

 

 

 

 

 

 

명품관광도시 김해! 
김해를 대표하는 9경 (볼거리), 9미 (먹을거리), 9품 (살거리), 9길 (걷고 싶은 길)을 소개합니다. 9景味品道 

http://tour.gimhae.go.kr/05info/05_08_03.jsp

 

 

6가야 설은 고려 초의 전승이고, 실제로는 10여 개국 이상의 가야소국이 있었음
가야사라고 하면 보통 금관가야, 아라가야와 같은 이른바 ‘6가야’의 이름을 떠올립니다.

그러면 가야는 6개의 작은 국가(小國)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소국들의 이름이 ‘무슨 가야’였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6가야의 이름이 처음 실린 자료는 고려 말에 편찬된 <삼국유사> 5가야 조의 기록입니다. 이를 살펴보면, 실제로는 아라가야(阿羅伽耶), 고령가야(古寧伽耶), 대가야(大伽耶), 성산가야(星山伽耶), 소가야(小伽耶), 금관가야(金官伽耶), 비화가야(非火伽耶) 등의 일곱 가야의 이름이 나옵니다.

 

이런 이름들은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가락국 수로왕 건국 신화에 덧붙여진 6란(六卵) 설화에 덧붙여진 것인데, 그 6가야의 개념은 신라 말 고려 초의 혼란기에 후고구려나 후백제와 같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가야' 형태의 국명은, 그들이 소국으로 존재할 당시의 국명이 아니라, 옛날에 가야연맹 중의 하나인 금관국(金官國), 아라국(阿羅國), 고동람국(古冬攬國), 성산국(星山國,) 비화국(非火國)이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신라 말 고려 초의 명칭입니다.

 

고려 초의 인식은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삼국유사>에 나열된 7개의 가야소국 중에서 일부는 옛날에 실제로 가야연맹체 속에 들어 있던 소국이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게다가 가야 토기의 출토 범위를 통해서 보면 가야연맹체를 이루는 소국의 수는 6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10개국이 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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